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하루
다이라 아즈코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9월
절판


"그래서 나, 이런 생각을 했어. 어쩌면 성공하는 것도 실패하는 것도 대단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고. 몇십 년이 지나도 어제 일처럼 기억나는 것은 여름날 학교 운동장의 수돗물이라든지 개와 함께 본 강가의 석양이라든지, 목욕탕에 다녀오다 아버지가 포장마차에서 사준 어묵이라든지..."
동경하는 남자아이의 뒷모습을 줄곧 보고 있던 국어시간이라든지... 루이는 머릿속으로 덧붙였다.
"어쨌든 그런, 아무것도 아닌 일이잖아? 그때는 그것이 영구보존판 추억이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지. 드라마틱한 부분이라곤 조금도 없는걸. 지금의 무로타나 나처럼 고작 오늘 하루를 보내는 데 바빠서 허덕거리고 있으면 말이야. 그런 평범한 일들을 자신이 얼마나 소중히 생각하고 있는지 몰라. 그러나 나이 먹어서 살아가는 데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되고 모든 게 허무해졌을 때, 진공 팩으로 보존했던 그런 추억이, 뭐랄까, 위안이 되는 것 같아. 봐, 추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그때의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잖아. 그건, 소중한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이 아닐까?"-1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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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개의 죽음 그르니에 선집 3
장 그르니에 지음, 지현 옮김 / 민음사 / 1997년 8월
구판절판


누군가가 죽음을 맞이한 뒤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러한 의문을 던지게 마련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피할 수는 없는 일이었을까?
고야의 그림 중에 여러 명의 의사들이 환자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 있다. 그 표제는 <그는 어떤 병으로 죽을 것인가?>이다.
그가 죽을 것임은 확실하다. 하지만 그 죽음에는 어떠한 명칭이 부여되어야만 한다. 그것이 의사들의 관심사이다. 어쩌면 모든 이들의 관심사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절망적>이라는 선고를 내리고, 그 절망이 치료를 위한 모든 연구에 종지부를 찍고 나면 의사들은 그 살해자를 찾아내기 위한 조사를 시작한다. 하지만 그 살해자, 대자연은 우리에게 세상에서의 첫날과 마찬가지로 마지막 날을 선사했다. -15쪽

만약 당신이 사랑하는 이를 안락사시킨다면 그것은 그의 고통을 줄여주기 위한 것인가? 당신의 고통을 덜기 위한 것인가? 죽음을 맞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이다. 하지만 사랑 때문에 마찬가지의 처신을 할 수도 있다. -41쪽

다른 사람들, 혹은 우리 자신을 가엾게 여길 때, 우리는 삶이 마련해 준 기쁨들을 잊고 있다. 고통이란 기쁨의 결핍에서 비롯될 뿐인데, 삶의 기쁨을 모른다면 어떻게 고통을 알 수 있겠는가? 동물들은 삶을 행복한 것으로 여긴다. 나중에 겪은 고통에 연연해하며 일생 동안 누렸던 기쁨을 부정할 이유는 없지 않겠는가? -67쪽

'거두어들일 수 있을 만큼만 씨를 뿌리기를!' 하피즈의 말이다. 하지만 나의 욕망은 나의 필요와 능력을 초월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나는 다른 모든 생물과 다를 바가 없다고 여긴다. 나는 개들 중에서 귀감을 찾으려 했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개들은 먹을 기회가 생기면 배가 터질 때까지 먹어댄다. 개들은 자기들이 토해 놓은 것조차 꺼리지 않는다는 사실은 꼭 성경을 읽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렇다 개들은 우리보다 나은 존재가 아니며 우리에게 삶의 교훈을 전해 주지도 않는다. 좀더 낮추어 말하면, 개들은 우리와 똑같다. -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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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perfrog 2005-05-22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우맘님, 이 책 주셔서 감사합니다!!^^

2005-05-23 00: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5-23 1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흥한민국 - 변화된 미래를 위한 오래된 전통
심광현 지음 / 현실문화 / 2005년 5월
평점 :
절판


