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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으로의 긴 여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9
유진 오닐 지음, 민승남 옮김 / 민음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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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오닐이라는 미국의 극작가를 나는 몰랐었다. 퓰리처상을 네 번이나 받았고(홈어드밴티지?) 노벨상(국력에 힘입어?...퍽!)까지 받은 극작가. 나는 희극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서 과연 이 책을 수월히 읽어낼까, 부담스런 마음으로 읽기 시작.  

희극이나 소설이나 사람 사는 이야기 다를 바 없는 거 알지만, 어쩐지 극작품엔 몰입이 안 된다. 익숙하지 않아서겠지... `밤으로의 긴 여로` 극작품이다. 선입견으로 인한 부담을 덜고자 날림으로 읽기 시작했다.
디테일한 배경은 뭉개버리고 지문은 훌쩍 넘어 대화(스토리)에만 집중했다. 먼저 읽어둔 책 말미의 소개글이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밤으로의 긴 여로`라는 유진 오닐의 대표작을 읽으면서 나는 유진 오닐을 만날 수 있었다(희곡 낯설다며 느닷없다)

희곡에 대한 선입견은 그랬었고, 이 책 `밤으로의 긴 여로`에 나는 흠뻑 빠져 읽고 또 읽었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극은 하루 동안의 긴 대화이다. 어느 가족의 하루 동안의 이야기. 그날의 대화는 여느 날과 달랐다. 주인공들은 거실과 주방에서 서로에 대한 감정과 자신의 상처를 드러낸다. 하루 동안의 에피소드이지만 그날의 대화에 과거가 담겨 있고 미래가 그려져 있었다.
나는 그 대화를 읽었는데 어느 순간 생생히 들리는 듯했다. 희미했던 인물들이 살아나고 복색과 표정이 뚜렷해진다. 거실의 등의 노란 불빛이 주위를 밝히고 탁자 위의 위스키 향이 코끝을 스친다. 인물들간의 갈등이 고조되어 언성이 높아짐에 책장을 넘기는 손길과 시선에 긴박함이 서린다.
책을 보면서 한 편의 연극을 보는 기분, 오랜만에 느꼈다. `잘자요 엄마`가 그랬었는데... '밤으로의 긴 여로' 연극으로 꼭 보고 싶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주 인물은 유진 오닐의 아버지(티론), 어머니(메리), 형(제이미) 그리고 유진 오닐(에드먼드). 유진 오닐 분의 에드먼드를 제외하고 모두 실제 이름이다. 에드먼드는 어려서 죽은 둘째 형의 이름이다. 이 극에선 죽은 형의 이름이 유진 오닐로 서로 바뀌어져 있다. 객관적 입장을 견지하기 위한 조치라 생각한다.  책을 읽어가면서 희극이라는 걸 잊을 정도로 빠져들어 읽은 이유는 복합적이겠지만, 역시 감정이입이다. 가정이라는 작은 사회, 네 명의 식구, 때론 한몸같이 살갑지만 사실은 다른 객체들. 책을 읽으며 머릿속에 네 명의 배우가 생겨났다.  전혀 다른 배경이고 나에겐 일어나지 않은 상황이지만, 다르지 않았다. 나의 가족과... 그리고(아마도) 세상의 모든 가족들의 마음 한켠에 있음직한 이기적 속내가 그렇다. 가족 이전에 나(사람)이므로.
이입됐었다 말했다. 누구에게? 대답은 모두에게이다. 나는 모든 등장인물을 동정했고 비웃었다.
나를 보는 듯했기 때문이다. 가슴이 시리고 아팠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내고 그 잔인함에 스스로 자책하는 그 바보 같은 모습을 관객으로서 바라보며 나는 나를 보았다. 자기미화의 욕구를 참지 못하는 스스로를 조소하고 또 그런 내가 가여워 동정하는 세상 속의 나. 내가 그 거실에 있었다.  
아픔에 서러움에 세상의 상처와 매서운 눈길에 마음이 아파 따뜻한 품을 찾아든다. 가족이다.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바깥 세상이 무섭다. 그래서 안전한 곳 가족의 품에 스며든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나 아닌 사람들에겐 서로 무장해제되어 아픈 곳을 드러낸다. 나 좀 봐줘, 아파, 안아줘... 애써 의연해질 필요 없는 분신 같은 사람. 
가족은 그렇게 위로받고 싶어 가면을 벗고 맨몸을 드러내지만 서로가 위로만 바란다면, 기대가 큰 만큼 실망과 분노는 커진다. 믿었던 만큼 실망도 큰 법일까, 분노에도 거침이 없다. 폭언과 추궁의 매서운 말의 칼날로 섭섭하고 미운 마음을 담아 휘두른다. 지금 아픈 나를, 내 맘같이 살펴주지 않는 가족에게 섭섭한 마음에 서로에게 상처의 말을 휘두른다. 서로 더 깊이...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낸 상처는 내게 자책으로 돌아온다(어쩌면 그게 목적이었을지도...). 자식들은 부끄러움에 자괴하지만 멈춰지지가 않는다. 최악의 상황에 이른 어느 가정에 희망의 빛은 없어 보인다. 남 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중산층의 유명 연극 배우의 집에서.

한때는 아름다웠던 메리, 그녀는 돌팔이 의사에게 에드먼드를 낳은 직후 산후 치료를 잘못 받아 모르핀 중독자가 되었다. 가정의 중심인 어머니의 부재는 에드먼드(오닐)에게도 큰 불행이었으리라.  

아버지 티론은 아일랜드 이민 2세로 갖은 고생을 다하다가 각고의 노력 끝에 연극배우가 되었고, 세익스피어 전문 배우가 되었으나, 결국 부富를 쫒아 통속배우가 되고 만다. 어린시절 사무친 가난에의 극복을, 배우로서 성공하여 이뤘음에도 티론의 삶은 만족스러워 보이지 않고 재물의 축적이 가난했던 어린시절의 보상이라도 되는 듯. 맹목적인 땅 사들이기를 한다. 명예와 교환된 그의 재물(땅)은 가족에게 또다른 상처로 되물림된다. 진정한 꿈을 경제적 가치와 맞바꾼 티론. 그것은 메피스토텔레스에게 영혼을 판 파우스트의 심정이었을까? 부와 명성를 얻은 배우 티론에게는 큰 상실이었나보다. 처음 티론이 자신의 진정한 꿈을 놓은 이유는 사랑하는 가족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티론은 자기의 꿈을 버리고 가족의 복락의 근원인 돈을 벌기로 작정한다. 하지만 티론은 돈은 있으나 바로 사용할 줄을 모른다. 수전노, 그럴 수밖에... 돈과 바꾼 꿈,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데 그 귀한 것과 맞바꾼 돈을 함부로 사용할 용기가 티론에겐 없다. 사랑하는... 그래서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가족에게마저도. 
  
