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를 가지고 조각하는 나를 보고 자네는 말했지.

"내게도 뭘 좀 만들어 주게나."

나는 "뭘 만들어 줄까?" 하고 물었네.

자네는 "상자."라고 대답했지.

"뭐 하게?"

"물건 넣으려고."

"무슨 물건?"

"자네가 갖고 있는 건 뭐든지 다."

자, 여기 그 상자가 있네,

상자에 내가 갖고 있는 것을 거의 다 넣었는데도 가득 차질 않는군.

이 속에는 고통과 흥분, 호감과 악감, 악의와 선의, 기쁨과 절망,

그리고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창조와 환희가 들어 있다네.

게다가 그 맨 위에는 자네에 대한 감사와 사랑이 놓여 있지.

그런데도 상자는 도무지 가득 차질 않는군.

-존 스타인벡

 

 

존 스타인벡이 친구인 편집자 파스칼 코비치에게 만들어 준 온갖 것을 다 넣었으나, 차지 않았던 상자는

 

 

 

 

 

 

 

 

 

 

 

 

 

 

 

 

 

 

이것이었다. 천백 페이지가 넘는 분량. 존 스타인벡이 친구에게 헌정하는 이 애정어린 제사는 그가 <에덴의 동쪽>에 쏟아부은 것들에 대한 자기 고백이기도 하다. 요절한 제임스 딘의 강렬한 이미지. 동명의 스케일 큰 드라마. 정작 어떤 내용인지도 모르고 캘리포니아 북부 살리나스 계속에 대한 생생한 묘사로부터 펼쳐지는 이 장대한 이야기에 코를 박았다.

 

이 이야기의 화자는 객관적 관찰자이기도 하고 작가 존 스타인벡의 대리 자아이기도 하다. 실제 그의 외가에 대한 자전적인 고백이 상당 부분 들어가 있다고 한다. 북부 아일랜드 출신 이민자인 외할아버지 새뮤얼 해밀턴이 살리나스 계곡에 도착하여 킹시티 동쪽의 척박한 언덕에 정착하는 과정은 존 스타인백 외가의 일대기에 끼워 넣을 만하다. 새뮤얼이라는 캐릭터는 더없이 복합적이고 매력적이다. 그는 손재주가 많고 따스한 성격으로 각종 마을 대소사에 빠지지 않았지만 돈을 버는 재주는 없는 몽상가였다. 반면 아내 라이자는 유머 감각이라고는 없고 메마르고 건조한 독실한 장로교도였다. 이 둘은 너무나 달랐지만 그래서 더 조화로웠다. 남편이 꿈을 꾸는 동안 아내는 묵묵히 아이를 아홉이나 낳고 길러냈다. 보수주의자,혁신주의자, 몽상가,현실주의자가 적절하게 섞인 더없이 균형감 있는 가족이었다. 9남매 중 딸 올리브가 존 스타인백의 어머니이다. 한편 동부에서는 제임스 딘이 연기했던 칼의 아버지가 될 애덤 트래스트가 배다른 동생 찰스의 반대를 묵과한 채 악마적인 데가 있는 여자 캐시를 데리고 살리나스 계속으로 이주해 온다. 캐시는 쌍둥이 형제를 낳고 남편을 총으로 쏜 채 도주해 유곽에 흘러들어간다. 실의에 빠져 쌍둥이 아들도 중국인 요리사 리에게 맡겨 버리고 삶의 의욕을 상실한 애덤은 부지런한 몽상가 새뮤얼에게서 아들들의 이름을 얻는다.

 

당신의 첫 아들을은 카인과 아벨인 셈이지.

-p.491

 

이름을 짓기 위하여 모인 새뮤얼, 애덤, 중국인 하인 리는 창세기 4장, 아담과 이브의 아들 카인과 아벨에 대하여 진지한 토론을 벌인다. 이 토론은 사변적이지도 않고 지루하지도 않다. "위대하고 영원한 이야기는 만인에 관한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지속되지 않을 거라는 겁니다."라는 하인 리의 이야기처럼 야훼에게 바친 제물이 거부당하자 야훼를 흡족하게 한 아우를 죽이고 만 카인의 후예인 우리는 꼭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악행을 저지르고 방황하는 카인의 이야기에 매혹당한다. 왜 야훼는 동생을 죽인 카인에게 표적을 찍어 죽지 않도록 보호해 주었는 지에 대한 그들의 의문은 말씀히 해소되지 못한 채 성경에서 '약속된 땅'으로 돌아온 칼렙과 여호수아라는 이름를 쌍둥이 형제에게 붙여주려는 것으로 끝난다. 여호수아는 '약속된 땅'으로 돌아오지 못한 아론으로 변경되기는 하지만. 이렇게 해서 칼과 아론이라는 형제는 성경에서 이름을 얻는다.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아름다운 외모의 형 아론, 타인을 두렵게 하는 동물적인 공격성이 있지만 형을 사랑하고 지켜주고 싶어하는 동생 칼. 이 형제는 마치 아버지와 삼촌, 카인과 아벨의 또다른 은유 같다.

