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27일 화요일, 지금, 여기에 나는 또 있다. 하지만 2055년 1월 27일에도 여전히 여기에 또 이렇게 있을 지는 확신할 수 없다.

 

그때 런던은 풀이 웃자란 오솔길일 것이고, 이 수요일 아침 인도를 따라 질주하는 모든 사람들은

결혼반지를 낀 뼈다귀와 금이빨밖에 남지 않은 채, 먼지에 덮여 있으리라.

- 버지니아 울프 <댈러웨이 부인> 중

 

 

 

 

 

 

 

 

 

 

 

 

 

 

 

 

 

일단 지금 내가 해야 할 자질구레한 일들이 산적해 있고, 내가 듣고 말해야 할 관계들, 아직 욕심내고 때로는 질투해야 할 것들이 남아 있는 마당에 정작 '내'가 사라지고도 남을 것들의 그 굳건함에 시선을 돌리기란 쉽지 않다. 영원히 살 것처럼 욕심내고 때로 절망하고 그럼에도 영원하지 않음이 때로 위안이 되기도 하면서 그렇게 오늘은 또 어제가 되고 내일은 끊임없이 오늘이 되며  시간 앞에 무력하게 침몰된다.

 

과거, 현재, 미래를 온전하게 좀 내려다볼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은 그나마 이야기를 읽을 때이다. 주인공들은 시간에 지고 때로는 시간을 이기면서 삶을 사는 정경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나도 안 그럴 리가 없다. 오십 대의 댈러웨이 부인의 눈으로 생생하게 그려지는 런던 풍경이 이윽고 곧 간곳 없이 허무하게 스러져 버릴 것이라는 것에 대한 언질은 버지니아 울프였기에 가능했다. 그녀는 줄곧 모든 생생함이 유한성 안에서 더욱 빛을 발함을 유한성 앞에 결국 굴복할 것임을 일깨운다. 그 자신이 시간 앞에서 죽음 앞에 삶이 속박되는 것을 못견딘 탓인지 그녀는 스스로 시간의 종결, 삶의 마침표로 걸어들어가며 자신의 삶으로 마지막 텍스트를, 마지막 조언을 남긴다.

 

이십 대를 눈부시게 긋고 지나갔던 수많은 과거의 노래들을 이제는 나이들어버린 가수들이 재현하는 모습에 언어로는 설명하기 힘든 절절한 막막함을 느꼈다. 그것은 언제든 항복할 준비가 되어 있는 나뿐만 아니라 조금은 건조해 보이는 사람들도 그 시대에 청춘을 맛보았던 시간들을 떠올리며 애절해했다. 결국은 '시간' 앞에 모든 것들이 무력화되는 것인지, 아니면 그럼에도 우리가 모르는 어떤 인식과 지각의 틈새에 소중하고 아름다웠던 것들이 온전하게 남는 것인지 알 길이 없다.

 

 

 

 

 

 

 

 

 

 

 

 

 

 

김연수가 어느 포탈의 서재에서 권한 책. 소설가가 권하는 소설이 아닌 책은 언제나 주의를 끈다. '무경계'라니. 게다가 저자는 겨우 이십 대 중반에 존재와 생과 삶의 근원적 의미에 대한 진지한 탐구를 행했다. 모든 궁금했던 것들이 모든 애매했던 것들이 이 얼마 안되는 책 안에 다 담겨 있었다. '내'가 '나'를 수많은 경계의 철책으로 얼마나 재단하고 속박하고 승산없는 전투를 했는 지에 대한 깨달음. 우리가 무심코 생각하고 끄달리는 모든 것들이 저도 모르게 어떤 경계와의 전투의 전장에 있었다는 것. 이것은 여든을 넘고 삶을 다 살아봐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아닌 인식과 지각의 지평이 넓어질 때 돌연 만개하는 듯한 내면의 확대와 심화의 정경이다. 도교, 불교, 기독교, 힌두교, 프로이트, 융의 이야기와 사상들은 더이상 대립하지 않고 한데 어우러져 과거와 미래라는 환상 속에 현재를 끊임없이 소모하는 인간에 대한 진지한 통찰과 따뜻한 연민으로 화해한다.