티론과 메리의 큰 아들 제이미. 술과 여자를 좋아하는 염세주의자. 집안에 꼭 하나씩 있는 철없는 망나니 아들.  

유진 오닐 분의 에드워드. 어린 시절부터 형 제이미를 우상으로 여기고 제이미에게서 세상의 철학을 배움. 하지만 아버지를 닮아 육체적으로 강인한 제이미와는 달리 심약하고 예민한 어머니 메리를 닮은 에드워드는 방탕, 방랑한 생활을 못 이겨 폐병에 걸리고 만다.  

오직 돈으로만 과거 가난의 고통을 치유하려는 티론과 평범한 가정을 꿈꾸었으나 임신 후 돌팔이 의사에게 몰핀 처방을 받은 이후 마약 중독에 빠져 자기를 잃은 메리. 그 가정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삐뚤어진 성정의 제이미와 유약한 에드워드. 사회적으로 성공한 연극배우 가정의 내면의 상처는 치유가 힘들어 보인다. 서로를 탓하며 불행의 원인에서 자기는 벗어나려하지만 모두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 자책에서 벗어나려 마약으로 술로 여자로 냉소로...

돌이킬 수 없는 파탄 가정의 불행. 서로를 할퀴며 불행의 책임을 전가하는 모습에서 인간의 적나라한 이기심과 속된 모습에 환멸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그 바탕에 서로에 대한 사랑과 이해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이해와 용서를 담아 이 책을 썼다,는 오닐의 말이 이해가 되었다. 

아프다. 이렇게 적나라하게 사랑하는 사람의 치부를 들추는, 그렇게 해서 자기의 상처를 치유하고 가족의 사랑을 역설적으로 이야기 하려 했던 오닐의 마음이 느껴져 아팠다. 

나는, 우리 가족의 모습은... 물론 책의 배경과 소재는 내 그것과 다르다. 하지만 다르지 않았다. 나의 소중한 가족.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사랑하는 가족도 가정이라는 세상에서는 나와 유리되어 있는 존재다. 가족에게마저 네 탓을 하며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넘사스러워 말 못하는 가족간의 갈등과 미움. 그 상처를 미화 없이 드러냄으로써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오닐의 용기의 고백에 존경을 표한다.

애처로운 메리의 처절한 몸부림을 보며 가족들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버티려 안간힘을 쓰지만 결국 무너지는 메리의 의지력에 비난의 화살을 돌릴 수 있을까?
지난날 가난으로 인한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 그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스스로를 굶주림으로 몰아넣는 티론. 티론이 돈 몇 푼 아끼고자 제대로 된 의사에게 진료를 맡겼었더라면... 메리는 먀약쟁이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결국 원인은 구두쇠 티론에게 있는 것인가? 
상처로 자기를 가누기 힘든 부모 아래 성장한 또 다른 아픈 영혼 제이미와 에드워드. 이들은 자신의 상처의 근원을 자기 밖에 있다고 믿으려 한다. 가정이라는 작은 세계에서 자기를 변호하기 위해 죄책감을 벗기 위해 선택한 고통의 원인은 사랑하는 가족이다. 맞다 아버지의 인색함과 어머니의 마약중독이 아니었다면 제이미와 에드워드는 지금 겪는 고통을 몰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부모에게 불행의 화살을 돌린다 해도 불행은 해소되지 않는다. 더욱 슬프다. 죄책감에 자책하고... 원인은 너무나 많다. 얽히고 섥힌 불행의 원인들 하나하나 짚어가며 되돌릴 수 없는 불행한 과거로의 여로에 빠져들지만 되돌아 갈 수 없는 과거일 뿐,  

해결 방법은 없다. 서로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들은 가족이다.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고 인정하는 것 밖에. 그래서 가족이다. 나는 살면서 이런 상처를 보지 못했다. 피부가 벗겨지고 살과 힘줄이 헤쳐져 뼈가 드러난 상처. 어느 명의도 치료할 수 없는 사무친 병들.이런 병을 잊게 만드는 건 모르핀 뿐이다. 하지만 잠시 잊는 건 치료일 수가 없다.   

내 가족, 발가벗겨짐이 두려워 애써 왜면하는 가족의 상처, 나도 있겠지,,,  나는 오닐처럼 드러내어 울부짖을 용기가 없다. 큰 불행이 없어서일지도 모르나 희노애락의 감정을 다른 사람과 견줄 수는 없는 법이다.  

오닐의 용기, 내게 필요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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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우 2011-12-31 0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두집 살림을 하시니 여기다가도 복사해 놓습니다, ㅎㅎ>

진작 읽었으면서 이제야 답글 씁니다.

향편님, '밤으로의 긴 여로'를 참 꼼꼼하게 읽으셨군요.
그리고 가족에 대하여 매우 적실한 소감을 쓰셨습니다.

그래요, 향편님.
몸부비며 사는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동굴.
한 인간의 기본적인 정체는 그 동굴 속에서 모두 형성되지요.
동굴은 숙명입니다.
사랑과 미움, 위로와 상처, 친밀과 소외, 이해와 외면, 미움과 용서, 부끄러움과 고통.

그리고 그것들은 필경 연민으로 남겨집니다.
향편님은 짐짓 초연한듯 말씀하시지만, 뉘에게나 그런 연민 없지 않을겝니다.

유진 오닐의 용기라고 말씀하셨지만 기실 얼마나 주저주저한 용기였을까요.
공연을 막고, 발표를 미루라는 유언까지 남겼으니.

그리하여 우리는 유진 오닐 가족사의 진실을 들여다 보고, 바로 나의 가족에 대하여 생각에 잠겨보는 시간을 얻은 것일테지요. ㅎㅎㅎ

차좋아 2011-12-31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가족사에 간련한소설에서 제 소회를 느끼는바 대로 적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아직 어린 이제 가정을 이룬 젋은 제가 느끼는 감정이 미숙할까 두려웠고 그 솔직이 덜 여문 인격에 근거함이라면 동우님 보시기에 너무나 어려 보일까 걱정이 되었거든요.
그런 생각끝에 오히려 좀 당당히 써 보자 해서 쓴 독후감이었어요.
나중에 동우님 글 읽으면서 좀 놀라기도 했고, 미리 알았더라면 더 조심히 썼을 것 같아요.

