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1995년 3월 20일, 월요일. 활짝 갠 초봄의 아침. 아직 바람이 차가워 오가는 행인들은 모두 코트를 입고 있다. 어제는 일요일, 내일은 춘분 휴일, 즉 연휴 한가운데다. 어떤 사람은 '오늘은 그냥 쉬고 싶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여러 사정상 당신은 쉴 수 없었다.
그래서 당신은 여느 때처럼 아침에 눈을 뜨고 세수를 한 다음, 아침을 먹고 옷을 입고 역으로 간다. 그리고 늘 그렇듯 붐비는 전차를 타고 회사로 향한다. 여느 때와 조금도 다름없는 아침이었다. 딱히 다른 날과 구분할 필요도 없는 당신의 인생 속 하루에 지나지 않았다.
- 무라카미 하루키 <언더그라운드> 머리말 중

일상이 그리 견고하지 않다는 것을 배워가는 것이 나이듦일 수도 있다. 살다 보면 도저히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들이 '남의 일', 때로는 '나의 일'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직전까지도 영원히 살 것처럼 일하고 미워하고 욕망한다.
이윽고 회사 출근을 위해 지하철에 올라탄 사람들은 거의 압사당할 것 같은 지옥철의 사람의 밀도에 헉헉대며 전날의 휴식의 아쉬움을, 지금 당장의 불쾌함을, 그리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일들을 생각하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목격하고 어떤 사람은 미처 자신의 시야를 어둡게 하고 욕지기를 치밀어 오르게 하는 것의 실체도 모르는 체 무방비로 당한다. 그럼에도 그 날 그 지하철을 탔던 시민들 대다수는 자신들의 몸이 무언가 알 수 없는 물질에 의해 교란당하고 있음을 자각하기도 하고 자각하지 못하기도 하면서 기어서라도 회사로 출근하려고 했다고 한다. 하루키의 이야기다. 몸이 괴롭고 도저히 컨디션이 살아나지 않는데도 관성처럼 다들 비틀거리며 회사로 향했다. 자신이 무엇에 의해 왜 이렇게 되었는 지에 대한 자각과 고민은 대부분 없었다.
1995년은 우리나라에도 대형 참사가 일어났던 해이다. 강남 한복판 견고하게 서 있던 백화점은 허술하고 빈약한 껍질처럼 와르르 무너지고 그 속에 품었던 사람들은 영문도 모르는 채 죽고 다쳤다. 결코 움직여서도 움직일 것 같지도 않았던 건물이 노쇠한 노인처럼 예고도 없이 자멸하는 모습은 그것을 만들고 그 속에서 소비하고 살았던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근처 일본에서는 고베 대지진과 지하철 사린 가스 살포 사건이 일어났다. 옴진리교라는 컬트적 색채를 띠는 종교의 교주의 지령 아래 붐비는 통근 시간 지하철 안에 치명적인 독가스가 살포되어 무고한 시민들이 다치고 피해를 입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외국에 있다 귀국해 있던 시점이었다. 그는 이 날 지하철에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익명화 속에 침몰되어 매스컴에서 무람없이 살포되는 것에 거부감을 느꼈다. 그는 피해자들의 이야기들을 듣고 그들의 이름을 그들의 개별적인 삶들을 건져내고 싶었다. 다만 그것은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것이어야지, 그 어떤 부담감이나 타의에 의한 것이어서는 안 되었다. 하루키는 소설을 쓰는 대신 그들의 삶 속으로 1년 남짓 걸어들어갔고 그것의 집적물을 가지고 걸어 나왔다.
어디에서 태어나고 어떤 첫인상을 가지고 있고 어떤 삶의 여정을 걸어왔는 지가 이야기되고 나면 그들은 어김없이 3월 20일 사린 가스가 살포된 그 지하철에 올라탄다. 때로는 3분 먼저 집앞에 온 버스 덕택에 타지 않아도 됐을 그 지하철에 타는 불운에 처하기도 했다. 근무교대가 끝나고 지원을 나온 덕에 사린 가스를 마신 역무원도 있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가스를 들이마시고 비틀거리면서도 그들은 그게 어떤 고의적인 악의에서 나온 독가스이고 빨리 병원으로 가서 해독제를 맞아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쓰러져 바라보는 '저쪽 길'의 사람들은 여느 때처럼 바쁘게 출근길을 가고 있었다. 회사에 가서야 비로소 뉴스를 보고 자신이 사린 가스를 마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처치에 들어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아내가 출산을 앞둔 에이지라는 사람은 아내와 딸, 늙은 어머니와 아버지를 두고 작별인사도 제대로 못한 채 출근길에 짧은 생을 마감하기도 했다. 하루키 앞에서 아내는 그를 처음 만나던 날, 사랑에 빠졌던 시간들을 이야기한다. 다시 돌아와 그의 허망한 죽음 앞에서 모든 참사와 비극이 타자와 되는 것에 대하여 그녀는 한탄한다. 부지런하고 효녀였던 여동생이 식물인간이 되었다 힘겨운 자활을 하는 여정에 동참한 오빠는 여동생 대신 여동생이 항상 써왔던 일기를 대신 쓴다. 하루키는 아직 회복되지 않아 자신의 의사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그녀를 만나 그녀의 손을 잡는다.
