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다시 백수가 된 지 어언 한 달이 넘었다.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에 늘 꿈 꾸던 백수생활의 백미는 첫째는 아침에 늦게 일어나기, 둘째는 아무 때나 자고 싶을 때 자기, 셋째는 무한정 자고 또 자기, 그야말로 죽도록 쳐 자기!
그런 꿈을 꾸었지만, 빵만 있어서야 되겠는가 장미도 필요하지, 잠은 잘 만큼 잤다 싶으니 무언가 문화생활을 향유하고 싶은 욕구가 솟았다. 그것도 역시, 직장 다닐 때는 엄두도 못 내던 평일 낮 시간에 하는 걸로.
그리하여 선택한 서울아트시네마 <아녜스 바르다 회고전> , 이야 ~ 언젠가 꼭 보리라 다짐했던 <행복>도 목록에 있고, 집에서 걸어갈 만한 거리에 위치한 극장 하며, 딱이다 싶었던 것. 욕심 같아서야 전작을 보고 싶지마는, 나야 뭐 원래 전작주의자도 아니고 영화 공부에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니, 보고 싶은 것만 얼추 추려서 봤다. 결과는요? (제 점수는요 톤으로 읽어주삼) 대만족.
1 노래하는 여자, 노래하지 않는 여자
수십 년을 관통하는 두 여자의 우정 일대기. 삽입되는 노래 가삿말이 다분히 여성주의적이고 두 여자 모두 여성 운동에 관여하고 있지만(노래를 하거나 하지 않거나) 페미니스트가 아니어도 충분히 공감할 내용이다. 좋은 영화는 이렇게 이념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찍어도 그 외의 볼 거리, 생각할 거리를 자연스럽게 제공한다는 생각을 했음. 아, 물론 내 오랜 여성 친구들도 떠올렸고. :)
2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
말 그대로 오후 5시부터 7시까지 클레오를 쫓아다니는 나름 로드무비이자 파파라치 영화. 클레오가 병원에서 암일 지 모른다는 암시를 받고 갈팡질팡하는 걸 보며 나라면 어떨까 상상을 조금 하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 몰입이 잘 안 되었다. 역시 나는 누구 쫓아다니는 건 흥미가 없는가보아.
3 낭트의 자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그 유명한 <쉘부르의 우산>의 감독인 자크 드미와 아녜스 바르다가 부부 사이인 줄은 몰랐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영화를 본 직후에 알았다. 따라서 영화 속 시네마 키드인 자코에 대한 감독의 시선이 너무나도 따뜻한 배경을 몰랐다는, 알고 나니 바르다 감독이 더욱 귀엽다. 그런데 유럽 애들은 왜 어려서는 넘흐나도 깨물어주게 귀엽다가 13세 즈음이 지나면 대체로 노안이 되거나 징그러워질까.
4 아녜스 V에 의한 제인 B
(안타깝게도 이 영화의 사진만 올려지지 않는구나, 그래서 아쉬운대로 제인 버킨의 사진을 올린다)
제인 버킨. 1988년에 본 <쥬 뗌므 므와 농 플뤼>(사랑해, 나도 아니야)라는 영화의 충격 때문에 잊혀지지 않는 배우다. 알고보니 그토록 더티하고 선정적인 영화 속 정사들을 하게 만든 감독 세르쥬 갱스부르의 아내이고! 알고보니 딸은 샤를로트 갱스부르. 아무튼 이 가족은 셋 다 내 맘에 쏙 든다. (세르쥬야 죽었지만. 안 죽었다면 더 한 기행을 많이 보여줬을텐데, 약간 아쉽다) 바르다 감독이 그린 제인 버킨은 영화에서만큼 도발적이고 매력적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수줍은 소녀처럼 소심해보이기도 하고, 내내 자유롭다. 늙어서도 이렇게 자연스럽게(성형수술 없이) 멋진 여배우가 우리에게도 많았으면 참 좋겠는데.
그리고 모님이 비밀댓글로 올려주신 영상 펌: 아흑, 고맙습니다. 아름다와요.
5 행복
대체로 따스하다고 여겨진 전작들과 달리 이 영화는 무시무시하다. (잠깐 오해는 마세요, 장면 중에서 무서운 장면은 하나도 없습니다. ) 인간이 행복을 얼마나 우습게 여기는가, 우리에게 행복이란 대부분 여지없는 착각에서 나오는 감정일 뿐이라는 사실을 한 부부의 결혼생활로 보여주는데, 완전 서늘하고 씁쓸하다. 난 그냥 착각 속에서 살련다. 그런데, 60년대 프랑스 사람들은 일요일마다 피크닉을 안 가면 어디 가서 혼나는 법이라도 있었나부다. 아우 - 그리고 내 앞에 앉았던 아주머니 세 분! 그렇게 불륜 막장 드라마 원하시고 수다 떨 거면 왜 이런 영화를 고르셨쎄요, 단 1분도 쉬지 않고 느긋하게 잡담하시던 세 분이 진정한 용자! (극장에서는 제에발 예의를 지킵시다, 흑)
* 이미지 출처: http://www.cinematheque.seoul.kr/ (4번 제인버킨만 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