 

백 년 전에는 아마도 다른 남자가 바로 이 자리에 앉아 당신과 마찬가지로 빙하 위로 스러져 가는 빛을 경외심과 동경심을 갖고 바라보았을 것이다.-p.227

 

저자는 언어조차도 실재의 지도에 불과하다며 경계했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문학적인 문장으로 자신의 앎을 전달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전체, 합일의 개념에 대한 이상이 지나친 신비주의로 흘러가지 않도록 절제하는 그 균형감도.

 

수만번 고쳐살고 싶은 지점이 있다. 수만번 돌아가는 대목이 있다. 그렇다면 나는 '살아있음' 그 자체에 탐닉했던 댈러웨이 부인보다 훨씬 못한 것이다.

 

<무경계>의 켄 윌버가 인용한 양자역학의 창시자인 에르빈 슈뢰딩거의 말을 재인용한다.

 

" <중략>영원히 그리고 언제나, 오직 하나이며 동일한 '지금 이 순간'만이 존재한다.

현재만이 유일하게 끝없이 영원한 것이다."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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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1-27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연수 소설가가 무경계 추천했을 때... 그 시대 20대는 누구나 한번쯤 <정신세계사>의 도움을 받았겠구나 싶었던...어제도 헌책방 가서 정신세계사와 류시화 책들을 발견하며...

blanca 2015-01-27 17:50   좋아요 0 | URL
아. 시대적인 분위기가 있었군요. 저는 사실 이 책 추천이 좀 뜬금없다, 여겼는데 읽어보니 시야가 탁 트이는 느낌이 시원했어요.

AgalmA 2015-01-28 02:51   좋아요 0 | URL
김연수 작가 안목은 믿지만 기존 리뷰 반응이 좋지 않아 갸웃했는데 blanca님 리뷰가 독자들에게 도움될 듯 하네요. 워낙 이런 사유의 책은 모냐, 도냐 식으로 취향을 많이 타다보니...
 
작가란 무엇인가 3 - 소설가들의 소설가를 인터뷰하다 파리 리뷰 인터뷰 3
파리 리뷰 지음, 김율희 옮김 / 다른 / 2015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앨리스 먼로, 트루먼 커포티, 프리모 레비, 수전 손택, 프랑수아즈 사강을 좋아한다. 줄리언 반스와 가즈오 이시구로의 책은 두 권 정도 읽어보아 아직은 무어라 말하기 힘든 상태다. 커트 보네거트, 잭 케루악, 돈 드릴로, 르 귄, 존 치버는 아직 읽어보지 못했다.

 

다시 인터뷰다. 인터뷰어도 시간도 장소도 제각각이다. 작가들의 집으로 찾아간 경우가 많아 그 집, 함께 사는 사람, 채운 소품들에 대한 인상이 작가와의 만남과 더불어 출발점이 된다. 예컨대 아내를 잃고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를 쓴 줄리언 반스는 여기에서 아직 아내와 아름다운 정원이 딸린 집에서 행복하다.

 

이제는 늙음에 대하여 생각하고 글을 쓰게 만드는 설레임이 사라질까 두려워하는 나이가 된 앨리스 먼로는 기대 만큼 따뜻하고 솔직하다. 그녀의 표현을 빌리면 열여덟 살때 그녀를 홀딱 반하게 한, 하지만 그때는 응답하지 않았던 남자가 지금 그녀 곁에서 그녀와는 또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자라난 곳에 함께 돌아와 있다. 한창 아이를 키우며 때로는 아이를 재우고, 때로는 학교에 보낸 시간에 열정을 쏟았던 이야기들은 그녀가 더이상 필요하지 않은 곳에 다 커버린 아이들 만큼이나 회한을 남기기도 한다. 이야기에는 실패하는 부분이 있지만 쓰는 행위 자체가 중요하다는 믿음을 보여주는 그녀의 이야기가 그녀가 써 낸 이야기 만큼이나 가슴을 뚫고 들어온다.

