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얘기 아닐 수 있다. 그냥 영국의 채링크로스 84번지에 위치한 어느 작은 중고서점에 있는 사람과 미국에서 그닥 잘 나가지는 못하는 작가간의 책 있어요 책 보냈어요 뭐 이런 내용들만 가득한 편지일 뿐 일수도. 사실 내용도 그렇다. 그 내용 이외에 매우 대단한 내용이 들어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왜 이리 재미있고 훈훈하고 아름다운 거지..?

 

1949년 10월 5일

선생님께:

토요문학평론지에 실린 귀하의 광고를 보니 절판 서적을 전문으로 다룬다고 하셨더군요. 저는 '희귀 고서점'이라는 말만 봐도 기가 질리곤 하는데, '희귀' 하면 곧 값이 비쌀 것이라는 생각부터 들기 때문입니다...

(p9)

 

 

이렇게 미국의 헬렌 한프가 영국의 채링크로스 가 84번지에 있는 마크스 서점에 보낸 편지가 시작이었다. 1949년.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였고 그래서 영국의 사정이 그닥 좋지 않은 시기였다.

 

 

1949년 10월 25일

친애하는 부인,

10월 5일 보내신 편지에 대한 답신입니다. 저희는 부인의 문제 가운데 3분의 2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부인께서 원하시는 해즐릿의 수필 세 편은 논서치 출판사에서 간행한 산문선집에 들어 있고, 스티븐슨은 젊은이를 위하여에서 찾았습니다...

(p10)

 

정중하게 보낸 답신에 서명은 FPD. 그것이 '친애하는 한프양'으로 호칭되고, 서명은 '프랭크 도엘 드림'으로 바뀐다. 그리고 다시 '친애하는 헬렌'으로 호칭되고 서명도 '프랭크'로 바뀌는 동안 그들 사이에 생기는 유대감이란... 아름다움이라 표현할 만 했다. 헬렌 한프의 까칠하면서도 책에 대한 사랑이 담뿍 느껴지는 편지와 사정이 안 좋은 영국의 사정을 생각하여 미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식료품들을 챙겨서 서점 식구들에게 보내는 마음이 전해지면서 근 20년 동안 프랭크 도엘 뿐 그의 아내 노라와 딸뜰, 서점의 모든 사람들, 세실리와 마크스... 과의 우정이 피어나게 되는 과정들... 정중하고 무뚝뚝하지만 속 깊고 일면 유머러스한 프랭크 도엘의 편지들. 무엇보다 20년이라니. 

 

 

1949년 12월 8일

... 저는 전 주인이 즐겨 읽던 대목이 이렇게 저절로 펼쳐지는 중고책이 참 좋아요. 해즐릿이 도착한 날 '나는 새 책 읽는 것이 싫다'는 구절이 펼쳐졌고, 저는 그 책을 소유했던 이름 모를 그이를 향해 '동지!'라고 외쳤답니다...

(p18)

 

 

중고책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애정 중에 이것에 비길 게 있을까 싶다. 누군가의 손을 거친 책에서 그가 즐겨 펴던 페이지가 저절로 펼쳐지는데 그 대목이 나의 마음과 통할 때의 그 찌릿함. 아. 생각만 해도 훈훈하지 않은가.

 

 

1951년 4월 9일

친애하는 한프 양,

소포에 대한 인사가 없어 혹시 뭐가 잘못된 건 아닌지 염려하고 계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우리를 감사도 모르는 패거리로 생각하셨겠지요. 사실은 제가 그동안 안쓰럽게 바닥난 재고를 채우기 위하여 교양 있는 가정을 찾아 전국 곳곳을 돌아다녀야 했습니다. 제 집사람은 이제 저보고 숙식만 제공받는 하숙생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물론 건조 달걀과 햄은 말할 것도 탐스러운 고기까지 들고 집에 들어서자 집사람은 저를 썩 괜찮은 남자라 여기며 모든 것을 용서해주더군요. 그렇게 많은 양의 고기를 한 덩어리로 본 것은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었습니다...

(p47)

 

 

공식적으로 또는 어느 정도는 건조한 답변만 보내던 프랭크 도엘의 이 유머러스한 답변이라니. 그냥 서점에서 책을 사는 손님과 책을 파는 점원의 관계가 아니라, 책을 사랑하는 서로를 배려하고 마음을 쓰는 관계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1951년 4월 16일

... (그리고 미래의 소유자에게도 그랬을 거에요. 저는 속표지에 남긴 글이나 책장 귀퉁이에 적은 글을 참 좋아해요. 누군가 넘겼던 책장을 넘길 때의 그 동지애가 좋고,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누군가의 글은 언제나 제 마음을 사로잡는답니다).

