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헬렌 니어링 지음, 이석태 옮김 / 보리 / 199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이 자기 집을 스스로 짓는 일은 새가 자기 보금자리를 만들 때와 똑같은 합목적성이 어느 정도 있다. 사람이 제 손으로 살 집을 짓고, 자신과 식구들을 위해 간소하면서도 꼭 필요한 만큼의 양식을 생산한다면, 새가 그런 일을 하면서 언제나 노래를 부르듯이, 사람도 시심이 깊어지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그러나 아! 우리는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는 찌르레기나 뻐꾸기처럼 산다.."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에 인용된 <월든>의 한 구절이다.
니어링 부부의 책들을 한 권 한 권 읽어가면서 아직은 여러 가지 이유로, 혹은 미진한 결단으로 인해 드러나는 변화를 만들어내지는 못했더라도 내 안에서는 끊임없이 큰 소용돌이가 일었다. 아름다운 삶이다, 아름다운 사람이다, 이렇게 사랑하고 이렇게 살고 이렇게 생을 마무리할 수 있구나.. 하는 충격으로 인해 어지러울 정도였다. 익히 알고 있겠지만 스코트와 헬렌은 많은 차이점이 있다. 스코트는 뛰어난 경제학 교수였지만 사회주의자라는 이유로 강단에서 쫓겨났으며 헬렌은 풍족하고 자유로운 가정분위기 속에서 자란 예술적인 성향이 높은 바이올린 연주자였다. 많은 차이점을 지닌 두 사람이 만나 이처럼 아름다운 삶을 살다 아름답게 생을 마감할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두 사람에 대한 무한한 믿음과 가치 있는 삶에 대한 끊임없는 지향이었다. 스코트는 헬렌에게 자상하게, 때론 거침없이 그녀에게서 개선해야 할 부분들을 끊임없이 글로 써서 그녀에게 보냈으며 그녀 또한 자신을 바꾸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헬렌이 스코트에게 일방적으로 종속된 삶은 산 것은 절대 아니다. 스코트 또한 예술적 부분과 정신영역에 대해 헬렌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두 사람은 손수 농사를 지어 식량을 마련하고 벽돌을 구워 살 집을 지었으며 몸을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노동을 멈추지 않았다. 농사를 짓고 노동을 하지 않는 시간에는 떠들썩한 파티를 즐기기보다는 글을 쓰고 강연을 하러 다녔으며 이웃들과 연대하고 음악을 듣고 시를 짓고 악기를 연주했다. 자연 그대로의 단순한 자연식을 했으며 '생활의 질을 높이기보다 삶의 질을 높이고자' 했다.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당신이 갖고 있는 소유물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나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어떤 행위를 하느냐가 인생의 본질을 이루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단지 생활하고 소유하는 것은 장애물이 될 수도 있고 짐일 수도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느냐가 인생의 진정한 가치를 결정짓는 것이다."

스코트가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결정하고 준비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아흔 여섯의 나이가 되자 그는 '그렇게 오랫동안 함께 연결되어 있던 유기적 요소들이 이제 서로 떨어지려 하고 있네. 대체 누가 그 요소들을 강제로 계속 붙어 있게 하고 싶어하겠나?'라는 말을 하며 새로운 세계로 갈 준비를 하였다.

천천히 천천히 그이는 자신에게서 떨어져나가 점점 약하게 숨을 쉬더니, 나무의 마른잎이 떨어지듯이 숨을 멈추고 자유로운 상태가 되었다. 그이는 마치 모든 것이 제대로 되어 있는지 시험하는 듯이 "좋 - 아."하며 숨을 쉬고 나서 갔다. 나는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옮겨갔음을 느꼈다..
곡기를 끊고 스스로 죽음의 순간을 맞이한 스코트의 임종을 지켜 본 헬렌의 기록이다. 그녀는 스코트가 평온하고 조용하게 삶에서 떨어져나갈 수 있도록 그의 곁에서 그를 안심시켰다. 그의 죽음 후에도 그녀는 그의 존재가 계속되고 있음을 느꼈다. 단지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슬픔 없이 그를 계속 사랑할 수 있었다.

