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라닌 1
아사노 이니오 지음 / 북박스(랜덤하우스중앙)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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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봐요, 그럴 수 없으니까 인생이 괴로운 거 아냐.'

독약을 먹이고 싶으면 약 이름 정도는 가르쳐 줄 수 있지. 에헤헤.. 하며 방긋이 웃는 이라부에게 항변하는 어느 환자의 말처럼, 인생이 괴로운 이유는 '그럴 수 없으니까'이다. 때맞춰 '그럴 수 있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도쿄의 한 구석, '낮고 좁고 무거운' 하늘을 이고 회사 옥상에 쭈그리고 앉아 고양이한테나 푸념하던 메이코에게 '인생의 레일 따위에서 벗어나'라는 속삭임이 들려온다. 레일을 벗어나면 예전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드넓은 하늘을 볼 것만 같다. 하지만 '그럴 수 없으니' 인생이 괴롭다.
프리터로 일러스트를 그리며 대학시절 시작한 밴드생활을, 본격적으로 활동하지도 접지도 못하는 다네다. 그럴 수 없으니 그 또한 괴로운 나날을 보낸다. 그런 다네다에게 어느날 메이코가 감자같은 얼굴을 들이밀고 회사를 관뒀다고 말한다. 이제 그들에게 '그럴 수 있어서 행복한 인생이' 시작되는 것일까.

설마. 인생이라는 괴물 같은 것이 그렇게 호락호락할 리 없다. 그 정도라면 누구나 이라부병원의 처방전 한 장을 받는 것으로 라 돌체 비타.. 노랠 부르며 살다가 마지막 눈을 감으리라. 둥글넙적하고 평범한 주인공들의 거창할 것 하나 없는 밋밋한 인생 이야기가 시작된다. 애초에 반짝거리기는커녕 스포트라이트조차 비추지 않는 불투명한 청춘, <소라닌>은 여름 한낮 사람 하나 없는 골목처럼 심심할 지경인 청춘 군상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조금만 더 죽어라 노력하면, '90일만 더 살면' 뭔가 좀 좋아질까 싶지만 기실 인생에서 놀라운 일들은 그렇게 쉽사리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니 다네다 밴드가 마지막으로 한번 해보자, 마음먹고 만든 앨범이 하룻밤 사이에 히트곡이 될 리 만무하고 다네다의 아버지가 지어준 밥과 명란젓 한 덩어리가 메이코에게 마법의 주문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골방에 박혀 날마다 텔레비전이나 부수며 살 수는 없으니 메이코는 다네다가 남겨둔 기타를 둘러맨다. 다시 한 번 '그럴 수 있어서 행복할'지도 모를 인생이 시작되는 것도 같지만, 엉망진창 연주를 하고 간신히 틀리지 않게 노랠 부르며 메이코는 생각한다. '살다 보면 이런 날도 있는 거야. 하지만... 이 곡이 끝나면 언제나와 똑같은 생활이 시작돼.' 머릿속이 새하얗게 되어 노랠 부르고 나서 무대 위에 코를 박고 엎드린 메이코는 영화 <태풍태양>의 모기처럼 밋밋한 일상으로 되돌아올 수 있는 자기만의 의례를 치러낸다. 이 장면이 얼마나 안타깝고 애처로우며 서글픈지는 책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자고 일어나 새로운 해가 떠올라도 어제와 같은 오늘이 반복되고, 심하면 기시감을 불러올 정도로 10년 전 어느날과 똑같은 나날이 이어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 하찮은 꼴을 한 게 내 인생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없다. 슬쩍 정류장 한 귀퉁이에 놔두고 떠나고 싶은 쓸모없는 물건처럼, 덩치 큰 배낭 같은 인생의 무게를 내다버리지 못해 누구나 질질 끌고 버티고 있는 거다. 어떤 이는, 하루하루가 행복하고, 죽는날까지가 아니라 사는날까지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인생이란 거 그렇게 누구에게나 헤헤 웃으며 행복할 수는 없는 노릇. 끊임없이 몸을 움직이고 손을 놀려야 한다. 아침마다 잠이 덜 깬 얼굴로, 이 끔찍한 인간들은 다들 어딜 향해 가고 있는 걸까. 다 죽어버리든지! 저주를 퍼부으며 지하철을 타고 출근해야 하고, 이참에 거지같은 면상을 한 상사를 들이받을까, 아니꼽고 더럽지만 이번만 참고 넘어갈까, 매초마다 시덥잖은, 혹은 절체절명의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의 연속인거다. 그런 자질구레함이 모여 한달이, 1년이, 인생이 돼버린다. 때때로 회상인지 착각인지 모를, 내게도 반짝거리던 지난 시절이 있었지..하는 중얼거림을 하며 한번씩 가늘어진 눈을 하고 허공을 보면서 말이다.

