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보문고 광화문점을 주말에 가족과 종종 가는 편이다. 아이는 슬프게도 그곳의 책이 아닌 각종 예쁜 스티커, 문구류 쇼핑에 재미를 붙여버렸다. 만삭인 나는 거의 마지막 친구와의 만남이 될 것으로 생각되는 약속 장소를 교보문고로 정하였다. 버스를 타고 광화문앞에서 내렸는데 습도 80%의 여름, 교보문고는 머나먼 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최대한 빨리 걸어야 조금이라도 서점에서 책을 볼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는 생각에 종종 걸음을 해보지만 보통 사람의 평상 걸음 속도에도 미치지 못한다. 광화문 광장 앞 전경들이 도열해 있다. 그 전경들이 마주하고 있는 시위대는 채 열 명이 되지 않는 어린 대학생들이다. 아이들의 이야기에 잠시 귀를 기울여 봤다. 그 아이를 둘러싼 전경들도 그 아이들 만큼이나 어리다. 분명히 지금 귀 기울이고 주목해야 하는 이야기는 교묘하게 묻혀 버렸다. 시위도 아니고 그저 열댓명의 대학생들이 차분히 의견을 이야기하는 현장에 두려움을 느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되묻고 싶었다.

 

 

 

 

 

 

 

 

 

 

 

 

 

 

 

지난 주말 서점의 진열대에서 이 책을 집어든 통통한 소녀는 엄마를 다급하게 부르고 있었다. "엄마! 이것 재미있겠다!" 나는 이미 이 책을 읽고 있던 중이라 그 모녀가 참 반가웠다.

트루먼 커포티는 누구일까? 그가 오드리 햅번이 창가에서 작은 기타를 들고 노래를 부르던 그 장면으로 남은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원작자인 것도 몰랐었다. 이 핑크색 겉표지, 토비 맥과이어를 연상시키는 눈망울의 작가가 이야기하는 아가씨 홀리 골라이틀리는 영화에서 오드리 햅번이 그려낸 이미지와는 많이 다르다. 트루먼 커포티가 투영된 '나'와 같은 뉴욕의 아파트 이웃 주민으로 만난 그녀는 나이 든 남자들을 유혹해서  기대어 사는 생활을 하는 어린 여자다. 트루먼은 그녀를 정통 미국 게이샤 정도로 표현한다. 사회적 규범, 도덕 기준, 경직된 틀을 해체하는 이 통통 튀는 아가씨의 언변은 듣는 것만으로도 이야기 자체를 떠나 절로 빨려들어가게 된다. 불미스러운 마약 사건에 연루되어 도망치듯 떠나버리는 그녀의 뒤에 남은 '나'는 렉싱턴 대로 술집 주인 조 벨과 함께 그녀와의 추억을 더듬는다. 무언가를 설교하거나 설명하지 않고 있는 그 자체로 투명하게 묘사하고 전달하는 이야기. 백오십 페이지 정도의 짧은 이야기는 술술 읽히고 트루먼을 조금 더 알아보고 싶게 만든다. 그래서 망설이지 않고 그의 또다른 책을 샀다.

 

 

 

 

 

 

 

 

 

 

 

 

 

 

 

 

소년 시절의 자전적인 이야기. 아주 아름답다고 하는데 기대가 크다. 그의 소년 시절 이웃에 <앵무새 죽이기>의 하퍼 리가 살아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아직 <티파니에서 아침을> 정도로 트루먼 커포티를 알았다고 표현하기에는 모자란 것 같아 <풀잎하프>를 읽고 그에게 빠질지 아닐지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같다. 아쉽게도 일가족 살인 사건에 대한 그의 논픽션 <인 콜드 블러드>는 일단 아이를 낳고 읽어야 할 것같다.

