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적게 먹어야 한다. 읽을 책은 산더미 같고 심지어 내 책장에 꽂혀서 읽어달라고 아우성치는 책도 수없이 많은데 술먹고 헤롱거리다가 며칠 보내면 독서를 못했다는 죄책감까지 더해져 아주 ... 별로가 된다, 기분이. 지금이 그런 상태. 요즘 손에 쥐고 있는 책만 해도 세 권인데... 오늘 겨우 꾸역꾸역 한 권을 끝냈다. 애나 번스의 <밀크맨(Milk Man)>. 이 책을 읽고 나니 더 후회가 된다. 아 벌써 읽었어야 했는데 이제야 다 읽고는, 좋았다고 페이퍼를 쓰다니. 아 정말 비연이란 인간...

 

 

 

 

 

 

 

 

 

 

 

 

 

 

 

 

 

 

이 책은, 1인칭 화자인 내가 12년 전 열여덟 살이었을 때를 회상하며 쓴 내용이다. 아일랜드의 적대적인 관계를 배경으로 했다고는 하지만 (저자가 북아일랜드 출신) 고유명사를 하나 쓰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 그냥 가상의 공간이라고 해도 믿을 만하다. 그래서 그 위에서 우리는 많은 상상을 할 수가 있고 나의 해묵은 기억을 들쳐내보일 수도 있다. 

 

이쪽과 저쪽이 대립하는 시기, 반대자라고 찍히면 쥐도 새도 모르게 제거당할 수 있는 시기,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곳. 억압과 통제가 빈번하고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소문과 비밀이 무성한 곳. 화자가 살고 있는 시기와 장소가 이렇다. 특히나 반군의 우두머리 격인 '밀크맨'에게 소위 말해 찍힘을 당한 주인공은 알게 모르게 조여오는 폭력에 대한 두려움에 매일이 너무나 힘들다. 더구나, 아무 일도 없었음에도 사람들의 소문에는 발이 달리고 날개가 달려, 벌써 그와 잤고 그의 정부가 되었고 그래서 '어쩌면-남자친구'와의 관계는 변절이라고 수근덕거리고 주인공은 엄마마저도 자신을 믿지 않는 가운데 고통을 견디고 두려움에 떤다. 이 이야기의 큰 줄기 위에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간다. 정치와 역사와 사회와... 그 수많은 이야기들의 날실과 씨실이 얽히고 섥히는 것을, 너무나 서사적이면서도 감정은 배제된 채 사실만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이 소설은, 누군가가 말했듯이 사무엘 베케트의 방식과도 유사하다 할 수 있겠다.

 

여기까지 말하고 엄마는 결혼의 의무에 대해, 로맨스에 대한 갈망과 현실 여성의 목표를 혼동하는 어리석음에 대해 설교하기 시작했다. 행복을 누리려고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고, 결혼은 신의 명령이고 공동체적 소임이자 책무이고 나이에 걸맞은 행동이고 맞는 종교의 아이를 낳고 의무와 한계와 제약과 구속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 (중략) ... 엄마는 이런 입장에서 한발도 물러서지 않았지만, 그래도 나는 나이 들어가며서 엄마가 진심일까, 마음 깊은 곳에서도 정말로 여자와 여자의 운명은 그런 것이라 믿고 있을까 궁금해하곤 했다. (p81)

 

여자, 결혼에 대한 강제와 압박, 이런 분위기가 팽배한 곳에서 여성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스무살이 되면 노처녀가 되는 곳에서 주인공은 갖은 압박에 시달리고 이제는 밀크맨의 정부라는 소리까지 들으며 살게 되지만, 결국 책의 후반부로 가서는, 그렇게 한 결혼에서 실제 감정을 숨긴 채 살아온 엄마가 "지금까지 진짜 밀크맨에 대한 사랑을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아, 결혼했는데 어떻게 사랑할 수 있어!' 라며 억눌러온 것에 대한 죄책감과 엉뚱한 짝과 결혼한 것에 대한 괴로운 감정을 덮기 위해서 그러는 것 같았다. (p466)" 이런 심정으로 스스로의 감정에 충실해지며 자신의 외모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어쩌면 이 모든 일련의 과정 속에서 어른도 '진정한 어른되기'의 과정을 밟아가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여기 사람들은 대부분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진심을 말하지 않는 한편 누가 자기 생각을 읽으려 하면 그 사람에게 가장 위쪽 마음 상태만 드러내고 진짜 생각이 무엇인지는 의식의 수풀 안에 감춘다. (p61)

