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생활의 천재들
정혜윤 지음 / 봄아필 / 2013년 3월
평점 :
품절


규칙적으로 출근해야 하는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 엄마가 되면서 가장 아쉬운 점은 다양한 사람들과의 수다다. 물론 친구들이 있고 아이 친구 엄마들도 있지만 이제 양복입은 아저씨들과 나누는 대화는 그것이 군대 갔다온 이야기일지라도(이상스레 나는 이런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었다.) 거의 나눌 기회가 없다. 나는 여성적이고 섬세한 것과는 거리가 있기 때문에 조금 투박하고 거칠고 공감이 조금 배제되었을지라도 그런 어조와 시선이 아쉽다.

 

이 책의 저자 정혜윤은 라디오 피디다. <침대와 책>,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 등 주로 독서 에세이 관련 책을 꾸준히 내왔다. 반면 이 책은 정말 '사람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다. 유명인이라고 한다면 영화 감독 변영주, 만화가 윤태호 정도일 뿐 사회학자, 자연다큐 감독, 야생 영장류학자 등 이름과 직업이 생소한 사람들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다. 그들의 이야기와 정혜윤의 이야기가 혼재되어 있어 다소 혼란스러운 부분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기본적으로 그들이 바라보는 세상과 지향하는 점이 저자의 그것과 합치되는 점이 있다는 데에서 이 책의 전체적인 통일성을 이루기도 한다.

 

다시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서 내가 아쉬웠던 그런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 새로운 시선 들이 이 책을 읽으며 절로 충족되었다. 정말 신선했다. 내가 잊고 살았던 것들, 소망했지만 이루지 못한 것들에 대한 복기가 일본부채처럼 좌르륵 펼쳐지는 경험이었다. 이 책을 읽는 동안은 좀 더 진지하고 좋은 사람이 되어 가는 듯한 착각에서 행복할 수 있었다.

 

저자는 카프카가 한 이야기 "우리의 유일한 인생, 그것은 우리의 일상이야."에서의 일상을 사생활로 지칭한다. 그러니 "역사 바깥의 시간 속에서 천재"들인 그들의 이야기를 할 준비가 된 셈이다. 시장의 시간과 오솔길의 시간을 이야기하는 자연다큐 피디 박수용 감독은 농사꾼의 아들로서 소년 시절부터 소몰이를 했던 경험을 잔잔하게 그려낸다. 악다구니를 하고 싸움박질을 하는 시장의 시간과 끊임없이 소와 함께 걷는 오솔길의 시간은 이윽고 그의 전체 삶을 지배하게 된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두 세계에 걸쳐져 있는 삶. 아름답고 잔잔하고 이상적이지만 지루한 그곳과 다이나믹하고 처절하고 거친 이곳. 그는 야생 호랑이를 촬영하기로 하고 한 평짜리 비트에서 칩거하며 호랑이들을 기다린다. 비트 지붕을 사이로 두고 호랑이 가족과 함께 파도 소리를 들었던 기억에 대한 묘사는 더없이 아름답다. 더 자극적이고 조금은 폭력이 섞인 호랑이와의 사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정작 그가 가장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였다.

 

<이끼>,<미생>으로 유명한 만화가 윤태호에게는 만성적인 피부질환으로 인한 열등감이 있었다. 그가 대중적인 인기를 얻기까지 걸었던 그 지난하고 고독한 길에 대한 회고는 참으로 눈물겹다. 노숙까지 하며 그리고 또 그렸던 그의 시간들은 결국 그 무게감으로 승리했다. 또한 소외당하고 때로 멸시당했던 그를 따뜻하게 보듬어주고 사랑해주는 아내에게 "나는 아내에게 존중받았다."는 고백은 '사랑받았다'는 표현보다 더 절절하다. 자기를 있는 그대로 존중해 줄 수 있는 반려자를 만나는 것은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일이다. 그의 고뇌와 시련들이 마침내 하나의 성과로 만개하기까지 그의 솔직하고 가감없는 고백은 저자의 미려한 문체로 부드럽게 다듬어져 감동을 준다.