참. 동우님이 지난 제 글에 덧글 달아주셨잖아요 그 거에 대한 답글, 제가 덧글을 비밀글로 올렸더라고요.... 바보 같이. 답글이 길어져서 정리좀 하고 다시 올린다는걸 깜박한 듯 싶습니다. 다시 공개로 해 놓을게요^^
 
분노의 포도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5
존 스타인벡 지음, 김승욱 옮김 / 민음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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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에 대한 선입견이 있는데 서사의 지루함과 현실감 없는 연극조의 대화가 그것이다.
<분노의 포도>를 읽기 전, 나는 지레 겁을 먹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걱정했던 류의 어려움은 없이 책을 읽었다. 
존 스타인백의 <분노의 포도>는 1930년대의 이야기임에도 지금의 현실과 너무나 흡사한 상황과 모습들이 펼쳐진다. 어느 미국인 가족의 생활기는 때와 곳을 달리한 나에게 너무나 생생하게 느껴졌다. 인물들간의 대화도 현실의 내가 말함직한 직설화법이었고 생활언어였다. 분량이 만만치 않았지만 수월수월 읽을 수 있었다. 간혹 띄엄띄엄 읽기도 했다. 행간의 의미를 파악하려 애쓸 것이 없는 너무나 현실적인 문장들이었다. 이야기하는 그대로 사실이었음이 분명한 한 인간의 살아가는 모습, 가족의 생존기.

대공황 시절의 미국 농촌은 그렇게 피폐했었고 사람들은 잔인하게 가난했었구나. 들어서 알고 있다, 보릿고개가 어땠으며 육이오가 얼마나 비참했었는지.
배워서 알고 있는 이야기들. 인간성 상실의 시대, 자본에 의한 인간의 도구화로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품위와 예의를 잃는 상황들. 
자본에 의해 땅을 빼앗긴 사람들. 자연에 의지해서 이웃과 조화하며 살던 아메리카 땅의 농부들은 일거리를 찾아 온 식구가 트럭을 타고 대륙을 횡단한다. 동부에서 서부로 66번 국도 따라 '고 웨스트'. 금광이 발견된 그 땅에 일자리도 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캘리포니아. 자본과 기업에 땅을 빼앗긴 동부의 사람들이 노숙을 해가며 광야를 건넌다.    
광야를 건너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스러진다. 하지만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은 살 수 있다는 희망으로 서부로 간다.
소박하지만 절실한 욕심. 생존에의 욕구는 동물적이었다. 동물은 단순하다. 살고 싶어하고 죽기 싫어한다. 그게 다다. 죽지 않기 위해 동물들은 향기로운 복숭아가 열리고 영근 포도송이가 주렁주렁한 캘리포니아로 간다. 

거대한 농장은 주인이 있다. 농장은 거대해서 많은 일손이 필요했다. 수천, 수만 에이커의 땅에 복숭아가 열리면 농장주는 일손을 구해야 한다. 배고픈 사람들이 모여들고 금방 일손을 구할 수 있었다. 배고픈 사람들이 계속 농장으로 밀려오고 일당은 내려간다. 그나마도 복숭아 수확이 끝나면 다시 다른 농장으로 발걸음을 돌려야 하는 사람들은 농장주를 위한 소모품이었다. 수확을 위해 필요한 것은 기계가 아니라 인간의 섬세한 손길이었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도구는 다른 기계와 달랐다.
사용가치를 다한 인간은 아름다운 캘리포니아 땅의 노숙자였다. 농장주는 그들이 싫었고 두려웠다. 
희망이 없는 가난한 이주민들로부터 절망과 분노의 기운을 감지한 농장주는 그 웅성거림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누어 줄 것은 없다. 과실이 남아도 가격을 유지하기 위해 농장주는 계곡과 바다에 버려야 한다. 배고픈 사람들이 혹여 주워라도 먹을까 석회를 뿌리고 기름을 부어 태워버린다. 돼지도 마찬가지, 팔리지 못한 돼지는 가격안정을 위해 땅에 묻어 버린다. 오키들(오클라호마 사람), 동부의 촌놈들은 버려지는 과실과 돼지를 주워도 못 먹는다. 사 먹을래야 사 먹을 돈도 없다. 일자리가 없고 노동력이 가치가 없어진 마당에 일을 한다해도 제대로 먹기가 힘들다. 배곯은 길 위의 사람들이 분노한다. 동물에게 먹히지 못하고 썩어나는 포도들이 분노한다. 무엇때문에 태어나고 길러졌는지 모르는 돼지들이 땅에 묻히면서 대지가 분노한다.
더럽고 약한 떠돌이 농부들간의 작은 연대도 농장주들은 용납할 수 없었다. 가난한 강도들이 자기 것을 빼앗을까 전전긍긍. 두려움에 떨기는 서로 마찬가지였다. 
 
산업 자본주의의 단면, 친미 반미 양단의 관점들과 구호에 익숙한 나는 또 다른 미국의 모습을 보았다. 불과 백 년 전 모습에서 아마 지금도 그러할 것이겠지만 그곳도 자본에 의해 억압당하는 약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느 걸. 국가니, 자본이니 거창하다. 나와 같은 소심한 욕심 가진 사람들이 희노애락, 아둥바둥 살고 있는 사람 사는 땅 아메리카. 사람끼리 연대하고 이해해야 하는 것을 새삼 깨달았지만 찰나의 자각. 내일이면 나는 미국놈 욕할 테고 오늘도 일본놈 욕하고 있다.
무엇엔가 내 정신을 빼앗긴 건 아닐까. 돈과 직업, 종교와 사상 그것을 뛰어넘는 진정한 가치, 이웃 사랑과 모두 함께 따뜻하게 잘 먹고 조화롭게 사는 것. 이웃과 대지와 나무와 새들까지도...


(음... 결론이 <분노의 포도> 결말을 따라가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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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1-08-23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후레시맨 시절 영어 원서로 보다가 지루해서 때려친 작품이에요...영문과 수업시간에 다시 봤는데요...역시 지루하더고요~ 아마도 제대로 못읽어서 그런가 봅니다. 아니면 영어라는 문장에 휘둘려버렸는지도 모르겠어요.