 

친구가 나에게 선물해 준 책 속에서 돈이 나왔다. 아무래도 비상금인 것같아 연락했더니 고맙다고 한다.^^;; 계좌이체해 주기로 했다. 지하철로 귀가하던 길에 펼쳐든 산후조리에 관련된 책은 뻔하지 않아 좋았다. 고3때 뒤돌아서 도시락을 같이 먹던 친구가 아직도 내 곁에 있다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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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13-07-11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티커와 문구류에 꽂히는가 싶더니, 이제는 코믹북스 코너에 한참을 머물러요. ㅋ
나도 모르게 씨익~ 미소를 흘리며 읽은 페이퍼네요 ^^
하퍼 리가 트루먼 카포티 어린시절 친한 이웃이었다니, 마실다니다 보면, 얻어 듣는 게 솔찮아여!

blanca 2013-07-11 21:32   좋아요 0 | URL
icaru님, 저도 스티커, 문구류 엄청 엄청 좋아해요. 하루종일이라도 그 코너에서 놀 수 있을 정도로요. 학생 때부터 펜 사는 게 취미였답니다.^^;; 하퍼 리와 트루먼 카포티가 커서는 트루먼 카포티가 하퍼 리의 성공을 시샘했다는 이야기도 있더라고요. 유명인 중에도 어렸을 때 우정을 나누어도 커서는 틀어지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젊음은 찰나다. 미숙하고 아리고 눈부시다. 삼십 대 중반을 넘어서며 나는 더이상 마냥 젊지 않다는 느낌, 무언가 틈새에 낀 느낌. 애매한 시점이다. 이 지점에서 바라보는 청춘은 가혹하고 부럽기도 하고 진저리 나기도 하고 여기에서 보는 노년은 두렵기도 하고 한편 다 겪어낸 그 잔잔함에 끌리기도 하고 짠하기도 하고.

 

 

 

다니자키 준이치로라는 작가는 노벨 문학상에 여러 번 거론되었고 동료 시인에게 자신의 아내를 양도하겠다고 약속하는 스캔들, 세 번의 결혼 등으로 근대 일본 문학계에서도 문학성 뿐만 아니라 사생활 면에서도 대단히 주목을 받았던 작가다. 탐미주의, 페티시즘 등이 기저에 깔려 있는 그의 작품들은 독특하게도 퇴폐적이거나 난해하고 모호한 것이 아니라 여성에 대한 섬세한 시선, 이야기를 감칠맛 나게 끌고 가는 작가의 힘으로 쉽고 재미있게 읽히는 매력이 있다. 작가의 세번 째 아내,처제 들의 실제 사연에서 끌어낸 <세설> 같은 작품은 많은 분량이 적게 느껴질 정도로 아기자기한 재미가 있다. <미친 사랑>은 어쩌면 작가 자신이 가장 솔직히 드러낸 자신의 욕망일런지도 모른다. 까페 여급이었던 열다섯 살의 소녀와 기묘한 동거를 통해 그녀의 성장과정과 성숙을 관찰하고 때로 주도하기도 하는 중년 사내의 이야기는 소재면에서 언뜻 거부감을 불러 일으킬 여지가 있음에도 이야기 전반에서 그런 퇴폐적인 분위기를 쇄신하는 기묘한 힘이 있어 쉽게 빨려들어간다. '나오미'라는 서양색이 짙은 이름의 소녀가 소위 밀고 당기기의 명수로 '나'라는 부유한 집안 출신의 성실했던 직장인을 쥐락펴락하는 모습은 러시아 작가 나보코프의 <롤리타>를 떠올리는 면이 있다.