 

트루먼 커포티는 이미 백만장자가 되어 패션 모델 출신의 기자를 맞는다. 앨리스 먼로가 장편을 남기지 못하는 데에 느낌 아쉬움이 트루먼 커포티 앞에서는 가장 어려우면서 절제된 형태로서의 단편의 찬양으로 변주된다. 돈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 글은 절대 쓰지 않는다는 솔직한 고백이 놀랍다. 온갖 불길한 전조에 물러서는 모습은 그의 나약한 내면을 드러내는 것 같아 안타깝다. 그는 찬란한 젊음을, 비참한 최후의 텍스트를 자신의 모습으로 표현해 낸다. 그의 몰락을 알고 듣는 그의 이야기들은 그 자체로 어떤 처연함을 내포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드레스덴의 폭격을 관통했던 커트 보네거트의 신랄한 유머는 웅변적이다. 그는 전쟁의 무용함, 아무리 선으로 포장해도 그것은 학살임을 자신이 <제5도살장>을 써서 유일하게 드레스덴 폭격으로 이익을 본 이 지구상의 한 사람이라고 자조적으로 고백하며 역설한다. 훌륭한 작가는 부족하지 않고 오직 신뢰가는 독자가 부족하다며 일을 그만두는 사람들이 복지수표를 수령하기 이전에 독서록을 제출하게 해야 한다는 이야기로 마무리하는 위트 앞에서는 이 진지하고 사려 깊은 작가가 얼마나 재미있는 사람인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책에 엄격해야 한다"면서 다시 읽고 싶어지는 책만을 읽는다는 수전 손택의 이야기는 또 어떠한가. 대부분의 작가들은 관계로부터는 거리를 두지만 세상 그 자체에 대하여서는 멀어지지 않는다. 수전 또한 그렇다. 인간의 잔혹성에 대한 그녀의 관심과 엄정한 묘사는 낭비를 싫어하는 작가들의 성향이 열정적 글쓰기로 이어지는 길목에 있음을 보여준다.

 

미국 작가로는 처음으로 예루살렘상을 수상했다는 돈 드릴로의 일과의 고백은 하나의 아름다운 단편 같아 옮겨적었다.

 

아침에 수동타자기로 일을 합니다. 네 시간쯤 일한 뒤 달리기를 하러 나가지요. 그러면 한 세계를 떨쳐내고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데 도움이 되요. 나무와 새들, 이슬비. 멋진 간주와 같죠. -p.351

 

그리고 그는 보르헤스의 사진을 본다. 낭비하지 않기 위하여. 무기력과 표류 상태에서 벗어나 마법과 예술, 예언이라는 별세계로 데려갈 안내자로 그를 삼으려고. 마치 르 귄이 베토벤이 자신이 향할 곳이 어디인지 알고 거기에 이르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은 것을 배우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무가 내다보이는 작업실 창문 앞에서 진지하고 사랑스럽고 신비한 독자들이 있는 상상을 하고 글을 쓴다는 존 치버의 고백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마지막으로 한창 젊고 예뻤던 사강이 라디오 녹음이 있다며 인터뷰를 마치고 소르본 대학으로 가는 여학생처럼 달려나간다. 여기에 그녀의 쇠락과 늙음은 없다. '삶'이 세 명의 인물이 엮어가는 일종의 리드미컬한 진행과정이라고 생각하면 삶이 제멋대로라는 느낌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지극히 사강다운 이야기가 남는다.

 

정확한 인터뷰의 일시가 누락되어 어느 순간, 어느 지점의 작가의 이야기인 지를 정확히 추정하기 힘들 게 한 것은 아쉬운 점이기도 하고 의도된 장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느 한때 어느 한곳의 그들의 찰나적인 모습과 생각, 가치관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은 마치 삶의 찰나의 거대한 은유의 집적 같기도 하다. 다만 언어를 주무르고 이야기를 퍼낼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재능을 부여받은 이들의 응축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순간이라는 것. 기억할 만한 이야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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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1-23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커트 보네거트 책보고 울었던 기억도 있네요; 그래서 전작을 다 찾아보고 싶어졌죠. 돈 드릴로는 화이트노이즈 한 권밖에 못 봤는데 그 한권만으로도 그의 전작을 다 찾아보고 싶어졌어요. 읽을 책이 많아 차일피일이긴 합니다만; 르 귄, 잭 케루악, 존 치버는 그 명성에 비해 제 취향이 아니라 읽다가 덮기를 반복하며 계속 시도 중이에요;;
blance님은 그들을 접하신 뒤 리뷰 어떠하실 지 궁금하네요.

blanca 2015-01-23 17:25   좋아요 0 | URL
아, agalma님 얘기 들으니 꼭 읽고 싶어집니다. 커트 보네거트 어떤 책 추천하세요?

