봐야지 봐야지 하면서 왠지 선듯 안 읽게 되는 책이었다. 후지와라 신야의 이름보다... 제목이 아릿해서였던 것 같다. "돌아보면 언제나 네가 있었다" ... 뭔가 내 맘을 종이에 벤 것처럼 아프게 할까봐 지레 겁을 집어먹었다고나 할까.

 

오늘 출근길에 첨으로 집어들고 나가서 한장 한장 찬찬히 읽어본다. 예상했던 것처럼 그저 마음이 아픈 이야기들은 아니었다. 그냥 먹먹하고 아릿하고. 그렇게 생각하니 내 예상이 반 정도는 맞아들어간 모양이다.

 

세상의 따뜻한 구석들을 찾아내는 시선이 탁월한 후지와라 신야다. 사진도 매우 선명하고 매우 강렬하게 찍기보다 좀 비켜있고, 좀 흐릿하고..

 

 

"부끄러움에도 시효라는 게 있지요?"


사진을  제대로 찍어낼 것 같지 않던 미야마군의 사진들 중 유독 수국 사진만은 마음에 남는 게 의아해서, 수국 사진만 찍는 게 궁금해서 물어보았을 때 미야마군이 내놓은 말이다. 시효가 있는 부끄러움이라. 그저 찰나의 순간 지나친 인연을, 그 느낌을 계속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사람. 신기하게도 그의 그 심약한 열정이 사진에 드러난다.

 

편의점이나 패스트푸드점 계산대에 서 있는 종업원은 복화술을 배운 인형처럼 매뉴얼대로 답변을 하고, 손님 또한 눈앞에 생물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없이 물건을 받아들고, 바람처럼 그 자리를 떠난다. 어쩌면 이런 무색, 무미, 무취의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런 장소에서는 사람끼리 마음을 교류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어느 틈엔가 자기 규제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돌이켜보니, 그런 것 같다. 매뉴얼대로 움직이는 사람들에게 익숙해져서 그게 누구이든 상관없이, 그냥 말없이 스캐너를 물건에 대고 가격을 집어넣고 얼마입니다를 이야기해주면 난 지갑에서 돈을 끄집어 내어 말없이 건네고. 그 와중에 불친절이나 정석대로 움직이지 않는 점이 발견되면, 그 때서야 감정이 발동한다. 불쾌감. 그러니까 그들과 나 사이에는 제로 아니면 마이너스의 감정만 존재하는 것일까.

 

도메 할머니는 모래사장으로 산책을 나와 제로를 보면 "구- 구- 구-" 하며 작지만 정말 자상한 목소리로 부른다. "이리 온, 이리 온, 이리 온" 이라는 뜻인 것 같다. 제로는 먼저 다가가려 하지는 않았지만, 도메 할머니가 다가가도 도망가지 않았다. 그런 광경을 보며, '그녀는 제로를 교통사고로 숨진 아들이 다시 태어난 것으로 여기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살아있는 것의 마음은 참으로 신묘하다.

 

날갯죽지가 꺾여 날지 못하는 갈매기와 아들을 잃어 마음의 한 쪽이 허물어진 할머니가 만나 교감을 나누는 장면은, 상상만으로도 슬프고 아련하다. 동물과 사람이라 해도, 다 같은 생명일지라서 그들간에는 감정의 선이 이어지는 걸까. 어쩌면 사람과 사람이 만나 이루는 소통보다 말이 통하지 않는 두 미물들간에는 저 심연에서 우러나오는 본질적인 교감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

 

이렇게 주변에 사는 사람들의 수많은 사연들이 사진들과 함께 보여지는 책.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나는 반가움을 느낀다. 차분해지고 고요해지고... 인생을 좀더 다정하게 바라보게 된다. 세상이 아무리 삭막해도 사람 사는 모습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아서, 애써 외면하려고 해도 우리는, 작은 것에서 기쁨을 얻고 사랑 받는 것에서 존재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 마음과 마음은 어디에선가 이어져 배려와 헌신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고.

 

 

 

 

 

 

 

 

 

 

 

 

후지와라 신야. 책도 좋지만, 아마도 .... 그 자신도 좋은 사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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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12-07-10 0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지와라 신지의 인도방랑은 인도여행을 앞두고 읽어본 책인데 재밌는 점은 오래전에 쓰여진 저 책과 현대의 인도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에 있더군요.

비연 2012-07-10 09:37   좋아요 0 | URL
아... 인도는 변함이 없는 걸까요.. 후지와라 신야의 인도방랑은 꽤 유명한 책이라.. 저도 읽어볼까 해요^^

라로 2012-07-10 0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끄러움에도 시효가 있을까요???

비연 2012-07-10 09:38   좋아요 0 | URL
뤼야켈레벡님... 있을까요..? 저도 한참 생각했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