얼마 전 부산까지 이어진다는 동해의 해안도로를 달렸다. 일행은 흥에 겨워 떠들어댔지만 초행에 밤길을 가야 하는 기사는 숱하게 핸들을 꺾고 이정표를 살피며 진땀을 흘렸다. 내심 불안감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면서도 끊임없이 구불거리는 길에 투덜거렸다. 어느 여름날 치악산에서 내려온 두 갈래의 계곡물이 합류해 소용돌이 치는 장관을 보고 필자는 흥겨운 충격을 받는다. 소박함, 한(恨), 신명에서 한국의 자연과 예술, 문화의 원류를 찾던 과거의 답변에 만족하지 못했던 필자에게 '프랙탈'이라는 압축된 해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본다는 행위에는 언제나 보는 행위를 통제하는 생각의 '체' 같은 것이 있어서 모두가 같은 것을 보고 있는데도 실은 다 다른 것을 보고 있다는 점을 알게 해준다. (p.19)'
구불거리는 길과 계곡물이 불평거리가 되기도 하고 시각을 바꿔 문제를 풀어내는 중대한 실마리가 되기도 한다. 생각의 '체'는 이처럼 전혀 다른 결론에 다다르게 한다. 필자는 한국의 문화와 예술, 자연경관을 서양의 유클리드 기하학의 '체'가 아닌 '프랙탈 흥의 미학'으로 구현된 것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부분이 전체와 같은 자기상사구조를 가지는 무한의 겹쳐짐 구조'를 의미하는 프랙탈(fractal) 구조와, 한(恨)도 자연스러운 미도 신명이나 풍류도 아닌 흥(興)이 결합된 프랙탈 흥의 미학을 통해 한국의 근현대사와 풍류, 생태미학을 말한다. 자연을 벗한 생활에서 배어난 흥의 문화를 통해 문학과 회화와 건축, 음악을 풀어낸다. 더 나아가 필자는 탈근대과학의 관점에서 고도의 생태가치를 지닌 세련된 문화를 발굴하여 새로운 문예부흥을 이끌어 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문화컨텐츠가 경제로 직결되는 문화경제시대에 예술과 인문사회과학과 문화컨텐츠 산업이 '제대로' 맞물려 가시적인 성과를 낼 수 있도록 국가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오,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仁義)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책의 앞머리에 인용된 백범 김구(<백범일지> 중 '나의 소원')의 일부이다.
짧은 생각이지만, 문화산업과 한류의 중요성을 전면에 내세운 이 책의 결론보다는, 백범의 이 인용문에 더 고개가 숙여지는 건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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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icare 2005-05-21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역시 소시적에 읽었던 백범 김구 선생님의 그 글에 한 표!

2005-05-21 15: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룸 2005-05-21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웃~ 걱정하시더니 금세 다 읽고 리뷰까지!! ^^
음...암튼 저도 김구선생님 말씀에 올인!!

▶◀소굼 2005-05-21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확실히 저도 문화강국이 더 와닿더라구요. : ) 봐도 봐도 좋은 글!
 
아름다운 아이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7
이시다 이라 지음,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2005년 4월
평점 :
절판