이들의 이야기는 서로의 기억들의 교차로 부정합이다. 기억은 완벽한 사실들의 집적이 아니다. 하지만 하루키는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이러한 집합적 이야기 속에 내재된 팩트를 뛰어넘는 진실에 주목한다. 지하철 사린 사건의 피해자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그는 사린 사건의 피해도 개개인이 살아온 내력과 상처를 처리하는 패턴에 무관하지 않음을 깨닫는다. 개별의 이야기들을 취합하는 과정에서 역시 하루키는 이러한 예고되지 않은 대형 재난에 대처하는 구조 시스템이 얼마나 허술한 지 그리고 거기에서 일어나는 기적들이 얼마나 개개인의 개별적인 선의와 구조 의지에 기대는 지를 발견한다. 이것은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하루키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이러한 것에 멈추지 않는다. 이 대목을 읽는 순간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우리는 어떤 제도=시스템에 인격의 일부를 맡기고 있지는 않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 제도는 언젠가 당신을 향해 어떤 '광기'를 요구하지 않을까? 당신의 '자율적 파워 프로세스'는 올바른 내적 합의점에 도달해 있는가? 당신이 지금 갖고 있는 이야기는 정말로 당신의 이야기일까? 당신이 꾸고 있는 꿈은 정말로 당신 자신의 꿈일까? 그것은 언제 어떤 악몽으로 변해버릴지 모르는 누군가의 꿈이 아닐까?
-p.712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어떤 선의와 대의를 위해 헌신해야 할 것 같은 종교 집단이 비록 그것이 약간의 컬트적인 요소가 있는 신흥종교일지라도 대다수의 무고한 시민들을 살상하기 위해 무차별적으로 독가스를 살포하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는 일일 것이다. 하루키의 시선은 이제 '저쪽'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지대를 더듬는 것으로 나아가려 한다. 혐오스럽고 괴이한 '저쪽'을 균질하고 단일하게 파악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자발적으로 '저쪽'으로 걸어들어간 사람들도 익명성에서 구출해내어 '이쪽'을 비추는 거울상으로 면밀히 들여다보려 했다. '저쪽' 사람들도 한때 분명 '이쪽'에서 '우리들'과 함께 있었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하루키는 옴진리교 신도이거나 한때 그 종교에 귀의했던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들었던 성실하고 진지한 청취자의 자세를 견지하기는 하지만 여기에서는 조금 더 적극적이고 비판적인 그를 만날 수 있다. 그저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 지나치게 왜곡되거나 편중된 지점으로 가려는 그들의 이야기를 적절한 균형추로 바로잡으려는 시도가 보인다. 평범하고 여느 사람들보다 조금 더 진지하거나 더 외로움을 느끼거나 했던 이들은 저마다의 개인적인 고민, 건강 상의 고민들로 우연히 옴진리교와 만나게 된다. 그러나 교주 아사하라가 제시한 그 평면적이고 단순한 세계관은 너무나 허술하고 빈약한 실체로 인해 곧 한계를 드러내게 되고 사람들도 그에 대한 실망감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옴진리교에 귀의하여 부정합과 모순이 난무한 세계를 등지고 단순하고 평면적이고 명쾌한 지향을 향해 몸과 마음을 맡길 수 있었던 지난 시간을 그들은 후회하지 않는다. 사람을 죽이고 사회를 교란시키려 했던 폭력을 걷어내고 남은 정경은 또다른 우리의 못나고 아픈 구석이다. 첨언처럼 덧붙인 하루키와 심리학자 가와이 하야오와의 대담 내용은 우리 인간 내부의 악하고 약하고 못난 구석을 부정하지 않고 직시한다. 그것을 무조건 거부하고 부인할 때 그리고 우리의 모습을 순수와 선으로 포장할 때 악은 기어나와 스스로를 형상화한다. 하루키가 왜 이토록 꾸준히 지하와 그리고 인간 내부의 부정적인 괴물 같은 면에 천착했는 지에 대한 단서가 나오는 대목이다.
나는 '나'를 온전히 신뢰하거나 단정짓지 않게 되었다. 물론 상식과 선과 타인에 대한 선의를 기반으로 하루 하루를 살려고 노력은 한다. 하지만 내 자신을 어떤 사건이나 어떤 상황에서 면밀히 들여다 보면 분명 거기에는 부정하고 싶은 내부의 정경이 있다. 그것을 뿌리째 소거해 버릴 수만 있다면 사는 게 얼마나 편하고 단순하겠는가. 그러나 그러한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지점에서부터 어떤 비극은 시작될 지 모른다. 타인의 그것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복합적이고 유동적이다. 애거서 크리스티가 소설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오늘은 자선을 행한 사람이 내일은 극도의 추하고 이기적인 행동에 전전긍긍할 수도 있다. 어느 한 면으로 그 인간을 다 설명, 판단할 수는 없다. 절대적으로 선하고 절대적으로 악하다는 심판을 내리는 지점에 분명 폭력의 맹아가 있다. 하루키는 어떤 판단을 정지하고 명확한 다수의 시점을 만들어내는 데 필요한 '재료'를 제공하는 데에 집필의 목적을 두었다 한다. 하지만 분명 이 지점은 대단히 웅변적이지만 더 나아가려다 머뭇거리고 만 것만 같아 아쉽기도 하다. 아니, 어쩌면 이 지점에서 어떤 대안을 제시하고 어떤 판단을 시작하는 것부터가 또다른 폭력과 오만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인식과 지각, 판단의 외연은 분명 또다른 어떤 한계 안에 봉착할 것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갈 수 있는지 끊임없이 궁금해 하며 가능성을 시험해 보는 게 삶의 과정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