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어릴 적을 생각하면 기억나는 나무가 하나 있다. 모질고 긴 겨울 내내 도전적인 초록색을 자랑하며 우뚝 서 있던 푸른 빛이 도는 은청가문비였다. (p46)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그런 나무가 있다. 아니, 식물인가. 어딘가에 딱 고정되어 나의 어릴 적 추억을 함께 한 것은 아니고 그냥 그 품종이 내게 와닿는 식물. 코스모스.

 

왠 코스모스? '코스모스 한들한들~' 노래 부르던 김상희씨가 생각난다.. 고 한다면 그건 연식 드러나는 얘기고 내게 이 코스모스라는 식물은 외로움을 달래주던 존재였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전학이란 걸 한 내가, 겉으론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다녔지만 속으로는 외롭고 외로와서, 학교 가는 길 길을 따라 쭈욱 피어있던 코스모스 분홍빛 꽃에 위안을 받았다는 이야기다.

 

예전 학교와 달리 전학온 학교의 아이들은,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더 깔끔하고 더 잘 살고 더 좋은 부모 밑에서 성장한 것 같은 아이들인데 참 못된 애들이 있었다. 동끼리 나눠서 서로 욕을 하고 (정치꾼들처럼 이 동에서 반장이 나오면 저 동에서 다음 반장이 나와야 한다 이런 걸로 싸우더라는) 친구 쟁탈전을 벌이고... 그 동네에 원주민이라 불리던 아이들을 괴롭혔다. 원주민이라니. 내 귀를 의심했었는데.. 그러니까 그 동네가 개발되기 전에 원래 살던 사람들이 거의다 이사를 갔음에도 남아 있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우리 반에도 여자아이 한 명이 있었다. 장의사 집 딸이었고, 집에서 잘 돌봐주지 않는지 항상 지저분한 행색으로 학교에 나왔고 공부도 잘 하지 못했었다. 그 아이를 어찌나 사악하게 따돌리고 괴롭히는지.. 순진했던 나는, 너무 놀라고 무서워서 한 학기 정도 학교에서 거의 말을 하지 않으며 지냈다. 그 전 학교에서는 난다 긴다 했던 나였는데 말이다. 어쨌든 그 아이는 결국 못 버티고 전학을 갔고.. 난 학교 아이들한테 정을 못 붙인 채 겉도는 한 학기를 보냈었다. 아침마다 학교 가기가 정말 싫었는데, 그 길가에 핀 코스모스를 바라보며 참고 갔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요즘도 코스모스를 보면, 그 때 생각이 아주 선명하게 난다. 그 때의 괴로움, 무서움, 불안함... 그리고 위안이.

 

 

모든 시작은 기다림의 끝이다. 우리는 모두 단 한 번의 기회를 만난다. 우리는 모두 한 사람 한 사람 불가능하면서도 필연적인 존재들이다. 모든 우거진 나무의 시작은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은 씨앗이었다. (p52)

 

좋은 글이다. 그냥 말했으면 그저 그런 잠언에 불과했겠지만, 이 작가의 말은 식물을 바라보며 과학을 바라보며 느끼는 감성을 아주 담담하게 그려내어서 마음에 와 닿는다. 소란스럽고 야단스러운 걸 싫어해서인지, 작가의 글이 좋다. 과학자로서, 여성 과학자로서의 고충을 그려낸 부분도 좋다. 아니 사실 아리다. 어디나 참 마찬가지다. 우리나라만 그런 게 아니라는 게 어떨 땐 위로이고 어떨 땐 고통이다. 세상에서 진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어딘가는 훨씬 나은 상태여야 하지 않는가. 여성으로 태어나서 느끼는 건 왜 비슷할 수 밖에 없는 건가. 라는 약간의 좌절감도 스민다. 관련해서 사둔 몇 권의 책이 나를 째리고 있다. 읽을 책이 많구나. 할 일도 많고. 지치고 힘들지만, 그래도 이럴 때가 좋은 거겠지, 라며 스스로를 다독여본다.

 

 

 

 

 

 

 

 

 

 

 

 

 

 

 

 

 

 

 

일이 대충 끝난 후, 연말 연초에는 일이 주 독서만 하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어디로 가든, 집에 쳐박히든. 사람들의 말이, 글이, 영상이 주는 재미가, 다 나의 시간을 그냥 잡아먹는 건 아닌가 두려울 때가 있다. 잠시 내 안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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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11-03 10: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랩 걸 참 좋지요? 저는 특히나 같이 연구하는 이성 동료와의 관계가 인상적이더라고요. 그 부분에 되게 집중해서 보았던 기억이 나요.

라로 2020-11-03 12:26   좋아요 1 | URL
저두요!!

비연 2020-11-03 14:23   좋아요 0 | URL
반 쯤 읽었는데, 재미있네요. 독특하고. 이성 동료와의 얘기는.. 부럽다 부럽다 하면서 보고 있어요.
인생의 소울메이트랄까. 성적인 끌림 없이 그렇게 일에 파묻혀 서로를 보완하고 지지하는 관계. 멋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