 

절대 늙어 소멸할 것 같지 않던 새뮤얼은 딸 유나의 죽음으로 점차 노쇠해가고 마지막으로 자식들의 간청을 못 이기는 척 그 척박한 땅을 떠나기 전 애덤과 하인 리를 다시 찾아와 아름답고 철학적인 대화를 나눈다. 인종, 민족, 계층을 뛰어넘어 한 곳에 모여 인간의 원죄의식, 삶 전체에 대하여 아름다운 운율의 시를 읊듯 대화를 펼치는 그들 모습의 묘사가 눈부시다. 그 대화는 사변적이지도 고리타분하지도 않은 영롱하고 생생한 음악 같다. 마지막으로 새뮤얼 덕택에 기운을 차리고 악마적인 여자 캐시에게서 해방되었다고 느낀 애덤이 새뮤얼에게 정원, 풍차 우물을 만들어 주고 서풍을 타고 장미향이 퍼지게 도와달라는 요청에 보인 새뮤얼의 반응은 너무나 아름답다.

 

"애덤, 고맙네. 자네의 향기로운 제안이 서풍을 타고 향기롭게 번지는군. "

p.54

 

하지만 자신의 마지막이 멀지 않았다고 느낀 새뮤얼은 할 수만 있다면 온 세상에 장미를 심으려 들 자신의 아들 톰을 대신 찾아보라고 완곡하게 거절한다. 새뮤얼은 죽고 그의 영혼은 하인 리의 표현처럼 애덤과 리 사이를 떠돌다 미처 마무리 되지 못했던 그들의 카인과 아벨에 대한 의문의 답을 가지고 온다. 야훼가 카인에게 이야기한 "팀셸"이라는 히브리어. 이것은 <에덴의 동쪽> 전부를 아우르는 핵심이기도 하다."너는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죄악도 인간의 자유 의지와 선택으로 다스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의 제시. 스타인벡 앞에서 인간은 신만큼 존귀하고 위대해질 수 있다. 칼이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한 소외감으로 섬약한 형 아론에게 유곽에서 마담으로 일하는 생모의 모습을 노출하여 그를 전장으로 떠나게 만들고 끝내 전사하는 결과까지 낳게 했을 때에도 그들의 실질적인 양육자였던 하인 리가 아버지 앞에 아들을 세우고 그 입에서 끝내 용서를 의미하는 "팀셸"을 뱉게 하는 마지막 장면은 인간 전체를 긍정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을 위대하게 고양시키고 삶의 존귀함을 응축시킨 존 스타인벡의 저력을 그 자체로 형상화한다. 존 스타인벡이 그려낸 인간의 숱한 악한 기질들은 우리 외면에 존재하는 머나먼 것이 아니다. 질투하고 시기하고 때로 어리석은 충동에 지고 피를 나눈 혈족들에게  상처와 위해를 가하는 모습은 우리 내부 안에  떠돌아다니는 부스러기들이다. 이러한 악덕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넘어설 수 있는 인간의 잠재력은 미덕에 닿아 있다. 그러고 보면 존 스타인벡은 자신의 결론이자 바람을 새뮤얼에게도 애덤에게도 하인 리에게도 골고루 흩뿌려 놓은 것 같다. 아니, 찰스에게도 칼에게도 심지어 사악한 여자 캐시에게도 그의 모습은 투영되어 있다. 그가 이야기하였던 것처럼 "모든 소설과 시는 우리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선악의 끊임없는 대결에 바탕을 두고 있다." 다만 <에덴의 동쪽>이 조금 더 밀고 나간 지점은 섣불리 미덕의 승리를 확정지은 것이 그 가능성의 도정에 인간의 선택과 의지를 조심스레 놓아 둔 것에 있다.

 

존 스타인벡의 모든 것이, 그리고 나머지는 읽는 자의 몫으로 남겨진 이 위대한 상자를 천천히 열어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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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3-04-22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지의 저 잘생긴 남자는 아마 제임스 딘이겠지요. 제임스 딘 정말 좋아해요.
동명의 한국 드라마를 무척 좋아했던 기억이 나요. <죄와 벌>을 언젠가 다 읽은 후에 읽어볼게요.
천천히, 천천히 열어볼게요.

blanca 2013-04-23 10:40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 저는 아직 제임스딘의 <에덴의 동쪽>을 보지 못해 이번 기회에 보려고요. 아, 저 이 책 읽으며 토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 형제들>이 생각났어요. <죄와 벌>을 읽고 비교해 보셔도 좋겠어요.

Jeanne_Hebuterne 2013-04-23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단에 자기 자식은 커녕 염소 한 마리 올리지도 못하여도, 씻겨줄 발이 없더라도, 마침내는 성 베드로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하여도 끝내 '나의 뜻대로 하지 마시옵고 아버지 당신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말할 용기가 인간에게 과연 있는 걸까요?

요즘은 점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지는 '그리하여'는 구약과 신약에만 존재하는 어구가 아닐까 생각하곤 한답니다. 어떤 것이 옳은지 무섭게 궁금했어요.

blanca 2013-04-23 10:42   좋아요 0 | URL
이 책에는 여러 번 성경 문구에 대한 토론이 나와요. 그런데 그 대목이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여러 시각에서 토론을 벌이면서 결국 인간의 위대함, 선택의 자유 의지에 대한 이야기로 귀결되는 것 보면 신을 이야기하면서 결국 인간으로 돌아가는 스타인벡의 의도가 보입니다. 반대의 것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으로 돌아가는 재능이 부러웠어요.

