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이런 소설은 이틀이면 뚝딱이다. 템포가 느린 책이나 머리를 많이 써야 하는 책을 읽고 나면 이렇게 속성으로 읽을 스릴러/추리소설이 내겐 필요하다. 그래서 머리도 좀 쉬어가고 (너무 맨날 쉬는 건 아닌지..;;;) 짜릿한 긴장감도 느끼고... 이번엔 뭘 읽을까 책장에서 한참을 고르다가 이 책을 골랐다. 도나토 카리시. <속삭이는 자>의 저자. 그리고 이 책은 그 속삭이는 자의 두 번째 이야기. 두 번째라니까.. 또 뭔 얘기인가 싶은 호기심이었지 뭐. 근데, 이 사람 책 진심 무섭다.

 

<속삭이는 자>에서 나왔던 밀라 바스케스 형사. 그녀는 그 이후 '림보'라고 불리는 실종전담반으로 옮겨 근무 중이다. 그 곳은 길 잃은 자들의 집합소요, 생사를 알 수 없는 실종자를 담당하는 부서로, 아무도 관심없고 주목도 받지 못하는, 소외된 부서이다. 원래는 세 명이 있었으나 그 중 한 명도 실종자가 되는 바람에 스티프 팀장과 같이 둘이 근무하고 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옛 동료인 보리스 형사가 이 곳을 방문하면서 심각한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일가족 살인사건이 났고 그 범인이 일부러 자신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한 아이를 살려 알리기까지 했는데 그가 17년 전 실종되었던 로저 밸린이었다는 것. 17년 동안 어딘가에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 살인을 저지르고 심지어 자기가 죽였다고 광고까지 하는 상황. 그리고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계속해서 단서를 주는 범인들로 인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실종자들에 의한 살인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된 경찰들. 그리고 밀라. 앨리스라는 딸 때문에 이제 이런 사건에 휘말리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말려들게 되고 그 와중에 사이먼 베리쉬를 알게 된다. 지금은 면담전문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 예전의 어떤 비리 사건으로 인해 동료 경찰들에게 소외되고 왕따당하는 경찰. 스티프 팀장이 알려주어 찾아가보니, 그러니까 베리쉬는 그 옛날 연쇄살인 사건을 쫓고 있었고 그 사건들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밀라를 통해 알게 되면서, 둘은 알게모르게 한 팀이 되어 범인을 쫓게 된다.

 

순간, 악의 논리에 관해 베리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인심을 베푸는 것은 그걸 행하는 사람의 양심을 달래주는 행동일 뿐, 그 인심을 받는 사람을 위한 진정한 선행은 아니라는 말. 왜냐하면 그 노숙자가 그 돈으로 따뜻한 밥 한 끼를 사 먹는 대신 술을 사 마시면 오히려 그의 삶을 나락으로 밀어 넣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p307)

 

집 근처 골목길에 기거하는 노숙자에게 늘 저녁거리를 가져다 주던 밀라가 어느날 저녁거리를 사 오지 못해 동전 몇 개를 그의 발치에 놓으면서 한 생각이다. 도나토 카리시는, 악이라는 것, 인간의 본성에 내재한, 그리고 전염처럼 퍼지는 그 악이라는 것에 대한 관심을 계속 가지고 있는 작가이다. 끈질기고 무섭게, 아주 집요하게. 그리고 이 책에서는 그 악이 '카이루스'라는 이름으로 다가온다. 이름이 있으나 그 전사들은 이름이 없다. 

 

여전히 밀라를 괴롭히고 밀라의 마음 속에서 그녀를 어둠으로 이끄는 '속삭이는 목소리'는 남아 있다. 심지어 '속삭이는 자'도. 직접 누군가를 죽이지 않아도 죽이게끔 말하는 목소리로 존재하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소름끼치는 일인가. 이 책의 말미로 가면 갈수록 그만두고 싶어질 정도로 무서웠다. 그리고 사건의 진상이 드러났을 때... 으악. 그리고 더 한 것은 책의 제일 마지막 부분. 스포일러는 되기 싫으니 말은 못하겠지만, 덕분에 어제 밤에 잠을 설칠 지경이었다. 왠만하게 잔인하고 무서운 소설들을 접해도 끄덕도 않는 나인데 도나토 카리시의 소설을 읽고 나면 이상하게 등골에서 오한이 스민다. 도나토 카리시의 다른 작품들도 더 있는데 이건 읽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아직 안 샀기 때문에 고민 좀 해보련다.