이 책이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견 딴 세상 소리로, 실천할 수 없는 허무한 대안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맑은 정신으로, 주위의 가장 가까운 사람을 돌아보며, 자신이 추구해 온 삶을 반추하며 읽어야 할 필독서이다. 이 책을 읽으며 '아름다운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비단 부부 사이가 아니더라도 사람 사이의 사랑은 어떠해야 하는지, 맹목적으로 매달려온 가치들이 정말로 그만한 가치가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본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를 위해 꼭 읽어야 할 감동적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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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09-11 0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곡기를 끊고...스스로...
그 마른 몸과 얼굴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술마시고 안 들어오는 남편 기다리고 있습네다.^^

balmas 2004-09-11 0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언젠가는 반드시 읽어볼게요.
추천도 한방 꾸욱~

superfrog 2004-09-11 0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헛.. 로드님, 정말 아름다운 할아버지였죠?
흐.. 저 분들을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나려고 해요.
열심히 살아야죠, 열심히..

superfrog 2004-09-11 0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almas님, 꼭 읽어보세요!! 님처럼 훌륭하신 분이 더 훌륭해지시려면 꼭 읽으셔야 한다니까요..!! 제가 보내드릴 수도 있다구요.. (헛, 추천은.. ㅎㅎ 감사합니다.. 에구.^^;;;)

chika 2004-09-11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란 말에 긴장하고 들어왔습니다. 오옷~!! 역시.. ^^b
오늘은 읽는 글들마다 찬성표하나씩을 던지고 가야할 운명인가봅니다. ^^

가을산 2004-09-11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 보관함 직행입니다. ^^

chaire 2004-09-11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드시 읽어야 할 책, 이라는 님의 말씀에 천 퍼센트 동감! 정말 훌륭한 책이지요! 월든보다 훨씬훨씬 재밌고!

반딧불,, 2004-09-11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좋지요??

진/우맘 2004-09-11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요? 음...헬렌 니어링의 밥상에 대한 책을 읽고, 게으른 나에 대한 좌절에 몸부림쳤더랬는데....이것도....

superfrog 2004-09-12 0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아직 안 읽으신 분.. 제발 읽으시길..

미완성 2004-09-12 0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금붕어님,
이주으 마이리뷰 다시 받으실 때가 온겁니다...
흙, 덩말 이번에야말로 도금해놓으셨던 비늘들은 벗기고 순금비늘만을.....ㅜ_ㅜ

짜고치는 추천아, 물러가라!
저는 진지하게 아름다운 추천을 드린 겁니다!!!!

superfrog 2004-09-12 0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아침에 일어나서 알라딘을 들어오니
멍든님의 멋진 코멘이 금붕어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여요!!!아, 비는 그치고 아름다운 일요일입니다요~~!!^^

비로그인 2005-04-11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겠습니다. 꼭 읽겠습니다..^^;;
 