AgalmA 2015-01-23 17: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초기작)제5도살장-(마지막장편)타임퀘이크 둘 중 선택하기 까다롭네요; 전 타임퀘이크가 더 감동적이긴 했어요. 보네거트 위트를 재밌어하셨으니 (에세이)나라없는 사람부터 읽으셔도 좋겠죠^^

blanca 2015-01-24 09:46   좋아요 1 | URL
<나라없는 사람> 오고 있어요. ^^ 이상하게 거의 다 절판이에요. 제5도살장도 절판이고요.

AgalmA 2015-01-24 10:31   좋아요 0 | URL
네, 작년에 제5도살장 반값할인 때 사람들이 엄청 사대면서 전반적으로 그리 된 듯; 저는 다 도서관에서 빌려봤어요.으힉; 읽고 나신 뒤의 리뷰 기대합니당^^

다크아이즈 2015-01-23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덕에 보관함에 담습니다. 고맙습니다.
앨리스 먼로 좋아하시면 엘리자베스 스타라우트도 좋아하실 듯.
그녀처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라디오 녹음이 있다고 뛰어가는 사강이라.... 영화나 그림 같은 이미지네요.
50년대말이나 60년대 초의 사강일랑가 ㅋ

blanca 2015-01-24 09:48   좋아요 0 | URL
그럼요! 저 <올리브키터리지> 완전 좋아해요, 다크아이즈님! 그런데 왜 다른 책은 전혀 번역이 안 되는 건지, 너무 아쉬워요. 소개에도 화려한 젊음, 황폐한 노년이라는 표현이 눈에 띠더라고요. 비단 사강 뿐 아니라 원래 젊음은 찬란하고 노년은 슬픈 건지...

Nussbaum 2015-01-24 00: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설과 소설가. 제가 오늘 조금 고민했던 부분의 책이라 관심이 갑니다. 그간 한참이나 소설을 멀리했는데 이제는 좀 소설을 가까이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얼마전 제 노트북에 타자기 소리가 나는 앱을 깔았습니다. 조용한 방에서 타자를 치니 뭔가 새롭기도 하고 그렇네요. 저도 타자를 치면 한 세계를 떨쳐 내고 다른 세계를 맞이하게 되면 참 좋겠습니다~

blanca 2015-01-24 09:48   좋아요 1 | URL
타자소리가 나는 앱이 있어요? 저도 한번 찾아봐야겠어요. 저도 타자기 써 보고 싶어요!

AgalmA 2015-01-24 10:24   좋아요 1 | URL
저도 써봤는데 바탕 화면, 글자도 색깔별로 쓸 수 있고 어떤 앱은 눈내리는 화면에 서걱서걱 소리까지 나죠^^
포맷하고 다 날아갔는데 가끔 생각나요 :)
 

뒤늦게 하루키한테 빠져서 인터넷으로 하루키에 관해 이것저것 검색을 시작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친정엄마 연배인 줄 알았는데 아버지보다 한 살 더 많았다. 사람이 나이가 들기 시작하면 어떤 유연성이나 청취력 같은 부분에 분명 한계가 오는 것 같은데 그의 소설을 읽어보면 당최 이것은 아주 많이 깨달아 버린 똑똑한 젊은이의 분위기니 참.

 

그래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드디어 그의 부인 사진을 찾아 떠나기 시작했다. 아, 안 나온다, 더 궁금하다. 그러다 찾았다......

음..... 놀랐다. 하루키가 더 괜찮아 보였다.

