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간신히 대학에 갔지만 넉넉한 형편은 아니어서 언제나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과외 아니면 논술 첨삭 같은 비교적 편한 일이었지만, 거의 쉬지 않았으므로 몸이 고된 날이 많았다. 그렇게 해서 번 돈이 한달에 30만원 남짓. IMF 때라 그나마 일거리가 있는 데 감사해야 했는데, 부잣집 딸들이 많은 학교에서 같은 과 애들이 "야 너 옷 예쁘다 어디서 샀어?" "학교 앞에서 30만원 주고 맞췄어." "와, 너 돈이 어디 있어서?" "엄마 카드 슬쩍 했지, 깔깔" 하는 소리를 들으면 주눅이 들었다. (대학 때 친구중에 아직도 만나는 애들은 한 명도 없다.) 아직도 나한테는 "큰돈"의 첫 단위가 30만원이다.

 

늦은 밤까지 종로 3가에서 두 탕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 버스가 광화문 앞에서 유턴해 세종문화회관 앞을 지날 때, 이제 막 공연을 보고 나온 사람들이 환희에 찬 얼굴로 쏟아져 나오는 걸 보기도 했다. 그리고 버스 맨뒷자리에 앉아서 나는 왠지 서러워 찔끔찔끔 울었다. 취직하면 나 공연은 실컷 볼 거야. 그때 그런 결심을 했다. 비록 취직한 다음에도 한동안 넉넉하지 못해 원을 다 풀진 못했지만, 지금도 비싼 공연을 볼 때면 그때의 내가 떠올라서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다. 

 

*

 

 

 

 

 

 

지난 금요일엔 기돈 크레머 할아버지와 그의 젊은 친구들의 연주회에 갔다. 음반으로 만나면서 꽤 오래 팬심을 키워왔던 터라, 크으은맘 먹고 두번째로 비싼 자리를 골랐다. 60년동안 바이올린과 한몸이 되어 산 거장의 연주는 꽉 막힌 내 귀에도 엄청난 감동을 주었다. 연주를 쉬는 동안에도, 아무 소리가 나지 않는 순간에도 청중을 사로잡는 카리스마. 긴장된 적막을 찢으며 예민한 음을 짚어내는 결단력. 얼굴이 벌게지도록 온몸을 사용해 연주하는 집중력. 태어나서 처음으로 기립박수를 했다. (아, 이럴 때 기립박수를 하는 거구나!) 그런데 오늘 아침 라디오에서 얼핏 들으니, 서구 어딘가에서는 수입이 얼만지가 아니라 "스스로 즐기는 운동이 있는지,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있는지, 나만의 요리가 있는지, 공적인 집회에 의연히 참가하는지" 등으로 스스로 중산층인지 여부를 따진다고 한다. 나는 악기를 다룰 줄 모르지만, 이만하면 중산층인 것 같다. 기돈 크레머 할아버지의 연주를 찾아가고, 기립박수를 했다. 늦은밤 53번 버스 맨뒷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훌쩍이는 스무살이던 내가.

 

*

 

 

 

(▲ "할아버지 안녕하세요?"라고, 어린이들이 먼저 와서 인사했다지. 너네 이 할아버지가 누군지는 아는 거냐!)

 

오늘은 문재인 펀드가 개시된 날이다. 나는 추천인 란에 노무현이라 썼다 지우고 문재인이라고 적었다. 그를 보고 하는 투자니까. 금액을 고민하다가 나의 대학시절 한달 수입을 써 냈다. 중산층임을 자처하면서 지금 한달 월급을 내지는 못하는 내가 부끄럽지만, 한때는 지금의 한달 월급보다 더더 절실했던 "큰돈"을 그에게 보냈다. 앞으로도 내가 계속 중산층으로 살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어쨌든 우리는 당신을 잃지 않을 거예요, 속으로 그렇게 말해 보았다.

