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기운이 세다. 엄마가 일주일 전쯤 감기가 걸리셨는데 병원을 계속 다니셔도 쉽사리 낫질 않으시더니 급기야 나도 걸린 느낌이다. 머리도 아프고 몸도 노곤하고 코랑 목이 아프고. 낼 모레 일본 출장이 예정되어 있어서 (그것도 한달이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어제 오늘 많이 쉬었다. 좀 나은 것 같기는 하지만, 긴장해서인지 아니면 감기의 기세가 등등해서인지 아주 개운한 맛은 없다.
역시나 쉴 때는 침대에 데굴거리면서 보는 독서가 제 격이다. TV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는 밥 먹을 때 엄마와 보는 프로그램 빼고는 쉰다고 TV를 찾아서 보지는 않게 된다. 결국 뭐..자다가 보다가 하면서 어제 오늘 읽은 책이 세 권이다.
아우슈비츠 등의 수용소를 경험했던 오스트리아 출신의 의사 빅터 프랭클이 그 체험담과 그로부터 끌어낸 자신의 이론을 쓴, 꽤 오래 전 책이다. 이시형 박사가 번역을 했다. 수용소 생활을 하고 극적으로 살아남은 사람들 중에 글을 쓴 사람들이 여럿 있다. 나는 프리모 레비의 글을 좋아하는데, 이 분이 아니라도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람들이 꽤 된다. 그 혹독한 수용소 생활에서는 자살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그 고초 다 겪어내고 이제 평온한 생활 속에서 글을 쓰며 살아가고 있는데 어느덧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다는, 아니 끊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참 무섭고 아이러니했다. 빅터 프랭클은 그런 일상의 위기에서도 벗어나 93살까지 장수한 분이다. 사람이 자신의 알몸 외에는 아무 것도 남겨진 것이 없을 때, 그리고 매일 매시간 매분 매초 죽음을 직면하고 있을 때 어떠한 심리상태가 되는가. 그 속에서도 사람은 동물이기 이전에 사람이고 따라서 의미를 찾는 생활을 통해 목숨을 연명해나갈 수가 있다. 어찌보면 긍정적인 마인드라고 일반적인 단어로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실존적인 상황에 어울리는 말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자신을 사랑했던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잊지 않고 자신의 존재적 의미를 붙잡고 놓지 않는 사람만이 희망을 잃지 않고 그 혹독한 상황에서도 자신을 지킬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무서운 아우슈비츠 등의 수용소에서도 그것은 통하더라는 것. 그것은 읽는 내내 너무나 감동이라 믿기가 어려웠었다. 따라서 빅터 프랭클 박사는 프로이트적인 정신분석학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이론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인간은 쾌락만을 쫓는 것이 아니며 과거의 어떠한 성적인 외상에 의해 평생을 지배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재적인 요구와 소망과 의미추구에 의해 생활을 질적으로 풍요하게 할 수 있다는 이론이다. 어떤 이론이 맞다 안 맞다 얘기할 수는 없겠지만, 체험에서 나온 글은 가슴에 뻐근하게 다가온다.
요코미조 세이지. 사자마자 꼭 봐야지 하면서 잡아든 책이다. 후기의 걸작이라고 평가받는 이 <삼수탑>. 근데...좀 실망이었다. 숱한 우연의 일치와 격한 로맨스, 그리고 너무나 뻔한 결말. 게다가 긴다이치 코스케는 처음과 끝에만 나온다는. 로맨스가 많이 나온다는 게 이색적이라고 할 수는 있었겠지만, 추리의 묘미도 떨어지고 인간들의 심리적인 부분의 묘사도 미흡하고 그저 두 남녀의 사랑이 주안점이 되어 어떠한 역경도 사랑으로 이겨내리..뭐 이런 내용? 게다가 사랑한다고 처음에 여자가 그다지 원하지 않는 상황에서 도장이라도 찍듯이 남자가 억지로 관계를 맺는 장면은 현대의 우리로서는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장면이었다. 흠....아뭏든 다른 작품들에 비해서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는 않은 작품이었다고 한 마디.
박민규. 이 사람의 작품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적어도 내게는.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이라는 소설에서 처음으로 만났는데 읽고 나서 아하. 싶었었다. 이거 몇 권의 작품을 한번 더 읽어볼 만 하겠는걸? 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중에서 고른 게 이 작품이었다. 사랑이라는 소재로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나갈까 이런 의구심에서 고르게 되었던 것 같다. 천하 박색의 여자. 그래서 어려서부터 누구에게나 멸시를 받고 잉여인간으로 취급받아온 나머지 마음에 깊은 상처를 안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사랑받는 것도 감히 해보지 못했던 여자. 그런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한 남자가 있었다. 배우랍시고 출세한 아버지의 버림받은 아들. 대학도 갈까 말까 결정 못 한 채 우연히 만난 아르바이트 자리에 뜻없이 몸담고 있는 남자. 아버지를 닮아 생긴 건 반반해서 백화점 미스터 아르바이트에 뽑히기도 한 그 남자가 천하 박색의 그 여자를 19살의 나이에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는 요한이라는 남자가 자리한다. 서로 머뭇거리고 서로 수줍어하는 연인의 사이에서 메신저가 되고 사랑을 꽃피우게 도와주던, 또 하나의 상처 투성이 남자. 이 작품은 이 세사람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정말로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이다. 사랑이야기가 아름답다는 거, 뭘까. 모든 사랑이야기는 아름다울 수 있으나, 이 책에서 나오는 사랑은 그 무엇보다 서로의 상처를 말없이 보담는 진실이 담뿍 들어가 있어서 서로에게 빛을 발하게 하고 그래서 천하 박색의 그 여자가 '인생'을 살아갈 힘을 얻게 하는 그런 사랑이었다. 그래서 진하고 깊고..잊혀지지 않는 그런 사랑이었다..박민규의 관심사는 대부분 상처를 가진 사람들, 사회의 소수자들에게 가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의 인생이 대역전홈런을 터뜨리게 되는 개연성 없고 현실설 결여된 결론으로 절대 유도하지 않는다. 씁쓸한 인생의 길에서, 어쩔 수 없이 사회라는 곳에 귀속되어 있는 사람들로서 이러저러하게 그 상처가 옅어지고 쓰다듬어지면서 살아가게끔 한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항상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은 모두 보통 사람들, 어쩌면 사회의 주변인물에 가까운 사람들이다. 그래서 읽는 사람들에게 몰입하게 한다. 대부분이 인생을 살면서 세상의 주역이라고 느끼지는 않을 게다. 늘 액세서리이고 그래서 늘 당하고 있고 그러나 힘이 딸려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그런 평범한 사람들이기에 박민규의 소설을 읽으면서 동감을 하게 된다...그리고 이 책은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진실한 사랑을 너무나 아름답게 이야기하고 있다.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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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세권을 후다닥 읽고 나니 일요일의 밤이 깊어가고 있다. 이제 좀 나아진 몸을 이끌고 남은 일을 하기 위해 책상 앞에 앉았다. 요즘은 그런 생각이 많이 든다. 사는 게 뭔지.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들이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남들이 한다고 나도 다 따라하는 게 옳은 삶인지. 그리고 인생은 참으로 쓸쓸하고 적막한 것이구나 라는 뜻없는 감상에 젖어보기도 한다. 물론 나락에 떨어지는 감상은 아니고, 그냥 담담하고 건조한 감상일 뿐이지만. 날이 추워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