어제와 같은 모습의 언제나 똑같은 생활이 시작되더라도, 메이코는 그때 '그럴 수 있는' 선택을 했기 때문에 조금은 인생이 괴롭지 않을 것이다. 어느 날 가출했던 애인이 돌아온다고 전화해 놓고는 그길로 황천길로 가버릴 수도 있는 게 인생이지만, 청춘 앞에 항상 찬란한 미래가 펼쳐져 있는 건 아니지만, 한번쯤 '레일을 벗어나라'는 검은 속삭임의 꾐에 빠져든다고 해도 세상이 무너지는 건 아니라고 작가는 말한다. 텔레비전을 던져 버린다고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내 손톱 아래 가시 하나가 세상의 전부가 되기도 하고, 세상의 전부가 발톱에 낀 때만도 못하게 하찮은 것으로 느껴지는 그 불합리하고 제멋대로인 게 청춘의 모습이니까.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무척이나 사실적이다. 만화의 본질이랄 수 있는 과장도, 남발하는 우연도, 따뜻함도, 청춘예찬도, 밝은 미래도, 로맨틱함도 찾아보기 힘들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공명수에 맞춘 작품이 아닌, 작가의 섬세한 감정에 함께 공명했을 때만이 화려하지 않은 작품 속에 숨겨진 작가의 내공을 발견할 수 있다. 툭툭 던지는 듯 하지만 묵직함을 지닌 작가의 생각들과 그것들을 무겁지 않게 받쳐 주는 경쾌한 유머, 그리고 치밀하고 섬세한 데생과 구도, 입체적인 전개, 무엇 하나 흠잡을 데가 없는 80년생 젊은 작가가 앞으로 어떤 작품을 보여줄지 몹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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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05 00: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superfrog 2007-03-05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방에 놀러 갈게요..^^

2007-03-05 09: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superfrog 2007-03-05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기피인물인가봐요. 다들 속삭이고 가시네요..^^
0944님, 스스로 내준 숙제라 기꺼운 맘으로 하긴 했지만, 님 한마디 말씀이 엄청난 압빡이라는 거 아시죠..?^^;
참, 부끄러워서 저는 1권에 올려놨어요..

2007-03-05 2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치니 2007-03-08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거 진짜 사봐야지 안되겠어요, 제가 아는 모든 알라디너들이 한결같이 칭찬이시니...

superfrog 2007-03-08 2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348님, 이거 꼭 죄수번호 같잖아요..;; 추천은 보신다는 말씀인거죠?^^
치니님, 치니님도 이 책 보시고 나면 다른분께도 추천하고 싶으실걸요? 저처럼 메이코를 대문에다 걸고도 싶고요.^^

2007-03-08 23: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superfrog 2007-03-09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345님, 역시 웃는 버섯을 드신게야..^^
혈액 속에 퍼진 독 성분이 빠져나가려면 하루 정도 걸린데요.
우리 잘 견뎌내봐요.ㅎㅎㅎ

습관 2007-06-21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연히 서재에 들러봤습니다.
요즈음은 거의 서재에 오지 않습니다.
그래도 무슨 여운인지 이렇게 가끔씩 들렀다가 이런 보석같은 리뷰도 보고 가네요.
추천 누르고 갈게요.
 
이문재 산문집
이문재 지음, 강운구 사진 / 호미 / 2006년 11월
구판절판


'조금 더 느리게, 조금 더 단순하게'를 삶의 지표로 삼고 있지만, 거대 도시에서 살아가는 월급쟁이에게는 이루기 힘든 꿈이 아닐 수 없다. 독서가 중요한 까닭은 책을 통해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사유를 만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책을 읽는 동안만큼은 다른 일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다른 일'은 우리가 그 일의 주인이 아닐 때가 많다. 나 자신을 위한 일은 그리 많지 않다. 녹차를 달여 마시는 것도 그렇다. 물이 끓기를 기다리는 동안, 녹차가 우러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이 도시 문명이 요구하는 잡다한 업무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걷기가 그런 것처럼, 휴대 전화 전원을 꺼 놓는 것이 그런 것처럼, 녹차 마시기는 자발적 망명이다.

-마지막 장, 녹차 마시기 中에서 -2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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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04 15: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superfrog 2007-03-04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저는 두번째 읽는 건 아니고요^^;; 읽는 사이 중간에 끼어든 책들이 있어서
이제 다시 붙잡고 읽으려고요. 녹차는, 이문재씨가 삶의 지표로 여기는 '느림'에 대한 오브제라고나 할까요.. (녹)차, 자전거, 만년필, 부채, 도보여행.. 이런 것들과 연장선상에 있는 거죠. 마지막 장의 저 단락이 책 전체를 아우르는 거라 생각되어 밑줄 그었어요. 비가 꽤 오네요. 하하, 저도 방금 뜨겁게 목욕을..^^

2007-04-03 06: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4-03 18: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4-04 17: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superfrog 2007-04-04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예. 속삭님, 잘 받았어요. 무료문자 잘 들어와요.ㅎㅎㅎ
넵, 알겠습니다. 열심히 해보도록 하지요.^^ 감사합니다~!
 