 

 

 

 

 


댓글(42) 먼댓글(0) 좋아요(3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레와 2012-10-22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눈물이 핑 -. ..

매달 월급에서 얼마씩 여행자금을 모으고 있어요. 그리고 매년 여행을 다녀요. 가까운 곳도 가고 먼 곳도 가고.. 지금 만큼만 행복하면 좋겠어요. 이것도 욕심일까요?

네꼬 2012-10-22 13:28   좋아요 0 | URL
맞아요 레와님, 우리가 뭐 큰걸 바라는 것도 아니고.. ㅠㅠ 욕심 아니에요. 우리, 계속 그렇게 살 수 있도록 같이 힘을 모아 보아요.

웽스북스 2012-10-22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뭉클하네요.
국민에게만 빚을 지겠다는 말이 좋았어요. 공지 뜬 것은 봤는데 오늘 시작했군요. 나도 할래요. 저는 네꼬님만큼도 못하겠지만. 추천인에는 네꼬님 이름 써야겠어요.

웽스북스 2012-10-22 13:28   좋아요 0 | URL
아. 접속이 안되네요. 이거 좋은 일인거겠죠? 설마 누군가의 방해? 아니겠지. 아닐거야~ ㅠㅠ

네꼬 2012-10-22 13:30   좋아요 0 | URL
웬디님. ㅠㅠ 응 난 아침에 컴퓨터 켜자마자 했는데도 접속이 쫌 오래 걸리더라고요. (하지만 이거 방해 아닐까 의심하는 그 맘 알겠음 ㅎㅎ)

예전에 노무현이 "빚을 진 게 국민뿐이므로 무서운 것도 국민뿐이다"라고 했었죠. 나는 오늘부로 채권자! 웬디님도! 으하하.

다락방 2012-10-22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님은, 내가 아는 가장 멋진 여자사람이에요!

네꼬 2012-10-23 13:05   좋아요 0 | URL
고양이가 아니고? =_= 한 가지만 딱 골라 얘기하자면, 어린 다락님은 내가 아는 가장 요염한 어린이. ㅎㅎㅎ

hnine 2012-10-22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광화문 지나 유턴 해서 세종문화회관 지나는 53번 버스 많이 타고 다녔던 기억이 나네요. 그거 타고 새벽에 학원도 다니고...

기돈 크레머, 서울에선 이미 공연했군요. 여기 대전에서도 한다고 광고하는것 어제 봤어요.

네꼬 2012-10-23 13:13   좋아요 0 | URL
나인님, 53번 버스를 아시는군요! 저도 그랬어요. 학원도 다니고, 과외도 가고... 저는 고양시 공연을 봤어요. 대전에서도 한다고 하던데.. 나인님 대전이시구나!

라로 2012-10-22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님~~.
눈물이 핑 도네요. 요즘 제 사는 모습을 돌아보게도 하고!!
멋진 분!!

네꼬 2012-10-23 13:14   좋아요 0 | URL
나비님이 멋진 분. 댓글 보니까 저도 제 사는 모습 되돌아보게... 되어서 슬프군요! ㅠㅠ

LAYLA 2012-10-22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돈을 번다는 게 감동적인 일이란 걸 다시 생각하게 하는 페이퍼네요.

네꼬 2012-10-23 13:15   좋아요 0 | URL
LAYLA님 돈을 본다는 게 참 어렵고 좋고 감사한 일이에요. 일하고 돈 받고 그걸로 하고 싶은 걸 하는 단순한 삶이 오래 계속되면 좋겠다고 생각해 봤어요.

M의서재 2012-10-22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님. 감동받았어요. 많은 것들을 떠올리게 하는 글이네요. 좋은 페이퍼 감사해요~

네꼬 2012-10-23 13:16   좋아요 0 | URL
불량주부님 반갑습니다. 가끔 서재 훔쳐 보고 있어요. (^^) 저야말로 감사해요. (전혀 안 불량해 보이시던데...)

