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전락 - 문예 세계문학선 119 문예 세계문학선 119
알베르 카뮈 지음, 이휘영 옮김 / 문예출판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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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절한 자기객관화와 자조 사이, 격변의 시대에 세대를 관통하는 작가 본인의 정체성 또는 정치적 스탠스에 대한 고민이 여실히 드러난 에세이처럼 느껴지는 소설이다.
그 와중에 이토록 유려하고 천재적인 글솜씨라니! 과연 까뮈는 까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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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마침 내가 애국자라는 걸 알게 되었던 거예요. 웃으시는군요. 웃을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걸 알게 된 것은 샤틀레 지하철역에서였습니다. 개 한 마리가 그 미로에서 헤매고 있더군요. 큼직하고 거친 털에 한쪽 귀가 찌부러진 그 개는 재미있어 보이는 눈초리로 껑충껑충 지나가는 사람의 정강이를 따라다니며 냄새를 맡고 있었습니다. 나는 오래전부터 개를 여간 좋아한 게 아니었습니다. 개는 언제나 용서해주니까요. 나는 그 개를 불렀습니다. 그랬더니 녀석은 반가운 듯이 엉덩이를 흔들면서 내게서 몇 미터쯤 떨어진 곳까지 와서 망설이고 있었어요. 그때 걸음걸이가 활발한 젊은 독일 병사가 내 옆으로 지나쳐 개 앞에 이르더니 그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습니다. 개는 서슴지 않고 여전히 기쁜 낯으로 그 병사의 뒤를 따라서 그와 함께 사라졌습니다. 원통한 심정과 그 독일인 병사에게 느낀 내 분노의 종류로 보아, 그것이 애국적인 반응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만약에 그 개가 어느 프랑스 사람을 따라갔더라면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나는 그 상냥스러운 개가 어느 독일 연대의 마스코트가 된 광경을 상상했고, 그러자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반응 검사의 결과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어요.


그런데 한 가지 확실한 일은, 물을 마실 적에 나는 어차피 죽게 될 사람보다 내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더 필요하며, 나는 그들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내 생각을 합리화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해서 제국이며 교회는 죽음의 태양 밑에서 태어나는 겁니다.


나는 소유물에 집착하지 않았어요. 사실은 소유한다는 걸 좀 부끄럽게 여겼지요. 사교계에서 잡담을 하다가도 “여러분, 재산이란 살인이나 다름없습니다” 하고 외친 적이 있답니다. 재산을 돈 없는 훌륭한 사람에게 나누어줄 만한 아량이 없어서, 있을지도 모르는 도적의 손이 미치는 곳에 놓아두는 셈이었지요. 그렇게 해서 우연이 부정을 고쳐주기를 기대했던 겁니다.


심판을 회피하는 데 가장 큰 장애는 우리가 누구보다도 먼저 자신의 죄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우선 단죄(斷罪)를 모든 사람에게 무차별하게 확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벌써 단죄가 좀 희미해지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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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겁나니?”


  “조금요.”


  “좋은 일이야.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때도 두려워하는 편이 좋아. 그래야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되거든.”


고모가 나를 확 밀어내는 순간 나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고모의 온기가 사라지자 찌르는 듯한 고통이 느껴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 게 부끄러워서 꾹 참았다. 고모가 엔초와 춤을 춘 후로 그 어떤 남자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점이 멋있게 느껴졌다. 나는 고모가 그녀의 다시없을 유일한 사랑에 대한 모든 기억을 세세하게 간직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마 나와 함께 춤을 추면서 그 순간을 다시 되새겼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이 너무나 멋있어 보여서 나도 빨리 그런 사랑을 하고 싶어졌다. 그런 절대적인 사랑을 말이다. 엔초에 대한 추억이 너무나 선명해서 고모의 깡마른 몸과 가슴과 숨결에서 사랑이 조금 새어 나와 내 몸 안으로 흘러 들어온 것 같았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호기심이 익숙한 환경과 나를 향한 변치 않을 애정을 이기는 느낌이었다. 그런 감정으로 인해 나는 때로는 안도감을 느꼈고 때로는 의기소침해졌다.


자기가 대단한 줄 아는 교만한 사람들은 자기들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굴어.


가끔 우리가 하는 행동은 행동이 아니라 상징일 수도 있거든. 


“기도가 도움이 됐니?”


  “아니요. 기도는 성공하지 못한 마술과 같아요.”


“하기 싫은 일을 하라는 강요에 복종하면 마음도 복잡해지고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게 된단다.”


  “그럼 복종이란 피부병과 같은 것인가요?”


사랑이란 뒷간 문에 달린 유리처럼 탁한 거란다.”


동정녀를 통해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을 자신의 창조물들 가운데 가장 불행한 자들이 겪는 최악의 상황에 몰아넣은 것도 싫었다.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도 그 힘을 인류의 상황을 개선하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하찮은 놀이에만 허비한 아들도 싫었다. 자기 어머니는 홀대하면서 아버지인 하나님에게는 화낼 용기조차 없는 아들이 싫었다. 자기 아들을 끔찍한 고통 속에 죽게 내버려두고 도움 요청에 응하지 않은 하나님이 싫었다.


‘안녕하세요. 다시 만나요. 마실 것을 드릴 테니 편히 계세요. 볼륨을 좀 낮춰주실 수 있을까요?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이렇게 멀쩡해 보이는 사람들에게도 언제든 검은 베일이 드리워질 수 있는 것이다. 갑자기 눈이 멀어서 거리를 가늠하지 못하고 부딪힐 수 있다. 어떠한 한계를 넘어가면 모든 사람이 앞을 못 보게 되는 걸까, 아니면 어떤 사람들만 그러는 걸까. 인간의 본모습은 모든 것을 명확하게 볼 수 있을 때 드러나는 걸까, 아니면 증오나 사랑처럼 농도가 짙고 무거운 감정에 의해서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질 때 드러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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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끄럽고 평온해 보이는 가면 뒤에 숨기고 있던, 누군가의 또 다른 얼굴을 보게 되더라도 지나치게 상처받거나 배신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 안에 숨어 있던 추악함, 시기심과 죄의식, 두려움과 조바심 같은 감정들을 맞닥뜨려도 외면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사람의 마음이란 한지를 여러 번 접어 만든 지화紙華처럼, 켜켜이 쌓은 페이스트리의 결처럼 여러 겹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고 있으니까. 빛과 어둠이 술렁이며 그려놓는 그림. 그것이 마음의 풍경이다.


행복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상을 괄호 안에 넣어두는 휴가가 삶을 지속하는 데 필요한 것처럼, 인간에게는 때로 진실을 괄호 안에 넣어두는 거짓말도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다.


지나치게 눈부신 빛 속에 서 있다는 생각에 갑작스럽게 현기증이 나고 두려워지면, 언젠가부터 나는 기꺼이 어스름 쪽으로 눈을 돌린다. 창가에 어린 입김과 계절과 계절 사이의 바람 냄새, 새벽에 내리는 첫눈과 말이 되지 못한 채 기척으로만 존재하는 마음 쪽으로. 붙잡으려는 순간 사라짐으로써만 존재하는 어떤 것들이 지닌 아름다움을 나는 무척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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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흑백 미시마야 시리즈 1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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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진진하게 읽었지만 괴담이라는 소재 자체가 개취와 살짝 동떨어져 있는 바람에 흠뻑 빠져들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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