내 나이 서른하나
야마모토 후미오 지음, 이선희 옮김 / 창해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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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어떤 책을 읽을 때 사실적인 정보를 전혀 알지 못한 채 멋대로 판단할 때가 있다. 그런 잘못된 판단으로 만들어진 생각들은 이내 실재하는 사실적 정보들과는 상관 없이 생명을 얻어, 머릿속 기억장치 속에 통조림처럼 유효기간이 찍혀 버젓하게 들어앉아 작은 공간을 차지한다. 야마모토 후미오의 이 책 <내 나이 서른하나>를 읽으며 나는 이렇게 '근본'을 알 수 없는 사생아 같은 생각을 만들어냈다. 서른한 개의 짧은 글들을 읽어나갈 때 그 생각은 글자들을 영양분삼아 제멋대로 덩치가 커져갔고 뿌리는 다부지게 뻗어나갔다. 그 사생아 같은 판단은 항상 그리 대단치도 않은 것들이고 대개는 잘못된 판단일 확률이 50%는 가뿐히 넘지만(가끔 족보도 못 외우는 얼뜨기가 화투판을 휩쓸듯이 족집게처럼 맞춰내기도 하지만) 이 버릇은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다행히 항시 어떤 책을 읽을 때마다 반복하는 것도 아니니 다행일 뿐이다. 하지만 우연하게, 혹은 어떠한 계기로 그 태생적으로 '근본'을 알 수 없이 만들어진 생각이 오류였음을 깨달았을 때도 수정하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그 오류들은 그때, 그 책을 읽을 당시를 충분히, 오롯하게 반영하고 있어, 쉽사리 수정하고 싶은 맘이 생기질 않는다. 그저 그때의 내 감정에 꼬리표를 달아 봉인하고 싶다. 
아마도 야마모토 후미오의 이 책에 대한 생각도 대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오류일지 모른다. 이 책을 읽으며 만든 생각은 이랬다. 작가는 어느 때보다도 가장 날이 서 있을 때, 변태할 외피는 벗었으나 아직 새 외피는 얻지 못한 상태로, 투명한 속살이 그대로 소금기를 지닌 바닷물에 드러나 눈물나도록 쓰라려 하고 있는 상태에서 발악적으로, 미열에 들떠, 혹은 공허한 시선으로 방 한구석을 응시하며 이 글들을 쓴 게 아닐까, 하는. 한 발 더 나가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 작가, 일시적으로 정신상태가 불안정해졌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하는 얘기는 순전히 그 근본을 알 수 없이 만들어진 오류를 바탕에 깔고서 하는 말들이다.
숨차게 사방으로, 위아래로 뛰어봤자 무엇 하나 내세울 것 없는 그저 그런 삶을 살다 어느날 맞는 서른이라는 나이. 나이 앞에 낯설게 들러붙은 3이라는 숫자가 준 충격에서 벗어날 즈음 다시 찾아온 그 충격에 조금은 심드렁해질 수 있는 나이, 서른하나. 어쩌면 길기도 짧기도 할 수 있는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지났을 수도 있는, 아직 어딘가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황금기를 기대하며 허허로이 꿈을 꾸고 있을 수도 있는 나이, 서른하나. 여기 이야기 속에서 제각각의 서른하나를 넘기고 있는 사람들은 다들 어딘가 한구석이 삐걱거린다. 직장에서 주위가 시끄럽다고 귀를 틀어막고 일을 하질 않나, 월급을 털어 산 외제차에서 생활하며 스포츠클럽의 샤워실을 제집 화장실로 사용하질 않나, 자신이 명기를 타고 났다며 동생에게 고백했다 구박을 맞질 않나. 맘에 쏙드는 기호품에 집착하듯 1년에 단 한번 해외에서 외도를 하질 않나. 하나 같이 뭔가 덜떨어진 것 같기도 하고, 사는 게 아무리 힘들어도 난 끈질기게 살아남겠다고 밤마다 다짐하는 사람들 같기도 하고, 세상이야 어찌 돌아가든 알 바 없이 난 내 멋대로 갈길을 가겠다고 외치는 철부지들 같기도 하다.
이야기가 이제 슬슬 진행되려나 싶을 때 '아.. 더 쓰기 싫어, 끝내버릴래!'하고 변덕부리듯 미련없이 끝나버리는 글을 한 편 한 편 읽다보니 작가의 속내를 알 듯도 싶다. 작가는 헤어진 남편의 주정뱅이 시아버지의 품에 기대 잠들고 싶을 정도로 외로웠던 게 아닐까. 혹은 실제로 알코올의 힘을 빌어 하루를 견뎌야 할 정도로 힘겨운 시간을 보낸 건 아니었을까. 세상에 나보다 더 못나 보이는 여자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게 못내 억울하고 속이 상했던 게 아닐까. 그래서 옆에서 발을 걸어 넘어뜨리고도 싶고 뒤통수를 타닥,치고 싶기도 하고, 공들여 한 그녀들의 화장한 얼굴을 망쳐버리고 싶기도 했던 게 아닐까. 내 나이 서른하나는 이렇게 숨쉬기조차 힘들 지경인데 네 나이 서른하나는 왜 아무렇지도 않은거야,라고 소리지르고 있는 것만 같다. 하지만 작가는 언제까지 귀를 틀어막고 자동차만큼 좁아터진 방구석에 박혀 있을 수만은 없잖아!하는 오기로 머리 위에 하나씩 저마다의 속도로 돌고 있는 우주를 달고 사는 그녀들에게서 그 우주를 멋대로 떼어내 속도를 늦추기도 하고 되감기도 하고 재빨리 감아버리고 싶었던 게 아닐까. 소금기에 드러난 속살이 견디기 힘들 만큼 아플 때는 거칠게, 조금 살 만하다 싶으면 생색내듯 너그러이 말이다. 이야기 속 서른한살에는 그녀들에 대한 작가의 미움과 시샘과 절망이 함께 들어 있다.
그녀들을 향한 작가의 감정은 변덕스럽고 불안정하게 이리저리 튀어, 대개는 공허한 서른하나의 '그녀'들이 탄생하지만, 때때로 네 나이 서른하나도 나와 같구나..하는 체념과 동질감에 읽고 나면 알싸하면서도 가슴 따뜻함을 느끼게 만들기도 한다. 그 덕분에 외로워 울고 있는 것만 같은 야마모토 후미오의 생채기투성이의 얄궂은 맨살을 다 들여다본 나는 이 짧은 글들이 더 마음에 든다. 새살이 돋고 견고한 새 외피를 장만해,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세상을 살고 있는 여자들을 미워할 필요가 없어진 단단한 그녀의 글들보다는 이 글들에서 야마모토 후미오라는 사람의 맨얼굴을 더 잘 알아볼 수 있을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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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06-12-27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작품을 내놓는 즉시, 오류로 빚어진 판단이라도 받아들일 각오를 해야 하는게 작가일테니...^-^ 저는 늘 제맘대로 오류하고도 자성하지 않는데, superfrog님은 작가의 맘을 사려깊게 헤아려주시네요.

