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 페미니즘 사상>은 진도가 참 안 나간다. 시작할 때는 비장했는데.. 돌아보니 벌써 20일이고 (세상에!) 읽은 페이지수는 몇 장 안된다. 이건 뭥미 ;;; 암튼간에, 흑인이라는 대상에 대한 글을 읽으니 그동안 보았던 영화들이 자꾸 생각난다. 그러니까 흑인을 직접 대할 수 없는 나로서는, 그 이미지를 아마도 영화에서 구하게 되는 것 같다.
1960년대 후반, 블랙파워 운동이 "흑인은 아름답다"를 구호로 외치면서 등장하기 전까지, 흑인은 피부색이 검을수록 멸시받았다. 즉 흑인을 피부색의 농도로 나누어 서로를 이간질시키는 것이다. 미국사회에서 흑인과 백인 사이에서 태어난 이들은 역사적으로 "피 한방울의 법칙"을 따라 "흑인"으로 여겨졌다. "피 한 방울"이라도 흑인의 피가 섞이면 흑인이라는 이 불문율은 백인의 "인종적 순수성"을 내세워 백인의 결합으로 태어난 이들만을 백인으로 간주함으로써 백인집단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한 악의적인 관습법이다. 밝은 피부를 지난 흑인은 흑인과 백인 사이의 인종혼합의 역사를 체현한 주체이다. 헤게모니적 역사관은 미국을 유럽계 백인 이주민과 그 후손의 나라로 규정하지만, 아메리카 원주민,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흑인 등과 백인 사이의 인종혼합이야말로 미국 역사의 근간을 이루는 토대 중 하나이다. (p166, 각주)
<슬픔은 그대 가슴에 (원제: Imitation of Life)> 라는 영화(1959년作)가 있었다. 라나 터너와 산드라 디가 나왔기 때문에 이 두 배우로만 기억될 수도 있지만, 사실 그 영화를 보았을 때 가장 인상에 남는 배우들은 주아니타 무어와 수잔 코너 였다. 아주 어릴 때 주말의 명화 시간에 보았던가 그랬었는데 두고두고 기억에 남아 있는 영화다.
줄거리는 두 개의 축으로 움직인다. 배우를 지망하는 로라(라나 터너)와 딸 수지(산드라 디). 그리고 우연히 이들과 마주친 애니(주아니타 무어)와 딸 사라(수잔 코너). 여기에서 애니는 흑인이고 사라는 백인이다. 즉, 사라는 흑백 혼혈이었으나 백인의 모습으로 태어난 것이다. 애니가 로라네의 가정부로 들어와 살게 되면서 그들의 운명은 얽히게 되고 로라가 결국 우여곡절 끝에 출세의 길을 가게 되었을 때 그 뒤에는 헌신적으로 집과 수지를 돌보던 애니의 지원이 있었다 (이것이 <흑.페.사>에서 얘기하는 흑인 여성의 유모라는 통제적 이미지일 것이다).
어쨌든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은 애니와 사라였다. 애니는 사라에게 지극정성이었고 정말 사랑으로 키웠지만 사라는 자신은 백인의 모습인데 엄마가 흑인인 것을 너무나 싫어했다. 학교에 오는 것도 싫어했고 남자친구에게도 백인 가정에서 자란 사람처럼 행세하다가 들켜서 차이곤 한다. 그러니까 위에 인용한 대목처럼, 혼혈일 경우 흑인으로 취급받는다.. 라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 사라는 집을 나가버렸고 술집 댄서로 일하게 된다. 딸을 찾아갔다가 이것을 보게 된 애니. 심지어 딸에게 외면까지 당하게 된 후 원래 앓았던 지병이 악화되어 죽게 되고, 죽기 전 하나님 나라에 가는 길 만큼은 화려하게 해달라 말하며 모아둔 돈을 로라에게 맡긴다. 엄마의 죽음을 알게 된 사라는 장례식에 뛰어오고... 오열하고.. (그러니까 살아 있을 때 잘하지..ㅜ) 관이 나가는 뒤를 따라가며 엄마 엄마 미안해 라고 말하던 장면은 그 때나 지금이나 눈물이 쏟아지는 장면이다. 그러니까 어린 나의 눈에도, 흑백 갈등 속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지 못해 갈등하는 사라와 그 중에 희생으로 살아야 했던 애니의 운명이 너무나 가슴아프게 다가왔던 것 같다.
흑인이 노예신분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고 난 후, 백인을 모방하며 살아가던 그 모습을 사라를 통해 적나라하게 보여줬던 (그래서 제목이 Imitation of Life 인가), 그리고 형식적으로는 해방이었지만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인종차별이 남아 있던 그 당시의 세태를 잘 그린 영화였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읽고 있는 <흑.페.사>의 전반부 많은 내용들이 이 영화에 다 담겨 있다고도 생각되고. 아카데미나 골든 글러브가 영화의 질을 다 담보하는 것은 아니지만, 애니와 사라로 나왔던 두 배우는 조연상 후보로 올랐었고 결국 사라로 나왔던 수잔 코너가 골든 글러브를 탔던 것으로 기억된다. 영화 자체로도 잘 된 영화였지만, <흑.페.사>를 읽고 나면 다시 보면서 책에 나왔던 흑인여성들의 이야기에 대해 되짚어 보는 것도 괜찮을 듯 싶다 (네이버 다운로드가 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