파크 라이프
요시다 슈이치 지음, 오유리 옮김 / 열림원 / 200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작년 겨울 <퍼레이드>로 요시다 슈이치의 작품을 처음 접했다. <퍼레이드>는 이색적이었고, 경쾌하며 동시에 음침했으며 다섯의 주인공들은 각 장에서 화자가 바뀔 때마다 실제 주변의 특정 인물들의 이미지를 차용하여 눈앞에 선명한 모습으로 형상화되었다. 잘 다듬어진 각본이 운좋게 섬세한 연출과 만나 감칠맛 나는 한 편의 단막극으로 만들어진 듯한, 리듬감이 느껴지는 그런 작품이었다. 많은 정보가 없던 만큼 기대치가 적어서였을까, 요시다 슈이치는 우연찮게 알게 되어 적잖게 기대를 갖게 한 작가로 기억되었다. 몇 개월이 지난 후 그의 다른 작품인 소설집 <파크 라이프>를 읽고는 <퍼레이드>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 속에서 좋은 소설을 만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파크 라이프>에는 '파크 라이프'와 '플라워스'라는 두 편의 중편소설이 실려 있는데 첫번째 작품 '파크 라이프'는 책 표지가 작품 자체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선과 단순한 색으로만 이루어진 그림, 고층빌딩에 둘러싸인 공원. 한가운데 분수가 있으며 작은 연못이 있고 몇 종류의 새들이 있으며 빨간색의 항공촬영용 소형기구가 날고 있다. 뚝 잘려져 단층으로 보여지는 공원의 땅 속으로는 지하철이 다니고 해골도 묻혀 있으며 공원 옆으로는 도로, 그 위로 초록색 차가 달린다. 공원의 풍경에는 한 명의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공원의 풍경은 샛노란 배경색을 갖고 있지만 영화의 정지 화면처럼 답답하다. 요시다 슈이치는 '파크 라이프'에서 대사를 아끼고 영상으로만 전달하려는 영화처럼, 그저 공원에서 이루어지는 행동들과 주인공 '나'의 움직임들만을 보여준다. 전작 <퍼레이드>가 1인칭 시점으로 건조하게 각자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과는 달리 이 작품에서 작가는 극도로 감정의 묘사를 배제한 채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파크 라이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읽는 내내 강한 감정을 뿜어낸다. 외롭다고 외치기도 하고 반가운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어 안도하기도 한다. 주인공의 의식이 흐르는 대로 이미지와 소리와 냄새가 뚜렷한 경험 속에서 개연성을 만들어 내며 이것은 바로 현대의 파크 라이프 자체이다.    
생동감 있는 영상을 떠올리게 하는 힘은 '플라워스'에서 더 강하게 드러난다. 언뜻 아무런 연관도 없을 듯한 사건들이 서로 뒤섞이고 엉켜서 선명한 영상을 통해 인물들의 호흡을 전달하는 능력은 탁월하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주인공의 동료 '간단'이 샤워실에서 벌거벗은 동료들에게 몰매를 맞는 상황과 주인공이 예전에 묘지에서 경험한 꽃의 이미지가 뒤섞이는 장면은 '플라워스'의 압권이라고 할 수 있다. 몰매를 맞는 '간단'과 그를 쳐다보는 주인공의 시선에서 메마르고 거친 감정이 손에 잡힐 듯이 느껴지며 소름이 돋을 정도로 속도감 있고 선명한 영상을 만들어 낸다.
'마리코를 생각하면, 어쩔 땐 갑자기 힘이 빠진다. 그건 다른 누구와 같이 있어도 맛볼 수 없는 이상한 느낌으로, 궤도를 이탈한 인공위성의, 그 미련 없이 멀어져 가는 뒷모습이 눈앞에 떠오른다... 마리코는 내게도 변화를 요구했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가볍게 뛰어올라 창공을 날아다니라고. 하지만, 나는 만약 그렇게 하면 심해에 피어 오르는 기포처럼 끝 모르고 떠다니다 결국엔 산산이 부서져버릴 것 같아 두려웠다...'
주인공은 '꽃에는 제 나름의 성정이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꽃의 수만큼 사람에겐 감정이 있다.'고 말한 할머니의 말과, '궤도를 이탈할 것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마리코, '심해에 피어 오르는 기포처럼 끝 모르고 떠다니다 결국엔 산산이 부서져버린' 간단의 틈바구니 속에서 위태롭게 중심을 잡고 외줄을 탄다.
고개를 돌려 외면해버리고 싶은 바로 내 자신의 안쓰러운 모습이다. 그럼에도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 줄 위에서 두 팔을 벌리고 중심을 잡아야 한다. 기포가 되어 부서져버리든, 궤도를 이탈하는 인공위성이든, 아니면 꽃의 성정이 잘 살아나도록 꽂힌 꽃꽂이 작품이든 결국 어떤 모습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떤 모습을 선택할지는 누구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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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08-31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쾌하며 동시에 음침했다니 관심이 가는군요.^^

2004-09-02 13: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superfrog 2004-09-02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님도 읽어보세요. 맘에 드실 것 같은데..^^
속삭인님, 님 날아가버린 긴 코멘 궁금해요.. 아, 이제 치과 갔다가 노란 약 타러 가야 해요..ㅠ.ㅜ 이 땡볕에 말이죠.. 으허~~