 

그러다 뜬금없이 김영하의 인터뷰를 읽고 그가 전업 작가로 생활하기 힘들다,는 고백을 듣고 놀란다. 하루키와는 또다른 세상이다. 책이 안 팔리는 시대, 소설은 더더욱 안 팔리는 시대, 김영하 정도의 인지도와 해외 유수의 신문에 고정 칼럼을 싣고 수 권의 책이 외국어로 번역되어 있고 한때 대학에 적도 두었던 사람마저 전업 작가로 생계유지가 안 된단다. 그렇다면 나머지 작가들의 생활이 얼마나 어려울 지는 상상하기도 힘들다. 그들의 이야기에 기대어 살아가는 나로서는 덩달아 우울해진다. '이야기' 없이 살 수 있을까?

 

다시 하루키로 돌아오면 하루키는 경제적 문제에서는 적어도 완전히 해방된(물론 그의 내밀한 경제 사정을 알 길은 없다) 작가다. 물론 거기에는 또다른 비판의 시각들이 있다.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들에 우리는 좀 더 엄격한 기준을 들이대는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들의 삶도 그들의 소비도 그들의 발언도 좀 더 책임감 있고 좀 더 대의에 헌신하기를 바라는 기대감이 분명 있다. 왜냐하면 '이야기'는 그 '이야기'를 만들어 낸 사람의 생각, 판단, 삶에 대한 태도에서 결코 독립되어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가난한 작가도 지나친 부자 작가도 그래서 독자 입장에서는 안타까운 부분이 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마치 바닥에 떨어진 불꽃들처럼 어딘가로 가는 차들의 행렬을 보다 갑자기 나의 기억들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살고 또 살아도 결국은 그것은 쌓인다기 보다 단편적인 기억들의 흩뿌림 정도로 느껴지면 너무나 허무하다. 어떤 전후맥락을 가지고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작가들은 그래서 혜택받은 존재인 것 같기도 하다. 이야기를 만들 수 없으니 작가들이 만든 이야기를 소비하며 살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러한 작가들이 살 수 없다면 너무 가혹한 세상일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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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5-01-19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요. 중국처럼 소설가한테 월급주는 그런 게 있어야 하는데 말이어요.
작가들마다 말하는 것도 달라요.
어떤 작가는 기본적인 경제력이 뒷받침이 되야 글을 쓸 수 있다고 말하고,
또 한쪽에선 가난해야 글을 쓸 수 있다고도 하고.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후자는 설득력이 없다고 봐요.
무엇보다 소설가는 상위 1%를 제외하곤 명예직인 거죠.
통반장처럼...ㅋㅋ

blanca 2015-01-19 20:50   좋아요 0 | URL
참, 이게 딜레마일 것 같아요. 작가가 돈을 많이 벌어도 너무 적게 벌어도 쓰는 일과의 균형 유지가 쉽지는 않을 것 같아요. 예전에 김연수가 다른 나라 작가들이랑 이것에 관련된 이야기를 나눈 글에서 읽었는데 외국에서도 전업 작가로 사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가 봐요.

cyrus 2015-01-19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아는 분 중에 문학잡지에 작품이 실린 적이 있는 젊은 시인이 있어요. 아직 시집 한 권을 출간하지 못했는데 시를 틈틈이 쓰면서도 기자직을 꿈꾸고 있더라고요. 현재 모 일간지 인턴으로 일하고 있어요. 기형도 시인처럼 ‘시인+언론인’ 조합을 괜찮다고 보는 편인데 글쓰기를 업으로 삼는 사람들은 경제적 여건을 위해서 제2의 직업도 가져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blanca 2015-01-19 20:54   좋아요 0 | URL
저도 비슷한 경우를 봤는데 이게 참 전력을 쏟아야 하는 일이 창작이니 투잡 하면서 최선의 결과물을 내놓는 것은 쉽지 않은 것 같아요. 특히 소설 같은 경우는 더더욱 그렇고요. 소설 쓰기를 위해 직장을 내려놓았는데 매너리즘에 빠져 더 이상 성과가 나오지 않을 때에도 참 괴로울 것 같고. 작가란 정말 대단한 결심, 결단, 주변 정리가 필요한 일인 것 같아요.

[그장소] 2015-01-19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키를 오늘 두번째..!
저도 오늘 그의 연혁을 보곤 아버지보다 한살 연하. 돌아가신분과 나이세기를 하면 곤란할테지만..암튼..그랬다는..

blanca 2015-01-20 18:02   좋아요 0 | URL
아, 그렇네요. 그장소님 아버님, 그리우실 것 같아요.....

