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가 아닌 한, 스물두 살에는 글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겨우 알까 말까 하는 법이니 말이다. 그러나 기교를 싫어하는 슬기로운 사람이요 연민의 철인인 파랭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잘 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인, — 그리고 그의 말은 옳다 — 서투르게 쓴 이 책 속에는, 그 뒤에 나온 다른 모든 책들보다 더 진정한 사랑이 담겨 있다.


예술가는 그처럼 저마다 일생을 두고 그의 됨됨이와 그가 말하는 것에 자양을 공급해 주는 단 하나뿐인 샘을 내면 깊은 곳에 지니고 있다. 그 샘이 고갈되면 작품은 말라비틀어지고 쪼개져 버리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우선 가난이 나에게 불행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빛이 그 부(富)를 그 위에 뿌려 주는 것이었다. 심지어 나의 반항들까지도 그 빛으로 환하게 밝아졌었다. 나의 반항은 언제나 모든 사람을 위한, 모든 사람의 삶이 빛 속에서 향상되도록 하기 위한 반항이었다는 것을 나는 거짓 없이 말할 수 있다


빈곤은 나로 하여금 태양 아래서라면, 그리고 역사 속에서라면 모든 것이 다 좋다고 믿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태양은 나에게 역사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삶을 변화시키는 것은 좋다. 그러나 내게는 신과도 같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은 안 된다. 


샹포르가 말했듯이, 자신의 성격상 감당하지 못할 원칙들을 스스로에게 강요하려 들기보다는 차라리 스스로의 교만함을 인정하고 그것이 보람되게 쓰이도록 애써 보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자문해 본 결과, 내게도 많은 약점들이 있지만 우리 사이에서 가장 흔히 발견되는 결점, 뭇 사회와 뭇 주의(主義)의 진정한 암적 존재, 즉 시기심만은 한 번도 그 속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는 것을 나는 증언할 수 있다.


  그러한 다행스러운 면역(免疫)의 공적은 나의 몫이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거의 모든 면에서 궁핍하기 짝이 없었지만 거의 아무것도 부러워하지 않았던 나의 집안 식구들 덕택이다. 글도 읽을 줄 모르던 그 가족은, 오직 그 침묵과 신중함과 천부의 질박한 자존심만을 통해서 나에게 가장 드높은 가르침을 주었으며, 그 가르침은 지금껏 지속되고 있다. 그리고 나 자신은 너무나 눈앞의 감각에 열중해 있어서 미처 다른 것을 꿈꿀 틈이 없었다. 지금도 나는 파리에서 엄청나게 부유한 삶을 목도할 때면, 거기서 내가 느끼게 되는 격원감에는 일말의 동정심이 깃들어 있다. 세상에는 불공평한 일이 많이 있지만 아무도 언급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기후의 불공평이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오랫동안 그러한 불공평의 수혜자였다. 열혈 박애주의자가 이 글을 읽고 퍼부어 대는 비난의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내가 노동자들은 부유하고 부르주아는 가난하다는 식으로 생각하게 함으로써 더 오랫동안 노동자들을 노예 상태로 붙잡아 둔 채 부르주아의 권세를 보존하게 하려는 저의를 갖고 있다고 말이다. 아니다, 그런 말이 아니다. 


지금 나는 내일에 대한 걱정 없이,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특혜받은 자로서 살고 있기는 하지만, 나는 소유할 줄을 모른다. 내가 가진 것, 내가 애써 가지려고 하지 않았지만 나에게 주어진 것 중 어느 것도 나는 간직할 줄을 모른다. 그것은 낭비벽 때문이라기보다는 다른 어떤 종류의 인색함 때문인 것 같다. 재물이 지나치게 많아지기 시작하면 즉시 사라져 버리고 마는 자유에 나는 인색한 것이다.


