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원인 1 - 40대 남성
회의에 다녀오니 직원들이 "실장님(공식적인 보직이 아닌 종합자료실 담당이다 보니....) 민원인이 찾는 책 없다고 욕하고 소리 지르고 난리가 났었어요. 그리고 ㅇㅇ씨 울었어요" 한다. 상황을 들어보니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살짝 이상한 이용자가 와서는 다짜고짜 "먼나라 이웃나라 지금 없다고 나오는데, 예전에 이곳에서 봤으니 무조건 내놓으라"고 한것이다.
만화책은 자료실에서 몽땅 치우라는 관장님의 강압으로 안타깝게도 도서관의 모든 만화책은 서고에 꽁꽁 숨겨두고 대출불가가 된것이다. (먼나라 이웃나라, 내일은 실험왕, 삼국지, 식객, 살아있는 한국사, 세계사 교과서까지 모두.....) 하지만 기대 이상으로 학부모들은 좋아했으며, 아이들도 글책을 열심히 읽더라. 도서관에 오면 만화책만 보던 규환이도 요즘 해리포터에 푹 빠졌다.
그는 무조건 책 찾아 놓으라고 잠시후에 다시 온다는 이야기를 했다기에 설마 했는데 정말로 온 것이다!!
다행히 난 경력 20년의 사서였으며 웬만한 민원인은 끄덕도 하지 않는 강심장의 소유자이다.
그의 첫 이미지는 말을 할때 입을 가리고, 눈동자는 나를 쳐다보지도 못하며, 표정이 어둡고 몸은 왜소한 그런 평범한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에게는 최대한 정중하게 그러나 위엄있게,
나 : "안녕하십니까? 제가 여기 책임자 입니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십니까?" (최대한 저음으로....)
그 : "과장님이신가요? (응? 아닌데....속으로만) 음 작년에 여기서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편이랑 역사 봤는데 없어요. 난 지금 그 책이 보고 싶으니 당장 가져와요"
나 : "선생님 죄송합니다만 우리 도서관에는 만화책이 없습니다. 학생들이 도서관에서 만화 본다고 학부모들의 항의가 많아 모두 폐기 처분했습니다. 따라서 빌려드릴수가 없습니다. 당연히 볼 수도 없고요" (관장님이 임의로 그랬다고는 차마 말하지 못하고....)
그 : 내가 작년까지 봤는데...암튼 무조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져와요"
나 : 죄송하지만 방법은 없고, 인근 서점이나 가까운 도서관을 안내할테니 그리로 가시면 어떨까요? 아니면 인터넷 서점에서 구입하실수도 있구요. 어떻게 할까요?
그 : 우리집 인터넷도 끊겼고, 내가 그렇게 돌아다닐 만큼 몸이 자유롭지가 않아요. (응? 뭔 말이야... 속으로만)
나 : 음 그럼 돈을 주시면 제가 인터넷으로 주문해서 댁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알아보니 15천원) 인터넷 서점엔 30%나 세일해서 저렴하네요. 15천원 주시겠습니까. (15,500원 나오더만 500원은 깎아서 불렀다)
그 : 나 돈 없는데.... 난 그냥 내용 조금 보면 되는데.....하며 한참을 뜸 들이더니, 에이 알았어요 돈 줄테니 빨리만 보내줘요. (지갑을 슬쩍 보니 5만원권이 2장이나 보이더라. 돈 있으면서 거짓말 하기는)
나 : 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주문해서 댁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늦어도 토요일엔 받으실 거예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난 책도 집으로 구입해주는 친절한 사서가 된 것이다.
다행히 그는 전혀 소리 지르지도 않았고, "과장님 이신가요" 하는 비굴함도 보였으며, 나름 예의를 갖추려고 하는 노력도 보였다. (나의 미모와 부드러운 카리스마에 눌린 걸까? 이러다 매일 오는거 아냐?)
그가 가고 난뒤 직원들이 "실장님 그러다 책 안 받았다고 하면 어떡해요" 하기에,
난 "에이 한번 째려보고 아무말 없이 15천원 돌려주는거야. 불쌍한 사람 도와줬다고 생각하지 뭐" 라고 했다.
어쨌든 그 긴박한 상황에서 알라딘이 떠올랐고, 덕분에 위기를 모면했으니 알라딘은 역시 나의 베푸인 것이다.
그나저나 책이 빨리 가야 할텐데...과연 그는 주소는 정확히 써 준것이며, 무사히 책을 받을까? 설마 오리발 내밀지는 않겠지? 

