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겁나니?”
“조금요.”
“좋은 일이야.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때도 두려워하는 편이 좋아. 그래야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되거든.”
고모가 나를 확 밀어내는 순간 나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고모의 온기가 사라지자 찌르는 듯한 고통이 느껴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 게 부끄러워서 꾹 참았다. 고모가 엔초와 춤을 춘 후로 그 어떤 남자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점이 멋있게 느껴졌다. 나는 고모가 그녀의 다시없을 유일한 사랑에 대한 모든 기억을 세세하게 간직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마 나와 함께 춤을 추면서 그 순간을 다시 되새겼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이 너무나 멋있어 보여서 나도 빨리 그런 사랑을 하고 싶어졌다. 그런 절대적인 사랑을 말이다. 엔초에 대한 추억이 너무나 선명해서 고모의 깡마른 몸과 가슴과 숨결에서 사랑이 조금 새어 나와 내 몸 안으로 흘러 들어온 것 같았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호기심이 익숙한 환경과 나를 향한 변치 않을 애정을 이기는 느낌이었다. 그런 감정으로 인해 나는 때로는 안도감을 느꼈고 때로는 의기소침해졌다.
자기가 대단한 줄 아는 교만한 사람들은 자기들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굴어.
가끔 우리가 하는 행동은 행동이 아니라 상징일 수도 있거든.
“기도가 도움이 됐니?”
“아니요. 기도는 성공하지 못한 마술과 같아요.”
“하기 싫은 일을 하라는 강요에 복종하면 마음도 복잡해지고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게 된단다.”
“그럼 복종이란 피부병과 같은 것인가요?”
사랑이란 뒷간 문에 달린 유리처럼 탁한 거란다.”
동정녀를 통해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을 자신의 창조물들 가운데 가장 불행한 자들이 겪는 최악의 상황에 몰아넣은 것도 싫었다.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도 그 힘을 인류의 상황을 개선하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하찮은 놀이에만 허비한 아들도 싫었다. 자기 어머니는 홀대하면서 아버지인 하나님에게는 화낼 용기조차 없는 아들이 싫었다. 자기 아들을 끔찍한 고통 속에 죽게 내버려두고 도움 요청에 응하지 않은 하나님이 싫었다.
‘안녕하세요. 다시 만나요. 마실 것을 드릴 테니 편히 계세요. 볼륨을 좀 낮춰주실 수 있을까요?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이렇게 멀쩡해 보이는 사람들에게도 언제든 검은 베일이 드리워질 수 있는 것이다. 갑자기 눈이 멀어서 거리를 가늠하지 못하고 부딪힐 수 있다. 어떠한 한계를 넘어가면 모든 사람이 앞을 못 보게 되는 걸까, 아니면 어떤 사람들만 그러는 걸까. 인간의 본모습은 모든 것을 명확하게 볼 수 있을 때 드러나는 걸까, 아니면 증오나 사랑처럼 농도가 짙고 무거운 감정에 의해서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질 때 드러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