이거 존스타인백의 작품을 흠모하는 후배에게 존스타인백의 작품은 제미 없다고 하니...어떤 작품이 재미없냐면서 열변을 토하던 그 친구가 떠오르네요..^^

차좋아 2011-08-23 23:25   좋아요 0 | URL
후레시맨 시절이라길래(오후에 덧글을 처음 읽었을 때) 후레쉬맨 티브이 플그램 하던 시절을 말한는줄 알았어요. ㅎㅎ 제 수준이 이래요 ㅋ
다시 보고 알았습니다.ㅎㅎㅎㅎ

저도 지루했어요. 여타 소설에서 느끼던 긴장감이 없으니 책 여러번 들었다 놨어요. 문장이 쉬워 술술 읽히기는 했는데 쉽게 놓게도 되더라고요. 분량이 상당하니 읽는데 오래 걸릴 밖에요.ㅎㅎ


pjy 2011-08-23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내용이 현실과 너무 정확하게 맞아들어가는게 무섭습니다-_-; 일단 결말을 제가 읽고 급! 정치권의 필독도서로 권장해드리고 싶네요

차좋아 2011-08-23 23:31   좋아요 0 | URL
일반의 정서로써 이 책을 이 이야기를 접한다면 분명 이 세상이 문제가 있구나라는걸 깨닫거나, 다시 느끼거나 할꺼에요. 분명히.
근데 그건 오키들을 전제 했을 때구요. 이미 자본의 노예가 된 자본가들 정치인들 종교 지도자들이 본다면 글세요~ 뻔한 이야기에 귀기울일 인종들이 아닐꺼에요. 그치들에게서 기대 버려야지요. 우리끼리라도 연대하고 이해하면 다행입니다.
무상급식 투표 따위, 찬반 양분되서 가난한 사람들끼리 싸우는 거 보면 속상해서... 에휴~~

동우 2011-08-24 0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

향편님.
나는 사회적 혹은 계충적 연대의식보다는 인간의 연대의식이라는 보편적인 인간성을 그린 것으로 읽히는바 있었습니다.
진부한 휴머니즘쯤으로 이 소설을 폄훼할수 있으나.
존 스타인벡이라는 작가의 다른 작품에서도.

계층은 어느 사회나 존재하는 것.
동류의식 가득한 순정한 집단 속에서도 계층은 있습니다.
인간성이란 일반화하여 집단적으로 정의하기에는 너무나 복잡하고 신비한 그 무엇입니다.
우리의 조르바가 통찰하듯 말입니다. 하하하

차좋아 2011-08-24 09:14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계층적 연대의식의 다른 표현이 집단 이기주의 일수도 있으니까요.
소수의 압제자도 어찌보면 불행한 인종들. 수억 수천억 돈을 가지고도 계량될뿐 도대체 얼마만큼인지도 모를 그 부. 그 부 때문에 외롭게 사는 사람들 보면 자본의 숙주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런 견해 또한 열등감에 의한 감상적 휴머니즘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그런 의미에서 존 스타인백의 <분노의 포도> 결말을 폄훼하지는 않아요.

다소 어쩡쩡하지만 분명한 거 보단 신뢰가 갑니다. 케이시 목사도 어정쩡...
저도 그래요.ㅋㅋㅋ
 
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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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말미의 이윤기님의 번역후기를 읽으며 나도 크레타 섬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들었다. 이윤기 선생님처럼 그곳에 가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무덤을 참배하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처음 읽었을 때도 그런 생각을 했었지...' 

나는 조르바가 되고 싶다. 조르바 처럼 살고 싶은 게 아니라 그처럼 되고 싶다. 그리스인 조르바, 자유로운 영혼의 조르바. 조르바를 흉내 낸다고 조르바처럼 살게 되는 게 아닌 것이다. 조르바는 조르바로 태어났다. 아니, 나는 조르바 처럼 살고 싶기에 조르바가 되고 싶은거다. 조르바가 되지 않으면 조르바 처럼 살 수 없으니까...
(얽힌 듯 하지만 조르바에 대한 내 관념이다.) 

내게 있어 조르바스럽다, 라는 말이 얼마나 듣기 좋은 소리인지 아시는가? 무엇 때문인지 기억 안나지만 나는 조르바스럽다,라는 이야기를 들어봤다. 여자와 남자에게서 딱 한 번씩.
그 남자와 여자는 기억도 못하겠지만, 나는 그 말을 들었던 순간의 내 기쁨을 기억한다. 그래?, 하고 무심한 채 했었지만 사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시간이 멈추었었다. 내가 조르바다웠다던 그 소리가 듣기 좋아서 말이다. 
나의 시간을 잠시 멈추었지만 나에게 조르바스럽다, 라고 이야기한 친구의 시간은 잘도 흘러갔나보다. 어떻게 조르바스러웠는지 한번 더 듣고 싶었지만 친구의 화제는 바뀌었고 나는 아쉬움 남겨둔채로 친구를 따라 본래 나의시간으로 갔었다.  
조르바는 내게 그런 인물이다. 조르바스럽다라니...

내가 아는 한 인간은 누구나 조르바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자유롭고 싶고, 쾌락을 지향하는 인간 군상들.
조르바와 다른 모든 인간의 차이점은 단 하나이다. 절제.
조르바가 무절제하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자유로운 쾌락주의자 조르바는 절제마저 자유롭게 컨트롤하는 인간이었다. 도덕과 율법, 인습과 윤리라는 이름의 절제에 구속된 다른 모든 인간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지점이 아닐 수 없다. 
국가에 대한 복종심, 신에 대한 외경, 종종간의 인습, 시대적 윤리.... 이 모든 것에서 자유로운 단하나의 인간 조르바. 자유를 지향하는 조르바에게는 단 하나의 법칙이있다. 인간에 대한 사랑(주로 측은지심에 근거하는)이 그것인데 이웃인간에 대한 사랑이 필요한 경우는 조르바는 쾌락에의 욕구도 잠시 뒷전으로 미루고 목청껏 화를 내곤 한다.

아! 의리있는 조르바.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은지 삼 년 시간이 흘렀지만, 나는 조르바의 구절구절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화개장터버전으로...) 
그 때 포스트잇을 떠덕떠덕 많이도 붙였었는데 그 책은 어디로 가버리고 이번에 새로 사서 읽게 된 <그리스인 조르바>. 독후감을 써야하니 밑줄을 좀 쳐야겠는데 너무 재밌어서 그냥 눈으로 한번 더 확인하고는 넘어가 버렸더니 기억나는 구절을 찾기가 좀 어렵다. ㅎㅎ
 
일단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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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1-07-16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르바 조르바 해서 어떤 소설인가 궁금하기에 읽은 책인데 말이죠. 저도 대감동이었죠. 직감적이고 자유로운 그의 생명!

항상 그렇게 살기를 꿈꾸지만 그러지 못하는 것이 영..속상하죠.

