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 살림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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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한 찬사가 워낙 여기저기서 들려와서 책표지가 정말 맘에 안 듦에도 불구하고 책장에서 꺼내 읽기 시작했다. 1952년부터 1970년까지의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는, 여섯살박이 어린 카야가 24살이 될 때까지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었다. 그냥 아무 생각없이 읽기 시작했는데, 오늘 비행기 안에서 마지막 부분들을 읽으면서 오열을 했다... 아 왜 그랬는 지 모르겠다. 사실 내용이 대단히 다른 것도 아닌데, 대단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마지막 부분에서는 카야의 마음과 하나가 되면서 눈물이 그칠 줄을 몰랐다. 작가의 말처럼, 이 책은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이고... 무엇보다 다 떠나가고 버림받은 아이의 성장이야기이며 스스로가 스스로를 지켜나가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해야 했던 분투기이다.

 

 

엄마가 떠나고 몇 주에 걸쳐서 큰오빠와 언니 둘도 모범이라도 보이듯 홀연히 떠나버렸다. 아버지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다 도망가버렸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아버지는 처음에는 고함을 지르다가 주먹으로 때리고 결국은 제 분을 못 이겨 손등으로 철썩철썩 갈겼다. 그렇게 언니들과 오빠는 한 사람씩 사라졌다. 카야는 훗날 언니 오빠의 나이도 잊고 진짜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생각나는 건 미시, 머프, 맨디라는 애칭뿐이었다. 포치의 매트리스에는 언니들이 두고 간 양말들이 쌓여 있었다. (p23)

 

 

모든 불행의 시작은 폭력이다. 자격지심에 사로잡힌 아버지는 엄마를 두들겨 패고 그래서 떠나간 엄마를 대신하여 자식을을 패기 시작한다. 그냥 자기 울분에 못 이겨, 자기 인생의 불만을 연약하고 힘없는 자들에게 퍼붓는 가장 졸렬하고 비겁한 인간상. 그 속에서 나 혼자라도 살아야겠다 떠나는 가족들. 그렇게 해서 언니 둘, 큰오빠가 떠난 후 가장 가깝게 지내던 조디 오빠마저 떠나버린 후 카야는 정말 혼자가 된다. 여섯살 짜리가. 두들겨 패는 아빠와 단 둘이. 아.. 정말 이게 뭐란 말인가.

 

 

"다들 왔구나. 그런데 이렇게 많은 숫자는 셀 수가 없는데."

우짖는 새들은 빙글빙글 돌다 자맥질하고 카야의 얼굴 근처에서 떠다니다 옥수숫가루를 던져주자 땅에 내려앉았다. 그러더니 조용해져서는 가만히 서서 몸단장을 했다. 카야는 다리를 한쪽으로 모으고 모래밭에 앉았다. 커다란 갈매기 한 마리가 카야 곁의 모래사장에 내려와 홰를 쳤다.

"나 오늘 생일이야." 카야는 갈매기에게 말했다. (p33)

 

 

이 부분에서부터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외로운 아이. 생일만큼은 엄마가 돌아올거라 애타게 기다리지만 오지 않는 엄마. 그렇게 아이는 습지와 동물들과 벗하며 사는 방법을 터득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요리를 하고 물건을 사고, 돈을 벌기 위해 홍합을 채취하는 아이. 그리고 서서히, 오지 않는 엄마를, 형제들을 마음에 묻고 습지에 스며드는 삶을 살게 된다. "그러자 습지가 카야의 어머니가 되었다.(p49)"

 

한번쯤 아버지와 낚시를 다니며 평화롭게 지내던 시절도 있었지만, 그것은 잠시였을 뿐, 아버지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고 (제 버릇 남 주겠는가. 못난..) 홀연히 없어진다. 정말 혼자 남게 된 카야. 그런 카야를 음으로 양으로 돌봐주는 흑인 점핑 아저씨와 메이블 부인. 인종차별이 아직도 여전하던 시절, 돌로 맞아도 대꾸도 못하던 흑인 부부는 아무도 아는 척하지 않던 카야를 다정하게 조용하게 도와준다. 옷을 받아주고, 음식을 나누어주고, 무엇보다 정을 준다.

