뻥 뚫린 고속도로를 달리는 시외버스의 좌석수는 언제부터인지 열당 하나가 줄어서 넓고 쾌적해졌는데 그때문인지 아니면 좋아진 교툥상황 덕분인지 휴게소 정차가 줄어든 듯하여 여간 아쉽지 않았다. 다른 어떤이는 목적지에 더 빨리 갈 수있어 좋다, 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여행을 시작하는 길이어서 휴게소의 공기마저도 여행의 기대였기 때문이다. 찌뿌드한 몸을 사방육방으로으로 뻗으며 휴게소 화장실을 찾고, 뭐 맛있는 거 없나 살피는 여행객의 모습을 그리면서...
휴게소의 통감자는 계획이랄 것도 없는 당연한 먹거리였고 그 작은 몇 알 감자에 배가 불러 매번 맛도 못보는 핫바며 오징어 따위의 군것질 거리는 눈으로 코로 먹을 참이었다.
삼등삼등 달리는 내 마음은 차창 밖 휴게소에 자꾸 눈길이 가는데 씽씽~ 최신형 버스는 별로 쉴 필요가 없었는지 휴게소란 휴게소는 다 지나쳐간다.

야간 버스라 고속도로에 간간히 나타나는 휴게소의 불빛은 더욱 화려했다.
남부터미널에서 진주까지 세시간 삽십분. 통영가는 마지막 버스를 놓친 우리는 통영에서 멀지 않않은 진주행 마지막 차를 가까스로 탔다.

"형님, 어쩐지 진짜 모험을 떠나는 기분인걸요"

신나하는 종률이는 동행이다. 예정에 없던 하지만 이제는 영락없이 짝궁이 된 종률이는 마냥 들떠있었다. 혼자가는 여행이라며 일정이며 장비, 또 마음 준비도 단단히 했었는데 어쩐지 김빠지는 내마음을 종률이 너는 모를테지,.

여튼 여행은 시작 되었고 우리는 여행을 가는 길이다.
종률이가 매고있는 배낭은 내 것이었고 그 안에 장비도 침낭을 빼곤 다 내 것이었다. 내가 매고 있는 100리터자리 대형 배낭에는 텐트며 그외 잡다한 장비가 들어있었는데 그것도 처음 비박(야영)을 가는 종률이를 위한 짐이었다. 종률이로 인해 짐이 많아졌지만 그보다 종률이가 내게 짐이었다.
하지만 후회는 한 번이면 족하고 이제는 그저 즐거울 방법밖에 도리가 없으니 즐겁게즐겁게... 뭐 적적하지 않아 좋기도 했으니 특별한 짐인 종률이와 함께하는 여행이 싫었던 것만은 아니고다.

 

진주에 도착한 건 세벽 세시경이었는데 통영으로 점프하려는 우리는 찬 대합실에서 일곱시까지 기다려야 했다. 와~ 형님. 진짜 대박인데요. 처음부터 아주 지대로 여행이네요 형님!,
뭐가그리 신났는지 자다깨자마자 이런 시골은 처음이라는 둥, 모험모험, 타령을 해가며 제대로 신이난 종률이 덕에 나도 덩달아 설레는 마음이 들었다.

대합실 구석에서 우동 김밥에 소주를 한 병 나눠 마시곤 버스를 기다리다 지쳐갈 즈음,

"형님 누구 찍을거에요?" 대뜸 묻는 표정이 식어가는 대화를 잇기 위한 노력이라고 생각되서 나도기분 좋게 응 문제인!, 하고 응수를 했다.
나는 종률이가 박근혜지지자라는 걸 알지 못했고 종률이는 내가 문제인을 지지하리라 생각을 못했었다. 서로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기에 빚어낸 오해였던 것이다.
종률이와 나는 대합실에서 서로 감정이 상할만큼 싸웠다.
보통 정치색이 완전히 다르면 내 주장을 개진하지 않는데 그날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먼저 물어본 건 종률이였지만 박는혜를 찍으면 안된다고 설득을 시작한 건 나였다.
덕분에 지리하기만 했던 진주의 새벽 시간은 잘도 갔다만,,,


평행선을 달리던 우리의 마음은 통영행 버스를 타기 직전에 만날 수 있었는데 앞으로 이틀은 우리 둘 뿐이라는 현실적 이유로 우리는 화해를 했지 싶다.
버스에서 내가 듣던 팟 캐스트를 잠시 들었던 종률이가 내게 그딴 거 몇번 듣고 뭐 아는 줄 안다, 했던 일이며, 나는 종률이에게 강남에 아쉬운 거 없이 사는 게 다 네 덕이고 네 부모의 노력만으로 이뤄진 게 아니라느 걸 알아야한다, 훈계를 했던 모습은 아마도 서로 잊지 못하겠지만, 어쩌나 우리는 이제 또 여행을 떠나야 하는 걸.

