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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를 피할 때는 미끄럼틀 아래서 ㅣ 보림문학선 4
오카다 준 지음, 박종진 옮김, 이세 히데코 그림 / 보림 / 2006년 11월
평점 :
품절
지금 삼십대를 보내고 있을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도 '모래 요정 바람돌이'를 좋아했다. 아니, 좋아했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나는 그가 없인 못 살 것처럼, 방송이 시작되기 직전까지 온종일 애를 태우곤 했다. 바람돌이 종영설이 풍문처럼 떠돌 때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마지막 방송이 끝나고는 어찌나 서럽게 울었는지. 지금도 그 때 생각을 하면 눈물이 난다. 모래 요정 바람돌이. 그는 왜 어린 네꼬를 그토록 사로잡았던가. 그는 뚱뚱했다. 목소리도 희한했다. 발톱은 좀 무서웠다. 그런데 왜. 왜. 어른이 되고 이 문제를 가만 생각해본 적이 있다. 그리고 알았다. 그가 내 마음을 빼앗아 간 비밀은, 바로 "소원은 하나씩. 하루에 한 가지 바람돌이 선물"에 있었다. 아무리 애걸복걸해도 소원은 딱 하나만 들어 준다. 어떤 선의를 가진 소원이라도 해가 지면 마법과 작별해야 한다. 그대신, 꼭 들어준다. 소원을 딱 하나만 들어준다는 설정이 야박하게 느껴질 때가 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그래 하나 들어주는 정도는 그에게도 어렵지 않을 거야. 게다가 하루 짜린데' 하는 생각에 그 마법의 존재를 확신하게 했던 것이다. 마치 "한 달만 어디 여행가면 좋겠다"는 것보다 "내일 하루 휴가 내야지" 하는 계획이 훨씬 사람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것과 같다. (비유 하곤.) 하나만이니까, 내 소원을 들어줄지 몰라. 정말 들어줄 거야. 내일이라도 만나기만 한다면.
(실제 리뷰는 매우 짧다)
<<비를 피할 때는 미끄럼틀 아래서>>라는 서정적인 제목이 우선 맘에 들었다. 판권을 보니 대충 원서 제목하고도 비슷한 것 같다. 오카다 준이 유명한 작가라는 정도의 사전정보만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덮고 난 소감은 "명불허전이로다"다. 방학이 끝날 무렵, '같이 등교하는 아이들과 함께 놀기' 숙제를 하던 아이들은 갑자기 쏟아진 비를 피하기 위해 미끄럼틀 아래로 모여 든다. 그리고 지나가는 아마모리 아저씨를 지켜보다가, 각자가 알고 있는 아마모리 아저씨와 관련한 에피소드들을 털어놓는다. 여기에 자세한 얘길 쓰면 읽는 분들이 김 샐 테니까 이야긴 여기까지만. 때로는 가슴이 짠하고 때로는 웃기고, 어떤 건 귀여워서 다음날까지도 생각나는 아기자기한 에피소드들을 통해 아이들은 아마모리 아저씨가 마법사라는 걸 짐작하게 된다. 아주 대단하고 무서운 마법사가 아니라 자기들의 일상에 파고들어서 조그만 울림을 주고는 유유히 사라지는, 말이 없고 친하게 지내는 사람도 없고 새를 기르지도 초콜릿을 좋아하지도 않지만, 아이들을 지켜보는 것만은 좋아하는 마법사 아저씨.
내가 이 책을 어린이였을 때 만났다면 어땠을까. 난 아마 잠도 못 잤을 것이다. 도대체 우리 동네 마법사는 누구란 말이냐, 가슴을 두근거리면서 이불 속에서 발을 동동 굴렀겠지. 학교 가는 길에 만나는 강아지도 예사로 보아 넘기지 못했겠지. 아아 이 얼마나 못 견딜 판타지란 말인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책에서 아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꿈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어디까지가 상상이고 현실인지 스스로도 깜빡 넘어가버리는 판타지. 내가 아이였을 때 이 책을 읽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하니 아찔하다. 그리고 어린이로서 이 책을 읽을 독자들이 부러워서 약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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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끝에 복수를 결심하고 나는 맥주를 들고 이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어린이들, 요녀석들, 너희들이 아무리 말랑말랑한 마음으로, 아무리 재밌는 책을 읽는다고 해도 이런 건 못하지? 맥주 마시면서 동화책 읽으면 얼마나 좋은지 모르지? 이 아이디어가 맘에 들어서 (오래간만에) 스스로 머리 쓰다듬기를 2회 실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