성경은 언젠가는 학문적으로 정독해 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이리시스 2013-04-26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는 한번씩 보는데, 책은 못봤어요. 재밌겠다!

blanca 2013-05-16 08:46   좋아요 0 | URL
댓글 달린 줄도 몰랐어요. 아이리시스님. 아, 책 정말 좋아요. 진짜요! 강력추천합니다. 영화에서는 너무 생략된 대목이 많은데 그 생략된 대목 중에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답니다. 좋아하실 거에요!
 

처음에는 그냥 그렇고 그런 책인줄 알았다. 너무 드라마틱하고 너무 뻔할 거라고. 기대 없이 나간 소개팅.

오히려 그런 소개팅은 결혼까지 가곤 한다. 이 책도 그랬다.

 

물론 이 책의 저자 마이클 게이츠 길은 스타벅스의 종업원인 만큼 스타벅스에 대단히 호의적이다. 그러나 그런 그의 스타벅스 예찬이 커피농사의 3세계 아이들의 노동력착취, 1회용 제품의 남용 등 다른 측면에서의 비판의식과 대척점에 놓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대기업 중역에서 종이나부랭이처럼 갑자기 추락하여 스타벅스에서 라떼 한 잔을 사먹는 비용에도 버거워하며 괴로워하다 우연히 브로드웨이의 그 매장의 종업원이 되어 자신의 화려했던 과거의 삶에서 현재의 비참한 경제적 상황, 결혼실패, 건강악화를 어떻게 건강하게 극복해가는 지에 대한 솔직담백한 고백은 굉장한 진정성을 지닌다. 이 책은 스타벅스에 대한 홍보가 아니라 한 인간이 자신의 삶을 둘러싼 외부의 파고를 어떻게 넘어나가고 균형감을 가지게 되는 지에 대한 감동적인 예시다.

 

 

 

 

 

 

 

 

이런 고백을 공적으로 하기란 쉽지 않다. 사실 말할 수 있을 때 이미 우리는 극복의 지점을 넘어가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나는 돈관리를 제대로 못해서 ,또 성적 본능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 이 지경까지 왔다는 잔인한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중략>일자리를 구하기에 너무 늙어버린 지금, 내가 맞닥뜨린 현실은 자기 몸 하나 부양할 능력도 없고, 그 어떤 회사에서도 반겨주지 않는 미국 노인들이 처한 잔인한 현실 바로 그것이었다. 불안하고 암담하고 창피했다. 그런 마음으로 나는 스타벅스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p.60

 

그는 뉴욕 맨해튼 어퍼이스트 지역의 최고급 주택에서 성장한다. 소위 상류층 자제로 예일대에 진학하여  굴지의 광고회사 JWT의 고위직까지 승진가도를 달린다. 단란하고 다복한 가정. 백인 중산층. 그곳에서의 추락은 예기치 않게 왔고 그런 만큼 더 뼈아픈 것이었다. 정리해고 후 그는 십년 동안 방황하다 혼외정사로 낳게 된 늦둥이 아들의 부양과 이혼, 사업 실패, 뇌종양 등 온갖 악재는 다 경험하게 된다. 행복하고 화려했던 유년의 회상, 언론인 아버지 덕에 숱한 명사들과의 교유 등을 경험했던 그를 이제는 전염병 환자나 되는 마냥 피하는 무리들이 생긴다. 환갑이 훌쩍 넘은 나이. 그는 검은 복장에 초록색 스타벅스 앞치마를 두른다. 화장실을 대걸레로 밀고 손님들에게 거스름돈을 내어 주며 그는 다시 태어난다. 불행했을까, 비참했을까.  우연히 마주치는 예일대의 동창들은 그를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그는 부끄럽지 않다. 특히나 화장실에서 마약을 하다 폐장시간까지 나가기를 거부하며 그에게 칼까지 들이밀던 젊은이를 경험하며 그가 정작 자신의 분노를 찬찬히 들여다 보는 장면. 그는 그 젊은이에게 분노하는 대신, 늙고 오만하고 통제광이었던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모든 상황을 통제하기를 원했던 지난 시절의 잔재로 그는 그 젊은이와 상황을 통제하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그는 육십이 넘어서도 이렇게 스타벅스 매장에서 끊임없이 성장한다. 뭉클했다. 늙고 오만하고 독선적인 노인. 우리는 일부의 습성을 흡사 그 연령대의 본질적인 특질인 것처럼 오도하고 있지나 않은지. 지하철 경로석에서 젊은 사람들과 노인들이 벌이는 그 수많은 유쾌하지 않은 상황들을 이 마이크처럼 자신에게서 극단적으로 치솟는 부정적인 감정을 통하여 돌아보는 기회로 삼는다면 우리는 다 점점 더 성장할 것이다.

 

스타벅스 매장에서 청소, 계산, 음료 만들기 등 한 단계 한 단계 일을 배워나가며 빛나는 마이클이 드디어 매장에 찾아온 전처 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과 행복하게 화해하고 서로를 토닥이는 장면은 영화의 클라이맥스 같다. 군데 군데 그의 유년, 청년기의 아름다운 추억들은 커피에 얹은 토핑 크림처럼 달콤하고 아련하다. 지하철을 몇 번이나 갈아타며 한 시간이 넘게 걸려 매장에 도착하여 손님들 하나하나에게 덕담과 인사를 건네는 이 인상좋은 할아버지의 모습이 한국에서도 낯선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재기'라는 그 진부한 용어에 의외로 너그럽지 않다. 추락은 쉽고 재기는 어렵고 낯선 것이다.

