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부터 러시아 작가 -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푸쉬킨, 체호프, 투르기네프, 고리키 등등 - 들을 좋아해서 그 작가들의 유명한 작품은 거의 다 읽었노라 생각했는데, 흠? 니콜라이 레스코프 라는 낯선 러시아 작가 이름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 책제목이 <레이디 멕베스>. 러시아 작가 가운데 가장 러시아적인 작가라고 했고 톨스토이도 인정했다고 했고. .그래서 두말없이 샀다.
대부분의 러시아 작가 소설들은 진지하고 무거운 편이다. 체호프 정도가 좀 농밀한 유머와 뒤틀림의 중단편들을 써내지, 다른 작가들의 작품은 진지하다 못해, 어떤 것은 머리에 끈을 두르고 읽어야 할 정도로 심오하고.. 길다... 그래서 두 번 읽고 싶어, 라고 덮은 책도 두 번 읽으려고 마음 먹기가 쉽지 않다는 것. 그런데 이 레스코프라는 작가는 시종일관 아주 해학적이다. 이걸 노어노문학 하는 사람이 원문으로 읽었다면 더 마음에 와닿는 러시아적인 소설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투리도 들어갔을 것이고 단어들도 한국어로는 표현이 안되는 유머가 녹아 있지 않을까... 어쨌든, 이 책에 수록된 <레이디 멕베스>와 <쌈닭>은 가볍고 재미있지만 각 작품의 주인공인 여성들의 삶은 매우..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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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멕베스>의 주인공인 카테리나 리보브나는 가난한 집에 태어나 나이가 두배는 차이나는 잘 사는 상인집에 시집을 왔다. 90이 다 되어가는 시아버지와 50대의 남편은 일하느라 정신이 없고 게다가 아이도 생기지 않아 카테리나는 매일을 무료하게 여기저기 왔다갔다 하며 지낸다. 그러다가 문득, 산책하던 중 하인들과 어울리게 되고 거기서 세르게이라는 잘생긴 청년을 알게 된다. "키며, 얼굴이며, 어떤 여자든지 원하기만 하면 금방 꾀어내어 결국 일을 치르고 마는 도둑놈이자 비열한 변덕쟁이"인 세르게이의 유혹에 홀랑 넘어가버린 카테리나는 남편이 멀리 나가 있는 사이 세르게이와의 환락에 푹 빠져 지내게 된다. 그렇게 지내던 중, 시아버지에게 들켜버렸고 그래서 노환처럼 시아버지를 독살해버린 후 소식을 듣고 달려온 남편도 함께 묻어버리고... 이제 다 해결되었나 싶었더니 유산 공동상속인이라고 먼 친적 아이가 나타나 이들을 방해하니..
"잘 들어, 세료자! 다른 여자들이 어땠는지 나는 알 바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아. 단지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은, 물론 내가 너를 원하기도 했지만, 네가 나를 유혹했기 때문이고, 또 네 술수 때문이란 사실은 너도 알고 있겠지. 그래서 하는 말이지만 만약에, 세료자 네가 나를 배신하거나, 내 대신 다른 여자를 택한다면, 나는, 결코 살아서는 너와 헤어지지 않을 거야." (p41)
사실 이 남자가 죽일넘인데.. 주변 여자들만 놀아남을 당하고 버림을 받고 죽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고... 이런 구도가 좀 못마땅한 면이 있다. 이 남자를 죽이면 다 끝나는 건데 말이다. 어쨌든 카테리나의 마지막 선택은, 찝찝한 구석이 있다. (더이상은 스포일이라 말하지 않겠다는..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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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쌈닭>은 더하다. 돔나 플라토노브나라는 한 여성이 등장하고 이 여성은 원래 직업은 레이스 파는 사람이지만, 페테르스부르크 온 동네를 헤집고 다니며 오지랖 넓게 살아가는 사람이다. 중매쟁이가 되기도 하고 물건을 알선하기도 하고 돈을 구해주기도 하고 이런저런 인력들도 구해주고, 심지어는 능력 안되는 여성들을 돈많은 늙은이들에게 알선하는 역할까지도 자청하고 나선다. 뭔가 매우 사악한 기운으로 그러는 게 아니라, 자기 딴에는 이게 최선이라고 생각해서 정말 최선을 다한다고나 할까. 그런 작업들을 자신의 작품인 양 사랑하고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모양새다.
돔나 플라토노브나가 이 작품의 '나'라는 남자에게 썰을 푸는 내용들은 읽어보면 꽤 재미있다. 황당한 일들도 있지만, 말하는 내용이 재미있어서 그냥 쭈욱 읽어나가게 된다. 한없이 오지랖이 넓어서 돈도 많이 못 모으고 그렇지만 별로 개의치 않게 살고 그러나 자기가 뿌린 일들에 늘 배신당한다고 생각하는 여자. 늘 당당하고 수다스러운 여자. 자신의 일에 자부심이 있는 여자. 그게 돔나 플라토노브나였다. 그리고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여자였다.
"돔나 플라토노브나! 오래전부터 묻고 싶던 것이 있는데 말이에요. 당신은 젊어서 남편을 잃고 혼자가 되었는데, 정말로 한번도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준 적이 없었나요?" 내가 말했다.
"마음을 주다니,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누군가를 사랑한 적이 없었느냐고요?"
"정말 어리석은 소리를 하는군!"
"왜 어리석은 말이에요?" 내가 말했다.
"그게 왜 어리석은 말이냐 하면, 그런 사랑 이야기 같은 것은 도와주는 사람이나 살펴 주는 사람이 있는 사람한테나 걸맞은 것이기 때문이야. 혼자인 나는, 언제나 나 스스로를 부양하고, 언제나 절약을 밥 먹듯이 하며 살지. 그런 것은 전혀, 정말이지 생각조차 할 겨를이 없다니까."
"정말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고요?"
"눈곱만큼도 없었지! 그리고 또 자네니까 하는 말인데, 사랑이란 모두 쓸데없는 짓이야. 사랑에 빠졌다는 사람들은 이런 정신나간 말들을 하곤 했지.
'아, 죽을 것 같아! 그 남자 없이는 혹은 그 여자 없이는 살 수 없어!'
그것뿐이야. 내 생각에 사랑이란 남자가 여자를 잘 도와주는 것, 그게 바로 사랑이라고. 그리고 여자는 모름지기 언제나 자기 몸 잘 건사하고 정숙해야 되고." 돔나 플라토노브나가 손톱을 비비면서 덧붙였다. (p267-268)
이랬던 돔나 플라토노브나의 말로를 보면, 뭔가를 너무 부정하며 산 사람에게 그 무언가가 갑자기 들이닥칠 때 와르르 무너지기도 하는 게 아닌가 싶다. 닫혔던 마음이 급격하게 부서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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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 아주 맞는 스타일의 책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뒤의 작가 해설을 보니 흥미가 좀 돋는 책들도 있어서 번역된 것들을 보관함에 담아둔다. 내 느낌엔, 이 사람은 마치 .. 우리나라로 말하면 김동인의 느낌이랄까. 그리고 요즘 들어 고전을 읽다보면 늘상 드는 생각인데, 참 어투나 문체나 고풍스럽고 템포도 많이 느리구나 싶다. 요즘 태어난 아이들이 이런 고전을 읽어내려면 많이 힘들겠다 싶기도 하고. 세상이 너무 많이 바뀌었고, 물론 인간의 본질은 바뀌지 않는 법이니 고전은 영원하겠지만, 어쩌면 아이들한테는 새로운 요즘 세대의 고전이 필요한 지도 모르겠다 라는 뜬금없는 생각도 해본다.
졸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