차좋아님이 좋아하는 것이 그런 말이었군요. 나중에 꼭 써 먹을겁니다. ㅋㅋㅋ

차좋아 2011-07-18 12:34   좋아요 0 | URL
의식 무의식적으로 저는 조르바를 조금씩 닮아가는 것 같아요.
인간이기 때문에 그런거 같아요. 조르바스러운 행동은 중요한게 아니고 마음의 문제말입니다.ㅎㅎ

나중에 써 먹는다고 하시곤 금방 써 먹으셨어요 ㅎㅎㅎㅎㅎ

동우 2011-07-23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야아, 향편님.
할 얘기 좀 있지만 내 것 다 쓰고 나서 말하리다.

차좋아 2011-07-24 00:34   좋아요 0 | URL
아 그리스인 조르바, 저도 미완인데 잊고 있었습니다.

분노의 포도는 오늘 잡았어요. 재밌을 것 같아요^^
 
고리오 영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박영근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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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 쓸개 다 빼주고 자식에게 버림 받는 부모의 안타까운 이야기일 줄이야. 
사람 사는 모습, 어느 시절 어느 나라나 매한가지이겠지만 고전 <고리오 영감>이 그런 이야기일 줄은 생각도 못했다.

고통 속에 죽어가며 절규하는 고리오 영감의 한서린 원망은 이기적이고 철없는 딸 자식들에 대한 원망이며 동시에 자책이었다.
귀한 자식 거칠게 키우라는(대강 그런 옛말이 있지요?) 말을 고리오 영감을 통해 생생히 지켜볼 수 있었다. 주변에서도 심심찮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귀하다고 오냐오냐 버릇없이 키워봐야 고마움 모르는 게 자식이라지, 그걸 몰라서 세상 부모들이 부질없는 사랑을 쏟는 게 아닐 것이다.
사랑은 계획하고 통제해서 나눠주고 베푸는 그런 것이 아니니까...
어리석은 고리오 영감은 평생 모은 전재산을 딸들에게 나눠주고 스스로는 허름한 여인숙에서 쓸쓸히 살아가는데 그 처량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인지라, 작가는 이야기 서두에 고리오 영감이 묵는 여인숙에 대해 장황하게도 얼마나 누추하고 보잘것없는 곳인지를 설명하는데 많은 공력을 들이고 있다. 그  장황한 서문 때문에 처음 책 읽기가 얼마나 힘들었던지...  

고리오 영감의 자식애는 유별난 데가 없지 않지만 세상 어버이들, 고리오 영감과 대동소이한 마음일 테고 사랑도 욕심인지라 잘못된  자식 사랑은 결국 자식에게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설정은 다소 식상하기도 하지만, 마지막 부분에 반전 하나가 충격이었는데 자식애라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불가항력이 될 수도 있는 거구나. 

희곡조의 대사와 석연찮은 전개는 소설을 읽는 데 많은 어려움이었다. 예를 들어 으젠은 야심에 불타는 젋은 학생이었는데 어느 순간 전혀 다른 면모의 인간이 되었고 (내가 제대로 못 읽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악명 높은 악당이 으젠에게 호의를 베푸는 이유도 나는 알 수 없었음이다.
관심있게 읽은 내용은 의로운(?) 청년 으젠의 정서, 그것이었다
고리오 영감의 바보 같은 헌신적 자식애가 헌신짝처럼 버려지는 과정. 지고지순한 부성에 대한 일말의 경외감, 배은망덕한 딸들의 이기적 행태에 대한 분개... 등등.

내 주변에도 고리오 영감이 있다. 고리오 영감의 자식들도 있는 것 같다. 나도 책을 보면서 혀를 끌끌 찼지만 나도 제 어미의 살을 파먹는 거미 새끼마냥 살아왔는지 되돌아 생각해 볼일이다.
자식교육방법에 자신없는 부모, 본 적이 없는데 나 역시 나름의 방식에 만족하고 있었다.
다들 최선을 다해 형편과 가정문화에 맞춰 좋은 교육을 하고 있겠지만, 그 교욱이란 게 과연 최선일지, 자신의 교육관이 자신할 만한 것인지, 고집할 일은 아닌 것 같았다.

고리오 영감이 지나친 사랑도 사랑은 사랑이었음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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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1-06-15 0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리오 영감은 말만 들어봤을 뿐 저도 읽어 보지를 못했네요. 자식에 대한 지나친 사랑, 저는 아직 아이들은 없지만 저도 고리오 영감 같은 자식에 대한 애착을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요. ^^ 근데 차좋아님의 교육 방법은 서재에 올라온 것만 봐도 좋은 교육이라는 걸 느끼고 있는데요. 자신감을 가지시기를 ㅋ

차좋아 2011-06-16 00:25   좋아요 0 | URL
추천하고 싶은 책은 아닙니다.ㅋㅋㅋㅋ 뭐랄까...꾸질꾸질해요 ^^
개인적으로 제가 아이들에게 교육하는 게 없어서...ㅋ 아빠가 놀고 자고 일하는 모습에서 아이들이 스스로 배우는 것도 교육이라면 모를까.
교육. 가르치는게 딱히 없으니 그건 모르겠고 보육은 많이 신경 쓰고 있어요. 아이들을 보호해 주려고 모기장도 잘 때 설치하고, 차가 오면 막아주고 배고프면 먹여주고 ^^

루쉰P 2011-06-16 11:41   좋아요 0 | URL
저 역시 발자크는 평전만 읽었을 뿐 작품은 하나도 읽지 않은 날라리 독자여서 말이죠. 헤헤헤
흠..교육보다도 보육이야 말로 아버지의 임무이죠. 저 역시 이곳 아파트에서 보육의 임무를 맡아 주민들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아파트 주민들은 나이가 좀 많아서 보육하는데 칭얼거려서 좀 고민이기는 하지만요.
그래도 차좋아님은 좋은 아빠에용!!!