 

 

 

 

 

 

 

 

 

 

 

 

 

 

 

 

 

미성숙이 나를 왜 매혹하는가, 그것은 순수하고 젊고 금지된 요정의 아름다움이 주는 명쾌함 때문이라기보다 많은 것이 약속되지만 거의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음으로 인해 생기는 틈새를 무한한 완전성들이 메꾸어준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안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보코프 <롤리타> 중 

 

"내 삶의 빛이오, 내 생명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이라고 명명했던 롤리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소녀들을 '님펫'이라 부르며 도착적인 집착에 빠졌던 험버트는  <미친 사랑>의 가와이 조지가 '나오미'라는 이름을 몇 번이나 부르며 그녀의 소녀 시절을 그리워하는 모습과 대단히 닮아 있다. 시차, 공간을 두고 이 무모하고 집착이 많고 현실 계산에 무능한 두 사내는 만난다. 그들이 소녀들에 다가갈수록 그들의 삶은 소진되고 헝클어지고 소외된다. 돌아온 나오미를 다시 아내로 맞는 가와이 조지와는 달리 험버트는 남의 아내가 되어 만삭이 된, 이제는 더이상 롤리타가 아닌 롤리타를 씁쓸하게 대면해야 했지만. 서늘한 마지막의 그 차가운 여운은 두 작품을 넘나든다.

 

우리나라에는

 

 

 

 

 

 

 

 

 

 

 

 

 

 

할아버지 시인 앞에 나타난 관능의 현현, 소녀 '은교'가 있다.

오십이 년이라는 시간의 간격 앞에서 시인 이적요는 '사랑은 본래 미친 감정'이라고 설파한다. '변태적인 애욕' 대신 '생로병사를 이기는 관능'으로 소녀에 대한 감정은 합리화된다.

나오미도 롤리타도 은교도 그녀들의 그 미성숙, 저돌적이고 무모하고 다듬어지지 않은 정념, 아름다운 찰나의 육체로 남자들의 욕망을 점화한다. '소녀'는 '찰나'다. 그러니 그 집착은 시한부로 끌날 수밖에 없다.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을 배워가야 하는 삶에서 시지푸스처럼 그렇지 않다고 되뇌며 끊임없이 떨어져 내려오는 바윗덩어리를 굴려 올리는 그 무모한 치기에 대한 이야기. 그것은 인간의 욕망에 대한 하나의 거대한 은유의 대상으로 소녀들을 등장시킨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어느 곳에 있는 인간이든 인간은 누구나 얼마쯤 가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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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3-07-07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친사랑과 롤리타, 은교는 참 많이 닮아 있군요.
소녀는 찰나다...... 폭풍같은 소녀, 소년시절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에 대한 답도 들어있는듯 합니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는 생각도......

blanca 2013-07-07 22:06   좋아요 0 | URL
세실님, 신기한 게 이런 비슷한 욕망에 관련된 책이 동서양, 시간차를 두고 나란히 꽤 있는 것 같아요. 일종의 판타지인 것 같기도 하고. 일단 가장 쉽게 잘 읽혔던 것은 <미친 사랑>이었어요. 술술 넘어가더라고요. 이것도 작가의 능력인 것 같아요. <세설> 같은 소설은 너무 아기자기하고 예뻐서 같은 작가가 쓴 책이 맞나 싶긴 했지만요^^;
 

책을 읽고 나면 꼭 역자의 후기를 읽는다. 번역 과정에 대한 이야기부터 원작 자체에 대한 소감까지. 숨어 있는 화자는 작품의 뒤안의 또 다른 등장인물 같다. 번역은 대단히 민감하고 미묘한 작업이다. 어떤 번역가의 직역이, 또 어떤 소설가의 의역이 때로 논란의 중심에 서는 것은 '번역'의 한계와 이상의 철책에 대한 사회적 합의라는 것이 가능한 시점까지 여전히 논란이 된다는 것의 방증이다. 언어의 경계를 넘나드는 일은 때로 감정의 층위까지 넘나들어야 하는 일이라 단순하지 않다. 우리가 느끼는 것을 저들도 비슷한 결로 느낀다는 보장이 없고, 저들이 울고 웃는 것에 우리도 감응하리라는 법이 없다. 이 자체도 문제가 되지 않을 인간의 보편적 정서가 응축되는 지점도 분명 있지만, 그렇지 않은 가장자리에서 번역은 때로 방황한다.