 

힘들 때에는 우울할 때에는 라떼를 마신다. 술과 담배를 하시지 않는 아버지도 테이크 아웃 커피를 마신다. 고단했던 삶에서 아버지에게 이런 테이크 아웃 커피는 하나의 축복이다. 너무 많은 진지한 생각, 어려운 비판의 잣대를 들이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냥 이 책에서는 넘어져도 정말 아프게 쓰러져도 다시 행복해질 수 있고 웃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구체적이고 와닿게 아름답게 그려냈다는 것, 그래서 마지막 장을 덮으면 그냥 갑자기 삶이 너무나 눈이 부시게 느껴진다는 것으로 즐겁고 유익한 독서였다고 할 수 있다. 스타벅스에는 된장남, 된장녀만 있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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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04-17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작년이었나, 서점에 가서 이 책을 보고 읽어볼까 말까, 살까 말까 망설이다가 그냥 왔었어요. 그리고 잊고 있었는데, 여기, 블랑카님 서재에서 보게 되네요. 저도 읽어볼래요.

blanca 2013-04-18 11:26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이 책 저는 정말 좋았어요. 가볍고 흥미로운 책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기대이상이었답니다.

Jeanne_Hebuterne 2013-04-17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마침 어느 알라디너분으로부터 선물받은 스타벅스 텀블러를 사진으로 찍어 올린 후 서재 브리핑을 보니 블랑카님의 이 책 리뷰가 업데이트되었군요! 이 책은 저도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하워드 슐츠의 자서전보다 이 책이 스타벅스의 입장에 더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구태의연하고 밋밋하고 예상한 대로 펼쳐지는 이야기이지만, 가끔 꾸미지 않은 따뜻함과 밝음이 부러울 때면 이런 책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도 함께.

쓸데없는 덧-스타벅스가 시중 모든 커피 전문점 커피 중 카페인 함량이 가장 높대요.

blanca 2013-04-18 11:29   좋아요 0 | URL
아, 그러셨군요! 슐츠 자서전은 저도 읽다 말다 그랬어요. 그러고 보면 스타벅스에 관련된 이야기 중 경제적 상황이 어려운 백인 남성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군요.

스타벅스 카페인 함량이 제일 높단 말이에요? 저는 라떼는 카페인 함량이 무조건 낮을 거라고 맹신했는데 기사를 보니 그렇지도 않더라고요. 점점 카페인의 노예가 되어 가는 느낌입니다.--;;

Jeanne_Hebuterne 2013-04-21 18:01   좋아요 0 | URL
더욱더 쓸데없는 덧-카페인 함량은 에스프레소와 더치 커피에 가장 낮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어요. 미뢰가 나를 배신한 듯한 느낌이 드는 순간이었습니다. 전 이미 카페인 세계의 자발적 노예로 와있으니, 웰컴, 블랑카님!

세실 2013-04-18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고 현재의 삶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겠네요. 삶이 너무나 눈이 부시게 느껴진다는 것.....저도 느끼고 싶어요^^
울 도서관에 있나 찾아봐야지~~

blanca 2013-04-18 11:29   좋아요 0 | URL
세실님, 이럴 때에는 도서관에 계신 게 너무 부럽습니다.^^;; 드뎌 봄기운이 완연해졌습니다. 벚꽃비도 내리고. 그곳은 더더욱 그렇겠죠?

saint236 2013-04-19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타벅스에 관련된 책들이 꽤 많이 있네요. "스타벅스 감성 마케팅"이라는 책과 "교회 스타벅스에 가다"라는 책도 있지요. 블랑카님 오랫만에 뵙습니다. 건강하시죠?

blanca 2013-04-20 09:29   좋아요 0 | URL
saint236님도 안녕하시죠? 저도 잘 지냅니다. 나이들면서요--;; 아, 그런 책들도 있었군요! "교회 스타벅스에 가다"는 또 어떤 내용인지 궁금하네요. 주말이라 잔뜩 기대했더니 비가 추적추적. 날씨 변덕이 정말 너무 심하네요. 그래도 모처럼의 여유, 가족들과 즐거운 주말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1995년 나는 고3이었다. 그 날, 기억이 맞다면 나는 친구들과 보충수업 중이었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스무 살이 된다. 이제 정말 조금만 더 참으면 된다.

 

어두컴컴한 교실로  고3 교실에 참을 인자를 적어 놓던 자그마한 국어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얘들아, 백화점이 무너졌단다."

어안이 벙벙했다. 도저히 무너질 수 없는 것이 거짓말처럼 해체됐다.

그 백화점 안에 있었던 숱한 생명들이 나에게 구체적이지는 않았지만 뭉뚱그려 하나의 예기치 않은 희생으로 다가왔다.

연일 티비에서는 재난 속보 방송을 했고 그 방송을 들으며 영웅처럼 귀환하는 생존자들의 모습에 뭉클했다.

그들도 나도 견디고 있었다. 그 무게는 비교할 수가 없었지만.

