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나는 새벽같이 여행을 떠난다. 그래서 오늘이 2015년 마지막 근무날이다. 주위의 동료들은 오늘부터 쉬는 사람들이 많지만, 여차저차 사정이 허락치 않아서 내일부터 나의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여행을 갈 때 노트북은 가져 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아마 오늘 이 글이 2015년 을미년의 마지막 글이 되지 싶다. 이따가는 퇴근해서 집에 가 짐부터 싸고 자야 해서 시간이 별로 없을 듯.
올해, 화두는 '비통 (悲痛)' 이다.
사실 돌아보기도 싫은 한 해였다. 개인적으로 잊지 못할 일이 있었고 내내 마음이 불편했고 슬펐다. 내년도 그렇게 그런 감정이 이어지긴 하겠지만, 올해의 충격만큼은 아니지 않을까 싶다. 이보다 더한 일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나는 충격을 받았고 아...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난다.
이렇게 한 해가 마무리된다는 게 신기하다. 7월에 그렇게 충격을 받았을 때는 시간이 정지한 것 같더니. 시간은 무념무상으로 제 갈 길을 간다. 그리고 어느 틈에 나도 갈 길을 가고 있었던 것 같다. 슬프게도. 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 거고 자기 인생을 어떻게든 끌고 나가야만 하는 거니까.
여행이 가기 싫어졌었다. 어딘가로 떠난다고 뭐가 달라지겠는가. 뒹굴뒹굴. 거렸다. 10월에 부산영화제를 다녀온 건, 이렇게 지내선 안되겠다는 억지심이었다. 물론, 다녀오긴 잘했다. 영화제는 좋았고 내년에도 또 가고 싶어지는 곳이었다. 내년에는 좀 알게 되었으니 보다 알차게 다닐 수 있을 듯 하다.. 그리고는 앞뒤로 여행을 간 게 거의 없다. 그리고 내일 가는 건, 순전히 추억을 위해서다. 그래서 여기저기 관광지를 다닐 생각은 없다. 그냥 여기저기 발길 닿는 대로 지낼 거다.
그래도 많이 나아졌다는 거. 그래서 내년을 살아낼 힘을 가지게 되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인 일이다. 술을 끊고 사람을 끊은 하반기였는데... 내년도 이 기조는 그대로 유지할 생각이다. 술이고 (쓸데없이 알기만 하는) 사람이고 다 부질없는 짓이다. 말짱한 정신으로 소중한 사람들과 지내는 시간을 늘려나가는 게 요즘 나의 화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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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책도 그저 그렇게 읽어서 추천하기도 민망스럽지만, 알라딘 서재에서 한 해를 정리한다면 책으로 정리해야 할 것 같아 몇 권 들어보려고 한다.
1. 작은 책방, 우리 책 쫌 팝니다! (백창화, 김병록)
이 책으로 하나의 붐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건, 순전히 나만의 착각일까. 외국 도서관이나 서점에 대한 책은 있어도 우리나라 것들은 찾아나서지 않아왔던 분위기에서 내 주변의 서점이나 책방에 눈을 돌리게 만든, 놀라운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돈도 안된다고 보여지는 일에 아이디어와 정열을 쏟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에 흐뭇함과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하는 책이었고.
2. 13.67 (찬호께이)
올해 읽은 최고의 스릴러 혹은 경찰물이다, 내게 있어선. 왠만한 B급 소설은 다 읽어치우는 터라 왠만해서는 아 새롭다 아 재미있다를 잃은 지 오래인 나다. 그런데 이 책은, 심지어 홍콩의 추리소설이라는 이 책은 내게 정말 색다른 감동과 줄거리를 주어서 매.우. 인상적이었다. 홍콩의 역사를 반영하고, 경찰의 애환을 드러내고, 단편과 단편 사이의 역사를 만들어내고, 하나하나의 사건에서 재미있는 트릭들로 사람을 놀래키고.... 뭐 하나 빼놓을 게 없는 책이다.