 

 

 

 

저자 김남주는 주로 프랑스 문학을 번역해 왔다. 이 책은 그녀가 번역한 책들에 덧붙인 옮긴이의 말이 모인 것이다. 프랑소와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로부터 아멜리 노통브, 로맹 가리, 가즈오 이시구로 등 그녀는 평론가로서의 역할을 자처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녀가 세상에 내어 놓기 전에 독대한 작가들의 원작 자체에 대한 솔직한 감상도 들을 수 있다. 그러니 이 책은 번역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번역가의 성실한 독서의 여정에 대한 독자들의 초대로 보여진다. 문학을 사랑하고 책을 부지런히 읽으며 또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수시로 월경하는 이가 하는 작가와 그 작가의 작품, 삶에 대한 이야기는 끌리는 옷자락처럼 여운이오래 남는다. 군데 군데 인용되는 원작의 내용은 그 어느 홍보 문구보다 그 작품으로 다가가고자 하는 마음을 동하게 한다. 그녀의 책에서 또다른 독서목록을 건져 올린다. 찾아 보니 절판된 것이 많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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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아이즈 2013-07-04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블랑카님 저도 나의 프랑스식 서재 받았어요.
아직 안 읽었는데 읽고 페이퍼 남겨야 겠어요.
이참에 김남주의 번역 문체에 대해 관심 좀 가지려구요.
제 취향이길 바라봅니다.^^*

blanca 2013-07-04 20:47   좋아요 0 | URL
저는 김남주 씨의 번역으로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읽었어요. 번역 자체에 관심을 기울이고 읽은 책이 아니라 번역가를 알고는 있었지만 이 책을 읽으며 저자의 색깔을 미처 몰랐다는 게 좀 아쉽더라고요.
 
한낮인데 어두운 방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3년 6월
평점 :
절판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아스팔트 위에서 아물아물 춤추는 초여름 오후입니다. 훈풍이라는 말이 존스 씨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일본어에는 정말 아름다운 말이 많다고 존스 씨는 생각합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손에 든 봉지가 차락차락 울립니다. 봉지 안에는 갓 뽑아낸 우무채가 들어 있습니다.

 -p.5

 

이렇게 시작하는 이야기.

이제 본격적인 한여름을 앞두고 끈적이는 습기와 내리꽂히는 빗소리에 불쾌지수가 마구 올라가는 아침에 혹은 저녁에

이런 청량한 초여름에 물꼬를 트는 이야기는 청량하다. 에쿠니 가오리는 친절한 경어체로 독자를 맞이한다. 어떤 이야기일까.

남자는 게다가 일본에 체류 중인 오십 대의 미국인 강사다. 그는 장성한 남매를 미국에 두고 아내와는 별거 중인 남자다. 가족들과는 1년에 한 번 정도 재회. 그리고 그의 방에는 해가 잘 들지 않는다. 그러니 한낮인데도 어두운 방이다.

 

상대 여자는.

언덕 위의 군함 같은 하얀 집에 아이 없이 사업가 남편과 살고 있는 전업 주부 미야코.

그녀는 아주 착실한 살림꾼이다.

종일 청소를 하고 화분에 물을 주고 퇴근하는 남편을 위해 매일 매일 새로운 밥을 짓고 때로 이웃집 아이를 돌봐주고 하는.

 

둘은 같은 동네 주민으로 함께 산책을 다니게 된다.

존스가 '필드 워크'라 명명한 그 기묘한 여정에서 미야코는 무심코 들었던 예쁜 새소리가 박새 소리임을 알게 되고 유치원떄 오렌지반이었다는 것, 남자는 초등학교 때 너드였단 것을 서로 고백한다.

불륜일까? 동네 이곳저곳의 스쳐 지나던 풍경이 남녀의 동행으로 더 풍부하고 사랑스럽게 변모하고

여자는 자신이 '세상 밖으로 나와버렸다'는 것을 깨닫고 만다.