 

그리고 찾아든 첫사랑. 글을 가르쳐주고 수학을 가르쳐주고 습지와 생물을 아끼는 마음이 카야와 같은 조디 오빠의 친구 테이트. 다정하고 사려깊은 테이트의 보살핌 속에서 카야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해가고 많은 것을 알게 되고, 그리고 테이트와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하지만 테이트가 대학을 가고 나서 카야와의 연락을 무정히 끊어버리면서 카야는 다시 혼자가 되어 버리고. 이 아이는 언제쯤 혼자가 아닐 수 있을까 가슴이 미어지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었다.

 

사랑이란 차라리 씨도 뿌리지 않고 그냥 두는 게 나은 휴경지인지도 모른다. (p264)

 

 

이 책은 사실, 테이트 이후에 카야를 이용하러 다가든 체이스 앤드루스의 시체를 발견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예전과 현재가 교차하면서 카야의 외로운 인생과 체이스와의 악연, 그리고 체이스의 죽음으로 인해 카야에게 쏟아지는 의혹들이 하나하나 전개되어 가는 구조이다. 끝까지 읽고 나면, 뭐랄까. 스포일을 할 수 없으니 더 말을 할 수는 없겠지만, 카야라는 여성상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외롭고 또 외로왔던 한 아이가 자연과 동물들을 벗하며 살아가는 모습들이 감각적이면서도 정감있게 펼쳐지고 그 속에서 짐승만도 못한 인간들의 행태가 대비되어 그려지면서 카야가 그 속에서 세상과 마주하는 방법을 어떻게 터득하는 지를 그려내고 있다, 이 책은.

 

외로움을 아는 이가 있다면 달뿐이었다.

예측 가능한 올챙이들의 순환고리와 반딧불이의 춤 속으로 돌아온 카야는 언어가 없는 야생의 세계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한창 냇물을 건너는데 발밑에서 허망하게 쑥 빠져버리는 징검돌처럼 누구도 못 믿을 세상에서 자연만큼은 한결같았다. (p267)

 

외로운 사람들, 핍박받는 사람들은 서로가 통하는 게 있는 것 같다. 점핑과 메이블 부부가 카야에게 보여준 사랑은 온갖 잘난척은 다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자기밖에 모르는 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 착한 부부가 그런 중에도 흑인이란 이유로 받는 차별을 묵묵히 견뎌내야 하는 모습은 분노를 넘어서 서글픔을 느끼게 한다. 그러니까 이 책은 카야의 외로움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고, 그 시절 살아가야 했던 사람들이 어떻게 버티며 지낼 수 있었는가를 서글프게 그리고 있기도 하다.

 

 

"깜둥이 노인네가 마을로 가네. 조심해라, 깜둥아, 그러다가 넘어지지 말고."

소년들은 발끝만 보고 걷는 점핑을 놀려댔다. 한 소년이 허리를 굽히고 돌멩이를 주워들어 점핑의 등에 던졌다. 돌은 툭, 소리를 내며 점핑의 어깨뼈 바로 밑에 명중했다. 점핑은 비틀, 하고 고꾸라졌지만 다시 걸었다. 소년들이 배를 잡고 웃어대는 사이 점핑은 길모퉁이를 돌았다. 그러자 소년들은 돌멩이를 더 많이 주워 들고 뒤를 따라갔다. (p129)

 

 

좋은 책이다. 일흔이 다 되어가는 생태학자가 첫 번째로 낸 소설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수많은 이야기와 감정선이 날실과 씨실처럼 엮여 들어가고 그 속에 다양한 인간군상을 담아냄과 동시에, 한 아이의 외로움과 사랑과 성장을 개연성있게 잘 그려내어서 읽는 동안 내내 상당히 몰입되는 책이었다. 마지막 부분까지 다 읽어내려가다 보면 아마 나처럼 가슴 뭉클함에 울음을 터뜨리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한동안 카야를 잊지 못할 것 같다. 여러가지 측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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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0-01-08 08: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을래요! 그리고, 앞으로 비연님께 더 많이 써달라, 더 많이 쓰시라 강권하는 단발머리가 되겠습니다.
길게, 기~~일게 써주소서!!!

비연 2020-01-08 08:48   좋아요 0 | URL
이 책... 마음에 들어하시리라..^^ 더욱 강권하는 단발님에 힘입어 더욱 열일 아니 열쓰하는 비연이 되기로 ㅋㅋㅋ

카스피 2020-01-09 15: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늦었지만 서재의 달인 등극 축하드리며 새해복많이 받으셔요^^

비연 2020-01-09 21:29   좋아요 0 | URL
카스피님. 저 북플마니아만 된 ㅠㅠ 서재의 달인은 안되었지만 축하 감사해요! 올해는 좀더 활발히 활동할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