 

김영하의 팟캐스트로 정이현의 <삼풍백화점> 낭독을 들었다.

여고 동창생과의 조우. 그 친구는 삼풍백화점 의류 매장에서 일하는 친구였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 문득 종료 버튼을 눌렀다.

이제는 읽을 차례다, 싶었다. 결말까지 육성으로 들을 용기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95년 나는 새파랗게 젊었고 어렸고 무모했다. 나를 둘러싼 모든 일들은 스쳐 지나가지 못했고

하나하나 가슴으로 포박해 들어왔다. 트라우마는 그 일을 겪은 당사자에게만 남는 것이 아닌가 보다.

 

 

그해 봄 나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비교적 온화한 중도 우파의 부모, 슈퍼 싱글사이즈의 깨끗한 침대, 반투명한 초록색 모토롤라 호출기와 네 개의 핸드백.

- 정이현 <삼풍백화점>

 

 

 

 

 

 

 

 

 

 

 

 

 

 

 

 

1995년 6월 29일 삼풍백화점 에어콘은 고장이었다. 교실 안도 후끈했다. 선풍기를 돌리고 부채질을 하며 과연 수능날까지 전과목을 제대로 정리할 수 있을까 싶어 아연했다. 많은 것들이 예비되어 있을 거라고 착각한 열아홉. 주인공은 서태지와 동갑이었다. 그녀는 취업 시장에 뛰어들었지만 반겨주는 곳이 없었다. 내가 대학교 4학년 때 당면할 현실이기도 했지만. 스무 살 문턱은 너무나 눈부셔서 그 이후를 걱정할 여유가 없었다. '나'는 존재감 없던 여고 동창 R을 삼풍백화점 여성복 매장에서 만나게 된다. R과 나는 여고 동창생인데 여고를 졸업하고 이제 대학까지 졸업하려는 찰나에서야 소통하게 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찍 사회인이 된 R은 나에게 고속터미널 근처 칼국수를 사준다. 그리고 남산 근처의 그녀의 작은 방으로 '나'를 초대한다. 스물네 살. 삼풍백화점에서 '나'는 하드커버의 일기장과 소중한 친구를 함께 얻는다. 그 친구가 일하는 매장에서 임시 아르바이트를 하다 도리어 그 친구에게 피해만 끼치고 어색하게 헤어지고 그것으로 그 둘의 인연은 끝이 난다. 한때 절절하게 가까웠던 누구와 어이없이 헤어지는 일은 우리 청춘의 부산물이다. 그 인연히 훑고 지나간 자리에서 우리는 성장한다.

 

그.리.고. 백화점이 무너진다."R과 나의 삐삐번호는 이미 지상에서 사라졌다."는 문장에 가슴이 아려왔다. 물론 나의 삐삐번호도 그 번호를 둘러싸고 만들어졌던 우리들의 관계도 이 지상에서 사라졌다. 그녀는 싸이홈페이지에서 R을 찾아 헤맨다. 그러다 R을 닮은 여자아이의 사진을 발견하고 그것이 R의 딸이기를, R은 삼풍백화점에서 무너지지 않았기를 바란다.  

 

정이현의 <삼풍백화점>은 이런 내용이다. 나의 삶을 스쳐 지나간 인연이 거대한 재해 속에 고난 속에 함몰되지 않았기를 기도하는 모습이다. 우리가 어쩔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슬픈 복기이기도 하다. 잊을 만하면 다시 떠오르는 것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과정이기도 하다. 어떻게 지내는지 잘 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나의 사랑하는 청춘의 친구들. 가만 가만 나도 그녀들의 안위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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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13-04-12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리신 글은 언제봐도 참 좋습니다!
즐겁고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blanca 2013-04-16 11:5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후애님. 어제까지 춥더니 오늘 드뎌 봄기운도 느껴지고 벚꽃도 자주 보이네요^^

후애(厚愛) 2013-04-21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비가 와서 그런지 오늘은 좀 쌀쌀합니다.
날씨가 이래서 감기도 안 낳고...ㅠㅠ
건강 꼭 챙기시고 즐겁고 알찬 주말 되셔요.*^^*

blanca 2013-04-22 16:50   좋아요 0 | URL
감기 걸리셨군요--;; 아무쪼록 빨리 나으세요! 수분 섭취 많이 하시고 목에 스카프나 손수건을 두르면 목감기 예방도 되고 치료도 조금 빨라지는 느낌이더라고요.
 

책을 읽긴 읽었는데 미처 그 책에 대한 감상이나 느낌을 추스르지도 않고 바로 다음 책으로 고고,한 것같다. 먼저 뒤늦게 읽은  로맹 가리의 단편집.

 

 

음, 사실 쉽게 완독하지는 못했다. 로맹 가리 특유의 그 가볍지 않은 진중함이 빛을 발할 때도  있고 지루했던 적도 있어 읽다, 말다 했다. 처절한 경험으로 자의적으로 눈이 멀어버린 소녀와 떠돌이 도붓장소의 기묘한 동행. 크리스마스 특수와 인간의 친절을 믿는 그들이 끝내 또 처절한 배신을 당하고도 그것을 애써 외면하려는 모습을 그린 <지상의 주민들>에서는 로맹가리 특유의 냉소적이면서도 어쩔 수 없이 노출하는 삶과 인간에 대한 애정이 절묘하게 배합된 시선이 드러났다. <우리 고매한 선구자들에게 영광 있으라> 같은 작품은 다소 그로테스크하고 SF적인 분위기가 도발적이었다.

