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인데 어두운 방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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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아스팔트 위에서 아물아물 춤추는 초여름 오후입니다. 훈풍이라는 말이 존스 씨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일본어에는 정말 아름다운 말이 많다고 존스 씨는 생각합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손에 든 봉지가 차락차락 울립니다. 봉지 안에는 갓 뽑아낸 우무채가 들어 있습니다.

 -p.5

 

이렇게 시작하는 이야기.

이제 본격적인 한여름을 앞두고 끈적이는 습기와 내리꽂히는 빗소리에 불쾌지수가 마구 올라가는 아침에 혹은 저녁에

이런 청량한 초여름에 물꼬를 트는 이야기는 청량하다. 에쿠니 가오리는 친절한 경어체로 독자를 맞이한다. 어떤 이야기일까.

남자는 게다가 일본에 체류 중인 오십 대의 미국인 강사다. 그는 장성한 남매를 미국에 두고 아내와는 별거 중인 남자다. 가족들과는 1년에 한 번 정도 재회. 그리고 그의 방에는 해가 잘 들지 않는다. 그러니 한낮인데도 어두운 방이다.

 

상대 여자는.

언덕 위의 군함 같은 하얀 집에 아이 없이 사업가 남편과 살고 있는 전업 주부 미야코.

그녀는 아주 착실한 살림꾼이다.

종일 청소를 하고 화분에 물을 주고 퇴근하는 남편을 위해 매일 매일 새로운 밥을 짓고 때로 이웃집 아이를 돌봐주고 하는.

 

둘은 같은 동네 주민으로 함께 산책을 다니게 된다.

존스가 '필드 워크'라 명명한 그 기묘한 여정에서 미야코는 무심코 들었던 예쁜 새소리가 박새 소리임을 알게 되고 유치원떄 오렌지반이었다는 것, 남자는 초등학교 때 너드였단 것을 서로 고백한다.

불륜일까? 동네 이곳저곳의 스쳐 지나던 풍경이 남녀의 동행으로 더 풍부하고 사랑스럽게 변모하고

여자는 자신이 '세상 밖으로 나와버렸다'는 것을 깨닫고 만다.

여자의 죄책감을 남자는 '자의식'으로 수정하여 가르쳐준다.

미야코는 더이상 집안에 갇혀 남편의 저녁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작은 새 같은 귀여운 존재로 남아 있지 않는다.

어쩌면 인형의 집에서의 탈출 같은 이 여정에 대한 이야기는

에쿠니 가오리의 그 간명하고 청랑한 언어로 투명하고 반짝반짝 빛나는 언어로 물빛 같은 색채를 띤다.

 

황금색이라 부르고 싶을 만큼 샛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여기저기에서 한잎 두잎 떨어져 공중을 나는, 12월의 오후입니다. 겨울 채비, 라는 단어가 존스 씨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일본어에는 흥미로운 말이 정말 많습니다. 어깨에 짊어지듯이 들고 가는 양복-방금 세탁소에서 찾아오는 길입니다-에 덮인 비닐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사락사락 소리를 냅니다.

-p.239

 

 

초여름에 우무채 봉지를 들고 거리를 걸었던 남자가 이제는 '겨울 채비'라는 말을 떠올리며 세탁소에서 양복을 찾아오는 것으로 이야기는 어느새 저문다. 여자와 남자의 관계는 반년 남짓의 기간을 거치며 여러 색채로 변모하지만 그 관계 자체가 이 이야기의 핵심은 아닌 것같다. 언덕 위의 하얀 집에서 작은 새처럼 예쁘고 아기자기하게 살림을 했던 여자는 결국 '불륜'을 저지르고 남편과도 소원해지지만 '한낮인데 어두운 방'에서 만났던 남녀는 어둑신한 결말의 주인공들이 아니다. 남자는 작은 새 같았던 여자와 만나 행복했고 여자는 남편과의 관계가 지녔던 그 얄팍함을 간파하고 세상 밖으로 나온 것에 아픈 만족감을 가진다.

 

그들을 스쳐 지나갔던 풍경은 다시 흐른다.

나이 든 어른들의 성장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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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3-07-02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녁이 다가오는.. 비 오는 날 이 시간에
blanca님의 청량하고 고요하고 아름다운 글,
감사히 잘 읽고 갑니다~^^

blanca 2013-07-03 12:46   좋아요 0 | URL
댓글이 더 근사합니다.^^

안녕미미앤 2013-07-12 0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픈 만족감' 이라.. 아픈 만족감.... 아픈 만족감..
내공이 있는 블로그들을 만나면 따뜻해지는 무언가가 있어요.. 고마워요 블라카님..

blanca 2013-07-12 16:16   좋아요 0 | URL
안녕미미앤님, 아직 저는 '내공'이 부족합니다. 언제나 그럴 테지만요. 비가 많이 와요. 이런 날 이런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한 걸요. 주말 잘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