'신입사원'이라는 드라마에 나오는 한가인(극중 이미옥)에 대해 민주노동당 단병호 의원이 한마디 했는데, 한가인을 정규직화하라는 것이다.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충분히 이해하지만, 나는 이미옥에게 할 말이 있다. 이미옥은 정규직화 싸움에 동참하라고.
꾸준히 보는 드라마가 아니지만 채널 돌리기에 걸려 보게 되는 때도 있는데, 그러다 우연히 내 눈과 귀에 보이고 들린 비정규직 노동자(계약직)에 관한 부분에 대해서만 보기로 하자.
내가 알고 있는 사실관계는 아래와 같다(제대로 알지 못했다면 그냥 아래와 같다고 하자).
엘케이에서 이미옥은 정규직으로 일하다가 계약직으로 전환되어 5년을 근무했다. 그리고 최근에 계약기간이 연장되지 않는다는 통보를 받았다. 업무 능력이나 경영 사정이 아니라 누군가의 개인적 감정 때문이다.
1. 우선 이미옥이 하고 있는 업무의 계속 존재 가능성을 보자. 그의 업무는 과거에도 계속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 있게 될 것이다. 그 업무가 사라져야만 한다는 경영 사정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애초부터 그 업무에 계약직을 사용해야 할 경영 합리성이 있는지가 의문이다. 왜냐하면, 이미옥이 나간 다음에 그 누군가는 그 자리에서 일을 계속해야 하니까. 그리고 그 누군가에게도 계속 임금은 지급되어야 하니까.
2. 이미 본 것처럼 그 업무에 계약직을 사용할 경영 합리성이 없다. 이미옥은 5년을 근무해왔고 누군가의 개인적 감정이 없었다면 계속 근무를 할 수가 있는, 즉 재계약 가능성이 열려 있는 계약직이다. 따라서 재계약을 거부할 만한 이유가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위에서 본 사실관계에서 재계약을 거부할 만한 이유(업무 능력, 경영상 이유 등)는 전혀 없다.
3. 또한 미루어 짐작컨대 그 동안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계약기간 제도는 형식적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이미옥이 계약기간에 즈음하여 특별히 재계약 여부에 대해 노심초사 고민한 흔적이 별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정리해 보자.
그 전에 한가지 더 볼 게 있다. 이미옥을 정규직에서 계약직으로 전환할 때 그의 자유의사를 제대로 반영하였을까 ? 회사 그만둘래 ? 계약직으로 일할래 ? 선택을 강요하지 않았을까 ? 어쩔 수 없이 이미옥은 계약직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 대신 엘케이는 더 낮은 조건을 제시하였을 것이고 그래서 이윤을 더 늘렸을 것이다. 강요 속에서 이루어진 선택의 자유. 그 외 다른 가능성을 상상할 수 없다. 세계적 기업, 국내 최고의 기업이 경영이 어렵지만 그래서 싹 정리해고를 해야하지만 계약직으로라도 계속 고용을 유지하기 위해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그리했을 거라 볼만한 정황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현실이다.
이미옥은 위에서 본 사실관계에 비추어 보면, 형식적으로는 계약직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기간의 정함이 없는 계약을 체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의 업무는 앞으로도 계속 존재할 것이고, 그는 5년 동안 계속 계약 갱신을 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기대 가능성이 매우 크며, 그를 내보내고 새로 계약직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그로 인해 엘케이가 얻는 이익은 크다고 보지 않는다면, 계약기간은 그나 엘케이에 큰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는 계속 일할 업무가 있는데도 오로지 계약기간이 지났다고 일자리를 잃게 되는데 반해, 엘케이에는 계약직을 사용해야만 하는 합리적인 이유를 뒷받침할 만한 규정이나 근거도 마련되어 있지 않는 것으로 보이고, 그렇다면 엘케이는 해고 제한 규정을 회피할 수 있는 방법으로 계약직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고 그 결과 이미옥은 해고 제한이라는 법의 보호를 전혀 받지 못하게 되는데 이 때 이미옥을 보호하지 않는 것은 해고 제한 규정을 둔 근로기준법의 취지에 비추어 심히 부당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미옥에게 계약기간이 지났다고 하여 그만두라고 하는 것은, 부당한 해고라고 본다. 결국 그는 정규직으로 있을 때 보장받았던 정년까지 계속 일할 수 있게 된다. 한발 양보하여 그를 계약직으로 보더라도, 역시 결론은 같다. 재계약을 거부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최소한 1년은 더 근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싸우지 않고 그만 다니겠다고 한다. 그는 비정규직 노동자임에는 맞으나 자기 권리를 찾으려는 노동자는 아니다. 드라마니 그런 걸 기대할 수도 없을 지도 모르겠다만. 아무튼 그래서 나는 그를 정규직으로 봐야 한다거나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는 일반적인 주장에는 동조하지만, 자기를 옭아맨 사슬을 스스로 끊으려 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 그와 함께 하고 싶은 생각은 솔직히 별로 없다. 흠....이제 나도 서시히 지쳐가는 것일까 ?
참, 공부도 잘하고 아는 것도 많은 에릭(극중 강호)이 친구에게 이미옥의 문제를 상의할 때, 그 친구는 근로자 파견법(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을 들어 2년이 어쩌고 저쩌고 말하는데, 사실 이미옥의 문제에는 그 법이 거론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이미옥은 파견회사 소속이 아니기 때문이다. 설사 파견회사 소속이더라도 2년 이상 근무한 경우 엘케이가 사용자가 되므로, 그렇다면 더 이상 파견법이 거론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모쪼록 그저 드라마 쳐다보면서 그나마 뭐라도 얻어가려는 사람들에게 혼란을 주는 그런 대사가 나오지 않았으면 한다. 작가나 피디가 잘 모르면 누구한테라도 좀 물어나 봤으면 좋았을 걸...그리고 강호도 웬만하면 공부 좀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