 

로맹가리는 짧은 이야기도 함부로 쓰지 않는 작가인 것같다. 물론 다른 작가들도 그렇겠지만 그는 어디에 발자국을 찍어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깊고 뚜렷하게 남기고 사라지는 그런 캐릭터의 작가다.

 

 

 

 

 

사실 이탈리아를 가 본 적도 갔던 사람의 이야기를 길게 들어 본 적도 없다. 그래서 찰스 디킨스가 그려내는 이탈리아의 풍경이 상상만으로 부족해 참으로 아쉬웠다. 군데 군데 그의 어쩔 수 없는 위트, 풍자가 드러나 재미있었다. 1844년 일요일 아침, 가족과 함께 이탈리아로 떠나는 풍경을 소설처럼 묘사하며 시작하는 이 여행기는 카톨릭에 대한 가감없는 냉소, 관광지의 뒤안길의 그 적나라한 결핍과 생계를 위한 사투에 대한 묘사로 때로 독자를 불편하게 한다. 그만큼 찰스 디킨스는 솔직하고 그다운 산문을 써내어 그의 언어에 대한 펜심을 충족시켜 준다고나 할까. 화려한 사육제 풍경에 대한 생생한 묘사도 아름답다. 170년 전 이탈리아 풍경에 대한 대작가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그 대상이 아니라 그 자체를 다시 발견하는 재미를 누릴 수 있다.

 

 

 

 

 

 

 

 

벼르고 벼르다 드디어 구입해서 영어 공부 한답시고 영어 자막 띄우고 봐서 그런지 영화를 본 게 아니라 한바탕 수업을 들은 기분으로 좋아하는 작가 제인의 북클럽을 오염시킨 것 같아 다소 아쉽다. 다시 한글 자막으로 보니 그 한글자막마저 너무 빨라서 한번에 이해가 되지 않더라. 그러니 하물며 영어라니. 매달 오스틴의 작품을 한 권씩 선정해서 다 같이 읽고 저마나 자신의 시선과 목소리로 재해석하는 그 토론 장면이 너무 아름답고 부러웠다. <맨스필드 파크>, <노생거 사원> 같은 경우는 읽어보지 못해서 토론 내용에 흠뻑 젖을 수 없어 안타까웠다. 오스틴 작품을 다 읽고 다시 본다면 더 재미있게 몰입해서 볼 수 있을 것같다. 이런 북클럽 하나가 있어 테마별로 같이 책 읽고 이야기도 하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혼자 읽는 것과 함께 읽는 것의 그 찬란함의 밝기 차이는 실로 대단하다. 어떤 책이 공통된 정서와 감동을 끌어내지 못할지라도 함께 그 책을 읽었다는 시간 공유의 경험만으로도 소통의 지점은 빛난다.

 

 

 

 

알라딘 서재분들이 종종 언급했던 김영하의 팟캐스트를 드디어 다운받아 듣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작가지만 시간 분량이나 어조가 때로 눈을 감기게 했다. 그의 작품이나 산문집을 보면 대단히 기발하고 재미있는 감각적인 사람일 것 같은데 책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에는 대학교에서 강의를 듣는 느낌이 나서 좋기도 했고 아쉽기도 했다. 정이현의 <삼풍백화점>을 듣다 당장 구입해서 읽어야 겠다는 생각에 팟캐스트 듣기를 중단하고 바로 주문했다.

 

 

정이현이 서울 출신 72년생 작가라는 것이 시사하는 바에 대하여 김영하는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하숙생과 월남인들로 꾸려졌던 우리의 문학에서 서울에서 태어나서 자란 작가의 등장은 흔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정이현의 소설에는 종종 강남의 중산층의 모습이 가감없이 그려진다. 어쩌면 제인 오스틴도 프루스트도 자주 묘사했던 솔직한 속물적 욕망에 대한 묘사.  바라지만 드러내기는 어쩐지 두려운 것들에 대하여 이 작가는 매우 예리하고 흥미롭게 천착한다.

 

삼풍백화점 의류 매장에서 일하는 여고 동창생을 우연히 만나게 되는 '나'. '나'는 고등학교 때 그녀와 친하지 않았지만 우연한 조우는 그녀와의 인연의 틀을 다시 짜기 시작한다. 그녀들이 결국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호기심과 걱정으로 이 책을 시작하게 되었다.

 

 

 

 

