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동서 미스터리 북스 3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용성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평점 :
품절



요즘 서점에 직접 가게 되면, 이상스럽게 새로 나온 책들보다 고전에 끌린다. 추리소설의 예만 들어도, 대충 신간을 다 읽는 편이기 때문에 내가 잠시 관심을 두지 않은 사이 뭐 새로 나온 게 없나 하고 신간 쪽을 기웃거리는 게 나의 일반적인 행동양상이지만, 요 몇 달 사이 읽었거나 내용 다 알고 있어 쳐다도 보지 않던 작품들 쪽으로 발걸음이 옮겨지는 건 어인 일인지. 그래서 집어든 것이 아가사 크리스티의 '오리엔트 특급살인'과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라면 더욱 아연실색할 일이 아닌가.

아가사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 책으로 직접 읽은 적이 없었다(이걸 지금에야 깨달았다). 너무나 유명하고도 유명한 작품인데다 연극으로도 많이 했었고 이런 비슷한 플롯으로 풀어나가는 수많은 영화와 소설들을 통해서 나는, 이 책을 읽었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게다. 어이없는 깨달음 속에(어떻게 이걸 지금 알았는지...) 이 책만큼은 사오자 말자 읽기 시작해야 했다.

고전이란, 역시 고전이다. 다 아는 내용에 어찌 보면 조금 오래 전 작품이라 요즘 읽으면 약간은 현실감없이 읽어내려갈 수도 있을텐데, 정말이지 고전을 읽다 보면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기본적인 프레임은 고전에서 다 끝난 거다. 그 이후의 사람들은 거기에 현학을 덧붙이거나 현실을 반영하거나 독특한 캐릭터를 창조하거나 심리극을 하드보일드로 하드보일드를 사회추리로 바꾸어나가는 것일 뿐 기본을 건드리기는 힘들다. 난 아가사 크리스티의 대표적 작품인 이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를 보면서 무릎을 치며 이거다를 연발할 수 밖에 없었다.

외딴 섬에 불려들어간 10명의 각기 다른 사람들. 그리고 도착하자마자 울려퍼지던 그들의 숨겨진 죄상들. 사회적으로는 무죄방면 혹은 용서받았으나 자신의 내면에서 늘 스스로를 강박하고 옥죄던 과거의 일들이 그렇게 낱낱이 알려지고 나서 하나씩 둘씩 죽어나간다. 그것도 10개의 인디언인형이라는 마더 구스의 노래와 똑같은 방법으로, 죽을 때마다 놓여있던 인디언 인형들도 하나씩 사라지면서 말이다.

이 책의 압권은 살인이 아니다. 밀폐된 공간 속에서 양심에 거리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죽음이라는 위기에 봉착하면서 표출되는 인간성과 심리묘사가 탁월하다는 게 제일의 매력이다. 그들은 어떤 면에서는 자신의 죄를 합리화하고 다른 사람의 죄는 확신하며, 죽지 않기 위해 서로를 의심하고 추적하고, 그럼에도 시시가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 아래 미치고 발광한다. 그 과정이 연극적인 대사와 설정 속에서 그지없이 탁월하게 나타난다.

10명의 사람이 다 죽고 나서 도착되는 편지 한통에서 드러나는 진실은, 알고 있었던 나에게도 충격이었다. 읽으면서 내가 알고 있는게 맞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교한 플롯이 돋보였다. 아가사 크리스티가 추리소설의 여왕일 수 있는 이유는, 그냥 그저그런 추리로 사람을 현혹시키지 않고 나름의 매우 잘 짜여진 스토리라인과 더불어 사람의 기본적 심리를 파악하여 범죄와 결부시켜 풀어나갔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성향이 가지가지이긴 하지만, 적어도 아가사 크리스티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범죄라는 사회적 행동을 통해 드러나는 인간의 감추어진 본성. 그것은 동서양과 시대고금을 막론하고 변하지 않는 진리 중의 하나이고 그래서 고전은 영원불멸이며 아름다운 것이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이 책은 읽었더래도 또 다시 추천하고픈 작품이다. 초절정강추라고 표현해본다.

뱀꼬리) 근데, 책 두께를 불리려고 뒤에 수록한 중편은 에르큘 포와로가 나옴에도 너무나 범작이라는 데에 실망이다. 오히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의 번역에나 더 신경을 썼더라면 좋았을텐데 싶다. 사실, DMB 시리즈의 번역은 늘상 불만이지만, 이 책은 정말 심하다 싶은 번역이 많았다. 직역을 얼토당토않게 해서 영어로는 이거였겠군 예상이 될 정도다. (편지말미에 '친절한 유나 낸시 오웬'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다면 원래 영어가 뭐였는 지 예상할 수 없겠는가?) 정말, 번역을 제대로 하는 것에 집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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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yonara 2006-07-30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럽습니다. 이 책을 21세기에 처음 읽어보시다니... 어언 20년 전에 읽어버린 저에게는 이미 닳고 닳은 감흥만이... ㅠㅠ

비연 2006-07-30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러우시다니..^^;;; 다시 읽어도 좋으실 것 같다는....ㅎㅎ

상복의랑데뷰 2006-07-31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의 충격은 대단했죠. 여사님이 그저 부러울 뿐이라는...^^

비연 2006-07-31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사님? 그게 누군가요? 설마 저???? (ㅠㅠ;;)
암튼..이 책을 지금 읽을 수 있는 제 입장이 저도 괜히 뿌듯해지네요..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