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름다운 아이 ㅣ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7
이시다 이라 지음,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2005년 4월
평점 :
절판
소설을 읽을 때 작품에서 작가가 보인다는 건 두 가지를 의미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작가가 지닌 모든 것이 오롯이 작품 속에 녹아 들어 있는 경우, 두 번째는 작가가 소설을 위해 벌여 놓은 재료들이 제대로 요리되지 않아 버석거리며 하나의 완성된 이미지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경우. 두 번째 경우에 그 재료들은 작의(作意)를 드러내는 게 아니라 작위적이라는 꼬리표를 달게 된다. <4teen> 이후 다시 만난 이시다 이라의 <아름다운 아이>는 아쉽게도 두 번째에 해당한다.
소설은 흥미로웠다. 일본에서 실제 일어났던 아홉살 소녀 살인사건을 소재로 쓰여진 글이다. 주인공인 열네살 소년 '감자'의 동생이 살인사건의 범인이었고(누가 범인인가는 스포일러가 될 만큼 중요한 사안이 아니다) 이로 인해 '감자'를 둘러싼 세상은 하루아침에 부서져버린다. 이야기는 이곳에서 비로소 시작된다. 망가지고 부서진 곳에서 소년이 어떻게 이겨내고 성장해가는가, 겉으로 보여지는 '올바름'이 어떤 허위를 가질 수 있는가, 다수의 힘이 어떻게 잔혹한 폭력이 될 수 있는가를 그러나 소설은 그다지 어둡지 않게 보여준다. 장편임에도 집어들고 내쳐 결말을 보게 만들었으니 흡입력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몇 군데 밑줄도 그었다. 하지만 어째 동어반복적이다. 바로 <4een>에서 익히 들어왔던 말들이다.
참아라, 참아라, 그러면 언젠가 끝이 찾아온다. 인생이란 그런 것인가. 언젠가 찬란하게 빛이 날 때가 올까. 한여름의 열풍에 온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모든 것을 웃어넘길 수 있는 그런 때가 올까.
14살 식물탐구를 좋아하는 '감자'의 말이다. 14살 하늘을 날 수도 있는 나이라 말하는 <4teen>의 그 '괜찮은 네 녀석들'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작가는 이번에도 14살의 소년들에게 희망과 순수와 투명함을 노래하도록 한다. 자신들을 이해할 수 있는 극소수만이 '괜찮은 어른'이라 부르게 한다. 또다시 소년들에게 탐정놀이를 시킨다. 어른들이 해결하지 못하는 일을 14살의 희망과 순수와 투명함으로 답을 찾게 한다.
14살의 풋풋한 감수성은 <4teen>으로 충분하지 않았을까. 괜찮은 네 녀석들이 다짐했던 말처럼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은', 그 풋풋한 감수성을 지닌 청년으로 성장했어야 하지 않을까. 아이는 자라야 한다. 작가의 14살에 대한 애정과잉이 그들을 성장하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는 건 아닐까. 묵직한 주제를 흥미롭게 전개시킨 작가의 솜씨에도, 손에 잡힐 듯 생생한 묘사에도 불구하고, 매끄럽게 앞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뒷목을 잡아끄는 건 바로 이러한 점 때문이었다. 14살에 대한 로망의 혐의는 작가가 애써 준비해 놓은 나머지 빛나는 재료들의 빛을 잃게 한다. 이제는 14살에서 성장하도록 놓아주어야 한다.
노트북 컴퓨터의 두께가 3센티미터에서 1.5센티미터가 되고, 박막형이 시대의 흐름을 타고 잘 팔린다고 해서 그게 생활에 보탬을 주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런 것 때문에 가족까지 희생할 필요가 있을까? 요즘 들어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 돼. 미키오, 너는 시대의 유행을 타지 않는 일을 택해서, 그것을 평생의 직업으로 삼았으면 좋겠다..
감자의 아버지가 감자에게 해 준 말이다. 14살의 로망을 부여잡고 '그런 풍성하고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지.'라고 먼산을 바라본들 노트북의 두께를 줄이는 것이 관건인 세상에서 달라지지 않는다. 하늘을 날 수 없는 14살이 아니라고 해서 그 아이들에게 무참하게 '시원찮은 어른'이라 낙인 찍히는 건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하늘을 날 수 있는 나이를 지나쳤다면 24살, 34살, 44살에 벌판이라도 신나게 달려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