어제 식당에서 거의 고봉밥으로 김치볶음밥을 주신 아주머니에게 먹다 먹다 좀 남긴 접시를 갖다드렸더니 너무 어두운 얼굴로 "맛이 없었어요?"라고 해서 괜시리 미안했다. 아주머니가 내가 남긴 김치볶음밥으로 자신의 요리 실력을 폄하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감기는 끝물이고 이제 정말 봄이 오는 것같다. 4월에는 잠시 살았던 이천의 산수유 축제에 꼭 가보고 싶다. 그때 너무 슬픈 일이 있어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바람에 날리는 산수유를 보며 눈물을 삼켰었는데 이제 웃으면서 산수유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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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04-04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인오스틴 북클럽]을 보면 등장인물들이 책 읽는 모습들이 종종 나오잖아요. 밤을 새며 책을 읽는 모습도, 침대에 앉아 책을 읽는 모습도요. 그런 모습들이 무척이나 좋았어요. 굉장히 친근하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렇게 여러 사람이 모여 함께 책을 읽기에는 제인 오스틴이 적절하지 않나 싶기도 하고요. 로맹 가리라면, 코맥 매카시라면 그렇게 모여서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었을 것 같아요. 등장 인물중 '그렉'이 르귄의 책을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에게 선물하고 끊임없이 읽었냐고 묻잖아요. 나는 네가 좋다는 책을 읽었다, 너를 좋아하니까. 그런데 너는 내가 주는 책을 읽지 않는구나, 하는 것도 너무 공감이 됐고요. 결국은 그녀가 그 책을 무척이나 재미있게 읽어서 제가 다 행복했어요. 책 읽는 사람들이라면 정말 공감하고 좋아할 예쁜 영화에요. 저는 제인 오스틴을 좋아하진 않지만요.

blanca 2013-04-05 09:56   좋아요 0 | URL
우아, 다락방님 정말 영화의 디테일한 부분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저도 그 책 읽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어요. 원서 페이퍼백이 예뻐 보이기도 했고 가장 연장자(이름이 가물가물)의 그 책갈피도 넘 탐나고. 맞아요, 그렉이 자꾸 자기가 권한 책을 읽지 않았다고 서운해하는 모습 정말 현실적이었죠! 마지막에 북파티도 너무 부럽고요. 부러운 것 투성이였어요!

2013-04-04 12: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4-05 09: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진 2013-04-05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인오스틴 북클럽>이라니. 정말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모습이네요. 영화를 언젠가 꼭 보리라 다짐했어요. 물론 그 전에 제인오스틴의 책을 한 권이라도 읽고 말이죠. 제 주변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없어서 작품을 읽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어떤 로망처럼 인식되어 있어요. 참 재미있고 괜찮을 거 같은데.
정이현의 저 책은 한국 현대 단편 소설집을 한 열 권 정도 한꺼번에 주문할 때 끼어 있었어요. '삼풍백화점' 기억하고 갈게요.

blanca 2013-04-05 10:00   좋아요 0 | URL
아, 특히 남자와 제인 오스틴은 쉬운 접근은 아니에요^^;; 이 영화에서도 나오거든요. 아무래도 다분히 소녀적 취향이라는 선입견이 있어서요. 하지만 절대 아니예요. 소이진님도 한번 시도해 보세요. <설득> 같은 책도 참 좋거든요. 아, <삼풍백화점>이요! 제 고등학교 때 삼풍백화점도 성수대교도 무너졌었던 기억이 너무 강렬해서요. 소이진님한테는 이 작품이 또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듯싶어요.
 
사생활의 천재들
정혜윤 지음 / 봄아필 / 2013년 3월
평점 :
품절


규칙적으로 출근해야 하는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 엄마가 되면서 가장 아쉬운 점은 다양한 사람들과의 수다다. 물론 친구들이 있고 아이 친구 엄마들도 있지만 이제 양복입은 아저씨들과 나누는 대화는 그것이 군대 갔다온 이야기일지라도(이상스레 나는 이런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었다.) 거의 나눌 기회가 없다. 나는 여성적이고 섬세한 것과는 거리가 있기 때문에 조금 투박하고 거칠고 공감이 조금 배제되었을지라도 그런 어조와 시선이 아쉽다.

 

이 책의 저자 정혜윤은 라디오 피디다. <침대와 책>,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 등 주로 독서 에세이 관련 책을 꾸준히 내왔다. 반면 이 책은 정말 '사람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다. 유명인이라고 한다면 영화 감독 변영주, 만화가 윤태호 정도일 뿐 사회학자, 자연다큐 감독, 야생 영장류학자 등 이름과 직업이 생소한 사람들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다. 그들의 이야기와 정혜윤의 이야기가 혼재되어 있어 다소 혼란스러운 부분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기본적으로 그들이 바라보는 세상과 지향하는 점이 저자의 그것과 합치되는 점이 있다는 데에서 이 책의 전체적인 통일성을 이루기도 한다.

 

다시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서 내가 아쉬웠던 그런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 새로운 시선 들이 이 책을 읽으며 절로 충족되었다. 정말 신선했다. 내가 잊고 살았던 것들, 소망했지만 이루지 못한 것들에 대한 복기가 일본부채처럼 좌르륵 펼쳐지는 경험이었다. 이 책을 읽는 동안은 좀 더 진지하고 좋은 사람이 되어 가는 듯한 착각에서 행복할 수 있었다.

 

저자는 카프카가 한 이야기 "우리의 유일한 인생, 그것은 우리의 일상이야."에서의 일상을 사생활로 지칭한다. 그러니 "역사 바깥의 시간 속에서 천재"들인 그들의 이야기를 할 준비가 된 셈이다. 시장의 시간과 오솔길의 시간을 이야기하는 자연다큐 피디 박수용 감독은 농사꾼의 아들로서 소년 시절부터 소몰이를 했던 경험을 잔잔하게 그려낸다. 악다구니를 하고 싸움박질을 하는 시장의 시간과 끊임없이 소와 함께 걷는 오솔길의 시간은 이윽고 그의 전체 삶을 지배하게 된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두 세계에 걸쳐져 있는 삶. 아름답고 잔잔하고 이상적이지만 지루한 그곳과 다이나믹하고 처절하고 거친 이곳. 그는 야생 호랑이를 촬영하기로 하고 한 평짜리 비트에서 칩거하며 호랑이들을 기다린다. 비트 지붕을 사이로 두고 호랑이 가족과 함께 파도 소리를 들었던 기억에 대한 묘사는 더없이 아름답다. 더 자극적이고 조금은 폭력이 섞인 호랑이와의 사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정작 그가 가장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였다.