소설을 읽을 때 작품에서 작가가 보인다는 건 두 가지를 의미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작가가 지닌 모든 것이 오롯이 작품 속에 녹아 들어 있는 경우, 두 번째는 작가가 소설을 위해 벌여 놓은 재료들이 제대로 요리되지 않아 버석거리며 하나의 완성된 이미지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경우. 두 번째 경우에 그 재료들은 작의(作意)를 드러내는 게 아니라 작위적이라는 꼬리표를 달게 된다. <4teen> 이후 다시 만난 이시다 이라의 <아름다운 아이>는 아쉽게도 두 번째에 해당한다.
소설은 흥미로웠다. 일본에서 실제 일어났던 아홉살 소녀 살인사건을 소재로 쓰여진 글이다. 주인공인 열네살 소년 '감자'의 동생이 살인사건의 범인이었고(누가 범인인가는 스포일러가 될 만큼 중요한 사안이 아니다) 이로 인해 '감자'를 둘러싼 세상은 하루아침에 부서져버린다. 이야기는 이곳에서 비로소 시작된다. 망가지고 부서진 곳에서 소년이 어떻게 이겨내고 성장해가는가, 겉으로 보여지는 '올바름'이 어떤 허위를 가질 수 있는가, 다수의 힘이 어떻게 잔혹한 폭력이 될 수 있는가를 그러나 소설은 그다지 어둡지 않게 보여준다. 장편임에도 집어들고 내쳐 결말을 보게 만들었으니 흡입력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몇 군데 밑줄도 그었다. 하지만 어째 동어반복적이다. 바로 <4een>에서 익히 들어왔던 말들이다. 
참아라, 참아라, 그러면 언젠가 끝이 찾아온다. 인생이란 그런 것인가. 언젠가 찬란하게 빛이 날 때가 올까. 한여름의 열풍에 온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모든 것을 웃어넘길 수 있는 그런 때가 올까.
14살 식물탐구를 좋아하는 '감자'의 말이다. 14살 하늘을 날 수도 있는 나이라 말하는 <4teen>의 그 '괜찮은 네 녀석들'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작가는 이번에도 14살의 소년들에게 희망과 순수와 투명함을 노래하도록 한다. 자신들을 이해할 수 있는 극소수만이 '괜찮은 어른'이라 부르게 한다. 또다시 소년들에게 탐정놀이를 시킨다. 어른들이 해결하지 못하는 일을 14살의 희망과 순수와 투명함으로 답을 찾게 한다.
14살의 풋풋한 감수성은 <4teen>으로 충분하지 않았을까. 괜찮은 네 녀석들이 다짐했던 말처럼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은', 그 풋풋한 감수성을 지닌 청년으로 성장했어야 하지 않을까. 아이는 자라야 한다. 작가의 14살에 대한 애정과잉이 그들을 성장하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는 건 아닐까. 묵직한 주제를 흥미롭게 전개시킨 작가의 솜씨에도, 손에 잡힐 듯 생생한 묘사에도 불구하고, 매끄럽게 앞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뒷목을 잡아끄는 건 바로 이러한 점 때문이었다. 14살에 대한 로망의 혐의는 작가가 애써 준비해 놓은 나머지 빛나는 재료들의 빛을 잃게 한다. 이제는 14살에서 성장하도록 놓아주어야 한다.
노트북 컴퓨터의 두께가 3센티미터에서 1.5센티미터가 되고, 박막형이 시대의 흐름을 타고 잘 팔린다고 해서 그게 생활에 보탬을 주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런 것 때문에 가족까지 희생할 필요가 있을까? 요즘 들어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 돼. 미키오, 너는 시대의 유행을 타지 않는 일을 택해서, 그것을 평생의 직업으로 삼았으면 좋겠다..
감자의 아버지가 감자에게 해 준 말이다. 14살의 로망을 부여잡고 '그런 풍성하고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지.'라고 먼산을 바라본들 노트북의 두께를 줄이는 것이 관건인 세상에서 달라지지 않는다. 하늘을 날 수 없는 14살이 아니라고 해서 그 아이들에게 무참하게 '시원찮은 어른'이라 낙인 찍히는 건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하늘을 날 수 있는 나이를 지나쳤다면 24살, 34살, 44살에 벌판이라도 신나게 달려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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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05-19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저도 이제 막 읽어서 그런지 따스하게 읽었습니다..;; 리뷰 잘 보고 갑니다^^

superfrog 2005-05-19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비숍님, 따스하게 읽으셨다는 말씀은..?
님의 리뷰 많이 기다려집니다요.^^

2005-05-20 01: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superfrog 2005-05-20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를 기점으로 잠시 저보다 언니가 되신 님..!^^
surprise! 잊어버릴지도 몰라요..! 금붕어잖아요..^^;;;

헨즈 2005-07-14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블로그에 이 서평을 좀 담아가겠습니다^^ (네이버)
출처는 꼭 밝히겠습니다^^
이 서평을 보니까, 또 그런면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항상 책을 읽으며 생각하는것은, 책을통해 관점도 시야도 점점 넓어져간다는 것입니다..... ^^

superfrog 2005-07-23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지금에서야 봤네요. 이 댓글이 왜 브리핑에 안 뜬 거죠? 아님 제가 놓쳤거나..
넵, 잘 알겠습니다.^^
 
처녀치마
권여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4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재잘거리는 수다쟁이는 필시 과장하고 모방하며 나풀나풀 가벼울 수밖에 없다. 그들은 어딘가에서 주워 들은 다른 이의 유니크한 생각이나 표현에 약간의 첨삭과 윤색을 가해 제것인양 떠들어댄다. 그 과정이 하도 무의식적이라 누군가 그것을 지적하면 아연실색하고 만다. 제 머리에서 나온 것이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기 때문이다. 떠들어대는 것에서 만족하지 않고 글로 쓰고 모양을 추스려 책으로 만들어내기까지 한다. 야단맞을 소리지만 이런 뒤틀린 심성으로 오래전부터 제나라말로 쓰인 책읽기를 멀리 했다. 그래서일까. 헛생각은 떨쳐버리고 정신 좀 차리라는 것인지 이 책이 곁에 왔다. <처녀치마>. 그리고 이내 무언가 둔중한 것이 뒤통수를 친다. 그 냉소와 깊이에 빠져든다. 군더더기 없는, 조각퍼즐처럼 단 하나의 딱 맞는 조각이 끼워져 생겨난 문장들은 읽는 내내 서늘함을 느끼게 할 정도로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