superfrog 2006-12-27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느낌표와 물음표님, 왜 그러세요, 우리 사이에..ㅋㅋ 그런 과한 칭찬은 건강에 해로워요.^^
치니님, 아무래도 이 작품집은 이전에 읽은 것보다는 약간 색이 달라요. 거칠다고 해야 하나, 그 이유를 저는 멋대로 야마모토 후미오의 '상태'에서 이유를 찾았는데 저연혀~ 아닐 수도 있는 거죠. 헛다리짚은 것일 수도요. 가장 최근에 쓴 작품일 수도 있구요. 그래도 저는 그냥 제맘대로 믿으려구요.ㅎㅎ

가랑비 2006-12-27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언제 파충류가 되셨어요? *.*

chaire 2006-12-27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 작가의 마음속에 들어갔다 나오신 듯. 아니면 돋보기라도 갖고 계신 걸까요. 어쩜 이리 선연하게 소설 그 이면, 혹은 그 이전의 풍경을 묘사하신답니까! 서른한 살이건 아니건 간에, 불안하고 도도한 여자들의 마음을, 후미오의 소설이 아니라 님의 리뷰 덕분에 새삼 확인하게 됩니다. 공들여 화장한 그녀의 얼굴을 망치고 싶은 그런 심리, 좀 알 것도 같으니, 소설의 언어가 살짝 거칠어도 용서가 될 것 같은데요? (아, 역시나 저는 밀린 책들부터 해결해야 하지만요 :)

superfrog 2006-12-27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벼리꼬리님, 개구리가 파충류인지 양서류인지 헷갈려서 찾아봤지 뭐에요..ㅎㅎ 양서류라네요.^^
카이레님, 리뷰는 별볼일없는데 님의 해석이 너무 근사해요. 님 덕분에 재밌게 잘 읽었어요. 이 책을 읽으니 작가에게 더 애정이 가요.^^