여자의 죄책감을 남자는 '자의식'으로 수정하여 가르쳐준다.

미야코는 더이상 집안에 갇혀 남편의 저녁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작은 새 같은 귀여운 존재로 남아 있지 않는다.

어쩌면 인형의 집에서의 탈출 같은 이 여정에 대한 이야기는

에쿠니 가오리의 그 간명하고 청랑한 언어로 투명하고 반짝반짝 빛나는 언어로 물빛 같은 색채를 띤다.

 

황금색이라 부르고 싶을 만큼 샛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여기저기에서 한잎 두잎 떨어져 공중을 나는, 12월의 오후입니다. 겨울 채비, 라는 단어가 존스 씨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일본어에는 흥미로운 말이 정말 많습니다. 어깨에 짊어지듯이 들고 가는 양복-방금 세탁소에서 찾아오는 길입니다-에 덮인 비닐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사락사락 소리를 냅니다.

-p.239

 

 

초여름에 우무채 봉지를 들고 거리를 걸었던 남자가 이제는 '겨울 채비'라는 말을 떠올리며 세탁소에서 양복을 찾아오는 것으로 이야기는 어느새 저문다. 여자와 남자의 관계는 반년 남짓의 기간을 거치며 여러 색채로 변모하지만 그 관계 자체가 이 이야기의 핵심은 아닌 것같다. 언덕 위의 하얀 집에서 작은 새처럼 예쁘고 아기자기하게 살림을 했던 여자는 결국 '불륜'을 저지르고 남편과도 소원해지지만 '한낮인데 어두운 방'에서 만났던 남녀는 어둑신한 결말의 주인공들이 아니다. 남자는 작은 새 같았던 여자와 만나 행복했고 여자는 남편과의 관계가 지녔던 그 얄팍함을 간파하고 세상 밖으로 나온 것에 아픈 만족감을 가진다.

 

그들을 스쳐 지나갔던 풍경은 다시 흐른다.

나이 든 어른들의 성장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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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3-07-02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녁이 다가오는.. 비 오는 날 이 시간에
blanca님의 청량하고 고요하고 아름다운 글,
감사히 잘 읽고 갑니다~^^

blanca 2013-07-03 12:46   좋아요 0 | URL
댓글이 더 근사합니다.^^

안녕미미앤 2013-07-12 0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픈 만족감' 이라.. 아픈 만족감.... 아픈 만족감..
내공이 있는 블로그들을 만나면 따뜻해지는 무언가가 있어요.. 고마워요 블라카님..

blanca 2013-07-12 16:16   좋아요 0 | URL
안녕미미앤님, 아직 저는 '내공'이 부족합니다. 언제나 그럴 테지만요. 비가 많이 와요. 이런 날 이런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한 걸요. 주말 잘 보내세요^^
 

사람은 변한다. 취향도 성격도. 심지어 가치관도. 원래 나에게도 취향이 스릴러, 호러물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십년도 더 전의 일이지만. 정말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공수창 감독, 감우성 주연의 <알포인트> 영화를 심야로 보고 일주일 동안 엄마 옆에서 자야 했던 그 일 이후로 모든 호러물을 끊었다. --;; 그 영화가 뭐 그리 무서웠냐,고 반문한다면 글쎄, 유독 그 영화의 다큐멘터리 촬영 기법과 카메라의 시선이 내가 무서워하는 그 지점과 정확히 겹쳤다고랄 수밖에.