 

통영에서 연화도로 가는 배 안에서도 마음이 안맞아 싸울 때는 확 밀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짜증도 났지만 지나고 보니 다 추억이 되어 내 통영 여행의 불청객은 기억속에서 단짝으로 변해있었다.

참, 종률이 그자식이 노무현 욕할 때는 개새끼가 죽을래, 하고 진짜로 욕이 나올뻔도 했었는데...ㅋㅋ     

 

그 싸가지 없는 놈 추울까봐 뜨끈한 국물, 커피 쉬지 않고 끓여 내어 마시라하고 편하게 자라며 텐트까지 독채로 내준 건 나 믿고 험한 길 따라나선 친구에게 좋은 추억을 남겨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밤하늘의 별들이 선명하다, 그날 분명히 그랬었고 지금 내 기억에서도 그렇다.

코고는 소리가 나는 텐트를 쳐다보면서 그래도 같이 있어서 좋구나 생각을 했었다.

종률이 너도 좋아? 그래?, 대답할 리 없는 텐트에 대고 조용히 물어보지만 작은 섬을 휘감는 바람 소리에 내 목소리가 내게도 들리지 않았다. 잠이 안와도 밤새 별을 보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못하는 그날 나는 속수무책으로 해 뜨기만을 기다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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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좋아 2012-12-29 0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쓰다가 아내님이랑 술 한잔 하는 중...ㅋ
 

'오 년 후에는 과연 바른 판결이 나올 수 있을까?'
국민투표라는 최선의 방법으로 최악의 선택을 한 국민 배심원단의 판결에 어쩔 도리없이 승복은 하지만 상실감을 넘어선 절망의 감정이 마음 속에 생긴 건 이번 선거의 휴유증이다.
박근혜 개인의 역량 부족, 역사 인식 부재의 정치인, 뭐 이저런 문제로 그이는 대통령에 적임하지 못하다, 말들을 하고 나도 동의하지만 그보다 안타까운 건 이번 선거는 유신잔당에 대한 역사적 책임을 물었어야 하는 선거였기 때문이다.

어떻게 얻어낸 직선제인데 그 권리로 유신 군사정권에게 무죄 판결을 내릴 수 있단 말인가.(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유신 잔당에 대한 준엄한 심판이 뒤늦게라도 이루어지리라 믿었다)
조용하지만 단호한 심판을 기대했었다.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박근혜지지자들의 입장을 이해해주려는 여유도 있었다.

답답하다.

 

 

장인어른의 안동 사람은 누구 찍었나?, 묻는 표정엔 당연히 당신 사위가 상식적인 선택을 했으리라는 믿음의 편안함이 배어있었다. 피하고 싶었지만 거짓말을 할 수는 없어서 문재인 찍었습니다, 대답을 했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장인어른은 불편한 기색을 굳이 감추지 않는다.

나는 죄 없이 죄인이 되어 시선을 아래로 내리었다.

충격 받은 장인어른을 대신해 티비를 보던 장모님이 혼잣말로 몰라서 그래,... 하며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낸다.

나는 마음 속으로 '어른들도 모르세요.' 하고 생각을 한다.

 

속내를 안비치는 조용하고 참한 사위의 본적지가 경북 안동이라는 이유로 최소한의 상식은 있을 거라 생각하셨는데 사위의 커밍아웃은 적잖은 충격이셨나보다.
썰렁해진 분위기 속에 티비 프로그램에 집중을 못하시고 육이오 얘기, 일제시대 얘기가 자꾸 이어진다.

그분들은 온 몸으로 체득한 경험에 의한 결정이었고 나는 학습에 의한 판단이었다.

안타까움은 두 어른의 진심이었다. 안타깝게도...

진정으로 걱정하는 마음 앞에서 나는 발언권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설혹 어른들이 잘못 알고 있고,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 한치의 오류도 없는 진실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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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곰 2012-12-28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랬는데,앞으로 5년은 그 분들께도 뭔가 다르게 설명할 수 있는 방법들이 있지 않을까요? 선거 끝나고는 후회했어요.... 저희 엄마한테도 열내면서 "각자 알아서 찍읍시다"하지 말껄. 잘~ 말씀드려볼껄...하는 후회요.