2006-12-29 0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superfrog 2006-12-29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엉성한 듯 알뜰한 관계님, 제가 부탁드려야죠.
드문드문 올라오는 님 글 읽는 거 소확행이에요..^^
이번에 나온 책들, 표지가 좀 그렇죠?
알록달록 여성지 칼럼의 삽화풍을 의도한 것도 같고.
게다가 일본소설은 왜 죄다 하드카버를 고집하는 건지.
약간 맘에 들지 않아요. 서재지붕 자주 바꾸려면 부지런떨어야겠죠?
내년에도(아, 3일 후!) 동시에 눈길 둔 소소한 것들 붙잡고 유쾌해하기도 하고 투덜거리기도 하고 그래요.^^

2007-01-06 19: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superfrog 2007-01-08 0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리번거리신 님, 새해엔 소홀하심 안되요..ㅋ
오늘 한밤 산책길에 인간은 세 명 정도 만나고 눈밭을 여러 곳 뛰어다니다 왔어요.
물론 옆에서 설레발치는 지지배랑 같이요.^^
저 책은 한번 집어들면 금방 읽으실 거에요, 그쵸?ㅎㅎ

2007-02-23 12: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superfrog 2007-03-02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음질하시고는 홈질이라고 주장하시는 님, 제발 기다리지 말아주세요..;
 
바다에서 기다리다 - 제134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이토야마 아키코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10월
평점 :
절판


<막다른 골목에 사는 남자>를 읽을 때부터 이 작가, 심상치 않았다. 역자의 말을 빌자면 '어려운 단어 하나 없는, 기교조차 부리지 않는 평범한 문장'을 슬렁슬렁 읽고 나면 '어, 끝났네?'하고 만다. '아, 끝났구나..'가 아닌, 약간의 끝이 치켜올라가는 이 느낌은 책 한 권을 다 읽었다는 작은 충만함을 가져다 주는 게 아니라 고개를 15도 정도 갸웃거리며 한번 더 앞 장을 뒤적이게 하는 묘한 여운을 불러온다. '희한한 재주'를 가진 이 작가를 <바다에서 기다리다>라는 표제작과 <노동감사절>로 다시 만났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희한한 재주를 가진 작가와, 세밀한 감각과 작가에 대한 넘치는 애정을 가진 역자가 만나 싸하면서도 유쾌한 책 한 권이 만들어졌다.
표제작 <바다에서 기다리다>는 직장 동기 오이가와와 후토짱의 이야기이다. 한없이 선량해보이는 두툼한 손을 가진, 1년도 더 전에 발령난 인사이동을 특급비밀이랍시고 몰래 전화로 알려주는 동기 후토짱이 있다. 둘은 술을 마시다가 장난삼아 '먼저 죽는 사람의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나중에 남은 사람이 부숴주기' 협약을 맺었는데 말을 꺼낸 후토짱이 덜컥 죽어버렸다. 그것도 후토짱 식으로, 우스꽝스럽게. 오이가와는 덜덜 떨리는 몸으로 후토짱의 하드디스크를 부숴주러 후토짱의 집에 몰래 들어간다. 그리고 후토짱의 내밀한 기록들을 폐기시킨다.
가끔 슬프고 속상한데도 피싯 웃음이 새어 나올 때가 있다. 웃으면 안 되는데, 분명 슬픔의 한가운데 풍덩 빠져 있었는데 어느새 가장자리에 와 있었던 걸까, 순간적으로 팟, 떠오른 기억이나 꼬리를 물고 연상된 일 때문에 새어나오는 허탈한 웃음. 입사동기 후토짱의 죽음에는 그런 서글픔과 웃음이 뒤섞여 있다. 일로 만나 오랜 시간을 함께 한 한 '사람'과의 인연을 작가는 조근조근, 마치 옆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들려주듯이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동기 후토짱과 함께한 오이가와의 소소한 시간을 들려준다. 그 담담한 어조의 글을 읽다보면 눈물이 나면서도 웃게 된다. 웃으면서도 가슴이 아프다. 

