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았다.
2008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걸어도 걸어도 (歩いても 歩いても)>.
좋은 영화다.. 라고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아, 이 지극히 일상적이면서도 소소한 영화가 내 맘에 이리 진하게 꽂힐 줄은 몰랐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실제 어머니를 여의고 그러면서 만들게 된 영화로, 어머니와의 실제 이야기들이 중간 중간 배여 있다고 한다. 영화는, 십년 전 죽은 준페이의 기일에 맞춰 동생들, 료타와 지나미 가족이 부모님의 집에 오는 것으로 시작된다. 준페이는 물에 빠진 소년 요시오를 구하려다가 죽은 것으로, 요시오도 이 날 왔고. 그렇게 하루와 또 하루, 이틀간 가족들끼리 지내는 이야기가 이 영화의 전체 줄거리이다.
형이 죽고 나서 의사인 아버지의 기대를 받았지만 미술품 복원사의 길을 걷게 되어 사사건건 아버지와 부딪히는 작은 아들 료타(아베 히로시). 게다가 그는 아들 하나를 둔 여자(나츠카와 유이)와 결혼을 하여 더더욱 집에서 위축된 상황이다. 그렇게 피 한방울 안 섞인 아들과 부인을 데리고 나타난 료타. 누나인 지나미는 자동차 세일즈를 하는 남편을 둔 평범한 주부로 두 아이의 엄마이고 부모님과 함께 살겠다는 의향을 비추고 있다.
가족은 가족일지라도 다 나름의 비밀이 있을 수 있고 속내가 있을 수 있는 것이라,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문득 알아가는 과정이 지난하다. 어머니는 평범한 할머니이지만, 큰 아들을 그렇게 잃은 것에 대한 한이 있었고 젊었을 때 바람을 피우던 남편에 대한 한도 있는 분이었다. 수더분하게 음식을 하고 이것저것 잔소리를 하고 남편과 끊임없이 티격태격하면서도 중간중간 비치는 속내는 서늘하기까지 하다. 료타가 이제, 요시오를 그만 오게 하는 것이 좋지 않겠냐고 하자, 어머니는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한다. 계속 부를 거라고. "증오할 상대가 없는 만큼 괴로움은 더한 거야. 그러니 그 아이한테 1년에 한 번쯤 고통을 준다고 해서 벌 받지 않아. 그러니까 내년 내후년에도 오게 만들 거야"... 이렇게 말하면서. 어머니 역의 키키 키린은 이 장면에서 정말... 그 한이 나에게까지 사무치게 전해질 정도의 저릿한 연기를 보여준다.
그리고 어머니에게도 18번 곡이 있었다. <블루 나이트 요코하마>. 몰랐었는데 LP 판까지 있었다. 그걸 굳이 틀어달라고 하고서는, 어머니는 자리에 앉아 따라 부르기 시작한다. 여기에 이 영화의 제목인 걸어도, 걸어도.. 라는 대목이 나온다. 마치 우리 엄마가 가요무대를 보고 따라부르는 것 마냥 나즈막하게 부르던 키키 키린의 모습. 젊은 시절, 바람 피우는 남편을 찾아간 아파트 안에서 들려오던 평상시와 다른 남편의 목소리. 이 노래를 부르던... 아기 료타를 등에 업고 갔다가 그 소리에 그대로 돌아와 음반을 사고는 18번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냥 말하지 않고. 노래를 들으며 아마도 속을 삭였겠지...
료타의 아내. 유카리. 아이를 데리고 재혼한 불편함을 꾹 누르고 잘 하려고 노력하지만, 데려온 아들에게 서운하게 하는 시부모에게 불만을 표하기도 하고...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아들에게 둘만의 추억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료타와의 사이에 아이를 낳는 것은 잘 생각해보라는 시어머니의 말에 묘한 표정을 보이기도 하고.. 그리고 그 아들. 친아버지를 잃고 아버지처럼 피아노 조율사가 되고 싶어하는 아이. 피로 엮이지 않은 가족들을 바라보는 그 아이의 시선. 이런 묘사들이 너무나 섬세하게 보여지고 있다 이 영화.
방안에 들어온 나비를 향해 손짓을 하던 어머니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큰 아들 준페이의 영혼이 좇아왔을 지도 모른다며 허공을 휘젓던 그 어머니의 손길. 그리고 그 눈길. 아이를 잃은 어머니가 그 시절을 감내하고 살면서 느꼈을 고통이 고스란히 다가왔다. 부모는 자식을 마음에 묻어서 늘 생각하지만, 하룻밤도 자지 않고 그냥 집으로 가던 딸은 남편에게 말한다. 살아있은 자식을 더 생각해야지. 하룻밤을 자고 가던 아들은 말한다. 다음 설에는 안 와도 되겠어. 일년에 한번이면 되지. 그 아들을 배웅하며 돌아가던 아버지는 얘기한다. 다음 설에나 보겠군. 이렇게나 엇갈리는 부모와 자식.
그리고, 돌아가는 버스에서 부모와 이야기하는 도중 나왔던 스모선수 이름이 생각났다며 료타가 이름을 말하고는 뒤이어 중얼거린다. "늘 이렇다니까. 한발씩 꼭 늦어." ... 부모님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함께 축구 보러가자던 아버지는 3년 뒤 축구장엔 결국 못 가고 돌아가셨고, 욕실에 떨어진 타일을 수리해준다고 말로만 계속 얘기하다가 결국 그대로 어머니도 돌아가셨고. 아들이 태워주는 자동차 한번 타면 좋겠다던 어머니를 태워드리지 못한 것도 있구나...
그렇게 세월이 흘러 료타와 유카리 사이에 아마도 딸이 생긴 듯... 부모님의 묘에 성묘를 오는 장면이 마지막에 이어진다. 그리고는 돌아오면서 노랑나비를 보자, 료타가 딸에게 얘기한다. "저 노랑나비는 말이지, 겨울이 되어도 죽지 않은 하얀 나비가 이듬해 노랑나비가 되어 나타난 거래." 딸이 말한다. "누가 얘기한 거에요?" 료타는 답한다. "흠.. 누군지 기억이 안 나..".. 사실은 료타의 어머니가 형의 묘에 성묘를 다녀오면서 한 말이었다. 그렇게 부모에게서 자식으로, 또 그 자식에게로 전해지는 이야기들. 누구에게서 비롯되었는 지 기억나지 않는 그 이야기들.
요즘... 마음이 좋지 않아서인지, 이 영화를 보고나서 그 여운이 많이 남아 계속 생각이 난다. 산다는 건 뭘까. 가족이란 뭘까... 사람 산다는 게 참 소소한 거구나. 이런저런 생각에, 오히려 마음이 정화되는 것 같은. 그래서 조금 차분하게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이 영화는 두고두고 기억하고 보고 싶다. 그리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를 더 찾아보려고 한다. 예전에 <아무도 모른다> 라는 영화는 보았었는데, 독특하다고 생각했었다... <걸어도 걸어도>와 비슷한 영화들이 몇 편 더 있는 듯 하니 한번 찾아서 봐야겠다.
아. 이 영화는 별표 다섯이다. 지루하다고 느낄 사람들이 있을 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최고의 영화 중 하나로 매김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