2004-09-02 16: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4-09-07 1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개가 있는 따뜻한 골목
김기찬 지음 / 중학당 / 2000년 3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책이 아니다. 사진집이다. 사진집도 책의 형태로 만들어져 출판된 것이니 왜 책이 아니냐 하겠지만 책이라고 하기에는 편집상의 문제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많다. 한마당 화랑 개관 17주년 기념으로 열린 '개가있는 따뜻한 골목' 김기찬 사진전을 책으로 만든 것으로, 책 앞부분에 자신의 이름을 딴 칼럼으로 널리 알려진 '명 칼럼니스트'가 쓴 축하의 글과 책 뒷부분의 작가의 말과 약력을 빼고는 모두 다 사진으로 채워진 사진집이다. 영문을 제외하고 한글이라고는 달랑 6페이지 정도 되는데 이 여섯 페이지가 거의 저자의 원고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 너무 엉터리여서 '아, 이렇게 하고도 책이 나오는구나', 하고 기가 막혀 했다. 속사정이야 모르지만 아마도 자비출판이 아닐까, 하는 엄한 생각도 잠깐 스쳐간다. 무엇보다도 오류의 핵은 제목일 듯하다. <개가있는 따뜻한 골목>이라 표지에 찍혀 있는데 이 '개가있는'이 의도한 것인지 아니면 확실한 오류인지 한참 동안 생각해 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속표지에는 버젓이 '개가 있는'으로 제대로 띄어쓰기가 되어 인쇄되어 있으므로.

책다운 부분에서는 거의 낙제점 이하를 주고 싶지만 그 엉터리 글자들 사이를 빼곡히 채우고 있는 사진들은 보고 있는 새 충분한 만족감을 던져 준다. 잘 넘겨지지도 않는 두터운 종이에 콘트라스트 높은 가을날 오후의 그림자처럼 선명하게 찍혀 있는 사진들은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시선을 머물게 한다. 
사진들은 모두 개가 있는 골목의 풍경들이다. 개말고 또 무엇이 있을까. 사람들이 있다. 언제 어디선지 모르게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스쳐지나갔을 법한 얼굴의 사람들, 또는 나 자신.. 거창하게 무슨 종이네,라고 이름붙일 수도 없는 잡견들과 뒤섞여 돌사진을 찍는 찡그린 얼굴의 아이도 있고 상가집 앞에 걸려 있는 등도 있다. 웃통을 벗어제끼고 데모대들이 깨서 시위 때 쓴다 하여 이제는 사라진 널찍한 네모 블럭이 깔린 울퉁불퉁한 골목을 잡견을 앞에 세우고 가는 사내아이도 있고, 태어난 지 얼마 안 됐을 강아지를 웃옷 속에 품고 친구에게 자랑하는 사내아이도 있다. 10마리도 족히 넘는 동네의 온갖 개들 앞에 여왕처럼 먹이통을 들고 군림하고 있는 갈래머리 소녀도 나온다. 조각난 햇빛 아래 볕을 쬐고 있는 개가 있는가 하면 늙고 병든 노인의 옆에 놀랍도록 노인과 똑같은 포즈로 앉은 비쩍마르고 애처롭게 생긴 개도 등장한다.
 
어릴 때 잠깐 개를 키워 본 경험밖에 없고 그다지 개에 대해 관심도 없었다는 작가의 말처럼 이 사진집은 거창하고 요란스럽게 개를 대하지 않는다. 또한 '명 칼럼니스트'의 축하글에서 읽을 수 있는 것과는 달리 물질적 풍요나 빈곤, 절망 등을 '아이들과 개들이 뛰는 풍경 속에서 무엇이 빈곤인지 묻고' 있지도 않다. 작가는 그저 조용히 자연스런 표정을 하고 있는 골목 안의 사람과 개에게 흑백의 필름을 담은 카메라를 골목 안 풍경을 깨뜨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들이밀었을 뿐이다.