소영 2012-10-22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 네꼬님(이라고 불러야지ㅋㅋ) 저도 중산층 인증하며 펀드 출자 했어요! 으하하
근데 글이 막 감동이야 므앙

네꼬 2012-10-23 13:16   좋아요 0 | URL
깜짝이야 소영님. ㅎ 가서 봤어요, 저도. 예쁜 순남이랑 귀요미 남편님이랑 다 너무 좋아요, 나는.

세실 2012-10-22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쁜 네꼬님^*^
네꼬님의 글에는 향기가 나요....

네꼬 2012-10-23 13:17   좋아요 0 | URL
세실님, 요새 바쁘시던데. ㅎㅎ (훔쳐보는 네꼬. 제 냄새가 거기까지...?)

프레이야 2012-10-22 1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냥한 네꼬님 찡긋~
돈도 있을 땐 소중함을 잘 모르고 살게되는 것 같아요.
없어봐야 소중한 걸 알게되고요.^^
네꼬님이 잃지 않겠다는 그분, 저도 잃고 싶지 않네요.

네꼬 2012-10-23 13:18   좋아요 0 | URL
돈도 사람도, 있을 때 잘해야 되는 것 같아요. (뭐래니.)
우리 같이 서로를 지켜주어요. 모두모두 서로서로의 울타리.

저.. 저도 찡긋! (꺅.)

마노아 2012-10-22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유 눈물이 찔끔, 감동 주르륵이에요. 이 멋진 사람을 내가 알고 있어 더불어 행복해지네요.

네꼬 2012-10-23 13:19   좋아요 0 | URL
아유 참 눈물 많은 마노아님, 이리 오세요. 흥! 코 풀고.

2012-10-22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멋지십니다. ㅠ.ㅜ

네꼬 2012-10-23 13:19   좋아요 0 | URL
횽님(?) 감사합니다만 네, 오해십니다;;;

휘모리 2012-10-23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는 성인이 되고나서 늘 한분에게만 투표해왔던지라 이번엔 어째야할지 모르겠는 상태예요..
네꼬님 저는 종로에서 차비구걸도 해봤어요 ㅎㅎㅎ
네일케어 받고 왔다던 동기녀석한테 얼마나 졸리던지.. 학생 식당에 공사하는 아저씨들이 같이 식사하는 동기들에게 말한마디 못뱉고 속으로만 삭히던 그때가 저도 문뜩 생각나네요.

네꼬 2012-10-23 13:22   좋아요 0 | URL
휘모리님 반가워요. 그래요, 휘모리님은 한분이었겠죠! 차비.. 므앙. 미녀에게 너무 안 어울리잖아요. ㅜㅜ 맞아요, 똑같이 과외를 해도 저처럼 절박하지 않은 애들 앞에선 엄청 주눅 들고 그랬어요. 차 가지고 다니는 애들도 그렇고. 그런 애들은 피부도 하얗더라. -_- 우린 우리끼리 친하게 지냅시다. (엉?)

휘모리 2012-10-23 13:32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흑흑 말도 안되게 써놔서 수정 ㅋㄷㅋㄷ
우리는 친하다고 믿고 있어요 암!

치니 2012-10-23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 님은 참, 이러면서 왜 책을 안 내시는지! 빨랑 동화를 써 봐요 ~
대학 시절 친구들 중, 저도 만나는 친구가 없어요. 친구란 결국, 관심사가 같아야 오래 가나 봐요.
돈을 귀중하게 벌고 귀중하게 쓰고 싶은데, 잘 못하고 있네요. 반성 반성. 좋은 글, 감사합니다!

네꼬 2012-10-24 23:11   좋아요 0 | URL
엉터리 치니님, 내가 옛날 생각하는 거랑 책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그것도 동화라니. ㅎㅎ 하여간.