 

청년유니온 조성주 전 정책기획실장의 우리 사회의 청춘 담론이 엘리트 중심이라는 이야기는 미처 주목하지 못했던 부분에 대한 시사점을 준다. '노스페이스 사태'의 바깥에 그 옷을 못 입는 아이들은 미처 논의에 포함되지도 않았다는 그의 이야기. 논란과 논의의 변경에는 자신의 목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많은 아이들이 있었다. 피자 배달을 30분 안에 하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쳐야 했던 아이들의 이야기. 그 아이들을 위해 싸우고 하나 하나 대안을 만들어 나가는 그의 모습이 정말 청춘다웠다.

 

정치경제학자 홍기빈이 이야기하는 비그포르스의 '잠정적 유토피아'론도 흥미로웠다. 궁극적 유토피아가 가져올 수 있는 무기력감에서 일어나 지금보다 좀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잠정적 유토피아' 어차피 우리가 만들 수도 갈 수도 없다는 지향이 아닌 현실적이고 '이것만큼은 없었으면 좋겠다'에서 출발하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사회 개혁론은 따뜻하게 가슴에 와닿았다.

 

이야기가 먼저 나오고 누가 한 이야기인 지에 대한 사회적인 약력, 타이틀은 말미에나 간략하게 첨부된다. 우리는 누군가 말을 시작하면 그 말 자체에 대한 몰입보다는 어떤 직책, 직업의 누가 이야기하는 지에 대한 선입견으로 이미 마음을 채색하고 그 이야기를 자의적으로 평가할 준비를 한다. 이 책은 그런 여지를 주지 않는다. 소년 시절 소를 몰고 하늘의 별을 보며 떠나는 소몰이꾼의 이야기로 출발하여 우리는 마침내 그가 자연다큐 감독이 되어 야생 호랑이를 촬영했음을 알게 된다. 미리 다큐 감독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그가 하는 이야기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그가 어린 시절 겪었던 그 오솔길에서의 체험은 작아지고 만다. 피부병으로 고생하며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계속 그림을 그렸던 그렸던 아이가 오늘날 유명한 만화가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하나의 성장 소설 같다. 이미 성공한 만화가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추억하는 것으로 그의 이야기가 축소되고 경직화됐을 때 얻는 아쉬움과는 다르다.

 

정말 이야기를 제대로 듣게 된 느낌이다. 정말 이야기. 정말 고팠다.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것들. 내가 미처 챙기지 못한 것들. 바랐으나 그냥 지나가버린 풍경들.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런 이야기들을 조곤조곤 풀어낸 그런 책. 가볍지도 않지만 지나치게 무겁지도 않아 요즘 같은 봄 풍경에 펼쳐들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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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3-04-04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혜윤 피디의 책은 새로운 책이 나올수록 곰삭는 느낌이랄까? (좋은 표현~~)
아직도 읽지 못한 그녀의 책 다 읽고나면 이 책도....
아름다운 4월 되세요^^

blanca 2013-04-05 10:01   좋아요 0 | URL
세실님, 지금까지와의 책들과는 또다른 매력이 있더라고요. 날씨가 넘 따뜻해져 드뎌 저는 만년패딩을 넣을 수 있게 되었어요 ㅋㅋ 추위를 많이 타서요.

프레이야 2013-04-04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ᆢ정혜윤의 이런 책도있군요. 그동안 봄감기 앓으셨다니 이제 언능 나으시고 사월을 누리시길요, 블랑카님^^

blanca 2013-04-05 10:02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고마워요. 정말 대단하게 앓았답니다.--;; 살은 안 빠졌지만요. ㅋㅋ 감기 나은 후 보는 세상은 더욱 아름다워요. 그래서 감기가 오나 봐요. 그냥 이런 것도 행복이란 걸 알게 하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