차좋아 2012-12-28 22:42   좋아요 0 | URL
저를 설득 아니 계몽하고 싶은 제 엄마는 (좋은 말로할 때)박근혜 찍어라~, 협박을 하셨거든요. 엄만 엄마 찍고 싶은 사람찍고 난 내 찍고 싶은 사람 찍으면 돼~, 하고 대답 했었어요 저도...
 

나보다 오래 된 진공관 엠프를 소유하게 되었다. 내겐, 이것 말고도 나보다 오래 된 물건들이 꽤나 많은데 그런 오래된 물건을 갖게 되면 처음엔 좋다가도 차츰 부담스럽다는 생각이 들곤 해서 소위 골동이라는 걸 좋아하지는 않지만, 굳이 들어오는 물건을 막을 결기는 없는 것이어서 또 하나의 골동품을 소장하게 되었다. 

빨간 불빛 은밀히 밝히는 음악소리가 저 부황기를 통해 나온다 이거지, 진공관 트렌지스터 직접회로 초집적회로...... 어렸을 적 배운 진공관이라는 게 저거란 말이지, 꼭 부황기 같은 걸,

차가운 디지탈 음악이라고들 하던데 그럼 저 진공관을 통한 음악은 따듯하다는 소리잖아, 무엇이 따듯하다는 건지 나는 잘 모르지만, 잡히지 않는 표현하기엔 아직 어색한 어떤 온기가 느껴지기는 해, 근데 웃기는건 음원은 아직 디지털 음원이라는거지. 결국 소리의 영향이라기 보단 눈에 속고 있는셈인게지, 게다가 난 청음력도 좋지 않거든.

 

잠 안오게 하는 물건 또하나 가지게 됐는데 지금은 본래의 목적보다는 그저 관심의 대상이라 한참을 구역하고 희안하네, 허허

주인을 잘 찾아 온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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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라도 쓰고 자야겠다.

퇴근 후, 아니 두번 째 퇴근 후 둘째 아이의 생일 케잌을 들고 집에 도착하니 열시 삽십분. 낮엔 은행에서 경비를 서고 저녁엔 스포츠센터에서 일를 하는 투잡 생활도 어느 정도 몸에 익어 체력적인 피곤함을 호소하고자 하는 건 아닌데, 절대적 근로시간 과다로 인한 정신적 피로의 영향은 체력적 문제보다 상위의 것인지 결국 체력저하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는다.
원인은 마음의 문제이지만 그 결과로 인해 몸이 견디지 못하는 상황에서 선택한 해법은 아이러니하게도 또 다른 노동인데 늦은 시간 집에와 피곤한 몸을 이불 속에 뉘이는 것이 아니라 차를 마시고, 음악을 듣고, 책을 읽어서 짧은 수면시간을 쪼개는 것. 이 방법은 매우 효과가 있어서 다소의 부작용을 감수하고서라도 나는 매일 자정이 훌적 넘은 시간까지 차를 다리고, 음악을 듣고, 책을 보는 생활을 한다. 
가뜩이나 부족한 수면 시간이 더 줄어든다는 이야기인데 자가처방에 의한 물리치료 때문에 하루평균 수면 시간이 반토막으로 줄어드는 것은 실제적인 부담이 아닐수 없으나, 그러지 않고서는 단단치 못한 마음이 버티기엔 버거운 피로가 쌓이니 나도 어쩔 수가 없는 생활, 패턴인 것이다..
그러면 주말엔 휴식을 취하는 가, 또 그렇지도 않은 게, 주말만 되면 어디서 기운이 솟는지 산행은 기본에 비박은 옵션, 바위는 진이 빠지도록 기어오르니 개체력이라는 말을 듣고도 스스로 응, 하고 인정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예를 들면, 지난 주 일요일에는 여의도에서 마라톤 대회를 참가했었는데 4시간 21분 기록으로 완주를 하고 바로 북한산에 올라가 절친한 스님을 만나 차를 마시고 노닥거리다가 흥에겨워 결국 불광동에서 심야에 임박한 영화마저 한 편 때리고 심야버스를 갈아타고 갈아타 새벽 두시에 상계동 집에 귀가, 두어시간 수면 후 다시 한주를 맞이하는 체력왕다운 면모를 보이기도 할 정도이다.

