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차로 앞에서는 속도를 줄여라."

지난 가을 내가 운전을 시작했을 때 우리 아빠는 몇 번이나 같은 말씀을 하셨다. 안전운전을 자랑하는 아빠가 딱 한번 딱지를 떼인적이 있는데, 그게 바로 교차로 신호위반이었다고 한다. 주황색 불이 들어와 속도를 높였는데 중간에 빨간 불로 바뀌는 바람에 교차로 건너에 있던 교통경찰에게 딱 걸린 것이다. 교차로에서 신호가 바뀌었는데 그럼 어떡하냐고 항변하셨더니 교통경찰이 그러더란다. "교차로 전에서 속도를 줄이셨어야죠." 덕분에 나도 같은 얘기를 몇 번이고 들어야 했다.

그런데 실제로 나는 그 말씀을 잘 지키지 못한다. 성미가 급한 데다가 이상하게도, 교차로 근처에 오면 "아 곧 주황색불이 될지도 모르니까 속도를 줄여야겠다" 생각하기보다 "아 곧 주황색불이 될지도 모르니까 얼른 지나가야지" 하고 오히려 속도를 높이는 것이다. 운전 습관으로 치자면 나쁜 습관이다. 오늘 엄마 집에 갔다 오는 길에 교차로에서 큰 사고가 난 걸 보면서 다시 한번 조심해야겠다 결심했다. 그러니까 이건 운전에 대한 얘기다.

-

주말에 '두번째 사랑' 을 보았다. 뉴욕에서 성공한 한국인 남편과 결혼한 소피는 오랜 노력에도 아이가 생기지 않자, 한국인 불법체류 노동자 지하에게 모종의 거래를 제안한다. 한번 잠자리를 하면 300달러를, 나중에 임신이 되면 30000달러를 주겠다는 것. 불법체류자라는 신분 때문에 그가 팔 수 있는 유일한 것인 정자조차 팔 수 없는 지하는 그 제안을 거절할 수 없다. 그렇게 시작한 그들의 관계는 육체적인 것이었지만 (거의 필연적으로) 정신적인 것으로 발전한다. 주변 사람들에게 마음을 쓰느라 자신을 돌보지 않았던 소피와, 고단한 현실 때문에 마음을 돌보지 않았던 지하의 사랑은 뻔한 것이지만 그만큼 자연스럽다.


기도하는 방법을 모른다고 했던 소피는 지하에게서

돌을 쌓으면서 소원을 빌면 된다는 새로운  기도법을 배운다.


소피는 마침내(?) 임신에 성공하지만 (보는 사람 조마조마하게 해가면) 지하의 남루한 아파트를 계속해서 찾아간다. 아, 이쯤되면 남편이 알 만도 한데. 그만 가야 하는데. 소피의 뒷모습을 쫓아가는 카메라 뒤에서 나는 속으로 외쳤다. 멈춰야 해. 거기서 멈춰야 해요. 그러나 내 말을 들을 리 없고 듣는다 해도 참고해줄 리 없는 소피는 멈추지 않는다. 바보같이. 뻔한 길을 왜 가는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나도 한편으로는 생각했다.

멈출 수 있다면, 사랑일까.

멈추어야겠다고 생각해서 멈춘 적이, 내게는 있다. 더 가면 안되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조금 더 가보았고, 더 간 그만큼 아니 그의 몇 갑절의 상처를 돌려받고 난 뒤에 이제는 멈추어야겠다고 생각했고, 조금 늦었지만 나는 거기에서 멈추었다. 그런데 그게 멈추어야겠다는 결정 때문은 아니었다.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거기서 멈추고 아픈 길을 걸어 나의 자리로 돌아왔을 때 나는 안도하였다. 아마 사랑이라고 생각했다면 더 누더기가 되었어도 나는 속도를 내었을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나는 교차로에서 속력을 내는 사람이다. 그런 고양이다.

다시 사랑이 찾아온다면 마음을 열 수 있을까 요즘 그런 고민을 해보았다. 정말로 한 때는 내가 그러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고, 그것이 겁이 났다. 상투적인 전개와 하정우의 불안한 영어 발음(!)-어쩌면 불법체류자로서의 연기였을 수도-이 약간 어색하고, 소피의 남편이 둘의 사랑을 목도하는 타이밍이 너무 도식적으로 설정되어 눈을 가리게 했지만(나는 그런 조마조마한 장면을 도저히 바로 볼 수가 없다-_-), 영화를 보면서 깨달았다. 나는, 다시 사랑이 찾아온다면 나는, 역시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멈출 때와 멈추지 않을 때를 아는 고양이다. 그런 내가 누가 뭐래도 나는 좋다. 알랍, 네꼬♡ (엉뚱한 결론 1)

*하지만 운전할 땐 조심할게요. 교차로 전에는 속도를 줄일 것. 여러분 안전운전! (엉뚱한 결론 2)

 


댓글(4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Mephistopheles 2007-06-24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 이제부터 교차로에서 속도를 줄이듯이 안전한 사랑을 하시겠다는 말씀..? 이신건가요?