후니마미 2011-06-15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 소설이 쓰여진 시기가 시기이니만큼
소설을 이끌어가는 능력이, 그때로서는 획기적이었고, 또 내용도 남들이 안 건드리는 부분을 건드려 주었다는 것에서,
즉 처음으로 그렇게 해 보였다는 데서 발자크는 명성을 얻었지요
하지만 그 후에 발자크 따라 하는 소설가가 많았고
요새야 발자크 정도야 가볍게 발로 차 버릴 수 있는 소설쓰기 능력의 소유자들이
많은지라

독서력 많은 차좋아님의 마음에 들 수가 없는 소설이었어요
하숙집 장면 묘사, 이런 것도 소설의 기술쯤에 해당되지만

이런 식으로 장면 묘사 할 꺼면 소설가 나도 하겠다
하는 마음이 들만큼이었어요

ㅎㅎㅎ

찝찝한 것이
이제는 더욱더 돈이 사람을 만드는 세대가 되어놔서
고리오 영감 같은 아버지와
고리오 영감 딸들 같은 자식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

뜨끔하는 것은

우ㅠ리 아버지도 나에게는 고리오 영감 같아 주었으면
좋을텐데 좋았을 텐데

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던 것 ㅎㅎㅎ

늦은 독후감이지만
잘 읽었어요
독후감 썼다고 다른 분들 독후감 읽고 댓글쓰시면서
직접 이야기 하세요 ^^

차좋아 2011-06-16 00:36   좋아요 0 | URL
획기적인 전환기의 소설이라는 이야기 때문에 많이 참고 읽었어요 그쵸^^

독후감이 자연스레 두 주 정도 딜레이 되어가는 형국입니다. (옳지 않아~)

너무 획획 전환돼느 ㄴ느낌이 들어서 몰입 이 안되더라고요. 장문의 소설을 읽는데 막이 바뀌는 연극을 보는 느낌이 종종들었어요. 전화기의 소설이라 그런건가? 맥이 끊기고 다시 몰입하고 반복되다보니 읽는 데 시간이 많이 들었어요.
꽤나 집중한다고 읽어서 그런지 이야기 자체는 매우 흥미로웠어요. 하숙집을 중신으로 여럿의 인물들이 부챗살처럼 펼쳐져 여러 이야기를 구성하는 모습에서 시트콤이 떠올랐거든요. 시트콤의 단점이 개연성 부족인걸 생각한다면 제가 아쉬워했던 부분들도 어느정도 이해할 수있는 부분이구요. 저는 그렇게 읽었어요.ㅎㅎ
서사 구조가 취약하지만 다양한 인물과 상황묘사는 인상적이었어요.


동우 2011-06-16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향편님.
향편님과 내가 이 소설을 읽은 기본적인 느낌은 동일합니다.
사실주의의 정수라는 소설에서 접하는 지극히 연극적인 요소들, 나는 심지어 무대에서 벌어지는 몰리에르의 어떤 희곡(왕년의 연극경험으로 몰리에르를 좀 압니다)을 연상하기도 하였답니다.
윗글에서 향편님은 헌신하는 아비와 그를 배신하는 딸들의 작금 우리의 현실성을 말씀했지만, 나는 그것까지 좀 작위적으로 느꼈지요.
그렇게 딸에 헌신하는 아비와 그런 아비를 냉대하는 딸의 구도...
나는 그런 헌신의 아비는 도저히 될수 없을 것이고, 딸들의 그런 냉대를 견뎌낼수 없을겁니다.

그러나 향편님.
추장님의 본글과 예제 답글 읽어보면 사실주의의 창시자라는 발자크, 이냥반의 19세기 당시의 그 참신성.
그 또한 부정할수 없겠지요.
문학사적.....

로댕, 그 위대한 예술가가 조각한 발자크(호호야님 댁의 그림).
무언가 프랑스인에게는 절절한 발자크일진대, 극동의 우리에게는 이리도 멉니다그려.ㅎㅎㅎ



몸짓은 어느 정도 짐작할수 있겠습디다그려. ㅎㅎㅎ

차좋아 2011-06-17 00:40   좋아요 0 | URL
몰리에르 엄청 웃기다며 꼭 읽어봐, 추천하던 친구가 있었어요. 찌질한 군상들을이 실감나게 다뤄진다고 그 찌질한 인생들을 아주 웃기게 이야기하는 작가라면서요.
고리오 영감에서도 몰리에르가 언급되었지요. 저도 몰리에르가 생각나더라고요. 몰리에으 희극처럼 생생하면서도 생경한 일상의 모습들이요.
낮선 환경의 사람들, 하지만 너무나 익숙한 사람 삶의 모습들을 보았습니다. 고리오 영감보다는 몰리에르 희곡이 더 재밌는거 같아요.

네. 작위적이에요. 아주 많이요. 작위적이지만 의젠이 느낀 감동을 조금은 느꼈던 것 같아요. 그 감동의 순간이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깊이 집중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어느 부분이냐면, 고리오 영감이 병상에 누워 아이들을 찾으면서 횡설수설 할때 진심이면서도 거짓으로 아이들에 대한 원망을 내 비칠 때 그 부분에서 마음이 좀 움직였어요. 안타까웠어요.
긔 외에는 대부분 의무적으로 읽었습니다.ㅎㅎㅎㅎ

좋은 경험이었어요.

도치님 2011-06-27 0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뭐 그냥 한편의 아침 막장드라마였죠? ^^;

이번에도 번역에 대해서 매우 실망했어요.

잘 지내시죠? 오랜만에 인사하네요. ^^

차좋아 2011-06-30 00:29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그렇네요. 아침 막장드라마 안 본지 오래되서 저는 그런 생각 못했는데... 요즘 아침 드라마 보시는군요?ㅋㅋㅋ
민음사 세계문학은 번역이 아쉽다는 얘기를 많이들어서 그런지 저도 계속 걸리더라고요. 선입견 같기도 하고.. 도치님도 그러셨다니 다행스러운 기분이들어요.^^
 
불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3
밀란 쿤데라 지음, 김병욱 옮김 / 민음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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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이었다.
20일을 들고 다니면서 다 못 읽은 밀란 쿤데라의 <불멸>. 어디를 가든 손에서 놓지 않았으나 아직 다 못 읽은 소설. 손의 짐이 마음의 짐이 되었다.

화장실에서 읽기 좋은 책이었다.
한 권의 책을 해결 못한 20여 일 동안 화장실도 20여 번(책 들고 가는 화장실 용무는 하루에 한 번), 20여 개의 챕터. 고도의 정신력을 쏟은 화장실에서의 독서 부분들... 그 외 많은 부분은 두 번 이상 되읽기를 무수히 반복했다. 하지만 불멸을 읽기 위해 변기 위에 머무를 수는 없는 일...