내가 몸담아 살고 일하기를 좋아하는 곳(더 드문 일이겠지만, 나로서는 거기서 죽어도 괜찮다고 여겨지는 곳)은 호텔 객실이다. 나는 한 번도 집안 생활이라고 불리는 것(그것은 내면 생활과는 오히려 정반대의 것이지만)에 빠져들 수가 없었다. 이른바 부르주아적이라고 하는 행복은 나에게는 따분하고 두렵기까지 하다. 하기야 그러한 적응 능력 결핍은 전혀 뽐낼 것이 못 된다. 그것은 나의 좋지 못한 결점들을 길러 주는 데 적지 않은 몫을 했다. 아무것도 부러워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나의 권리다. 그러나 나는 다른 사람들의 부러워하는 심정에 생각이 미치지 못할 때가 있어서, 그것이 나에게서 상상력을, 즉 남에 대한 친절을 앗아가 버린다.


슬픈 일이지만 사람은 타고난 천성의 결함을 메우기 위해서 좌우명을 만든다. 


사람이란 의욕만 가지면 — 나에게도 의욕은 없지 않다 — 가끔 도덕에 입각하여 처신할 수 있지만 진정으로 도덕적 존재가 되지는 못한다. 실제로는 정열의 인간이면서 도덕을 꿈꾼다는 것은, 정의를 부르짖는 바로 그 순간, 불의에 빠져드는 것이 된다. 내 눈에는 이따금 인간이란 살아 움직이는 불의 같아 보인다 — 내가 바로 그렇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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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남자가 체코의 어떤 마을을 떠나 돈벌이를 하러 갔다. 이십오 년이 지난 뒤에 그는 부자가 되어 아내와 어린 자식을 데리고 돌아왔다. 그의 어머니는 누이와 함께 고향 마을에서 여관을 경영하고 있었다. 그들을 놀래 주려고 사내는 아내와 아이를 다른 여관에 남겨 두고 어머니의 집으로 갔는데, 그가 들어갔을 때 어머니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장난 삼아 방을 하나 잡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자기가 지닌 돈을 내보였다. 밤중에 그의 어머니와 누이는 그를 망치로 때려죽이고 그가 가진 돈을 턴 다음 시체를 강물에 던져 버렸다. 아침이 되어, 사내의 아내가 찾아와 자기도 모르게 여행자의 신원을 밝히게 되었다. 어머니는 목을 맸다. 누이는 우물에 몸을 던졌다. 나는 그 이야기를 아마 수천 번은 읽었을 것이다. 한편으로 그것은 있을 법하지 않은 이야기였다. 또 한편으로는 자연스러운 이야기였다. 어쨌든 내가 볼 때 그런 결과에 대해서는 여행자에게도 좀 책임이 있었으며, 그리고 장난을 치면 절대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문이 끝났다. 법원을 나와 호송차를 타러 가면서, 나는 짧은 한순간 여름 저녁의 냄새와 빛을 기억해 냈다. 굴러가는 감옥의 어둠 속에서 나는 내가 좋아했던 한 도시의, 그리고 이따금 스스로 만족감을 느꼈던 어떤 시각의 귀에 익은 그 모든 소리들을, 마치 내 피로의 밑바닥으로부터 찾아내듯이 하나씩 되찾아 냈다. 이미 고즈넉하게 가라앉은 대기 속에서 들려오는 신문팔이들의 외치는 소리, 작은 공원 안의 마지막 새소리, 샌드위치 장수들의 호객하는 소리, 시내 고지대의 굽은 길에서 울리는 전차의 마찰음, 그리고 항구 위로 어둠이 기울기 전 하늘의 저 술렁이는 소리, 그러한 모든 것이 나에게는 소경이 되어 더듬어 가는 행로를 재구성해 주고 있었다. 감옥에 들어오기 전에 내가 잘 알고 있었던 그 행로를 말이다. 그렇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에 내가 스스로 만족감을 느끼곤 했던 그런 시각이었다. 그때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언제나 가볍고 꿈도 없는 잠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무엇인가 달라져 있었다. 왜냐하면, 다음 날에 대한 기대와 더불어 이제 내가 다시 대면한 것은 바로 나의 감방이었으니 말이다. 마치 여름 하늘 속에 그려진 낯익은 길들이 우리를 감옥으로 데려갈 수도 있고 순진무구한 잠으로 데려갈 수도 있다는 듯이.