친구 사이에 추억보다 중요한 게 사실은 관심사인 것 같아요. 그게 아니라면 오래 사귄 친구가 장떙이게? 저는 요즘 "내 월급의 대가는 내 일이 아니라 내 스트레스"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니까 반성하지 마세요. ㅠㅠ

2012-10-23 2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0-24 2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Mephistopheles 2012-10-24 0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왜 다 싫을까요. 특히 빨간정당후보님이 도드라지게 싫긴하지만...

네꼬 2012-10-24 23:18   좋아요 0 | URL
메피님 오래간만이에요. 저는 박근혜만 싫어요. 저로선 나란히 놓을 수가 당연히 없음. 저는 기쁘게 힘차게 마음을 잡았지요.

도우너 2012-10-24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세상에, 아까 문펀드에 갔는데 경기 서울 지역은 3시 이후에 접속했으면 좋겠다잖아요? 그래서 기다리는 김에 소영님 블로그에 들어갔는데 지난글 중에 문펀드 얘기가 있지뭐양. 근데 또 네꼬님 얘길 하기에 요기 서재에 들어왔더니 요기도 문펀드 얘기. 그러니까 소영님의 네꼬님 글도 문펀드 글이었구나.. 으아 난 문펀드 들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의 소용돌이인가봐요.

네꼬 2012-10-24 23:20   좋아요 0 | URL
도우너님 도우너님 도우너님아. 당신은 벗어날 수 없다... 여기는 펀드의 늪이다... 당신은 어디를 가도 펀드로 오게 되어 있다... 있다... 있다.... 여기는 펀드다... 도우너는 돈을 낸다... 낸다... 낸다....

(와락!) 그래서 접속했어요? 나는 월요일 아침 일찌감치 성공했지롱!

도우너 2012-10-25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다시 그분을 방문했을 땐 이미 200억 마감 ㅠㅠ 문님에게 서운했다는... 3시에 오라며~ 말 잘듣고 3시 넘어서 왔는데 왜 마감이야 왜 나만 빼놓고 왜왜왜! 얌전히 2차분을 기다리겠어요. (누굴 탓해...역시 사람은 부지런해야... ㅜㅠ총총)

네꼬 2012-10-25 17:58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 도우너씨 고생했네! 그래요 2차를 기다립시다. 우와, 우리 돈 많다!

모모 2012-10-28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네꼬님~나쓰메 소세키 팬이신가 하고 들렀다가 글 읽고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힘있는 중산층이십니다~

네꼬 2012-10-29 09:31   좋아요 0 | URL
모모님 안녕하세요? 나쓰메 소세키도 네 조금은 좋아하지요. (조금 좋아하는 이유는 조금만 읽었기 때문이에요.) 힘이 있거나 제대로 중산층이거나 둘 중 하나만 돼도 좋겠네요! ㅠㅠ 감사합니다. (왜 눈물이..)

에세르 2012-10-29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읽어보는 아주 가슴 뭉클한 글입니다.
짧은 이 글만으로 즐겨찾는 서재를 해야겠단 생각을 했습니다.
젊은 시절의 고생하던 기억과 현재의 네꼬님이 연결되어 감동 받았네요.추천!

p.s. 저는 (아래의) 하리보 젤리를 좋아하지 않지만, 주변에 좋아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나눠주는 것을 좋아합니다. 사람들마다 좋아하는 색깔(맛)이 다르더라구요. 곰의 얼굴부분부터 먹으면 조금 잔인한 느낌이 들지요..ㅋㅋ

네꼬 2012-11-02 11:06   좋아요 0 | URL
에세르님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빨간 발 너무 예쁘시네요!!
와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쑥스럽...)

저 하리보는 아주 조그만 하리보라 먹을 땐 한 마리를 한번에.. (엉?) 네 그런 것입니다. ㅎㅎㅎ 고 조그만 곰이 사과맛 딸기맛 나는 것이 참 신기하지요. (저는 딸기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