민원인 2 - 올해 고등학교 졸업했다는 여성
내일까지 수강신청 기한이라 홈페이지에서 열심히 찾아 헤매고 있는데 직원이 "실장님 바쁘세요" 한다. 또 뭐니?
이번엔 올해 고등학교 졸업한 학생인데 대출이력을 뽑아 달래서 뽑아주었더니 연체 데이터가 떴다며 연체한 사실이 없다고 지워 달라고 실랑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주말에는 그 애 엄마가 와서는 직원말은 듣지도 않고 자기 딸 연체 사실 없다고 지워 달라고 소리치고 했단다. (아니 조용한 도서관에서 소리 질러도 된다니?)
그 아이를 보니 역시나 눈동자가 흔들리며 무언가 불안한 모습이다. (이 친구도 살짝 정신이 이상한 느낌)
왜 그런 사소한거에 연연해할까? 연체 데이터가 뜨면 좀 어때. 그래봐야 3일이던데....벌써 세번째 억지를 부리는 거란다.
다시 또 진지하게, 그러나 이번엔 인자하게,
나 : 학생 이번에 고등학교 졸업했어요? 그럼 어느 대학교 갔어요? (내심 입학사정관 준비라도 하는 걸까 하는 탐색?)
학생 : 대학은 안갔어요. (초등학교에서 받은 다독상을 보여주며) 저는 책을 굉장히 많이 읽었고, 제 날짜에 반납했다고 생각했는데 연체했다고 몇개 떠서요 (일일히 확인을 한거다. 뭐야. 그럼 입학사정관 준비도 아니네....)
나 : 학생 책 많이 읽어 상장도 받고, 도서관 이용도 많이 했네요. 참 고마운 친구네....이렇게 연체되었다고 기록에 남아서 속상하겠네요. 그런데 어쩌나? 이건 직원들이 임의로 적어 놓은것도 아니고 컴퓨터가 계산을 해서 자동으로 입력이 되는건데...알죠? 컴퓨터는 거짓말 안하는거....어떡하지? 내가 지워줄 수 있으면 좋을텐데 안타깝다.
학생 : 제가 속상해서 그래요. 정말 책 많이 읽고 연체도 안했어요. 그리고 예전에 다른 분께 물어봤을때도 연체없다고 했는데 이상해서요. 그때 증명서 받아놓을껄 그랬어요.
나 : 그러게 그럴껄. 암튼 학생 자랑스러워요. 이렇게 책 많이 읽었으니 훌륭한 사람 될꺼예요. 아쉽지만 컴퓨터로 한거라 우리가 만질 수가 없네. 이런거 연연해 하지 말고 앞으로도 자주 와서 책 많이 읽어요. 가끔 연체해도 이해해 줄께.
그리고 늦게 반납한거 문제될꺼 없어요. 2주 연기했다고 해도 되고, 재미있어서 2번 봤다고 하면 되는거야.
그 친구도 순순히 떠났다. 내일 엄마 데리고 다시 오는거 아냐?
지금까지 한번도 없던 민원이 오늘은 2건이나 발생한거다. 아 피곤해. 민원수당 받아야 해!
가끔 정신이 이상한 이용자가 오면 불쌍하기도 하고, 어쩌다 저렇게 되었을까 하는 호기심도 생긴다.
책을 너무 많이 읽어서 그런걸까? 꼴랑 먼나라 이웃나라 보는 40대 아저씨가 설마?
여우꼬리.
관장님은 내가 발령나서 온 첫 날.
"정선생은 자료실 신경쓸꺼 하나도 없어요. 거기 직원 많은데 뭐. 실장은 그냥 상징적으로 있으면 돼! 그리고 독서교육에 전념해요. 올 한해 독서교육 열심히 해보자구."
그 후 '독서'자만 붙으면 몽땅 나에게로 오는 것이다. 독서교실, 체험동화마을, 주부독서회, 어린이청소년도서관 어린이서비스협의회 위원, 독서프로그램 공모 등등" 앞으로도 무궁무진하다.
난 "못해요. 저 이제 일 안할거예요"라는 말을 연발하며 땡퇴근하는 무대뽀 정신을 발휘하고 있다.
살아보니 "일 안하고 뺀질거리는 사람도 서열이 앞서니 먼저 승진하더라."라는 사서직계의 불문율을 몸소 느낀 것이다.
저 그냥 학교 열심히 다니고, 민원 해결하며 조용히 살래요!
어쨌든 요즘 신간도서 가장 먼저 읽을 수 있어서 너무너무너무 좋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