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김숨의 책을 읽고 리뷰를 썼다.
어제 출근 길에 가방에 있는 책을 꺼내 보니 김숨의 <간과 쓸개>. 어쩔 수 없이 또 읽었다. 멀뚱히 서 있으면 뭐해, 이거라도 있으니 다행이다, 생각하면서 읽었다.
오늘, 헐레벌떡 지하철에 오르고 생각이 났다. 가방에 김숨의 책이 있겠구나, 아니 김숨의 <간과 쓸개>밖에 없구나, 한숨이 나왔다 뭐랄까, 어젯밤 갈아타야 할 곳을 한참이나 지나쳐버린 다음의 마음과 비슷했다. 화나지만 하소연 할데 없는 상황, 성형외과 광고물을 한참 보다가 <간과 쓸개>를 또 읽었다.
김숨... 이름만 들어도 한숨이 나올 거 같다. 김숨이 잘못한 건 아니다. 그래도 한숨이 나오는 건 김숨 때문이다. 지난 한 주 김숨의 글을 집중적으로 읽은 나는 김숨의 글이 얼마나 심난한지 많은 사람에게 알려주고 싶다.
"김숨 책 읽어 봐, 한 번 읽어봐봐 응?"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김숨 때문이라 했지, 김숨의 잘못은 분명, 당연히 아니다.)
-사막여우 우리 앞으로-
예전에 읽은 단편 소설을 작가의 작품집을 통해 다시 만나는 건 매우 기쁜 일이다. 이번에도 그랬다. 기쁘고 반가웠다. 하지만,, 소설은 난해했고 그 소설을 읽은 나는 매우 불쾌했다. 기쁜 마음으로 읽고 불쾌했단 말이다. 4년 전 읽은 -사막여우 우리 앞으로- 시간은 흘렀지만 너무 인상적이었던 소설이라 세세히 기억이 되살아 났다. 그래서 더 고역이었다. 난 책을 앞에서 부터 차례대로 읽는다. -사막여우 우리 앞으로-는 작품집의 세 번째 단편이었다 네 번째 소설 앞에 있기 때문에 두 번째 소설을 읽고 바로 -사막여우 우리 앞으로-를 읽게 되었다.
무슨 마음으로 이런 이야기를 쓴 걸까?? 도통 짐작이 안간다. 김숨의 이야기 대부분이 그렇다. 고요하면서 그로테스크하다.
동료 작가인 하성란이 말한다.
-이변이 없는 한 앞으로도 김숨은 가만히 있을 것이다. 가만히 가만히 속의 모래들도 이쪽으로 저쪽으로 옮겨 다닐 것이다. 그는 아무래도 광물성이다. 외계를 내계로 끌어들이는 광물. 외계를 압축해 내계에 기록한다.
가만히 있는 사람들에게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어느 순간 그것들이 제스스로 풀어놓는 이야기들이 있다. 밤나무 숲을 지나 펼쳐진 저수지 앞에 앉아 검은 물빛을 응시하고 있는 인물이 보인다. 김숨이다. 김숨은 끊임없이 이야기들을 건져 올릴 것이다.-
숨을 멈추고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렇게 보이는 것 일까? 가만히 세상을 주시하면 그간 몰랐던 움직임을 느낄 수 있는 것 일까? 하필이면 하성란이다. 그들의 눈에 보이는 그것이 궁금하지만 알고도 싶지만 두렵기도 하다.
가만히 있는데 김숨의 이야기가 다가오면, 가만히 가만히 들어봐야겠다. 가만히 듣기엔 좀 무섭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