하지만 실상은 얼굴이 검어지고 검어진 얼굴보다 더 검은 눈아래 그림자가 점점 영역를 넓혀가는 걸 보면 분명 몸이 부담스러워 하는구나, 인식은 하지만 그래도 어쩌나 마음이 지배하는 몸인지라 그래도 기분이 좋아, 살고 있는 거 같아, 그렇지 않아 몸아, 이렇게 말하는 걸.
알라딘은 또 하나의 처방전이다. 조금 더 피로해진다 하더라도 나는 잘 들어주는 이들이 있는 이곳에 내 이야기를 하러 올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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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12-12-07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근 어떻게 하실려고..
이렇게 안자니까 검어지는 거예요..
일터를 어디 옮기셨나봐요. 에구 힘들어 보여요.
요즘 다들 그렇지만.

차좋아 2012-12-07 10:27   좋아요 0 | URL
뭐 가끔은 지각도 하긴 하는데 별 탈없이 잘 해요.남들처럼....
생각해보면 항상 그랬지 싶어요. 늘 많이 움직이고 적게잤거든요. ㅋ
일터...... 만 사년 일하고 있어요. 휘모리님 알게된 그즈음부터요. 챙피해서 부러 얘기하지 않고 그러다보니 오해를 방치하는 미필적고의 수준의거짓으로 발전하고 나중엔 자발적으로 거짓말을 하게 되더라고요. 병신이라...
얘기라자면 아주 긴데 다 들어주세요 기회가 되면 ㅎㅎ
스포츠센터는 최근에 팔월부터 구했어요. ㅋ 아주 재밌어요. 오전일과는 다르게 ㅎㅎ 저녁일도 사실은 피로를 푸는 여러방법 중 하나.
 

#일요일 오후2시
"다산아 노올자~", "엄다산!", "엄.다.사안,"

누가 부르나, 음 정우녀석 또 왔나보네.
아 시끄러워. 언제까지 부를래?, 지치지도 않냐 동네 챙피해서 원, 저 놈이 도대체 몇 분째야 영 신경 쓰이는 걸... 산이 외가 갔다 임마, 적당히 부르고 그냥 가라.
추운 거리에서 정우는 산이를 찾고 오랜만에 홀로 차를 마시는 나는 오롯한 여유를 지키기 위해 정우야 빨리가라, 속주문을 왼다.
참, 정우가 지난번엔 저러다가 대문 앞에서 엉엉 울었다지, 오늘도 우는 거 아닌가 몰라, 나가봐야하나. 에이, 금방 가겠지 뭐,
이제 좀 조용하네. 꼬마가 안 됐어 주말인데 돌봐주는 사람이 없나?

어어 저 녀석 봐라, 조용하다 했더니... 혼 좀 나야겠어, 어디까지 들어오나 보자.

