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그러나 흥미롭고 찬찬히 읽어볼 만한 책이라는 생각이 든가. 그래서 재미도 있다.
자본주의 가부장제의 시각에서는 재생력의 터전으로서 종자와 여성의 육체가 최후의 식민지가 되는 셈이다. 이 창조적인 재생의 터는 전문가들의 가치를 '생산하고' 추가하는 '수동적인' 장소로 바뀐다. 자연과 여성과 유색인들은 다만 '원료'를 제공할 뿐이다. 여성과 자연의 공헌에 대한 평가절하는 식민행위에 개발과 진보의 가치를 부여하는 것과 맞물려 행해진다. 소외를 의미하는 분리가 소유권과 통제의 수단이 된다. (p85)
노동이 비노동으로 정의될 때, 가치는 무가치로, 권리는 무권리로, 그리고 침략은 개량으로 정의된다. '개량된 종자'와 '개량된 태아'는 사실상 '점령된' 종자와 태아이다. 사회적 노동을 자연상태로 규정하는 것이 이 '개량'의 본질적 요소이다. 이것은 다음의 세가지를 동시에 획득한다. ① 그들이 착취하는 생산물의 원소유자의 공헌은 모두 부정하며, 그들의 활동을 수동적이라 치부함으로써 이미 사용되고 개발된 자원을 '사용되지 않고' '개발되지 않은' '버려진' 자원으로 변모시킨다. ② 착취를 '개발'과 '개량'으로 해석함으로써 '개량'했다는 주장에 근거하여 절도를 소유권으로 바꾼다. ③ 그리고 거듭 말하지만 이전의 사회적 노동을 자연으로 정의하고 아무런 권리도 부여하지 않음으로써 민중들의 관습적, 집단적 용익권을 '해적행위'와 '절도'로 바꾼다. (p95)
그렇다면 인간의 태아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것은 분명 호모 싸피엔스 종이지만 인간의 특징적인 자질 중 어떤 것도 갖고 있지 않다. 즉 그것은 자기인식이 없으며 자율적인 이성적 존재가 아니다. 신경계도, 두뇌도 없으며 아무것도 경험하지 못한다. 경험능력의 결핍으로 인하여 이것은 인간이라기보다는 혹은 심지어 실험용 생쥐에도 못 미치는 양상추 같은 존재이다. (p117)
여기서 뿜었다. 양상추. 이렇게 인간을 단계별로 갈라서 최초의 몇 주 상태를 양상추로 결론지어 버린 것에 대해서. 고려할 필요가 없는 주체이며 그래서 이를 대상으로 연구도 하고 이를 낙태도 하고... 그렇게 여성과 태아를 분리해 버리는 것이고. 그래서 그들은 태아란 여성의 일부이며 여성과의 공생 관계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점은 어디서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최초의 분리는 여성과 태아의 분리이다 (p117-118)... 라는 것이지.
읽으면서 몇 가지 다른 책들도 떠올랐다. 아. 시간 있을 때, 이 책 좀 더 읽고 찾아서 같이 써봐야 겠다. 아, 우선 일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