'명칼럼니스트'가 본 골목 안 풍경 사진은 잡견이 아닌 혈통 있는 개만 고집하는 애견가가 갖고 있는 시선이며, 골목에서 살아보지 않은 사람이 바라보는 시선이다. 해서 이 사진에 다소 왜곡된 의미를 갖다 붙인, 띄어쓰기도 제대로 안 된 축하글은 심하게 못마땅하다. 마치 도시 사람이 시골을 전원주택의 풍경을 기본으로 깔고 한가로운 장면만을 떠올리듯이, 이 칼럼니스트는 골목 안 사람들이 이기적이지도, 풍요의 때가 끼지도 않은 유기농야채쯤으로 이미지를 마음대로 만든다. 하지만 실제 골목 안은 어떤가. 좀도둑이 다 쓰러져가는 엉성한 담을 넘고 있고, 매일밤 끊이지 않고 어느 집에선가 부부싸움으로 냄비가 날아다니는 소리가 넘쳐나며 아이들의 악다구니로 하루가 열린다. 혹은 소위 잘사는, 많이 배운 사람들과 그다지 다를 것없이 하루 세끼를 먹고 마찬가지로 키우는 개를 이뻐하며 쓰다듬고 먹이를 준다.

작가 김기찬은 이런 사람사는 모습들을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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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8-20 19: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superfrog 2004-08-20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사진 너무 좋았어요.. 그 풀먹인 베갯잇 같은 빳빳한 종이도 너무 맘에 들구요.. 헌데 책이요, 무성의한 게 아니라 무지하게 만든 것 같아서 말이죠..^^ 그래서 책이 아니라 사진집..^^;;;

로드무비 2004-08-21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기찬님은 정말 꾸준하게 사람 사는 골목을 찍으시는군요.
어느 부엌 주렴 밖으로 꽁치 굽는 냄새가 풍겨나올 것 같은...
개가 있는 따뜻한 골목, 아이디어가 참 좋은데 책이 좀 엉망이라니
안타깝네요.^^

hanicare 2004-09-02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다시 보러 왔더니 별이 한 개 더 늘었네요? 힛...

superfrog 2004-09-02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다시 보니 님 코멘도 자리를 옮겼어요..^^
글자 땜에 좋은 사진이 홀대 받으면 안 될 거 같아서 말이죠..^^;;;
 
도깨비 신부 1
말리 지음 / 길찾기 / 2004년 7월
평점 :
절판


사실 떠들썩한 명성 때문에 약간 삐딱한 시선으로 도깨비 신부를 대했다.
게다가 우리나라 만화를 폄하하고 있었다는 점 또한 부인하지 않는다.
김혜린과 박희정, 이진경, 이향우 등은 존경해 마지 않지만,
원수연이나 황미나 등의 작가들과 근래의 학원물 작가들과는 코드가 맞지 않는다.
해서 '말리'라는 이 신예의 작가도 색안경을 쓰고 꼬투리부터 잡아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대했다.
물론 꼬투리야 있다. 헌데 그게 딱 하나다.
아직 정돈되지 않은 데생력. 앞으로 더 열심히 갈고 닦아야 하는 숙제를 갖고 있다는 점.   
그로 인해 캐릭터들이 일관된 모습으로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말해 작가가 정밀하게 묘사한 통 컷의 캐릭터와 개그컷으로 그린 캐릭터가 다른 캐릭터로 보인다는 점은 책 이곳저곳에서 보인다.
하지만! 내용면에서 도저히 해답이 나오지 않는 일련의 작품들과는 확연히 다른 차별성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이 <도깨비 신부>는 놀랍다.
우선 탄탄한 주제의식을 꼽을 수 있다. 이마 이치코의 <백귀야행>을 떠올릴 수 있지만 그보다는 좀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다. 게다가 무게도 있다. 환상이 아닌 현실 속에서의 도깨비를 그린다.
또한 그 주제를 뒷받침하는 취재력이다. 뜬구름 잡는 식으로, 어린 머릿속을 정신없게 만드는 원수연의 작품들 속의 엉터리 대사들과는 달리, 뚜렷한 주제의식을 지닌 직설적인 대사를 통해 작가가 전달하려는 의미를 확실하게, 두눈 부릅뜨고 전달하고 있다. 덧붙여 설명해야 할 것 하나는 어색하거나 과장됨 없이 이야기를 진행시켜 나가는 연출력이 탁월하며 물 흐르듯 강약을 조절하는 능력 또한 뛰어나다는 점이다.
아직은 매끈매끈한 그만의 캐릭터나 멋진 꽃미남의 주인공 대신, 냄새나는 도깨비가 남자 주인공으로 등장하지만 이 작품이 처녀작임을 볼 때 말리라는 작가가 뻗어나갈 수 있는 길은 무한하고도 기대에 차다. 
일정 정도 완성된 경지에 이른 작가들의 초기작을 만나는 기쁨은 색다른 즐거움을 주고, 1권을 시작으로 점차 권수를 늘려가며 발전해 가는 그림의 데생력을 지켜보는 것은 만화를 사랑하는 독자들만이 알 수 있는 행복이리라.
이러한 연유들로 이 작가, 말리를 참으로 많이, 기대한다. 
아직은 거친 얼굴을 한 '신선비'와 도깨비 '광수'가 지극히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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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성 2004-08-15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도깨비 신부, 너무나 재밌게 봤어요-
이빈으 포스트모더니즘이었던 가요? 그 만화도 생각났고 했지만-
많이 기대되어요-

