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함께 읽기로 하지 않았다면 난 이 저자도 책도 아예 모르고 살았을 확률이 높다. 그리고 그랬다면, 이 혁신적인, 말하자면 튀는 생각을 접할 행운도 놓쳤겠지. 정말 다행이다 싶다.
나는 뭐든 좀 다르게 보는 걸 좋아한다. 예전에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태평양의 끝>이란 책을 읽었을 때도 그랬다. 우리가 아는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 이야기는 백인 남성이고 서양인이고 영국인이고 기독교도인 로빈슨 크루소가 무인도에 떨어져 살아남는 생존기이며 모든 이야기는 그가 중심이다. 거기 나오는 원주민 격인 프라이데이(프랑스말로는 방드르디)는 그냥 곁다리로 등장하고 심지어 서양문물에 경도되는 내용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미셸 투르니에는 이 생각을 뒤집어서, 방드르디의 입을 통해 이야기를 하고 그의 사는 방식에 로빈슨 크루소가 따라가게 된다는 내용의 소설을 썼다.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의 충격이랄까, 놀라움이랄까. 내가 이제까지 알던 소설을 이렇게 뒤집어 쓸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관점을 달리 하니 그 내용이 이렇게 바뀔 수 있다는 것, 무엇보다 어쩌면 우리는 백인에 서양인에 영국인에 기독교도인 사람을 세상의 중심으로 보는 데만 익숙했지, 원주민의 세상은 그냥 주변으로만 보는 경향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던 그 순간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이런 역발상 혹은 혁신적인 관점으로의 전환을, 나는 매우 사랑한다.
이 책 <모니크 위티그의 스트레이트 마인드>도 마찬가지다. 이제 70페이지 남짓 읽었는데도 그 예상치 못한 관점과 생각에 완전히 매료되어 버렸다. 찬성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아 나의 고정관념이 이정도구나. 이 저자가 말하는 내용을 자꾸 훼방놓고 있는 내 머릿속의 그 고정관념을 계속 느끼게 된다. 그 과정 속에서 내가 refresh 되는 느낌을 함께 가진다.
그러므로 성(sex)은 없다. 억압받는, 그리고 억압하는 성이 있을 뿐이다. 성을 생산하는 것은 억압이며, 그 반대가 아니다. (p45, <성의 범주> 중)
그리고 진실로, 여성의 투쟁이 없는 한, 남성과 여성 사이의 갈등은 없다. 예상되는 비율에 따르면, 재생산 신체 노동까지 더해서 사회적 일의 4분의 3을 수행하는 것은 여성의 운명이다. 살해당하고, 절단당하고, 물리적으로 정신적으로 고문당하고 학대당하고, 강간당하고, 얻어맞고, 결혼을 강요당하는 것이 여성의 운명이다. 운명은 아마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여성은 자신들이 남성에게 완전히 지배당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마침내 그 사싱르 인정했을 때 여성들은 그 사실을 "믿지 못한다." ..(중략).. 남성은 자신들이 여성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지배하도록 훈련되었다. 남성은 그 사실을 항상 표현할 필요가 없다. 인간은 자신이 소유한 것에 대한 지배를 거의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p47, <성의 범주> 중)
남성과 여성의 성을 나누는 것 자체에서, 지배와 억압은 시작된다는 것. 그리고 남성은 그 관점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반대의 성을 지배하고 있다. 그게 지배라는 걸 알지만 구태여 되새김질 할 필요 없이, 그냥 자연스럽게 태생적으로. 누가 성별을 자연적인 것을 만들고 그로 인한 억압 구조를 만들어내어 받아들이게 했는가. 이를 거부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어쩌면, 지금 일어나는 이 모든 사안들이 이런 기저에 깔린 생각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대의적으로는 이론을 말할 수 있는데 생활적인 측면에서는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남성'이라는 성별이 가지는 거대한 억압 기제를 뿜어내는 지도 모르겠다.
성은 여성이 벗어날 수 없는 범주이기 때문에 성 범주는 인구의 절반을 성적 존재로 만드는 이성애 사회의 생산물이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 (공적 영역에서 일하는 것을 포함해서) 여성은 남성에게 성적으로 접근 가능한 것처럼 보여야 하고 (만들어져야 하고), 가슴과 엉덩이, 옷은 반드시 가시적으로 드러나야 한다. 여성은 노란별을 달고 늘 밤낮으로 웃어야 한다. 결혼을 했든 안 했든 모든 여성은 강압적인 성적 서비스를 한다. (p52, <성의 범주> 중)
성 범주는 여성에게 딱 붙어 있기 때문에, 여성은 범주 밖에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여성은 오직 성, 그 성이다. 그리고 성이 여성의 마음, 몸, 행동, 제스처를 만든다. 심지어 살인과 구타도 성적이다. 정말로 성 범주는 여성을 꽉 옭아매고 있다. (p53, <성의 범주> 중)
여전히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적인 성별에 매여 있는 나는, 자꾸만 헷갈린다. 성별이 없다면 범주를 어떻게 나누지? 만약 범주가 필요하다면, 그 이외에 뭐가 있지?.. 그런 게 무슨 걱정이겠는가. 세상에 존재하는 생물학적 양태를 펼쳐놓고 구분하면 되는 거지, 필요한 경우에 한해. 뭐든 두 개로 쪼개놓으면 대결 구도가 되고 누군가가 누군가의 위에 서는 구조를 형성하게 된다. 아마도 이 성별이라는 문제 자체가 그래서 남성과 여성의 이 어이없는 구조를 만들어냈는가 싶다.
그래서 저자는, 용감하고 과감하게 시몬 드 보부아르의 "누구도 여성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라는 명제를 비판한다. "여성이라는 성별 자체가 없다." 라고 얘기한다. 그 성별이 있는 것부터가 모든 문제의 온상이므로. 따라서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과 이성애와 동성애라는 이분법 자체를 배격하고 레즈비언으로서의 정체성을 문제로부터의 탈출 trigger로 잡는다.
어렵고 잘 안 읽혀지지 않는 책이지만, 읽을수록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아름답다. 기존 관습에 대한 도전, 고정 관념의 전복, 그리고 당당하게 이를 벗어나고자 하는 논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