 

책도 그렇다. 추리물과 스릴러물은 미야베 미유키 정도만 간신히 읽어내고 되도록 시선을 안 두는 편이다. 본격 장르물이 아니더라도 그런 요소만 가미되면 뭐랄까, 책장 넘어가는 속도는 빠르지만 그 읽고 난 후 잠들기 전의 이런 저런 연상때문에 그리 즐기지 않는다. 겁이 많아서다. 정유정 작가의 <7년의 밤>에는 추리물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긴 했지만 그 중심에 놓여 있는 사건 자체가 가지는 응집력 때문인지 대단히 흡인력 있게 읽혔다. 여러 인물과 하나의 사건이 씨실과 날실처럼 치밀하게 직조되어 고도로 치밀하게 무게감 있는 메시지로 응축되고 있었다. 한국소설이 이 정도까지 나아갈 수 있다는 하나의 지표를 보여주는 것 같아 소설을 좀처럼 읽지 않는다는 사람들에게도 자신 있게 권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녀의 신작을 많이 기다렸다. 신작이 나오자마자 어떤 내용인지 알아보지도 않고 구입했다. 아껴두었다 며칠 전부터 읽기 시작했으나 읽어내지 못했다. 그러니 이 책을 '읽었다'는 표현을 쓸 수 없다. 중심에 놓인 '개', 그리고 그 '개'와 '인간'의 이야기. 그 '개'는 눈덮인 설원을 자유롭게 달리며 때로 인간의 생사를 좌지우지하는 '큰 개'이다. 그 '개'가 광막한 대지 대신 창살 안의 한정된 공간에 갇혀 사육될 때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에 대한 묘사들을 묵묵히 읽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치열하고 때로 잔인한 '날것'을 중심으로 전개될 것 같았다. 그러니 소심한 나는 잘 견뎌낼 수가 없다. 다 읽어내지 못한 책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조금 부끄럽다. 작가의 발전도 시선의 변화도 온전히 잡아낼 수 없으니 아쉽다. 누군가 다 몰입해서 읽고 하는 이야기에 귀기울이련다.

 

 

 

 

 

일백 페이지 남짓한 얇은 이 책은 아주 청량했다. 지금까지 내가 가본 나라는 딱 두 곳이다. 호주와 일본. 아이를 데리고 간 것은 아이가 네 살 때 북해도. 아, 쉽지 않았다. 7월의 더위 속에서 휴대용 유모차로 끈적끈적한 일본의 여름 안에서 아이와 실랑이하는 일은 얌전한 일본 사람들 속에서 조금 더 남사스러웠다. 이 책 속의 아이들은 이미 사춘기다. 그러니 조금 더 쉬운 것은 사실이다. 사촌남매를 데리고 북유럽의 덴마크, 스웨덴, 핀란드를 다닌 이야기. 지나친 감상도 딱딱한 가이드도 아닌 그 중간 지점을 잘 포착한 미덕. 언젠가 나도 아이를 데리고 갈 수도 있을 거라는 미망을 품게 하는 이야기.

 

 

 

 

이런 상큼한 가이드 지도도 군데군데 첨부되어 있어 여행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같다. 이 덥고 습한 날, 여행을 꿈꾸는 일은 당연하고 또 너무 먼 일이기도 하다. 어깨선을 넘어버린 이 긴 머리를 귀밑으로 싹둑 잘라버리고 조금 더 시원해지고 조금 더 어려보이기를 꿈꾸는 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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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06-25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저는 [7년의 밤]을 재미있게 그래서 빠르게 읽긴 했지만 그 작가의 신작이 기다려진다거나 하지도 않았고 신작이 나와도 그다지 호감이 가질 않더라고요. 그 때 아마도 구매자평에 '감탄은 있으나 감동은 없다'는 뉘앙스로 썼던것 같아요. 재미있지만 '아 좋구나' 하는 그런 책이 제게는 아니더라고요. 저는 그 흥미로운 이야기 속에 무언가가 더 있기를 원하는데, 제가 원하는 게 좀 부족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보니 지금 읽고 있는 책은 70쪽 남짓 읽었는데도 아주 마음에 들어요. 블랑카님 혹시 읽어보셨을까요? 슈테판 츠바이크의 [연민]이요. 아주 마음에 들어요. 블랑카님도 읽으시면 분명 마음에 들어하실텐데, 혹시라도 안읽어보셨다면 우리 같이 읽어요!!

blanca 2013-06-26 07:03   좋아요 0 | URL
아, 다락방님은 슈테판 츠바이크 책을 읽고 계시군요! 저는 <광기와 우연의 역사> 정도만 맛보았어요. 일단 주문한 책들 먼저 소화하고 뒤따라 갈게요. 작가의 능력이나 작품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취향'이라는 면에서 제가 접근할 수 없는 책들이 있더라고요. 다양하게 읽어야 한다는 것도 일종의 강박인 것 같아요.