superfrog 2004-08-15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제발 우리나라에서 만화가들을 위한 토양이 탄탄히 다져지길 바랍니다..
금붕어가 쌈지돈을 털어 천권 가까이 되는 만화를 사재기하고 있건만.. 흑, 여전히 택도 없는 힘인가 봐요..;;;
역시 멍든님과 금붕어는 통하는 구석이 있었군요.. 하이파이브!!!^^

미완성 2004-08-15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요! 저두 그 토양이 탄탄하길 바래요!

하이파이브!!

반딧불,, 2004-08-16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멋지군요..
저도 간만에 한 권 사야겠습니다.

금붕어님의 극찬이라니...^^*

superfrog 2004-08-16 0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반딧불님, 아마 1권 커버를 여시면 좀, 뭐야뭐야 하실 텐데요..
2권, 3권으로 갈수록 이 작가 만만치 않군! 하고 생각이 드실거에요..^^

hanicare 2004-08-16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가 커가는 모습을 지켜본다는 것,혹은 작가와 함께 나이들어가고 있다는 안도감.
전자는 저는 잘 모르는 경지고 후자는 왕가위에게서 맛보곤 합니다.
(근데 금붕어님.하루끼는 전에 전에 작품이 더 낫지 않던가요?)

superfrog 2004-08-16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휴... 맞아요.. hanicare님.. 전 사실 우리나라 작가분들 작품은 그다지 많이 읽지 못해서 뭐라 할 수도 없고 하루키도 좋아는 하지만 제멋대로 이해하고 있는 정돈데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하루키 작품은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와 양을 둘러싼 모험, 댄스댄스댄스에요.. 그리고 여타의 단편들..^^ 근래 다시 읽은 노르웨이의 숲은 처음 읽을 때의 건조한 느낌과는 좀 다른 느낌을 받았죠.. 하, 지금 세어보니 눈에 뜨일 때마다 냉큼 사버렸던 vintage의 페이퍼백까지 합쳐서 43권의 하루키 책이 있군요.. 흐아..;;;;;

로드무비 2004-08-19 2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깨비신부> 저도 참 재미있게 읽었어요.
대사가 허황되지 않고 멋을 너무 부리는 것 같지도 않은 것이 마음에 들어요.
그림도 좀 거친 듯한 것이 인간적이라는...^^

superfrog 2004-08-20 0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로드무비님도 보셨군요..^^ 허황된 대사..! 원 씨가 또 생각납니다..;;;
글쵸.. 그림이 아직은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구도나 뭐 그런 것들은 훌륭해 보입니다.. ㅎㅎ

nightlife 2004-08-29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뛰어난 만화죠. 뭐랄까 신기가 있어요! 리뷰 자알 읽었습니다 :-)

superfrog 2004-08-29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J.D.님도 좋아하시는군요!! 앞으로 많이 기대되는 신인이죠? 스토리 전개와 연출력이 뛰어나니 그림체만 어느 정도 완성단계에 이른다면 더할 나위 없을 듯합니다..^^

톡톡캔디 2006-08-09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금붕어 님 ^^ 저는 도깨비 신부 때문에 허브 정기구독합니다.ㅎㅎ 하루키 취향이 같네요. 요샌 하루키 안읽습니다만. 그냥 반가워서 한 마디 적습니다.
 
