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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3
밀란 쿤데라 지음, 김병욱 옮김 / 민음사 / 2010년 3월
평점 :
짐이었다.
20일을 들고 다니면서 다 못 읽은 밀란 쿤데라의 <불멸>. 어디를 가든 손에서 놓지 않았으나 아직 다 못 읽은 소설. 손의 짐이 마음의 짐이 되었다.
화장실에서 읽기 좋은 책이었다.
한 권의 책을 해결 못한 20여 일 동안 화장실도 20여 번(책 들고 가는 화장실 용무는 하루에 한 번), 20여 개의 챕터. 고도의 정신력을 쏟은 화장실에서의 독서 부분들... 그 외 많은 부분은 두 번 이상 되읽기를 무수히 반복했다. 하지만 불멸을 읽기 위해 변기 위에 머무를 수는 없는 일...
애써 읽기를 실천해야만 겨우 이해가 되었다. 읽고 또 읽어 밀란 쿤데라의 문장이 내게 쏙 들어왔을 때, 그 때가 <불멸>을 읽는 큰 즐거움의 순간이었으나 집중력이 흐트러져 독서의 끊김이 연속되었다.
냉정히 말해, 밀란 쿤데라의 기가 막힌 문장들과 (여러 종류의)불멸에 대한 단상을 읽는 재미는 세상 재미난 것들에 비해서는 지루할 뿐이었다. 곱씹을수록 맛이 나는 밀란 쿤데라의 문장은 가만히 되새김해야만 내 것이 될 수 있었다. 마음은 그 수고로움을 기꺼이 감수하려 했지만 시청각을 자극하는 세상 현란한 이야기들에 자꾸만 책이 뒷전으로 밀쳐진다. 눈 안에 담으면 씹고 다지는 수고 없이도 사르르 녹는 흥미로운 이야기와 현란하고 자극적인 드라마, 노래에 빠져 책은 그저 손안의 이야기, 손안의 짐일 뿐이었다.
아무것도 나를 유혹하지 않는 나만의 장소가 필요했다. 세상 근심을 해결하는 화장실에서 나는 불멸의 문장에 빠져 들었고, 화장실을 나서는 순간 불멸의 문장은 내게 근심이 되었다.
친구를 만나러 가는 지하철에서 나는 다시 불멸의 세상을 만나지만 친구를 만나는 순간 세상은 유한한 실존의 공간이 되었다. 불멸의 이야기는 그렇게 세상에서 소멸하고 말았다.
숙제로 남은 밀란 쿤데라의 <불멸>.
미완의 독서, 하지만 순간 순간 깊은 독서를 했었던 강렬한 기억이 인상적이었던 책.
어쩌면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나이 없이 살면서, 어떤 이례적인 순간들에만 나이를 의식하는 것이리라.-p10-
은희경의 <새의 선물>의 주인공 진희는 두 개의 자아를 구분하여 말하는데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가 그것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자아란 '바라보는 나'로서의 '나' 일 텐데, 실제로 우리는 세상에 '보여지는 나'가 곧 자아의 '나' 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건 아닐까?
33살이라는 나이와 남자라는 성별은 너무도 분명한 사실. 내 안의 또 어떤 자아가 있어서 진실의 '나'가 사실은 여자, 혹은 인간 이외의 것이라 믿는다 해도 달라지지 않는 불변의 것.
그 불변의 사실이라는 게 어찌 생각해본다면 세상에 '보여지는 나' 인 것은 아닌 건가...
자아니 정체정이니 ... 찾으려고 애쓴다만 결국 세상에서 '바라보는 나'를 '나'로 알고 있을 뿐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내가 결국은 타인의 시선에 의한 모습이라 생가하니 섬득할 뿐이다.
세상이 원하는 방향으로 최선을 향해 내닫으면, '내가 원해서..'라 믿고 그게 내 정체성을 찾는 것이란 믿음이 굳어지고... 힘겹게 나를 소진해서 내 자아를 찾아간 곳에 다른 모든 사람이 모여든다.
나는 자유의지로 행동하나 결국은 상식적인 수준의 행동을 한다.
자유로운 내 사고의 결과가 결국은 상식이라니...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아녜스가 괴로워하는 이유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모두 같은 양식의 삶과 상식적 수준의 사고를 한다. <불멸>165페이지에서 이를 이렇게 이야기한다.-사람은 많되 몸짓은 별로 없다.-
그야말로 나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아닐 수 없다.
또 다른 문장
"우리 이미지란 단순한 겉모습일 뿐이고, 그 뒤에 세상 시선과는 무관한 우리 자아의 실체가 숨어 있을 거라고 믿는 건 천진한 환상이야.~...."-p195-, 3부 -투쟁-
어쩐 일인지 이 이율배반적인 이야기들에 나는 공감할 수 밖에 없었다. 존재의 가벼움에 의한 야녜스의 슬픔도 유일한 실재는 바로 타인의 눈에 포착된 나의 이미지라 하는 이야기도 모두 수긍할 수 밖에 없는 나는 또 어떤 존재인걸까. 그럴 듯한 이야기에 매번 휘딱 넘어가서 좌절하고 기뻐하는 나란 존재에 대해 생각하는 순간, 나는 나의 실재를 느낄 수가 있었다. 슬프고 외롭더라도 나를 마주하게 되는 순간이있어서 나를 느낀다. 하지만 나를 덜 느끼더라도 나는 좀 더 따뜻하고 즐거웠으면 좋겠어... 돼지처럼 인형처럼...
결국엔 그 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사는 게 인생일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새의 선물>의 주인공 '진희'는 여섯 살에 어떻게 그런 이치를 깨달았는지.... 부러울 따름이다.
'바라보는 나'가 '바로 나'라는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만, "보여지는 나'를 무시할 수도 없겠지. 나는 불멸에 대한 의지가 부족한 인간이랄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