물론 희망이란, 힘껏 달리던 도중 길모퉁이에서, 어디선가 날아온 총탄에 맞아 쓰러지는 것이었다.

단두대 칼날의 경우, 결함은 그것이 그 어떤 기회도, 절대적으로 그 어떤 기회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니 말이다. 요컨대 단 한 번에 그 환자의 죽음이 결정되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미 결정된 일이며 확정된 배합이며 성립된 합의여서 재론의 여지가 없었다. 만에 하나 실패할 경우 다시 해야 했다. 그렇다 보니 난처한 것은, 사형수로서는 기계가 순조롭게 작동해 주기만 바라야 한다는 점이었다. 내 말은, 바로 그것이 불완전한 면이라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선 그렇다. 그러나 또 다른 의미에서는 그 훌륭한 조직의 모든 비결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컨대 수형자는 정신적으로 협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모든 것이 탈 없이 진행되는 것이 그에게 이로운 것이다.

그는 어지간히도 자신만만한 태도로군, 안 그래? 그러나 그의 신념이란 건 죄다 여자의 머리카락 한 올만도 못해. 그는 죽은 사람처럼 살고 있으니,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확신조차 없는 셈이지. 나를 보면 맨주먹뿐인 것 같겠지. 그러나 내겐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이 있어. 신부 이상의 확신이 있어. 나의 삶에 대한, 닥쳐올 그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 그래, 내겐 이것밖에 없어. 그러나 적어도 나는 이 진리를 굳세게 붙들고 있어. 그 진리가 나를 붙들고 놓지 않는 것만큼이나. 내 생각은 옳았고, 지금도 옳고, 또 언제나 옳아. 나는 이런 식으로 살았고, 다른 식으로 살 수도 있었어. 나는 이건 했고 저건 하지 않았어. 나는 어떤 일은 하지 않았는데 다른 일은 했어. 그러니 어떻다는 거야? 나는 마치 저 순간을, 나의 정당성이 증명될 저 신새벽을 여태껏 기다리고 있었던 것만 같아. 아무것도,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아. 난 그 까닭을 알아. 신부인 그 역시 그 까닭을 알아. 내가 살아온 이 부조리한 전 생애 동안, 내 미래의 저 깊숙한 곳으로부터 한 줄기 어두운 바람이, 아직 오지 않은 세월을 거슬러 내게로 불어 올라오고 있었어. 내가 살고 있는, 더 실감 난달 것도 없는 세월 속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것은 모두 다, 그 바람이 지나가면서 서로 아무 차이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거야. 다른 사람들의 죽음, 어머니의 사랑,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다는 거야? 그의 그 하느님, 사람들이 선택하는 삶들, 사람들이 선택하는 운명들,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다는 거야? 오직 하나의 운명만이 나 자신을 택하도록 되어 있고, 나와 더불어 그처럼 나의 형제라고 자처하는 수십억의 특권 가진 사람들을 택하도록 되어 있는데 말이야. 이해하겠어? 이해하겠냐고? 사람은 누구나 다 특권을 가진 존재야. 세상엔 특권 가진 사람들밖에 없어. 다른 사람들도 역시 장차 사형 선고를 받을 거야. 신부인 그 역시 사형을 선고받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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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정의 내리는 주체는 사진작가가 아니라 사진기의 셔터가 찰칵 하는 순간이어야 맞다. 시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인이 최대한 물러선 자리에 시가 들어와야 한다고.