 

<이끼>,<미생>으로 유명한 만화가 윤태호에게는 만성적인 피부질환으로 인한 열등감이 있었다. 그가 대중적인 인기를 얻기까지 걸었던 그 지난하고 고독한 길에 대한 회고는 참으로 눈물겹다. 노숙까지 하며 그리고 또 그렸던 그의 시간들은 결국 그 무게감으로 승리했다. 또한 소외당하고 때로 멸시당했던 그를 따뜻하게 보듬어주고 사랑해주는 아내에게 "나는 아내에게 존중받았다."는 고백은 '사랑받았다'는 표현보다 더 절절하다. 자기를 있는 그대로 존중해 줄 수 있는 반려자를 만나는 것은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일이다. 그의 고뇌와 시련들이 마침내 하나의 성과로 만개하기까지 그의 솔직하고 가감없는 고백은 저자의 미려한 문체로 부드럽게 다듬어져 감동을 준다.

 

청년유니온 조성주 전 정책기획실장의 우리 사회의 청춘 담론이 엘리트 중심이라는 이야기는 미처 주목하지 못했던 부분에 대한 시사점을 준다. '노스페이스 사태'의 바깥에 그 옷을 못 입는 아이들은 미처 논의에 포함되지도 않았다는 그의 이야기. 논란과 논의의 변경에는 자신의 목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많은 아이들이 있었다. 피자 배달을 30분 안에 하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쳐야 했던 아이들의 이야기. 그 아이들을 위해 싸우고 하나 하나 대안을 만들어 나가는 그의 모습이 정말 청춘다웠다.

 

정치경제학자 홍기빈이 이야기하는 비그포르스의 '잠정적 유토피아'론도 흥미로웠다. 궁극적 유토피아가 가져올 수 있는 무기력감에서 일어나 지금보다 좀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잠정적 유토피아' 어차피 우리가 만들 수도 갈 수도 없다는 지향이 아닌 현실적이고 '이것만큼은 없었으면 좋겠다'에서 출발하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사회 개혁론은 따뜻하게 가슴에 와닿았다.

 

이야기가 먼저 나오고 누가 한 이야기인 지에 대한 사회적인 약력, 타이틀은 말미에나 간략하게 첨부된다. 우리는 누군가 말을 시작하면 그 말 자체에 대한 몰입보다는 어떤 직책, 직업의 누가 이야기하는 지에 대한 선입견으로 이미 마음을 채색하고 그 이야기를 자의적으로 평가할 준비를 한다. 이 책은 그런 여지를 주지 않는다. 소년 시절 소를 몰고 하늘의 별을 보며 떠나는 소몰이꾼의 이야기로 출발하여 우리는 마침내 그가 자연다큐 감독이 되어 야생 호랑이를 촬영했음을 알게 된다. 미리 다큐 감독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그가 하는 이야기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그가 어린 시절 겪었던 그 오솔길에서의 체험은 작아지고 만다. 피부병으로 고생하며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계속 그림을 그렸던 그렸던 아이가 오늘날 유명한 만화가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하나의 성장 소설 같다. 이미 성공한 만화가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추억하는 것으로 그의 이야기가 축소되고 경직화됐을 때 얻는 아쉬움과는 다르다.

 

정말 이야기를 제대로 듣게 된 느낌이다. 정말 이야기. 정말 고팠다.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것들. 내가 미처 챙기지 못한 것들. 바랐으나 그냥 지나가버린 풍경들.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런 이야기들을 조곤조곤 풀어낸 그런 책. 가볍지도 않지만 지나치게 무겁지도 않아 요즘 같은 봄 풍경에 펼쳐들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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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3-04-04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혜윤 피디의 책은 새로운 책이 나올수록 곰삭는 느낌이랄까? (좋은 표현~~)
아직도 읽지 못한 그녀의 책 다 읽고나면 이 책도....
아름다운 4월 되세요^^

blanca 2013-04-05 10:01   좋아요 0 | URL
세실님, 지금까지와의 책들과는 또다른 매력이 있더라고요. 날씨가 넘 따뜻해져 드뎌 저는 만년패딩을 넣을 수 있게 되었어요 ㅋㅋ 추위를 많이 타서요.

프레이야 2013-04-04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ᆢ정혜윤의 이런 책도있군요. 그동안 봄감기 앓으셨다니 이제 언능 나으시고 사월을 누리시길요, 블랑카님^^

blanca 2013-04-05 10:02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고마워요. 정말 대단하게 앓았답니다.--;; 살은 안 빠졌지만요. ㅋㅋ 감기 나은 후 보는 세상은 더욱 아름다워요. 그래서 감기가 오나 봐요. 그냥 이런 것도 행복이란 걸 알게 하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