신탁의 밤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5월
평점 :
절판


[환상의 책] 이후 폴 오스터에게 약간 거리를 두었었다. 초반의 흡입력 있는 전개에 비해 막바지로 갈수록 이야기는 늘어놓은 곁가지들을 수습하는 느낌이 강했던 때문이다. 물론 토막 읽기를 한 때문에 몰입이 안되었던 건지, 몰입할 수 없어서 토막 읽기를 한 것인지 어느 것이 애초의 원인이 된 건지는 모르겠다. 어쨌거나 [환상의 책]은 저윽이 실망스러웠고 [신탁의 밤]을 다시 집어들기에는 망설임도 있었다.
하지만 작은 실망감보다는, 폴 오스터의 중독성을 지닌 질긴 인연으로 다시 [신탁의 밤]을 집어들었다.. 
열 페이지, 스무 페이지.. 읽을수록 손에서 책을 놓아버릴수가 없다. 몇 시간이 지나도 계속해서 책장을 넘기고 있다. 결국 하루 만에 꼬박 읽고는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휴, 한숨을 내쉰다. 미처 다 읽지 않고 페이퍼에서 투덜거렸던 내용들이 약간은 부끄럽다. 섣부른 판단을 했던 것에 대해 되돌리고 싶은 생각도 든다.
소설의 중반을 넘길 때까지 계보를 그려야 하나 싶기까지 했던 이야기들은 일순간 명확한 하나의 이미지로 선명하게 압축되어 눈앞에 드러난다. 그래, 신탁의 밤이다. 이 책의 제목이 신탁의 밤이로구나. 마지막 한 조각의 퍼즐이 제자리를 찾아 끼워질 때의 그 딱, 하는 손의 촉감처럼 지금까지의 인고의 시간을 보상받는 기분이다.
결국 시드가 집착을 보였던 포르투갈제 파란공책에 썼던 이야기는 미완이었지만 그 미완의 이야기 속에서 신탁은 완결된 모습을 가지고 있었고 그 신탁은 현실에서 힘을 발휘한다. '우리는 때때로, 설령 우리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더라도 어떤 일이 일어나기도 전에 미리 그것을 알게 되지. 우리는 현재에 살고 있지만 우리의 내면에는 어느 순간에나 미래가 있네.'라고 말한 존 트로즈의 말처럼 시드는 자신도 모르게 파란공책의 알 수없는 힘을 빌어 자신에게 신탁을 내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 신탁은 현실로부터 구분지어진 결계 속의 뜬금없는 우연이 아닌 그가 알아차리지 못했던 현실의 것들이 차곡차곡 쌓여 만들어진 운명적인 신탁이다.
 
언제나 우리들은 뒤늦게서야 깨닫고, 이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주판튕기기를 하거나, 회한의 눈물을 흘리거나, 나 아닌 존재를 향해 분노를 터뜨린다. 과거에 자신의 움직임들이 파란공책 속에서 이야기가 되어 신탁으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 이야기가 압도적인 힘을 지니고 자신에게 운명의 힘으로 덮쳐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 사실을 안다면 신탁은 더이상 신탁이 아니므로, 주위의 진동을 민감하게 알 수 있었던 '신탁의 밤'의 눈먼 주인공 르뮈엘 플래그가 자신을 칼로 찌를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생각은 진짜이고 말도 진짜고, 인간적인 모든것이 진짜'라는 사실을 알았던 존 트로즈가 불운한 사랑을 했던 것처럼 신탁은 대개 행운보다는 액운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인간 세상에서 신탁은 신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 만들어내는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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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8-20 12: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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