애써 읽기를 실천해야만 겨우 이해가 되었다. 읽고 또 읽어 밀란 쿤데라의 문장이 내게 쏙 들어왔을 때, 그 때가 <불멸>을 읽는 큰 즐거움의 순간이었으나 집중력이 흐트러져 독서의 끊김이 연속되었다. 
냉정히 말해, 밀란 쿤데라의 기가 막힌 문장들과 (여러 종류의)불멸에 대한 단상을 읽는 재미는 세상 재미난 것들에 비해서는 지루할 뿐이었다. 곱씹을수록 맛이 나는 밀란 쿤데라의 문장은 가만히 되새김해야만 내 것이 될 수 있었다. 마음은 그 수고로움을 기꺼이 감수하려 했지만 시청각을 자극하는 세상 현란한 이야기들에 자꾸만 책이 뒷전으로 밀쳐진다. 눈 안에 담으면 씹고 다지는 수고 없이도 사르르 녹는 흥미로운 이야기와 현란하고 자극적인 드라마, 노래에 빠져 책은 그저 손안의 이야기, 손안의 짐일 뿐이었다. 
아무것도 나를 유혹하지 않는 나만의 장소가 필요했다. 세상 근심을 해결하는 화장실에서 나는 불멸의 문장에 빠져 들었고, 화장실을 나서는 순간 불멸의 문장은 내게 근심이 되었다.  
친구를 만나러 가는 지하철에서 나는 다시 불멸의 세상을 만나지만 친구를 만나는 순간 세상은 유한한 실존의 공간이 되었다. 불멸의 이야기는 그렇게 세상에서 소멸하고 말았다.  
 

숙제로 남은 밀란 쿤데라의 <불멸>.
미완의 독서, 하지만 순간 순간 깊은 독서를 했었던 강렬한 기억이 인상적이었던 책.  

 

어쩌면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나이 없이 살면서, 어떤 이례적인 순간들에만 나이를 의식하는 것이리라.-p10-  
은희경의 <새의 선물>의 주인공 진희는 두 개의 자아를 구분하여 말하는데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가 그것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자아란 '바라보는 나'로서의 '나' 일 텐데, 실제로 우리는 세상에  '보여지는 나'가 곧 자아의 '나' 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건 아닐까?  
33살이라는 나이와 남자라는 성별은 너무도 분명한 사실. 내 안의 또 어떤 자아가 있어서 진실의 '나'가 사실은 여자, 혹은 인간 이외의 것이라 믿는다 해도 달라지지 않는 불변의 것.
그 불변의 사실이라는 게 어찌 생각해본다면 세상에 '보여지는 나' 인 것은 아닌 건가... 
자아니 정체정이니 ... 찾으려고 애쓴다만 결국 세상에서 '바라보는 나'를 '나'로 알고 있을 뿐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내가 결국은 타인의 시선에 의한 모습이라 생가하니 섬득할 뿐이다.
세상이 원하는 방향으로 최선을 향해 내닫으면, '내가 원해서..'라  믿고 그게 내 정체성을 찾는 것이란 믿음이 굳어지고... 힘겹게 나를 소진해서 내 자아를 찾아간 곳에 다른 모든 사람이 모여든다.
나는 자유의지로 행동하나 결국은 상식적인 수준의 행동을 한다.
자유로운 내 사고의 결과가 결국은 상식이라니...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아녜스가 괴로워하는 이유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모두 같은 양식의 삶과 상식적 수준의 사고를 한다. <불멸>165페이지에서 이를 이렇게 이야기한다.-사람은 많되 몸짓은 별로 없다.- 
그야말로 나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아닐 수 없다. 

또 다른 문장

"우리 이미지란 단순한 겉모습일 뿐이고, 그 뒤에 세상 시선과는 무관한 우리 자아의 실체가 숨어 있을 거라고 믿는 건 천진한 환상이야.~...."-p195-, 3부 -투쟁-
어쩐 일인지 이 이율배반적인 이야기들에 나는 공감할 수 밖에 없었다. 존재의 가벼움에 의한 야녜스의 슬픔도 유일한 실재는 바로 타인의 눈에 포착된 나의 이미지라 하는 이야기도 모두 수긍할 수 밖에 없는 나는 또 어떤 존재인걸까. 그럴 듯한 이야기에 매번 휘딱 넘어가서 좌절하고 기뻐하는 나란 존재에 대해 생각하는 순간, 나는 나의 실재를 느낄 수가 있었다. 슬프고 외롭더라도 나를 마주하게 되는 순간이있어서 나를 느낀다. 하지만 나를 덜 느끼더라도 나는 좀 더 따뜻하고 즐거웠으면 좋겠어... 돼지처럼 인형처럼...
 

결국엔 그 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사는 게 인생일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새의 선물>의 주인공 '진희'는 여섯 살에 어떻게 그런 이치를 깨달았는지.... 부러울 따름이다.
'바라보는 나'가 '바로 나'라는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만, "보여지는 나'를 무시할 수도 없겠지. 나는 불멸에 대한 의지가 부족한 인간이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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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1-05-11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의 끊임 없는 투쟁이 '진정한 나'를 만들지는 않을까 생각해요. 무엇 하나만 가지고는 온건한 내가 될 수는 없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요. '보여지는 나'만 추구하면 속은 없는 겉 껍데기의 인간이 되고, '바라보는 나'만 추구하면 다른 사람들과는 살 수 없는 독선적인 인간이 되지 않을까 하고 혼자 고민을 합니다. ㅋㅋ

근데 화장실에서 오래 앉아 계시면 변비 걸려요.

차좋아 2011-05-12 18:11   좋아요 0 | URL
같은 고민을 하고 있어서 반갑네요. 저도 혼자 그런 생각 많이 해요.

변비는 심하지 않은데(치질이 있어요ㅜㅡ).... 맞아요 조심해야 합니다. 동감

루쉰P 2011-05-13 09:53   좋아요 0 | URL
역시나 차좋아님은 뭔가 통해요. 근데 전 치질도 변비도 없는 쾌변의 소유자라 왠지 죄송하네요. 푸훗.

차좋아 2011-05-13 18:08   좋아요 0 | URL
제가 좀 독하게 많이 먹어서 장이 고생이에요 ㅎㅎㅎ

루쉰P 2011-05-15 08:18   좋아요 0 | URL
어디 놀러가신다고 댓글 다신 거 봤는데 거기서는 독하게 드시지 마세요. ㅋ

내 몸은 내 몸이 압니다. 특히나 가족이 있으면 가족들의 몸이죠. 건강하셔야 해요. ^^ 아버지는 가족의 구세주지 않습니까!! ㅋ

차좋아 2011-05-16 16:08   좋아요 0 | URL
지리산에 갔다 왔어요^^. 茶 만들고 왔습니다.
지리산 참 좋더라구요^^ 차밭 가운데서 한참을 깊은 숨을 마시고 뱉었어요.(흐~음/ 하~~).
차향이 폐속 가득 찼더랬지요~ 지금은 다시 오염됐지만 가만히 생각하면 그 향이 기억이 나요. 기쁜 시간이었어요^^
독한 거 안 먹고 왔다구요~

양철나무꾼 2011-05-11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금전 쓴 페이퍼가 생각나요.
자기 얼굴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자기 자신의 얼굴을 직접 본 사람은 없다...
거울을 통하여 보는 나는 과연 참 모습인가?