단편소설에는 영 걸맞지 않아 보이는 제목을 단 <노동감사절>은 다 읽고 나면 입꼬리에 웃음이 걸린다. 어쩌다 의리상 맞선자리에 끌려나오게 된 서른여섯 노처녀 무직자의 속내를 유쾌하고도 쌉쌀하게 드러내보인다.
'찐빵 한가운데를 주먹으로 냅다 친 것 같은' 얼굴을 한 맞선 상대자 노베야마 씨는 회사를 아주 좋아하고 취미가 '물론' 일인 서른 여덟의 남자다. 두 사람의 맞선 장면을 한번 들여다볼까. 우선 노베야마 씨는 찐빵 한가운데를 주먹으로 냅다 친 것 같은 얼굴임을 기억해두자.
팥이 몰려서 부풀어 오른 부분에 물기 많은 눈과 팽창한 붉은 입술이 붙어서, 호호호, 축 처져 있다. 머리는 어중간하게 길어서 감았을지도 모르지만 지저분한 느낌이다. 그러나 사랑만 있으면 다소 못생긴 건 커버가 된다. 여기서는 예의로라도 사람 됨됨이를 보자. 어쩌면 면상은 저 모양이라도 아주 좋은 사람일지 모르잖아.
서른여섯 노처녀 무직자 교코는 안간힘을 쓴다.
하지만 뭘 물어봐야 좋을지. 맞선 따위 본 적이 없으니 도박은 안 하시죠, 라든가 변태 행위는 곤란해요, 라든가 하는 이야긴 중요하기는 해도 말로 할 수는 없고. 머릿속에서는 이 인간하고 그걸 할 수 있겠니? 하는 소리가 들린다. 으음. 난이도가 극히 높겠는걸. 그러나 노베야마 씨도 생각하는 건 나와 별 차이가 없었다. 단지 그는 소리 내어 말했을 뿐이다. "신체 사이즈는 어떻게 되세요?" (아뿔사) "88 - 66 - 92." 노베야마 씨는 한번 더 히죽 웃었다. 여기가 가축시장이냐? 좀 더 지켜볼까.
그건 그렇고 노베야마 씨는 투명한 느낌을 주는 신기한 목소리를 갖고 있었다. 그 목소리로 인도 철학이라도 이야기하면 어떡하지? 약간 불안해졌으나, 그것은 기우였다. "직업은?" 그가 물었다. "무직인데요." 나는 대답했다. 도둑도 아니고 사기꾼도 아니고, 그저 일본에 삼백육십만 명이나 서식하는 정상적인 무직자 중 한 명이다. "저는 회사를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랍니다." 무엇무엇을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말이 아직 이 세상에 유통되고 있는 줄은 몰랐다. 그것도 회사라니, 덜떨어진 놈!
결국 교코는 맞선 주선자인 동네 아주머니와 어머니를 남겨두고 노베야마 씨에게 잘 놀다가라는 말을 남기고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후배를 만나 술을 마시고 집을 향해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내딛던 서른여섯 노처녀 무직자에게는 다행히도 기분 안 좋은 날 애용하는 '자포자기삼미' 주점이 있다. 썰렁한 술집 카운터를 지키며 14인치 텔레비전에 눈을 고정하고 손님이 오면 되레 귀찮아 하는 주인장과 불경스런 얼굴로 건배를 외치고 문어 안주를 먹는다. 이 주인장, 손님도 별로 없는 술집에서 도라도 닦은걸까. 지옥같은 맞선자리를 박차고 나와 집에 들어가기 싫어 배회하는 서른여섯 노처녀 무직자 교코에게 이렇게 말한다. "걱정해 봐야 손님은 안 와. 할 수 있는 데까지 할 뿐이지. 그래서 안 되면 그때 가서." 교코는 이렇게 자포자기삼미 주점에서 '새까맣고 조용하고 좁은 밤 한 조각'을 주머니에 넣고 조금은 마음이 편해져서 집으로 돌아간다. 생각해보니 그날은 12월 23일 노동기념일, 새까맣고 조용하고 좁은 밤 한 조각은 이 힘겨운 노동기념일의 노동에 대한 보답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뜻하지 않게 찾아온 죽음에-대개의 죽음이 그렇지만-무방비하게 살고 있는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남겨져 누군가의 손에 의해 발가벗겨질 농밀한 기록들을 생각하면 얼굴이 확 달아오른다. 후토짱 협약이라도 당장 맺고 싶다. 후토짱 같은 동기녀석, 사람 좋아 보이는 두툼한 손을 가진 동기녀석 하나가 있다면 인생 참 든든하겠다. 가끔 '자포자기삼미' 주점에서 문어를 안주삼아 건배를 해도 즐겁겠다. 단 어이없이 투신자살하는 사람에게 깔려죽지 않아야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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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06-11-08 0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런. 어제 신나게 장바구니에 책 담아 주문했는데, 오늘 이 리뷰를 보아버렸네요. 이거 보니 바로 구매하고 싶어지잖아요...흑.

