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죽음을 맞이한 뒤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러한 의문을 던지게 마련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피할 수는 없는 일이었을까? 고야의 그림 중에 여러 명의 의사들이 환자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 있다. 그 표제는 <그는 어떤 병으로 죽을 것인가?>이다. 그가 죽을 것임은 확실하다. 하지만 그 죽음에는 어떠한 명칭이 부여되어야만 한다. 그것이 의사들의 관심사이다. 어쩌면 모든 이들의 관심사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절망적>이라는 선고를 내리고, 그 절망이 치료를 위한 모든 연구에 종지부를 찍고 나면 의사들은 그 살해자를 찾아내기 위한 조사를 시작한다. 하지만 그 살해자, 대자연은 우리에게 세상에서의 첫날과 마찬가지로 마지막 날을 선사했다. -15쪽
만약 당신이 사랑하는 이를 안락사시킨다면 그것은 그의 고통을 줄여주기 위한 것인가? 당신의 고통을 덜기 위한 것인가? 죽음을 맞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이다. 하지만 사랑 때문에 마찬가지의 처신을 할 수도 있다. -41쪽
다른 사람들, 혹은 우리 자신을 가엾게 여길 때, 우리는 삶이 마련해 준 기쁨들을 잊고 있다. 고통이란 기쁨의 결핍에서 비롯될 뿐인데, 삶의 기쁨을 모른다면 어떻게 고통을 알 수 있겠는가? 동물들은 삶을 행복한 것으로 여긴다. 나중에 겪은 고통에 연연해하며 일생 동안 누렸던 기쁨을 부정할 이유는 없지 않겠는가? -67쪽
'거두어들일 수 있을 만큼만 씨를 뿌리기를!' 하피즈의 말이다. 하지만 나의 욕망은 나의 필요와 능력을 초월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나는 다른 모든 생물과 다를 바가 없다고 여긴다. 나는 개들 중에서 귀감을 찾으려 했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개들은 먹을 기회가 생기면 배가 터질 때까지 먹어댄다. 개들은 자기들이 토해 놓은 것조차 꺼리지 않는다는 사실은 꼭 성경을 읽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렇다 개들은 우리보다 나은 존재가 아니며 우리에게 삶의 교훈을 전해 주지도 않는다. 좀더 낮추어 말하면, 개들은 우리와 똑같다. -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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