 

 

 

 

 

 

 

 

 

 

그리고 다음 책은 이거다. 마야 안젤루의 <새장에 갇힌 새가 왜 노래하는지 나는 아네>. 제목이 정말 마음에 든다. I know why the caged bird sings. 첫 몇 장 읽어 보니, 금새 읽을 느낌이다. <흑인 페미니즘 사상>을 읽은 이후, 흑인 여성들의 소설에 부쩍 관심이 많이 간다. 겹겹의 차별 구조에서 살아간 사람들의 책에서,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느낌을 좀더 섬세하게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을 읽고 나서는 <컬러 퍼플>을 읽어야지. 아.. 읽어야 할 책들이 시리즈로 등장하는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만에 오늘은 책을 사야겠다. (간만 맞아??) 책을 산다고 생각하니, 조금 들뜨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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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6-18 11: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을 산다는 비연님을 응원합니다! (응?)

저도 마야 안젤루 읽어야 하는데, 마침 집에 있기도 하고요. 후훗.
도나토 카리시 소설은 첫번째 작품이 제일 좋다고 해서 저도 속삭이는 자만 읽고 말았었는데, 이름없는 자도 읽어봐야겠어요. 저도 힘들고 어려운 책, 머리 쓰는 책 읽고 나면 후루룩 넘어가는 소설 읽고싶더라고요. 그냥 이야기에 푹 빠져서 넘길 수 있는 책이요. 그래서 저런 스릴러 책들은 일단 많이 사둬야 합니다!!! 우리가 괜히 그러는 게 아니에요! 책 사고나면 인증해주세요~ 후훗.

비연 2020-06-18 11:53   좋아요 0 | URL
저는 개인적으로 <이름없는 자>도 재미있었어요... 라지만 너무 무서운...ㅜㅜ
스릴러 책들은 나오는 대로 사는 저로서는, 으헝~ 다락방님 댓글에 완전 힘 나네요 ㅋㅋㅋㅋㅋ
책 사서 오면 인증샷 올릴게요~

저도 책 사는 다락방님을 응원합니다~ (응?.. 크크)

다락방 2020-06-18 11:54   좋아요 1 | URL
저 방금 [이름 없는 자], [미로 속 남자] 다 질렀어요! >.<

나는 미쳤어!!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비연 2020-06-18 12:13   좋아요 0 | URL
오오오오오옷!!!!!!

유부만두 2020-06-18 13: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삼부작 질렀어요;;;
안개 속 소녀 라는 영화도 있네요?
이건 작가의 다른 소설 영화판이군요.

비연 2020-06-18 13:35   좋아요 0 | URL
지르셨군요..ㅎㅎ;;;
<안개 속 소녀>라는 영화는 도나토 카리시가 직접 감독했네요!
같은 소설을 자기가 영화로 만든 듯.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71927

단발머리 2020-06-19 20: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추리소설을 즐겨읽으시는 비연님이 참 신기하고 부럽고 그렇습니다. 저는 비연님 글만 읽어도 막 무서워질려고 그래요. 경찰과 살인, 미지의 사건과 단서. 그리고 마지막에 범인 검거의 그 구성요소들도 너무 멀게 느껴지고요.
마야 안젤루의 저 책은 진짜 금방 읽을 수 있는 책인데, 전 아껴 읽었어요. 작가님이 돌아가셨다는 걸 아는데도 너무 만나고 싶고 그러더라구요. 책 사시면 인증샷 올려주세요. 가장 핫한 사진이라면 책사진 아니겠습니다. 하하하.

비연 2020-06-20 19:18   좋아요 0 | URL
추리소설은... 좋아하기 시작하면 참으로 놓을 수 없는... 무서워도 또 보게 되는... ㅎㅎ;;;
마야 안젤루의 책은, 놀랍습니다. 어떻게 그리 쉽고 솔직하면서도 많은 것을 담아 낼 수 있는 것인지.
저도 한줄 한줄 놓칠새라 읽고 있어요^^ 책 인증샷 사진은 곧곧..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