그림쟁이입네 평생을 화가로 살아 온 아버지와 일수놀이로 물감을 댄 어머니. 여자는 생일날 이제는 세상에 없는 어머니가 운영하던 여관으로 길을 떠난다. 10년 동안을 한 해도 생일을 기억해주지 않는 연인에게 쓰레기통이자 변기통이자 타구통이 되었던 자신과, 남편의 배다른 아들로부터 죽은 남편이나마 미련스럽게 지키고자 했던 어머니의 안간힘. 아버지에 대한 극진한 사랑이 어머니를 초라하게 만든다는 것을, '사랑이 관계적이라는 것을 관계란 악마에 속한다는 것을 어머니는 몰랐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여자는 어머니의 모습을 닮는다. 그러나 어머니의 '캄캄한 욕망의 입구를 엿본' 여자는 조금 이른 때에 그 고통을 알아챈다. 여자는 해장국을 먹으러 간 식당에서 남자의 그릇에 남자 몰래 꽃씨를 띄운다.

그는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왜, 속 안 좋아? 안 받아도 먹어둬."
속에서 받아주기만 한다면 네 놈 안에서 조만간 꽃이 필 거다. 꽃씨는 쑥쑥 자라서 네 놈의 협소한 내부를 폭파하고 말 거다. 남편 몰래 밥에 독을 섞는 데 만족하지 않고 목까지 조르려는 간부처럼 10년 내 한 번도 생일을 기억해준 적 없는 그의 머리를 뜨거운 해장국 뚝배기에 지그시 밀어 넣고 싶었다.
 

여관방 단체손님의 소주박스에서 술병을 꺼내 마시는 여자에게 생일이란 '고작 남의 술을 축내는 날일 뿐'이며 서른 다섯 남은 봄을 꿈꾸다 꿈이라면 악몽일 뿐이라 자조한다. '겪은 날보다 남은 날이 더 적다고 부등호가 살짝 몸을 돌려앉는 봄에는' 그저 '희뿌연 꽃가루만 분분 날릴' 뿐이다. 돌아오는 길에 여자는 버스 안에서 흥건하지도 못한 눈물 몇 방울을 쥐어짜낸다. 휴가는 끝났고 여자는 말한다. 집에 돌아가면 즉시 냉장고에서 남은 우유를 꺼내 마시고 목욕을 하고 얼큰한 국밥을 사 먹으리라. 지옥 같은 부엌에 갇혀 똑같은 모양의 검은 절망을 말 만큼 나는 바보가 아니다. 그러나 바보는 죽어도 바보라면서요, 스님.     

책을 읽다 까무룩 든 잠의 꿈속에서 운전을 하고 있었다. 가끔 높은 장벽이 세워져 있어 옆으로 돌아가기도 하고 차의 방향이 마구 뒤섞이는 난잡한 도로 위에서 열심히 핸들을 돌려댔다. 어이없게도 브레이크와 가속페달을 밟는 공간이 마치 두터운 요 사이에 발을 집어넣은 것처럼 꽉 끼어서 소형차라 그렇다,고 꿈속에서 투덜거렸다. 헌데 한참을 서툴고 미련하게 경사진 도로들 구불거리며 운전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페달이 세 개였다. 지금껏 브레이크라 생각하며 밟아댔던 건 클러치였고, 가속페달이라 생각했던 건 브레이크였다. 아뿔싸. 그걸로 운전이 됐다는 것도 꿈이니 상관없지만 의뭉스러운 나는 마지막 오른쪽에서 가속페달의 존재를 발견하고는 허둥거리던 감정을 동행인에게 알리지 않았다, 들키지도 않았다. 그저 조급하게 발을 바꿔 올리고는 어수룩한 운전을 계속 했다.  그렇게 댓바람부터 열심히 되도 않는 운전을 하고 잠에서 깨니 심하게 피곤했다.
잠들기 전 이 책 <처녀치마>를 읽고 있었다. 읽다 잠든 책은 꿈에서 다시 모습을 나타낸 것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인생의 어느 때부터 브레이크와 가속페달과 클러치를 얼마나 잘못 밟아대며 살았던 것일까. 잘못 밟아댄 것을 깨닫고나서도 슬며시 감춰버리는 일을 숱하게 반복하지는 않았을까. 죽어서도 바보인 바보처럼 여자는 '똑같이 검은 절망을 국에 말' 것이 분명한 것처럼, 꿈속에서 허망하게 발견했던 세 번째 가속페달처럼, '산다는 일엔 애당초 그 어떤 아름다운 실마리도 없다는 걸. 누군가 우연히 제 손가락 마디를 이용해 실을 감고 조심스럽게 덧감아나가면서 만들어놓은 빈 공간, 누군가의 손가락이 빠져나가버린 그 허사의 자리에 자신이 도착했다는 걸.' 작가는 매몰차게 진실을 말한다. 인생은 지리멸렬, 다짐은 허무하고 뉘우침은 필연적으로 뒤늦다. 
어색한 번역체의 지루하기 짝이 없는 고전임에도 어릴 때 읽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 머리가 굵어진 후에 읽어봐야 이미 자신은 옴짝달싹할 수 없는 곳에 서 있기 때문이다. 무릎을 치며 고전의 진리를 깨닫더라도 돌아야 할 터닝포인트는 온데간데 사라지고 없다. 10년 전쯤에 나는 <푸르른 틈새>를 읽었어야 했다. 지금의 나는 가속페달과 브레이크와 클러치를 구분 못하는 곳에 서 있고 터닝포인트는 초라하며 인생은 지리멸렬하고 암울할 뿐이다. 그나마 단 한 편의 리뷰에 이 책을 골라 절박한 선택을 할 수 있게 해 준 어느분 덕에 10년 후에 <처녀치마>를 읽는 일이 생겨나지 않았으니 그때의 뒤늦을 뉘우침을 '부등호가 살짝 몸을 돌려 앉는 이 봄에' 막아냈다는 점은 다행스러운 일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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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져 2005-04-27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운전에 비유하시다니... 무면허 운전자에겐 택도 없는 이야기며, 저도 어쩌면 아무거나 막 밟고 부들부들 이 길에 서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씁쓸함이 교차하네요... 푸르른 틈새, 헌책방에서 사놓고 읽지도 못하고 있어요. 낼롬 읽어야겠네요!