깍두기 2006-11-08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금붕어님 반가와요!!!!!!!
너무 반가워서 리뷰도 안 읽어보고 댓글 달려다 간신히 참고 읽었어요.
리뷰는 또 어찌나 맛깔스러운지!
자주 좀 오시구려.(나도 뭐 할 말 없지만^^)

superfrog 2006-11-08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니님, 마음가는 대로 하세요.ㅎㅎ 제생각에는 치니님도 재밌게 읽으실 거 같은데요? <막다른 골목에 사는 남자> 보셨나요? 그 작품도 좋아요.
깍두기님, 진즉부터 오신 거 알고 반갑게 깍두기님 방에 들락거리고 있어요. 해송이 방에도요..ㅎㅎ 넵, 자주 오겠습니다! 어느분 명이라고..^^

2006-11-08 12: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superfrog 2006-11-08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음.. 그 표현 제격이에요. 어이없고 유쾌하고 쓸쓸한. 어수선한 시간에 어수선하게 읽혀버리게 하고 싶지 않은 책, 저는 요시다슈이치 작가가 그래요. 좋은 분이 선물해주셨는데 가만가만 표지만 한번 쓰다듬어줬지요. <바다에서 기다리다>도 그렇게 미뤄뒀던 건데 부담스런 양이 아니라서 욕조 속에 들어가서 다 읽어버렸지요. 그러고는 끼적거리고 싶어 근질근질해져서 한밤중에 저리 조각글을 남겼어요. 야마모토 후미오의 <플라나리아>를 한번 다시 읽고 싶어지네요. '느긋하게 볼 수 있을 때' 말이죠.

2006-11-08 12: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superfrog 2006-11-08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시다슈이치!님, 이거 위험해요. 같은 시간, 공명수가 너무 일치해요. 이쯤해서 갈라놔야 해요.ㅎㅎ
(또 각을 잘못 잡아 '어이없고'로 썼네요. 불치의 지병을 근사한 해몽으로 메꿔주셔서 감사.^^)

날개 2006-11-08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리뷰의 대가다운 금붕어님......^^

superfrog 2006-11-09 0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개님, 헛, 대가요? ㅋㅋ 모모가 들으면 웃겠어요. 잘 지내시죠? 배드민턴은 이제 선수급?^^ 땡수투가 많이 줄지 않았나요? 요즘 좀 바빠서 만화 사재기도 못하고 있어요.

플레져 2006-11-11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 땡스투여요 ^^

superfrog 2006-11-11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님에게는 이토야마 아키코가 어떻게 읽힐지 무척 궁금해요.
<막다른 골목에 사는 남자>도 그렇지만 이 책도 후토짱이 계속 기억에 남아요. 길지 않은 분량의 소설인데도 읽고 나서의 파장은 참 길어요. 땡스투, 땡스에요.^^
 
허니와 클로버 9
우미노 치카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어릴 때 난 관람차가,
무엇 때문에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느려터지고 그저 높기만 해서,
딱 한 번 타보고는 질려버렸다.
제트 코스터에 루프 슬라이더.
가슴이 콩닥거리는 놀이기구 외엔
눈이 가지 않았다. 그런데,
이젠,
왠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관람차라는 이 놀이기구는,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천천히 하늘을 가로질러 가기 위해 있는 것이다.
아마도
"조금 무섭다" 라느니 하면서...

 
자신을 봐주지 않는 사람을 바라봐야 하는 그는
그 사람이 바라보는 사람과, 그 사람과, 셋이서 관람차에 오른다.
또 다른 엇갈린 사랑을 하는 그녀는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지 못하는 그와 관람차에 오른다.

 
그때
관람차가 밑으로 다 내려가기 전에,
세상이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그 정도로 그 석양은,
아름다웠다...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가슴에 뜨끔, 하는 감각이 사랑인지도 모르는, 사랑인 줄 깨닫고는 당혹스러움에 줄행랑을 치는, 감당하기 힘든 알 수 없는 감정에 눈앞에서 밥도 못 넘기는, 아, 이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예감하고, 서글퍼하고, 혼란스러워하고, 추스리고, 다독거리는, 체념하고, 바라보고, 체념하고, 바라보는, 어린 그들은 몹시도 사랑스러워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하아.. 하고 한번 큰숨을 내쉬게 된다. 그래, <허니와 클로버>는 섬세한 눈과 손으로 세상을 보고 세상을 담아 내는, 어리숙하고 섬세하고 몹시 사랑스러운 아이들의 이야기다.
이제 결말을 향해 가고 있어 못내 서운하고 안타깝다. <렛츠고, 이나중 탁구부>를 곁에 쌓아 두고 보며 한권 한권 줄어들 때 느낀 아쉬웠던 감정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한참 동안 다음권이 나오지 않을 때 맘속으로 이렇게 빌었었다. '우미노 치카님, 열심히 열심히 사서 읽을 테니 작가님은 그저 힘을 내서 그려 주세요!'하고 말이다. 그 바람이 가 닿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작품이 끝나가는 이제는 또 이렇게 빌고 있으니 중증이 맞겠지만 그래도 빌고 싶다. '이 어리숙하고 섬세하고 사랑스러운 것들에게 조금만 상처주세요!'
'행복하게 해주세요!'라는 바람은 두리뭉실 안일해 보인다. <맘보걸 키쿠>의 토키와 엄마의 말처럼 '젊음이라서 섬세하고 결벽할' 수 있으니까. '섬세하고 결벽하면서' 행복하다 느끼기는 쉽지 않으니까. 고약한 취미가 분명하지만 숨막혀 어쩔 줄 모르는 하구미를, 얼굴 붉히는 마야마를, 야마다를 보고 있으면 내가 행복해지니까, 그러니 너무 많이 아파하지 않게만 해주길. 눈물 흘리는 야마다에게는 손잡아주고 음료수를 건네주는 모리다가 항상 옆에 있기를. 