이런 생각이 낡은 생각이며 전혀 참신하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지만, 낡음과 참신함 같은 것들의 가치는 제쳐둘 만하다는 걸 이제는 우리가 인정했으면 해서 감히 입 바깥으로 꺼내 적어본다. 망설임은 어떻게 끝낼 수 있는 것일까. 망설임은 언제고 덜 중요한 것들을 뿌리침으로써 겨우 끝낼 수 있는 것이었다는 걸, 이 중요한 것을 나는 자꾸 망각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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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이 고장에서 저녁은 우수에 젖은 휴식과도 같았을 것이다. 오늘은, 풍경을 전율케 하면서 천지에 넘쳐 나는 태양 때문에 이 고장은 비인간적이고 기를 꺾어 놓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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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일, 현재의 일은 정보를 수집할 수 있으니 알아맞히는 게 당연해. 하지만 여기서는 그걸 이용해 미래의 일, 다시 말해 예언의 정당성을 과시하는 셈일세. 사실 점술사란 미래를 예지할 수 있어야 존재 가치가 있는 것이지, 다 지난 일을 알아봐야 의미가 없네. 하지만 뒤집어서 말하자면 내일 있을 일 따위는 알 수 없으니 무슨 말을 하든 판단할 수가 없지. 판단 기준을 과거나 현재에 둘 수밖에 없는 것 또한 사실일세. 그러니, 과거와 현재의 일을 잘 알아맞히는 점술사는 신용할 수 없네.



심령술이란 설명하기 어려운 〈영(靈)〉이라는 관념에 편의적으로 형태를 주는 작업을 말하는 것이지, 결코 신비롭고 비과학적인 힘을 가리키는 게 아닐세. 따라서 무녀나 주술사가 내일의 일을 알 수 있을 리도 없고, 또 알 필요도 없는 것이지.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정보를 수집하는 특이한 능력과 효과적인 정보공개의 방법론일세. 어떠한 형태로든 자신이 수집한 정보를 가장 효과적인――이것은 제삼자에 대해 효과적이라는 뜻이네만――형태로 공개함으로써 그 후에 행해질 기적에 신빙성을 부여하는 셈이지.”



“그러니까 미래의 일 따위는 영능력자와는 관련이 없는 걸세. 영능력자는 점술사와 달리, 내일 당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납니다, 라는 말은 하지 않네. 굿을 하지 않으면 나쁜 일이 일어난다, 항아리를 사지 않으면 행복해질 수 없다고 하는 거지. 굿을 하거나 항아리를 사도 행복해질 수 없는 경우에도, 마음가짐이 나쁘다, 공양이 부족하다 등 얼마든지 이유는 있네. 즉 빗나갈 일이 없지. 영능력자는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전하는 게 아니라 내일 무슨 일을 해야 할지를 전하기 위해 존재하는 거거든.”



무엇보다 불교 교단에서는 사실 굿도 하면 안 된다네. 기본적으로 불교는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니까.”



사이언스는 원래 지식이라는 뜻이니, 오컬트 사이언스는 감추어진 지식이라고 번역해야 하네. 과학과는 상관이 없는 거야.



상자라는 건 말이지, 뚜껑을 열고 안을 확인하지 않으면 가치가 없는 그런 게 아닐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따위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거야. 상자에는 상자로서의 존재 가치가 있는 법이거든.”



오컬트는 라디오인데, 이건 특별히 구조를 모르더라도 들을 수 있다. 하지만 구조를 모른다는 이유로, 안에 작은 귀신이 있어서 사람의 목소리로 나니와부시[浪花節]48)를 읊조리고 있다는 바보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이 있는 거야. 그래서 나는 그것을 규탄하기 위해서 라디오 자체를 규탄하고 있었던 것이 되는 셈이로군. 이것은 번지수가 틀린 거지. 그 경우 라디오를 비판할 필요도, 라디오 뚜껑을 뜯어 안의 게르마늄을 꺼낼 필요도 전혀 없고, 작은 귀신의 바보 같은 존재만을 떼어내어 증명하면 된다. 뚜껑을 열고 게르마늄을 보아 버리면 작은 귀신이 없다는 것은 간단히 증명할 수 있지만, 흐르는 노랫소리 또한 전기의 속임수라는 걸 알고 흥이 식어 버리니까. 따라서 라디오 자체에는 손을 대지 마라, 뭐――이런 소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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