"누구야!"
은밀한 방법으로 대문을 따고 마당을 질러 열려있는 현관에까지 들어온 침입자에게 고함을 질렀다. 소리는 밀폐된 실내의 대류를 타고 사방으로 퍼지다 침입자의 귀로 흘러들어 갔으리라. 기척이 멈춘다. 대답은 없었다. 허나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내가 원한 것은 정우의 목소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침입자는 보이지 않는 곳, 미지에서의 고함소리에 놀라 멈춘 듯 했고 일층과 이층, 도둑과 주인은 서로 숨을 죽인다.
만나러 갈 시간이다.
"흠!" 헛기침을 하곤 차자리에서 일어나 아랫층 계단으로 향했다. 어린 꼬마가 혹 놀라진 않았을까? 아냐, 혼 날만 해. 일 층으로 내려가는 짧은 시간, 비겁한 천둥에 놀랐을 어린 침입자를 용서해주마, 마음을 먹는다. 보이지 않는 포승으로 결박된 꼬마 칩입자는 어린 두 눈을 꿈뻑거리며 관대한 처분을 바라며 심판자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이제 계단을 돌면 정우가 보일 것이다. 스스로의 관용에 만족스러움을 느끼며 다소 누그러진 목소리로 대답없는 칩입자에게 묻는다.
"누구냐니까,"
"실례합니다. 다산이 친군데요"
실례,실례라고! 일곱 살 꼬마가 몰래 들어와선 실례한다고? 저 녀석이 일곱 살 맞나. 도둑 고양이 같은 녀석, 이 집의 주인은 나고 너는 무단 침입을 했다. 이 집에서 지금 당당할 수 있는 권리는 오직 나에게 있는 것이란 말이다. 건방진 놈. 대문 따는 건 어떻게 알아낸건지...보마마나 산이가 알려줬겠지. 산이에게도 분명히 말을 해야겠어,
이윽고 그 녀석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이르러 나는 침입자 꼬마에게 다시 성난 소리를 냈다.
"누군데 허락도 없이 남의 집에 들어오느냐,"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유리창을 등지고 있는 내 얼굴이 안 보일 게 분명한데 그 정우란 녀석은 고개를 빳빳이 치키고 가만히 내 얼굴을 살피며,
"다산이 친군데요. 다산이가 없어서 들어왔어요." 라고 자못 침착하게 대답을 한다. 예상했던 상황이 아니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다산이 친구면 친구지 왜 남의 집에 허락도 없이 들어왔냐고 묻고 있다."
간댕이가 붓다 못해 배 밖으로 튀어나온 꼬마라는 건 진즉 알고 있었지만 이 상황에서도 내 얼굴, 어쩌면 표정을 읽으려는 정우를 보자 이번엔 진짜로 부아가 치밀었다. 더이상의 화는 계획에 없는 것이었다, '화'는 의지의 감정이 아니다. 그러니까 진짜 화가 나려는 참이었다. 이를 어째, 상대는 일곱살 어린애, 게다가 내 아들이 초등학교에서 사귄 첫번째 친구였다.
진정하자 진정, 어른 답게... 아니아니 어른이니까...,
실례를 사과의 의미로 말한 것이라면, 정우로서는 더이상 할 말이 없는 것이었다. 나는 아이에게 같은 질문만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으니 상황을 정리하는 수 밖에 없었다..
"다산이는 외가에 갔으니 다음에 놀러오거라", " 인사하고 가야지! 다시 들어와", " 주인 없는 집에 함부러 들어오면 혼나는 거다."
인사를 하기 위해 되들어 온 정우가 꾸벅 고개를 숙이다 생각났다는 듯, 손안의 작은 상자를 내미며 "이거 레고인데요 산이랑 같이 가지고 놀려고 샀어요, 안녕히계세요."

꼬마는 총총 계단을 내려서 대문을 쾅 닫고는 잠시 망설이더니 골목을 돌아 한길로 나가 금새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정우... 정우녀석 대체 어디로 가는 것일까,
절대 기죽지 않는 괴물 같은 놈에게 애써 의연한 척, 어른 흉내를 내었더니 기운이 빠진다.
애초에 상대가 되질 않는 걸 알면서도 하, 괘씸하고 약이 올라 혼 한번 내주려는 나의 시도는 무위에 그치고 말았다.
천방지축 정우, 거리의 아이, 힘이 없을 뿐 세상이 두렵지 않은 도시의 고양이.
눈치 빠른 정우가 다산이 아빠 따위 무서워 할 리 없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에이 씨, 뭐 이런 날이 있지.

#정우

쳇, 집에 있으면서 대답도 안하고 가만히 있을 건 뭐람, 이상한 아저씨라니까... 저런 사람이 다산이 아빠라니 불쌍한 다산이, 다산이처럼 착한 아이에게도 불행은 있는건가? 역시 하나님은 공평하셔, 그건 그렇고, 이거 생각할수록 분한 걸. 그것봐 누군가 있을 줄 알았다니깐, 아저씨 말고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할머니, 고모, 다산이 집 식구들 다 좋은데 저 아저씬 정말 마음에 안 들어, 다산이 아빠만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어, 오늘은 정말 재수가 없는 날이지 뭐야. 이제 어디가서 뭐 하고 놀지.
그나저나 다산이는 외가에 자주가네, 다산이 외할아버지는 좋은 차도 타고 다니고 부자 같던데 매번 새로운 장난감을 사주는 걸 보면 부자인 게 분명해. 다산이는 좋겠다. 아 다시 생각하니 좀 불공평 한 거 같아. 쳇,,
배가 고픈 걸, 누나가 시키는 대로 짜장면이나 사 먹을 걸 그랬나? 이 장난감으로 다산이랑 놀고 밥은 다산이네서 해결하려던 계획은 물 건너 갔고, 어쩌면 좋을까. 도저히 배가 고파 안되겠어 장난감도 갖고 싶지만 오늘은 도로 물러야지. 쳇, 문방구 아저씨 얼굴을 또 봐야 하다니...... 오늘은 정말.