<허니와 클로버>를 첫 번째 읽었을 때는 그 복작복작함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간간히 재밌고 독특했고, 드문드문 싸한 아픔을 느꼈던 정도였다. 다시 읽었을 때 처음보다 사람들 사이의 엮여진 끈이 선명해지자 조바심 때문에 놓쳤던 다른 부분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온다. 노다메왕국의 백성이 되어야 비로소 <노다메 칸타빌레>의 참맛을 알 수 있듯이 <허니와 클로버>는 그 아이들이 사는 작은 공간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때서야 그 섬세한 디테일들을 느낄 수 있다. 기린을 통째로 빨아들이는 눈을 가진 자그마한 콜로보클 하구미가 사는 마을, 훌쩍거리며 밤길을 걷는 야마다 뒤에 리더를 데리고 슬그머니 나타나는 노미야씨가 있는, 자아를 찾아 떠난 다케모토와 그를 기다리는 교수님이 있는 마을. 끝없이 하늘로 하늘로 향하는 탑을 쌓는 다케모토와 거대한 캔버스를 앞에 두고 앉은 요정처럼 작은 하구미의 작업실이 있는, 초콜릿과 민트와 산딸기향이 나는 도시락을 싸서 벚꽃놀이를 가는 하구미와 야마다가 있는 마을.
그리고 마을 어귀에는 석양을 등지고 천천히 돌고 있는 낡은 관람차가 있는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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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04 10: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superfrog 2006-11-04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명님, 저는 그게 능력이라 생각해요. 그 섬세한 감정에 공명할 수 있는 능력, 그게 반드시 성에 따라 주어지는 것도 아니더라구요.^^ 단순하게 두 패로 갈랐을 때 여자쪽에 좀 더 그 편중되어 주어지는 건 맞는 것 같지만요. 그래서 저는 공명할 수 있어 다행이다, 싶어요.^^ <허니와 클로버>는 사실 몹시 유쾌한 만화에요. 어떤 장면에서는 거짓말 안 보태고 떼굴떼굴 구를 정도에요.(예를 들자면 아빠머리통 장면. 보시면 알아요.^^) 작가가 대단한 건 심하게 웃기고 심하게 사랑스럽고 심하게 안타까운 장면들이 아무런 어색함 없이 같이 잘 뒤섞여 있다는 거죠. 님이 선택해주셨다니 기쁜걸요. 어떻게 보실지도 많이 궁금해져요. 혹 적응이 한번에 안 되시면 한번 더 보시길. 두번째는 더 재밌어져요.^^

superfrog 2006-11-05 1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별님, 좋아요, 좋아.. 다시 보면 더 재밌어지는 건 아마도 쪼만한 글씨들이 바글바글한 것도 이유가 될 거에요, 그쵸?^^

2006-11-07 13: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11-07 13: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11-07 14: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날개 2006-11-10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보겠다고 하고선 결국 다른 일때문에 오늘 리뷰 읽었어요..
리뷰 읽노라니.. 저는 눈물이 나려 합니다..
코끝이 찡해져 오는 이 감각이, 내가 느낀것을 금붕어님도 느꼈다는데서 오는 기쁨과 함께 전해져 오네요..
갑자기 책을 다시 들추고 싶어집니다....ㅡ.ㅜ

superfrog 2006-11-10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개님, 하구미는 하구미대로, 야마다는 야마다대로, 다케모토는 다케모토대로, 생각만 하면 아아, 이 사랑스러운 것들을 어떻게 하지, 그런 생각들어요. 젊고 어리숙하고 섬세해서 어쩔 수 없이 아파하는 애들을 보면 하.. 젊음이란 좋은 것이구나, 하고 늙은이 소리가 저절로 새나와요..;; 너무 이쁜 애들이죠? 작가는 어떻게 저런 아이들을 만들어냈을까요? 저는 한 세번 봤어요. 볼 때마다 더 재밌어지니 희한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