미완성 2005-04-27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숨이 막히는 리뷰잖아요. 이거..
숨이 막혀도 할 말은 쓰고 가야지요. 금붕어님, 너무 멋진 리뷰예요. 그 뉘가 있어 <처녀치마> 일독을 거부할까요. 처녀치마라...처녀치마라...10년이 지나기 전에, 얼른 읽어야겠군요.

superfrog 2005-04-27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이제부턴 제나라말 책들을 열심히 찾아 읽으라는 신탁으로 받아들였어요..^^;;;
플레져님, 저도 <푸르른 틈새> 낼롬 읽으려구요..^^
꽃든사과님, 아.. 정말 간만에 숨막히게 읽어나간 책이랍니다.
새벽별님, 읽으시면 분명 모님께 고마워하실거에요..ㅎㅎ

날개 2005-04-27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넘 멋진 리뷰입니다.. 감히 더 할말이 없군요...

▶◀소굼 2005-04-27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제 '우리나라 소설은 잘 안읽어'라는 대답을 했었는데...
바로 도서관에서 책 한권 가져왔지요^^ 이녀석도 읽어야 겠네요: )

panda78 2005-04-27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멋진 리뷰네요.. 저도 게으름 고만 피고 어서 읽어봐야겠습니다.

superfrog 2005-04-28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개님, 에이..=^^= 오늘따라 특히 아가천사 엉덩이가 토실, 귀엽습니다..!ㅎㅎ
fyra님, 님도 저랑 비슷하셨군요!! 이번에는 어떤 책을 또 꺼내 들까 생각중이에요. 좋은 책 있으심 알려주세요!!^^
panda78님, 홍콩 여행기 잘 봤어요. 님의 발랄한 사진도 많이 봤는데 왜케 낯이 익은거죠? 혹 제가 아는 분인가 해서 화들짝 놀라기도 했답니다. 여행은 다녀오고나면 계속해서 가고싶지요.. 아, 글고 말예요, 님이 게으름이면 저는요, 저는요!! 우엥!

비로그인 2005-04-29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허..이래도 되는 겁니까? 갑자기 드문불출하시더니 산에서 내공을 쌓고 오셨나..추천 한 방 안 박을 수 없고나..

2005-04-29 0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깍두기 2005-04-29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금붕어님이 방명록에 쓴 댓글 못 봤으면 이 숨막히는 리뷰를 그냥 지나칠 뻔 했네요. 그동안 처녀치마 소문 듣고도 모른 척 했는데, 이제 더이상은......

2005-04-29 2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4-30 1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panda78 2005-05-02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옷 0ㅂ0 혹시 저랑 전생에 무슨 인연이라도! ^^;;
모모는 잘 있나요오오오오-보고 싶어요!

2005-05-03 13: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5-09 18:4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