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직이란 걸 서고 있다. 예전처럼 당직실이 있어서 공용전화기 하나 부여잡고 쭈그리고 앉아 신문이랑 TV랑 뒤적뒤적.. 그러다 이불에 들어가 잠자는 그런 당직은 아니다. 그냥 늦게까지 남아 있는 당직. 이건 뭐 감시도 아니고 불침번도 아니고 좀 애매한 것이긴 한데. 어쨌거나 순번을 정해서 매주 한두번 씩 당직이란 걸 서고 있다, 우린.

가끔, 내가 처음 회사 들어왔던 때랑 지금이랑은 참 많이 달라졌다 라는 생각을 한다. 생각하지 않아도 그것은 사실이고, 이럴 때 격세지감이란 걸 느끼게 되는 거지. 예를 들어서, 예전에 내가 회사 처음 들어올 때는 여자가 회사에 별로 없었기 때문에 난 전체 입사자 중 한명의 여자였다. 그리고 배치가 되어서 갔더니 다 남자. 솔직히 나 스스로는 그다지 그때까지의 인생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었지만, 거기 부장은 틀렸다.

첫 입사날, 날 부르더니 첨 한다는 소리가, "여기 일이 힘들면 언제든지 말하세요. 내가 옮겨줄테니." 였다. 그리고는 한 달을, 책 한권 던져주고 아무 일도 안 시켰다. 난 앉아서 꾸벅꾸벅 졸다가 집에 갔고 첫 월급을 받았을 때 송구한 마음이 앞섰었다. (그 때 한번만 그랬다. 그 이후로는 월급이 내가 하는 일보다 많다고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대부분의 샐러리맨들이 그렇듯이)

 

참다참다 못해 내가, 출장을 나가겠다고 했더니 (그 직장은 출장이 잦은 직장이었다) 흘깃 보면서 어떻게 네가 출장을 나가? 뭐 이런 표정으로 가소롭다는 듯이 쳐다봤었다. 그 눈길, 그 표정이 지금도 하나 퇴색되지 않고 남은 걸 보면, 내가 그 때 꽤나 분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어쨌든, 우겨서 나간 첫 출장은 험했지만, 다 하고 들어왔고, 그 이후로 나도 출장이란 걸 나갈 수 있는 직원으로 인정받아 엄청난 물량이 쏟아지곤 했었다. 그렇지만, 여자에 대한 인식 자체를 완전히 바꾸기는 힘들었던 것 같다.

 

어제 후배를 만났는데, (물론 여자후배) 내가 예전에 다녔던 직장에 이번에 신입으로 들어간 후배다. 그 동안 참 많이 바뀌어서 여자들 수가 상당히 늘었고, 여자들이라고 깔보는 것도 많이 없어졌고... 여러가지 여건들이 참 많이 좋아져있었다. 난 잘되었다고 축하하면서도, 마음 한구석, 참 내가 어려운 시기에 직장생활을 시작했구나 라는 마음이 들었었다. 내 윗선배들은 더했겠지....


내가 이런 생각을 왜 당직을 서면서 하느냐. 지금 사이트에 여자들이 좀 있는데, 당직을 서자고 우리가 먼저 건의를 했었다. PM(프로젝트 매니저)은, 상당히 체념한 듯한 표정으로 "어떻게 연약한 여자들을 당직을 세우냐. 내가 다 할께.." 라고 하셨었다. 그 얘길 듣는데, 참... 여전한 사람도 있구나. 어딜 봐서 내가 연약하냐... 무슨 삽질 하러 나가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우겨서 당직을 서게 된 것. 그 분은 딸이 둘인데, "여자라서 공부 넘 안 시키겠다" 라고 말씀하시는 분이니까...

그냥 든 생각이다. 세상이 엄청나게 바뀌었다고 해도 여전히 예전의 사고방식을 고수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고... 어쨌거나 조금씩 나아지는 것에 위안을 삼고 살기에는 참 인생이 짧구나 싶기도 하고. 좀 편하게 직장생활을 하게 된 후배들을 보면, 그래도 많이 변했지 그러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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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12-09-05 0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전 신입사원 시절 아침 점심 저녁 하루 3번 가래침 범벅인 재떨이 닦던 기억을 죽을 때까지 못 잊을 거에요. OTL

비연 2012-09-05 09:12   좋아요 0 | URL
으으으윽. 정말... 저희 신입 땐 어떻게 지낼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아뜩. 조선인님도 그런 기억이..ㅜ

카스피 2012-09-10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 조선인님과 비연같은신 분들도 계시지만 아직도 회사에선 전 여자니 힘든것은 빼주세요 하는 분들도 계시다고 하더군요ㅡ.ㅡ

비연 2012-09-11 10:28   좋아요 0 | URL
그런 분들도 계시죠.. 요즘 사람들은 좀 더 한 듯.
일례로 저희 회사에 25살짜리 유부녀가 있는데 아이를 가졌습니다. 모성보호 차원에서 정시출근 정시퇴근이 원칙이죠. 그런데 회사가 멀어서 힘들다고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할 프로젝트 사이트에 보내달라고 징징..그래서 보냈더니 그냥 노는 겁니다...그런 분들 보면 정말, 예전에 제가 참고 살았던 게 다 허무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