처음 그렇게 의지를 불사르시더니요~
책에 화장실 냄새 뱄겠어요,ㅋ~.


차좋아 2011-05-12 18:17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맞아요 처음에 그랬었어요 막 이벤트도하고 ㅋㅋㅋㅋㅋㅋ
<불멸>을 주는이벤트를 하면 아무도 참가 안 하겠죠?ㅋㅋㅋ

대부분의 시간을 관찰자로서 살고있는데 어느 순간, 계기가 있어서 '나도 피사체구나,' 라는 생각을 퍼특 해보곤 해요. 불멸을 읽으며 그랬고 방금 전 양철댁님 글 보고 다시 생각했어요.
내 시선에 대한 확신을 버려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되더라고요.

동우 2011-05-12 0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향편님.
그 근심이 완결된 독후감에 대한 부담때문이라면 접어 두시기를.
완벽한 독후감이올시다.
밀란 쿤데라가 차려놓은 만찬, 맛있는 요리만 골라 드셨고, 그 맛 또한 깊이 음미하셨다는 걸 충분히 알수 있습니다.

화장실에서 빠져드는 '불멸'읽기. 화장실 밖은 시글벅쩍 재미로운 것들 널려있는데..
누구나 그렇지요, 나 또한 수월하게 읽히지 않는 이 소설 덕에 변기위에 머무는 모 부위가 많이 더워졌답니다.

오히려 향편님은 내게 또 하나 숙제를 던지셨어요.
아직 읽지 못한 유명짜한 '새의 선물' ㅎㅎㅎ

차좋아 2011-05-12 18:23   좋아요 0 | URL
완료 못한 독서에 대한 아쉬움은 정말 아쉬움으로 남았어요. 부담은 아니고요.ㅎ 근심이라 함은 어떤 자각이 있어서 인데 그게 또 가물하네요 ㅋㅋ
힘들었지만 , 힘든 만큼 재밌게 읽었어요. 아쉬움 뒤로하고 일단은 덮었습니다. 화장실 냄새 빠지면 그때 다시 ㅋㅋㅋㅋ

은희경의 새의 선물은 동우님에게 또 어떤 이야기일까? 저도 궁금해집니다. 사실 제가 좋아하는 소설이 아니거든요. 은희경의 이야기는 제게 그닥입니다만 동우님께는 어떨지..ㅎ

후니마미 2011-05-12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독후감을 통해, 같이 고민했던 부분을(밑줄긋기 같은 부분)을 바라보는 건
매우 큰 즐거움입니다
아녜스의 고민, 세상의 소란스러움에 대한 아녜스의 고민은
향편님이 눈여겨 본 부분을 저도 눈여겨 보고 고민해 봤지만
그 부분을 유독 독후감으로 써내진 못했지요
그런데 향편님이 감상을 적어 주시니까, 저를 대신한 문장을 보는 것 같아
만족이 큽니다.

그리고 새의 선물은 읽었으되 기억나지 않는 소설이 되고 말았는데
다시 읽도록 해 수십니다
동우님의 숙제와 저의 숙제가 같스니다

아주 훌륭한 독후감 옮겨갑니다

차좋아 2011-05-12 18:30   좋아요 0 | URL
밑줄만 옮겨볼까 생각도 했지만 무리더라고요. 일단 컴퓨터 앞의 시간이 너무 부족하고 앉더라도 다른 일(네이버 뉴스..)밀리고 ㅋㅋㅋㅋ

괴테의 이야기도 참 인상적이었어요. 에커만의 괴테와의 대화도 생각나고 어디가지가 사실적 기술인지도 궁금해지고.. 독서로 인한 관심이 사방으로 뻗치더라고요. 야녜스 이야기를 하려 계획한 게 아니었는데 그래도 야녜스가 인상적이었나 봅니다.
후니마미님 독후감은 아직 진행형이지요?^^ 생각꺼리 많은 후니마미님 이야기 때문에 한참 시간을 흘려 보냈어요~ㅎㅎ



토깽이민정 2011-05-17 0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멸하고 싶은 욕망은 젊을 수록 강한걸까
나이가 들면서 강해지는 걸까.

만일 죽음에 가까워 오면서 불멸을 꿈꾸는 것이라면
젊어서부터 '불멸'을 위해서 부지런히 작업하는 베티나 같은 캐릭터는 진짜 흥미로운 캐릭터같기는 하더라고 (그래도 싫기는 싫어! ㅎㅎ)

그리고
있지, 한국에서 떠나오기 전에는
'보여지는 나'를 좀 무시하고 살았었는데,
여기 오고나니까 보여지는 나의 영향이 얼마나 강한지 알겠더라.

독후감에 적지는 않았지만 그런 작은 것들도
내가 책을 읽기 싫다고 생각했던 이유인지 몰라.

나중에 불멸 다시 읽고 싶을때 말해
나도 그때 다시 읽어보자. ^^

나는 이제사 간신히 책도 읽고 독후감도 끝냈어.
4월 독후감을 끝내니 5월의 중순도 지나버렸다니,
이런 허무시리즈가 또 없다.


차좋아 2011-05-17 09:17   좋아요 0 | URL
나는 말야... 자존감이 별로 없는건지, 시선에 매우 민감하거든, 그래서 좀 의연한 사람들을 좋아하는 거 같아. 민정이 너도 그런 사람이고 ㅎㅎ

불멸 다시 읽어보자는 말 매우 반가운데, 그래!

그래도 너는 다 읽었구나~ 나는 나는... 흙ㅜㅜ
5월의 고리오 영감을 빨리 읽어야 하는데 아직 책도 못 샀다.ㅋ 고리오 영감이라니, 고리타분한 느낌의 제목이지만 의외로 재밌을 거 같아ㅋㅋ

참 베티나는 좀 부담스러운 캐릭터야. 나에겐 말이지... 그래도 그런 여자가 실제로 있었다면 야녜스 보다 훨신 매력적이었을 거 같기는 해.
훨신 매력적이라고 해서 야녜스보다 보다 좋다는 건 아니야. 사실은 어떤 면으로 내가 야녜스 같기도 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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