네꼬 2007-06-25 00:00   좋아요 0 | URL
에, 운전은 안전운전. 사랑은 버닝. 사랑에선 여전히 멈추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요. : )

Mephistopheles 2007-06-25 00:06   좋아요 0 | URL
멈춰야 될 사랑도 분명 존재하는 법이랍죠...예를 들면..고양이가 살쾡이를 사랑한다던지 호랑이를 사랑하면 절대 안되죠...^^

네꼬 2007-06-25 00:08   좋아요 0 | URL
이젠 이런 말씀해놓고 도망도 안 가시는군요. =__= 나 놀리는 게 그렇게 잼나세요? (쿠궁.) 흥흥흥, 호랑이 따위 뭐 별 거라고!!!!!

antitheme 2007-06-25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영화 애들엄마랑 보러갈려고 하는데 주변에 상영하는 극장이 없어요.

네꼬 2007-06-25 00:12   좋아요 0 | URL
저는 광화문의 미로스페이스에서 보았는데요, 거기서만 할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여러곳에서 하더라구요. 음, 부부가 같이 본다면 어떨까? (솔깃.) 혹 보시게 되면 어땠는지 꼭 알려주세요. : )

마노아 2007-06-25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멈춰야한다고 생각해서 멈췄고, 그 후 다시 그길로 가지 않았는데, 오랜 세월 지나서 후회는 남지 않았지만, 미련은 약간 남았어요. 다음 번엔 멈추지 않아도 될 사랑을 하리!라고 다짐하고 수년이 흘렀어요^^ㅎㅎㅎ

네꼬 2007-06-25 00:14   좋아요 0 | URL
수년 흘렀으니 이젠 때가 됐을 겁니다. 달리는 거예요!!! 버닝이야 버닝!!!!! (응? 내가 왜 흥분했죠?)

이매지 2007-06-25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멈춰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랑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게 아닌 것 같아요. 이거 무던~하게 묻어가는 것 같은 사랑이니 원. 그게 더 좋을 수도 있지만요^^;

네꼬 2007-06-25 02:28   좋아요 0 | URL
무던~하게 묻어가는 것도 멈출 수 없는 이유가 되겠지요. 사실 제가 진정 원하는 것은 바로 그런 멈출 수 없는 묻어감일 수도... ^^

무스탕 2007-06-25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님의 아우토반같은 사랑 이야기를 기대할께요 ^^

네꼬 2007-06-25 10:14   좋아요 0 | URL
저도 기대가 큽니다. ㅋㅋ (기대에 부응할게요. ^^)

nada 2007-06-25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정우, 히트에서 진짜 완전소중이었어요. 히트 느무 좋아해서 고현정까지 비호감에서 호감으로 바뀌었다는..+_+ 이 영화 인터넷 평점으로는 다들 욕하던데..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나 봐요. 그 데이트 취소한 남자한테선 또 연락 없구요?^^

네꼬 2007-06-25 10:17   좋아요 0 | URL
전 히트 때 하정우가 아주 살짝 어딘가 그러니까 알 수 없게 어딘가 쬐금 부족하다고 느꼈는데, 영화에선 그게 엔간히 채워진 것 같아요. 영화는 파격적인 결말이 있다거나 되게 좋다거나 한 건 아니지만 나름대로 생각할 것들을 주었어요. (데이트남은...)

Heⓔ 2007-06-25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방통행에서 멈추지 않고 질주해봤자 다쳐요..
상대방이 다치지 않도록 유턴할 수 있을 때는 유턴을 해야 해요.
다른 곳을 향한 일방통행로에서 역주행을 한다면 더더욱.
전 항상 일방통행이에요.
그래서 언젠가부터는 시동을 꺼놨어요.

어쨌든 운전할 땐 조심하세요. 교차로 전에는 속도를 줄일 것. 네꼬님 안전운전! (엉뚱한 결론 3)

네꼬 2007-06-25 10:19   좋아요 0 | URL
히-님, 사고는 피하는 게 좋고 그러니 안전운전을 해야겠지만, 시동을 꺼두는 것은 좋지 않아요. 더구나 시동을 꺼두었다고 장담하면 더욱 곤란! 언제 불타오를지 모르니까 장담하면 안 되어요. (그러니까 8 쯤 되나? ^^) 퍼스나콘처럼 곱게 손 마주잡고 다닐 그녀가 곧 나타나길 바랄게요. : ) 안전운전!