3. 법륜 스님의 금강경 강의 (법륜)
왠 금강경? 하겠지만... 올해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위안이 많이 된 책이다. 일단 금강경을 참으로 쉽게 해석해준 법륜 스님의 필력도 있었고 나 또한 혼란스럽고 힘든 마음에 한구절 한구절 닿아오는 좋은 말들이 고마왔다. 다른 경전들도 읽어봐야겠다 라는 마음을 일으키는 책이다. 아니면 다시한번 읽어야겠다 라는 생각도 들게 하는... 모든 것은 나에게서 비롯된 것. 나를 벼려야 하는 것이다. 그게 다다.
4. 정상과 비정상의 과학 (조던 스몰러)
이런 책을 좋아한다. 일단 제목이 딱딱하고 내용도 전문적이긴 한데, 교양 과학서적에 충실하게 재미있고 흥미진진하다. 우리가 보는 관점을 살짝 비틀고 거기에 현재까지의 과학적 성과들이 기여하는 바들을 술술술 풀어놓은 책이다.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것은 무엇인가. 비정상이라는 것은 정말 완벽하게 비정상일 뿐인 것인가. 우리가 생각하는 비정상이 과연 비정상이 맞는 것인가. 에 대한 생각을 다시금 고쳐잡게 하는 글들이다. 편견이라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것이며, 그러한 것에 비과학적인 맹신들까지 가세하여 집착하는 것은 또한 얼마나 우매한가.. 를 깊이 생각하게 한다.
5.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프리모 레비)
이 책을 읽고서야 프리모 레비가 왜 자살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는 지를 이해했다면... 무리인가. 하지만 서경식선생도 이 책을 프리모 레비 사상의 결정판으로 꼽았고 나 또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보였던 현상에 대한 고발적인 내용들이 확장되어 프리모 레비 자신을 포함한 인간 본성 자체에 대한 고발을 담았다고나 할까. 사실 읽으면서 섬찟 했다.
6. 칠드런 액트 (이언 맥큐언)
이언 맥큐언의 글은 정갈하다. 점잖다. 그런데 그 내용은 가끔 통렬하다. 우리가 얘기하기 껄끄러워 하는 이야기를 가감없이 냉철하고 객관적으로 풀어나간다. 그래서 읽노라면 무섭다... 뭔가를 들킨 기분이다. 미성년 아이와 종교의 문제. 여기에 판사의 개인적 사정이 얽히고 아이와의 관계가 뭔가 복잡해지고... 그러면서 마음과 정신에 스미는 많은 의문들, 판단들. 이런 것들을 참 평이하게 풀어나가고 있는데 다 읽고 나면 전혀 평범하지 않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표지는 좀 바꾸었으면 좋겠다. 아무리 봐도 못마땅..;;;)
7. 발칙한 현대미술사 (윌 곰퍼츠)
내가 읽은 중 최고의 현대 미술사이다. 어렵지 않으면서도 담을 내용 다 담았는데 재미있다. 그리고 현대 미술을 보는 안목을 좀더 부여해주는 매력이 있다. 이런 사람이야 말로 진정한 전문가구나 라는 생각에 부끄러움마저 느껴졌던 책이다. 역사를 관통하는 히스토리를 이해하고 있다는 건, 단편적인 사건들이 전체에 미치는 맥락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꿈도 못 꿀 일이니까. 여기 있는 지하철 노선도에 빗댄 현대 미술의 계통도는 잘라다가 방 벽에 잘 붙여두었다. 어쩐지 그것만 보고 있어도 현대 미술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는 기분이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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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꼽으라면 더 못 꼽을 것도 없지만, 가장 핵심적인 것들만 추려 보았다. 애초에 작정했던 방향으로의 독서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래서 많이 반성 중이지만, 올해도 여전히 잡다하게 여러 분야로 읽어대었던 것 같다. 내년에는 좀더 계획성 있는 독서를... 부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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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알라디너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에도 여기 서재에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