#다산
"산아 대문 여는 방법 친구들 한테 함부러 알려주면 안되는 거야, 아무도 없는데 산이 친구가 몰래 들어왔어, 오늘."
"정우?"
"산아, 식구들끼리만 아는 건 친구한테도 함부로 알려주면 안 돼, 정우 걔가 말이지 허락도 없이 집에 막 들어오지 뭐야, 마침 아빠가 집에 있어서 알게 됐는데 좀 걱정스럽더라. 정우 이 동네 친구들이랑 같이 돌아다니는데 아무도 없는 집에 친구들 다 데리고 들어 오면 안 되잖아."
낮에 정우가 우리 집에 들어왔다가 아빠한테 걸려서 혼이 난 모양이구나, 정우한테 외가 간다고 미리 말을 할 걸 미안해서 어쩌지... 아빠는 왜 정우를 미워하는 걸까, 정우도 참, 왜 허락 없이 들어온거야.
"...... 산아~ 아빠 말 듣고 있니? 아빠가 정우한테 다음에 놀러오라고 말했어. 그런데 대문 여는 방법은..."
"나 아냐, 나 아니라구. 다야가 알려준 거야!"

"......"


#아내와의 대화
자기야, 낮에 차 마시고 있는데 정우가 놀러왔었어. 다산아 놀자, 놀자, 부르는데 피곤하고 귀찮고... 제 풀에 지쳐 가려거니 없는 척 가만히 있었지. 근데 이놈이 대문을 따고 들어오지 뭐야, 현관이 열려있었는지 집 안까지 들어와서 기웃거리길래 따끔하게 혼내줬지, 근데 그녀석 기가 얼마나 센지 내가 다 떨리더라고...
알아, 안무서워 한다는 거. 근데 이번엔 좀 무섭지 않았을까?
전혀라고!, 아냐 이번엔 진짜 무서웠다니까. 에이, 정우 그녀석 왜 이렇게 신경 쓰이는 거야. 근데 산이는 정우 좋아해? 그렇겠지, 친구... 좋지 친구. 정우 그애 공부는 좀 잘하나, 그치 아직 일학년인데...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거지,
근데 글세, 산이가 그러는데 다야가 대문 여는 걸 알려줬다더라고 괜히 산이한테 잔소리를 했지 뭐야. 엄다야 이녀석 누굴 닮았는지, 뭐? 자기는 알고 있었다고, 아냐 걱정은 무슨, 정우를 의심하는게 아니라... 그래도 조심하자는 말이지.

뭐! 다야가 정우를 좋아한다고? 그럴리가, 진짜라구? 아니 여섯 살짜리가 무슨, 하하 귀엽긴 한데.. 정우는 싫어!, 정우는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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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12-05 0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소설인가요?

차좋아 2012-12-05 09:10   좋아요 0 | URL
네 소설이라고 쓴거에요. 뭐 소설이 사실이 아닌 건아니지만... 소설이랍시고 쓴거 맞아요. 오랜만에 서재와서 신나서 그만 ㅋ

무해한모리군 2012-12-05 0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우가 산이를 부르는 목소리를 생각하니 귀엽고 정겨운데요?
참 아이를 키우는건 백만가지 고민이 드는 일이군요.
여섯살 다야는 정우 오빠가 좋군요.
다음번에 다야가 좋아하는 사람은 차좋아님 마음에 들기를 기원해요 ㅋㄷㅋㄷ

차좋아 2012-12-05 09:14   좋아요 0 | URL
아 직접 들으면 미치는데 ㅋㅋㅋ
정우 걔 글보다 훨씬 와일드해요. 다야의 '야' 자가 들 야, 네요 ㅋㅋ 둘을 상상에서 엮은 게 현실이 되지 않길 바라긴 합니다 ㅋㅋㅋ 뭐 알 수 없는 미래지요.
정우가 매력있는 캐릭터라 제가 좀 관찰하는 중이에요. ㅎㅎ

치니 2012-12-05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오랜만! 잘 지내셨어요?
다산이 숫기 없어 걱정하시던 게 엊그제인 거 같은데, 학교가서 친구도 사귀고! 다 컸네요 ~ ㅎㅎ

차좋아 2012-12-05 14:20   좋아요 0 | URL
와- ㅎㅎ저는 열심히 지냈어요. 그래서 잘 지내지 않았나 싶을정도로.
치니님 제주 가시기 전에 한번 더 못 본 거 좀 아쉬웠어요
제주는 잘 있나요?ㅎㅎ
다산이도 여전해요. 부끄럽고 생각많고 ㅋㅋ
그래도 좀 컸는지 자기 의사표현은 좀 하려고 노력하더라고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