2007-06-25 1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6-25 13: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6-25 15: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6-25 16: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전호인 2007-06-25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사고의 원인은 조급증에서 비롯된다지요, 특히나 교차로에서 신호가 깜박거릴 때 통과하려는 심리로 속도를 내는 경우가 다반사인 것 같아요, 안전운전합시다. 나를 지키고 다른 사람의 가정을 지켜주는 일이니까요

네꼬 2007-06-25 13:20   좋아요 0 | URL
네. 조심하겠습니다. (갑자기 무릎 꿇고 얌전히 듣는 고양이 모드.) ----- 아니..... 사랑은 그렇고.... 운전은 조심하겠다는..... (땀 뻘뻘.)

홍수맘 2007-06-25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호인의 말씀에 이어 사랑도 조급증을 조심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문득해봅니다. 어찌보면 일상생활속에서 밀려오는 조용한 사랑법도 나름 괜찮을 듯 해요.
두 문장의 의미가 같은 건가? 다른건가? 써 놓고 헷갈려 한다는 ^^;;;;

네꼬 2007-06-25 13:21   좋아요 0 | URL
조용히 물밀려오는 사랑이 더 귀하죠. 제게도 그런 기회가 왔으면 좋겠습니다. (음, 착하게 살아야지. 엉뚱한 결심?)

2007-06-25 11: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6-25 13: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07-06-25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님, 두번째 사랑, 보고 싶은 영화에요.
운전은 안전이 제일이죠^^ 사랑도 그런가?

네꼬 2007-06-25 16:25   좋아요 0 | URL
안전하다고 생각했다가 얻어맞는 게 더 아프던걸요. 운전은 안전운전, 사랑은 레이싱~

비로그인 2007-06-25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혼자 보려하는데요.

네꼬 2007-06-25 17:52   좋아요 0 | URL
음 그것도 괜찮을 거예요. 조 밑에 "D"님처럼 ^^ 막 보고나서보다는 하루쯤 묵히고 난 뒤에 생각나는 게 더 많다는 의견도 있으니, 혼자 천천히 보시고 천천히 생각하시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 )

2007-06-25 17: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6-25 17: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07-06-25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님. 제 리뷰의 댓글에도 달았지만, 이 영화는 참 이상한 영화예요. 보자마자는 좋다는 느낌을 확 받은건 아니었는데 자꾸 생각이 나요. 하루가 지났을때는 영화에 더 푹빠져있는 자신을 발견했고 이틀이 지난 지금은 어쩐지 갖고싶다는 생각이 드는 영화가 되버렸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더 생각나는 그런 이상한 영화예요. 영화를 보고 이런 느낌이 들다니 너무나 신기해요. 그리고 좋아요. 그래서 지금은 최종적으로 참 좋은 영화가 되버리고 말았어요. 정말 이상한 영화지요?

네꼬 2007-06-25 17:58   좋아요 0 | URL
다락님. 다락님은 참 이상한 다락님이에요. 보자마자도 좋다는 느낌을 확 받았는데 그러고 나서도 자꾸 생각이 나요. 하루가 지났을때는 다락님께 더 푹빠져있는 자신을 발견했고 지금은 어쩐지 갖고싶다는 생각이 드는 다락님이 되어버렸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더 생각나는 그런 이상한 다락님이에요. 사람을 보고 이런 느낌이 들다니 너무나 신기해요. 그리고 좋아요. 정말 이상한 다락님이지요?

다락방 2007-06-25 1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므낫. 네꼬님때문에 얼굴이 발그레 *^^*

네꼬 2007-06-26 09:53   좋아요 0 | URL
이상한 다락님. 그런 표정도 이뻐요. : )

치유 2007-06-26 2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 영화 저도 봐야겠네요..

네꼬 2007-06-28 08:29   좋아요 0 | URL
제게는 별 셋 반에서 넷 사이를 오가는 영화예요. 그런데 제가 하정우를 더 좋아했다면 미련없이 네 개 줬을지도 몰라요. ^^

꼬마요정 2007-06-26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후 멈춰야겠다는 생각을 하고도 한참을 더 갔더랬죠. 그러고는 저도 네꼬님과 같은 이유로 딱 멈췄습니다. 사실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저 자신을 속이고 있었더랬죠. 왜 그랬을까요... 두 번째 사랑 보고 싶은데 제 주위엔 상영을 안 해요~~ㅠㅠ

네꼬 2007-06-28 08:30   좋아요 0 | URL
자, 요정님 그러니 다음에 달릴 기회가 오면 (무스탕님 말씀따나) 아우토반을 달려보아요. 가는 거야!! (응? 생각보다 여러군데서 하던데.~)

꼬마요정 2007-06-28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달리는 중이랍니다.^*^

네꼬 2007-06-28 21:54   좋아요 0 | URL
아니, 그러니까 이것은 염장 댓글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