 

그러니까 그것은 결혼 문제 뿐 아니라 생활 전반에 펼쳐진 억압의 요소였던 것이다. 심지어 일몰을 보고도 사람들은 하늘의 색은 정해져 있다고 절대 여러 가지 색깔일 리 없다고 보이는 것을 그대로 표현하지 못한 채 고집을 피운다.

 

 

"걱정하지 말아요." 그때 선생님이 말했다. "저녁놀을 보고 불편해하는 것도 평정심을 잃는 것도 다 좋은 일이에요.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의미니까. 깨어난다는 의미니까. 본심을 들켰다거나 망했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p118)

 

하늘은 파란색'이어야만' 한다고 고집부리는 학생들에게 선생님은 말한다. 두려워 말라고. 이게 시작이라고. 깨어나는 순간이라고. 그리고 주인공은 이미 어쩌면-남자친구와 일몰을 보며 색깔의 변화를 느낀 이후라 좀더 강렬하게 그 느낌을 전달받는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달라져 가고 있는 것이라는.

 

소설 내내, 답답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하고... 특히나 성적으로 위협을 받는 주인공에게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까봐 조마조마해 하기도 했는데, 조금씩 달라지는 분위기 속에서 좀더 성장해가는 주인공과 주변 사람들에게서 뭔가 안심을 느끼게 되었다고나 할까. 희망의 한 조각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어스름한 밝은 실마리를 잡게 되는 마지막이 마음에 든다.

 

 

우리는 작은 대문을 열고 닫고 할 것도 없이 작은 산울타리를 훌쩍 뛰어넘었고 나는 초저녁의 빛을 들이마시며 빛이 부드러워지고 있다는 것, 사람들이 부드러워진다고 부를 만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저수지 공원 방향으로 가는 보도 위로 뛰어내리면서 나는 빛을 다시 내쉬었고 그 순간, 나는 거의 웃었다. (p492)

 

아마 올해 지금까지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인상깊은 마무리였던 것 같다. "나는 빛을 다시 내쉬었고 그 순간, 나는 거의 웃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이 대목과 마주치면 정말 뭔가 해소되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한 문장으로 많은 것을 표현하는. 서사구조가 일반적이지 않아 어렵고 복잡해보일 수 있지만, 읽다보면 어느 새 푹 빠져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리라 믿는다. 맨부커상 수상작이니 뭐니 들먹이지 않고라도 일독을 권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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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6-15 19: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비슷하게 그렇게 꾸역 꾸역
읽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너무 여러 권을 동시다발로 읽다 보
니, 우선 순위에서 밀린 책들은 다시
읽게 되질 않더군요. 바빌로프의 책
부터 마저 읽어야 하는데...

비연 2020-06-15 19:29   좋아요 2 | URL
그래도 이 책은 그 여러 권 중에서도 찾아 읽게 되는 책이었어요.
세상에 왜 이렇게 읽어야 할, 읽고 싶은 책들이 많은 거죠? 흠냐...

letsgojin 2020-06-15 20: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재밌었어요, 아무개가 많이 나왔던 기억이 나네요

비연 2020-06-16 19:05   좋아요 0 | URL
ㅋㅋㅋ 정말이지, 아무개의 아들 아무개. 이러는데 머리가 빙글빙글 @.@

공쟝쟝 2020-06-16 08: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와, 마지막 문장 참 매력적이예요! 나는 거의 웃었다라니..!

비연 2020-06-16 19:05   좋아요 0 | URL
그쵸? 마지막 문장을 계속 생각하게 되는 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