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 P7

고통스러운 기억을 신이 나서 말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마흔 넘어서야 이해했다. - P27

농부 주제에 작은아버지는 해가 중천에 솟은 뒤에야 숙취에 시달리는 몸을 간신히 일으킨다. 작은엄마가 윗목에 차려놓은 밥을 먹은 뒤 도살장에 끌려가는 늙은 황소보다 느릿느릿 일 나갈 채비를 한다. 그의 첫번째 필수품은 낫도 아니요 삽도 아니다. 작은아버지는 마당 한편에 쌓아놓은 궤짝에서 소주 다섯병을 꺼내 지게에 싣는다. 그게 그의 일용할 양식이다. 밭에 도착한 작은아버지는 그날의 일감을 눈대중하고 일의 양에 따라 한고랑, 혹은 두고랑마다 소주병을 하나씩 고이 안착시킨다. 참고로 그 시각 작은엄마는 남자들이나 하는 논농사를 짓느라 구슬땀을 흘리는 중이다. 작은아버지는 오직 술을 마실 목적으로 고추를 따고 들깨를 벤다. 다섯병의 소주를 다 마시면 몇시가 됐든 그걸로 그날의 작업 끝이다. - P40

아버지는 뼈속까지 유물론자였다. 부모가 여든 넘도록 장지 마련은 고사하고 영정사진 찍어둘 생각조차 못한 불효자식이었으나 아버지의 유지가 그러하였으니 따르면 될 터였다. 역시 유물론은 산뜻해서 좋다. - P94

그런데 죽은 아버지가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살아서의 모든 순간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자신의 부고를 듣고는 헤쳐 모여를 하듯 모여들어 거대하고도 뚜렷한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 P181

언제 왔는지 상이용사의 얼굴이 벌써 시뻘겠다. 식전부터 술을 마신 모양이었다.하기야 술꾼에게 시간이 대수랴. 술꾼은 시간을 뛰어넘은 자, 아니 어쩌면 어느 시간에 못 박혀 끊임없이 그 시간으로 회귀하는 자일지 모른다. - P193

아직 사회주의를 모를 때의 아버지, 열댓의 아버지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질곡의 인생을 알지 못한 채 해맑게 웃고 있었다. 사진 속 소년 둘은 입산해 빨치산이 되었고, 그중 한 사람은 산에서 목숨을 잃었다. 형들을 쫓아다니던 동생은 형을 잃고 남의 나라에서 제 다리도 잃었다. 사진과 오늘 사이에 놓인 시간이 무겁게 압축되어 가슴을 짓눌렀다. - P195

죽음으로 비로소 아버지는 빨치산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로, 친밀했던 어린 날의 아버지로 부활한 듯했다. 죽음은 그러니까, 끝은 아니구나, 나는 생각했다. 삶은 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부활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화해나 용서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 P231

천수관음보살만 팔이 천개인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도 천개의 얼굴이 있다. 나는 아버지의 몇개의 얼굴을 보았을까? 내 평생 알아온 얼굴보다 장례식장에서 알게 된 얼굴이 더 많은 것도 같았다. - P249

아버지는 이곳에 묻히고 싶을까? 아무도 없이 적적하게 깊은 산속에 홀로? 아버지는 백운산에 가장 오래 있긴 했지만 이산 저산 떠돌며 48년 겨울부터 52년 봄까지 빨치산으로 살았다. 아버지의 평생을 지배했지만 아버지가 빨치산이었던 건 고작 사년뿐이었다. 고작 사년이 아버지의 평생을 옥죈 건 아버지의 신념이 대단해서라기보다 남한이 사회주의를 금기하고 한번 사회주의자였던 사람은 다시는 세상으로 복귀할 수 없도록 막았기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그래서 아버지는 고작 사년의 세월에 박제된 채 살았던 것이다. 아버지는 더 오랜 세월을 구례에서 구례 사람으로, 구례 사람의 이웃으로 살았다. - P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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