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이별 레이먼드 챈들러 선집 6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박현주 옮김 / 북하우스 / 2005년 5월
평점 :
절판



북하우스에서 나온 레이먼드 챈들러의 6권 시리즈와 더불어 초여름을 났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그의 마지막 장편인 '기나긴 이별'의 마지막 장을 덮었다. 사실 이 시리즈를 읽어나가는 동안 더운 줄도 몰랐음을 고백한다. 하드보일드 류의 추리소설에 별반 흥미가 없던 내게 이런 작품도 있구나 라는 놀라움을 안겨준 '빅슬립'을 시작으로 나는 레이먼드 챈들러가 창조해낸 필립 말로라는 사립탐정과 그의 활약에 푹 빠져 지내야 했다. 5권을 다 읽고 두툼한 '기나긴 이별', 그 마지막 책만이 남겨졌을 때 얼마나 망설였는 지 모른다. 이걸 다 읽고 나면 이제 다 본 것인데 아쉬워서 어쩌나 이 긴 여름을 어떻게 보내나 고민이란 것까지 했으니 참 우스운 일이다. 그래도 궁금함과 호기심을 못 이겨 결국 반나절 꼬박 지내며 이 책을 다 읽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 글을 읽으며 느꼈던 그 아쉬움과 일종의 서러움은 한참동안 내 마음을 지배할 것 같다.

필립 말로라는 사립탐정의 매력은 너무나 많지만 6권의 책을 다 읽어나가면서 소설의 한 캐릭터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인양 느껴졌던 것은 그가 세월에 따라 나이를 먹고 그에 따라 조금씩 변화해가기 때문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빅슬립'에 나왔던 필립 말로가 '기나긴 이별'에 와서는 조금은 의뭉해지고 조금은 지쳐가고 또 조금은 세상과 타협하는 모습들에 실망을 하기도 한다지만 나는 그것이 오히려 인간적으로 느껴져서 좋았다. 어떤 사람이라도 시간을 이길 수는 없는 것이기에 필립 말로가 30대 초반에서 40대로 넘어가면서 나이에 걸맞는 자신만의 모습을 만들어나가는 모습이 내게는 훨씬 사실적으로 다가왔다.

이 작품 '기나긴 이별'은 500페이지가 넘는 장편으로 다른 작품처럼 어떤 사람의 의뢰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필립 말로가 우연히 어떤 알코올 중독자와 친구가 되는 장면부터 시작하는 것이 독특하다. 그가 알게된 친구는 과거를 잘 알 수 없는 사람으로 거렁뱅이로 살다가 재벌의 난잡한 딸과 결혼이란 걸 하면서 신분상승을 했고 그 속에 불편하게 끼인 삶을 거추장스러워 하는 사람이었다. 말로는 그에게서 어떤 친근감을 느꼈고 결국 그 친구의 아내가 살해를 당한 날, 그를 멕시코로 도망갈 수 있게 도와주면서 사건이 전개된다.

여기서는 오히려 이전보다 살인사건의 횟수가 주는 대신 주위 사람에 대한 묘사, 부자들에 대한 생각, 세상에 대한 환멸을 토로하는 장광설 등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그리고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그 속에 그냥 악한은 없다. 다들 인생의 바퀴에 휘말려 자의로 타의로 지쳐가는 인간 군상일 뿐이며 그를 바라보는 말로의 시선 또한 아주 냉담하지만은 않다. 그게 아마도 레이먼드 챈들러 작품의 큰 매력이 아닐까 싶다.

결국 밝혀진 진실은 우리에게 통쾌함보다는 씁쓸함을 남긴다. 어쩌면 과거는 추억으로만 존재해야 하는 지도 모른다. 그 과거는 그냥 예전의 일이 아니라 어느 새 생명력을 가지고 우리에게 살아가는 원동력을 제공하기도 하니까. 내가 기억하는 과거의 조합들이 현실에서 다르게 재현될 때 우리는 일면 좌절하고 피하고 싶어지는 것일 테다. 작품의 제목처럼 과거는 그저 계속 '기나긴 이별(The Long Good Bye)' 의 상태로 남겨져야 했는지도 모른다.

레이먼드 챈들러 작품이 멋진 이유는 여타의 추리소설과는 다르게 미적인 섬세함과 적절하고 날카로운 비유가 돋보이기 때문이다. 그의 비유는 읽으면서 머릿속이 쭈뼛할 만치 좋다. 영문학도의 꿈을 꾸었던 작가는 추리소설이 그저 트릭으로만 승부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사람을 표현하는 아주 그럴 듯한 '작품'으로서 정의했을 것 같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그냥 추리소설만으로는 읽히지 않는다. 50년도 전에 나온 작품들 속에서 우리는 현재를 보게 되고 나를 보게 되고 그 속에 깔린 심리와 배경을 읽게 되므로.

나는 이 작품 뿐 아니라 레이먼드 챈들러의 작품 모두를 권한다. 추리소설을 읽으면서 두고두고 읽어야지 라는 생각과 함께 책장을 덮은 책은 몇 안되는데 그의 작품은 전부가 그랬으니까. 두말없이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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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5-07-24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립 말로 시리즈 가운데 제일 좋아하는 작품이지요. 좀 더 인간적으로 나오는 말로... 플레이벅을 출판하지 않는게 아쉽습니다 ㅠ.ㅠ;;;

비연 2005-07-24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이먼드 챈들러의 작품은 단편이라도 모두 나왔으면 싶어요~^^
저도 이 책이 필립 말로 시리즈 중 가장 좋았답니다, 만두님.

마태우스 2005-07-24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연님의 리뷰가 멋진 이유는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아주 많이 들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적절하고도 날카로운 표현력이 책의 질을 보증해 주고 있습니다.

비연 2005-07-24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과찬의 말씀을..^^

oldhand 2005-07-25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챈들러 완독을 축하드립니다. 저는 <기나긴 이별>을 아직 남겨 놓았답니다. ^_^ 언젠간 읽게 되겠지만요.

비연 2005-07-25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oldhand님...'기나긴 이별'은 아껴가며 읽으세요~ 읽고 나면 넘 서운하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