프레이야 2013-06-25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포인트,는 제가 최고로 치는 한국공포물이에요. 너무나 섬뜩하더라구요. 우리안의 공포감, 그것의 실체를 보여주니 더욱이요. 정유정 신작은 칠년의 밤,보다 더 강한가 보군요. 무장하고 봐야겠어요.^^

blanca 2013-06-26 07:05   좋아요 0 | URL
아, 프레이야님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당시만 해도 참 획기적인 공포물이었는데. 후속작들은 평가를 못 받았나 보더라고요. 배우들 연기도 좋았고요. 예, 프레이야님의 감상 기다릴게요. 저는 중반까지도 못 읽었어요^^;;

2013-06-26 08: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26 13: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13-06-28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오랫동안 님서재에 댓글을 안 남겼네요.
아마 비로그인으로 글은 읽은 듯한데...
정유정, 7년의 밤 읽으며 영화로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영화화된다는 애기를 들었어요.
우리지역에 사는 분이라 작가초청하려고 출판사랑 통화했지만 작품구상 들어가면 강연은 안한다고...
작년에 3년도 기다릴 수 있으니 성사시켜 달라했어요.
올 여름과 가을에도 작가초청할 건수가 많아서 다시 알아봐야겠어요.
신작은 다음달 구매리스트에 넣어둘래요.^^

아~ 나는 혼자서 호러영화 잘 봤어요. 여름이면 꼭 봤는데~ 이젠 그런 영화는 보기 싫어졌어요.ㅋㅋ

blanca 2013-06-28 10:27   좋아요 0 | URL
저도 영화화 얘기를 들었는데 진척이 있는지 궁금해요. 오호! 순오기님 지역에 사시는군요! 원래 간호사셨다고 들은 것 같아요. 이제 작품이 나왔으니 아무쪼록 성사되기를 바랍니다.^^ 저도 이제는 잔잔하고 여운이 남는 영화가 좋아요. 지나치게 자극적인 영화는 저어하게 되더라고요.

Jeanne_Hebuterne 2013-06-28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러물에서 시작하여 매끄럽게 정유정으로 스며들었다가 다른 부분에서 매듭을 짓는 페이퍼, 잘 읽었습니다!
알 포인트, 블레어 위치 프로젝트(이건 1편만), 엑소시스트, 링(대충 지금은 여기까지만)을 보더라도 인간이 느끼는 공포는 참 다양한 것 같아요. 감정의 뿌리를 캐내다 보면 늘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보일 듯 보이지 않는 희미한 자국이곤 했습니다.
저같은 경우는 상상을 자극하는 공포에 몹시 예민하게 반응-bgm으로 삐걱대는 문 소리만 들려도 혼자 자지러지는 부류-하는데, 블랑카님을 글을 읽으니 정유정이 궁금해집니다.올여름, 한 번 챙겨보아야 겠어요!

blanca 2013-06-28 10:32   좋아요 0 | URL
쟌느님, 혹시 <7년의 밤>을 안 읽으셨다면 강추드려요. 참 잘 썼더라고요. 감탄하며 읽었던 기억이 나요. 여기 저기에서 하도 칭찬을 해서 값을 하나 싶었는데 저한테는 아주 놀라운 소설이었어요. 저는 겁이 많아요. 번지점프, 스쿠버다이빙, 이런 것 죽을 때까지 못할 것 같고요. 무서운 것은 거의 눈감고 안 보는 수준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