(p50)

 

 

책에 뭐가 쓰여 있으면 버럭 화가 날 수도 있는데, 그 책을 가졌던 사람의 글을 보면서 마음이 통함을 느끼는... 책을 애정하는 헬렌 한프의 마음이 느껴져서 참 좋았다. 책이라는 대상이 그저 소유품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잇는, 같은 책을 바라보며 역사를 가질 수 있는, 사랑의 대상이라는 거.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거.

 

 

 

1957년 5월 3일

친애하는 헬렌,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하세요. 지난 편지에서 요청한 세 권이 일제히 당신한테 가고 있습니다. 1주일 정도면 도착할 겁니다. 어떻게 한 건지는 묻지 말아요. 그저 마크스 서점의 서비스라고만 생각해줘요. 부족한 5달러 청구서를 여기에 동봉합니다...

(p108)

 

 

한번의 만남도 없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서로 편지를 주고 받으며 사랑을 전달하며 20년이 흘렀다. 늘 일에 쫓기고 생활에 시달렸던 헬렌 한프는 늘 방문하고 싶어했으나 영국을 가보지 못했고, 그러다가 프랭크 도엘이 불현듯 세상을 떠나면서 이 책은, 이 편지 왕래는 끝나게 된다. 아. 마음이 너무 아팠다.

 

 

1969년 4월 11일

... 이 모든 책을 내게 팔았던 그 축복 받은 사람이 몇 달 전에 세상을 떠났어요. 그리고 서점 주인 마크스 씨도요. 하지만 마크스 서점은 아직 거기 있답니다. 혹 채링크로스 가 84번지를 지나가게 되거든, 내 대신 입맞춤을 보내주겠어요? 제가 정말 큰 신세를 졌답니다. 헬렌

(p145)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살면서 만나서 지지고 볶고 얼굴을 마주대고 이 일 저 일 함께 겪는 인연이 있는가 하면 멀찍이 떨어져 있으면서 가끔씩 소식을 전하면서도 묘하게 마음의 위안이 되는 인연이 있다. 그것이 책을 매개로 한다면 더욱 매력적인 일이 될 수 있고.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책에 대한 짤막짤막한 이야기들을 하면서도 사는 이야기, 나누는 이야기들을 함께 한, 그렇게 해서 둘만의 인연이 아니라 그 주변의 많은 인연으로까지 이어졌던 세월들이... 마음에 너무나 따뜻하게 다가왔다. 뭐라 장황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훈훈함이 가슴 가득 퍼지는 책. 그런 책이다, 이 책이.  

 

이 책은, 영화로도 나왔다. 우리나라 제목은 <84번가의 연인> - 아 유치해라. 이건 연인 이야기가 아니란 말이닷 - 안소니 홉킨스와 앤 밴크로프트가 나온 영화. 나는 어제 네이버에서 이 영화를 5,000원이나 주고 다운로드를 받았다. 꼭 영화로 만든 걸 보고 싶었다. 영화도 참 아름답다는 소문을 들어서... 주말에 이 영화를 보면서 마음을 릴랙스하리라 싶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7-05-30 09: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절판된 책 중에서 잘 찾아보면 읽어 볼만한 것이 있어요. 원하는 책을 찾을 때와 무작정 책을 찾을 때의 느낌을 비교하면 완전 달라요. 좋은 책을 우연히 발견했을 때 그 기분, 정말 짜릿합니다. ^^

비연 2017-05-30 10:49   좋아요 0 | URL
아... 저도 그 짜릿한 기분 느껴보고 싶네요. 절판된 책 중에 읽어볼만 한게.. 저번에 한 권 눈에 들어왔었는데.. 중고서점에 한번 가볼까... 그냥, 이 책의 헬렌처럼 편지를 써볼까요? ㅎㅎㅎ

레삭매냐 2017-05-30 15: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에는 영국에 대해 관심이 없어서 유럽에 갔을 때도
영국에 가지 않았었는데, 영국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니
이제는 영국에 한 번 가보고 싶어지더라구요 :>

비연 2017-05-30 15:23   좋아요 0 | URL
영국은... 참 독특한 나라라는 생각 들어요.
예전에 런던만 잠깐 갔었는데... 레삭매냐님 말씀처럼... 영국에 관한 이야기들을 읽다보면 아.. 런던도 다시 가고 싶고 여기저기 영국을 알고 싶구나 싶어져요. 헤이온와이도 가고 싶구요. 흠... 계획 짜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