[그장소] 2015-01-20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또 두번째..이젠 답글하기 무서움..ㅎㅎ
blanca 님 글 아니면 애쓰지 않을거예요..
아마도..ㅎㅎ 뭐가 문제지..
벌써 22 년 넘은 일..입니다.겨우 십년지난듯한데..시간이 쏜 살 같다..는 말 알겠어요!...활 시위를 떠난 쏘아진 화살..쏜..살,,같다.

blanca 2015-01-23 10:41   좋아요 0 | URL
아,꽤 오랜 시간이 지났군요. 그장소님 말씀 들으니 시간이 쏜살 같다, 는 직유가 정말 대단한 예리함을 갖춘 비유로 보여요.

세실 2015-01-22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영하작가 랜드로버 타고 댕기던데요.....
작가 강연회만 다녀도 살만한거 같던데 힘들다고 함.....ㅎㅎㅎ
하루키는 소설 한편 쓰고 나서 쉬는 타임에 에세이 낸다고 하더라구요. 그저 감탄했어요^^

blanca 2015-01-23 10:40   좋아요 0 | URL
아.... 그런 거였어요?

[그장소] 2015-01-23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향수라는 노래 들으며 생각했어요.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하는 대목이요..
그 건 아마 그냥 화살이 아닌 시간.
철없던 시절..아닐까.고
그냥...말하자면...요.
 

 

때는 1995년 3월 20일, 월요일. 활짝 갠 초봄의 아침. 아직 바람이 차가워 오가는 행인들은 모두 코트를 입고 있다. 어제는 일요일, 내일은 춘분 휴일, 즉 연휴 한가운데다. 어떤 사람은 '오늘은 그냥 쉬고 싶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여러 사정상 당신은 쉴 수 없었다.

그래서 당신은 여느 때처럼 아침에 눈을 뜨고 세수를 한 다음, 아침을 먹고 옷을 입고 역으로 간다. 그리고 늘 그렇듯 붐비는 전차를 타고 회사로 향한다. 여느 때와 조금도 다름없는 아침이었다. 딱히 다른 날과 구분할 필요도 없는 당신의 인생 속 하루에 지나지 않았다.

- 무라카미 하루키 <언더그라운드> 머리말 중

 

 

 

 

 

 

일상이 그리 견고하지 않다는 것을 배워가는 것이 나이듦일 수도 있다. 살다 보면 도저히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들이 '남의 일', 때로는 '나의 일'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직전까지도 영원히 살 것처럼 일하고 미워하고 욕망한다.

 

이윽고 회사 출근을 위해 지하철에 올라탄 사람들은 거의 압사당할 것 같은 지옥철의 사람의 밀도에 헉헉대며 전날의 휴식의 아쉬움을, 지금 당장의 불쾌함을, 그리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일들을 생각하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목격하고 어떤 사람은 미처 자신의 시야를 어둡게 하고 욕지기를 치밀어 오르게 하는 것의 실체도 모르는 체 무방비로 당한다. 그럼에도 그 날 그 지하철을 탔던 시민들 대다수는 자신들의 몸이 무언가 알 수 없는 물질에 의해 교란당하고 있음을 자각하기도 하고 자각하지 못하기도 하면서 기어서라도 회사로 출근하려고 했다고 한다. 하루키의 이야기다. 몸이 괴롭고 도저히 컨디션이 살아나지 않는데도 관성처럼 다들 비틀거리며 회사로 향했다. 자신이 무엇에 의해 왜 이렇게 되었는 지에 대한 자각과 고민은 대부분 없었다.

 

1995년은 우리나라에도 대형 참사가 일어났던 해이다. 강남 한복판 견고하게 서 있던 백화점은 허술하고 빈약한 껍질처럼 와르르 무너지고 그 속에 품었던 사람들은 영문도 모르는 채 죽고 다쳤다. 결코 움직여서도 움직일 것 같지도 않았던 건물이 노쇠한 노인처럼 예고도 없이 자멸하는 모습은 그것을 만들고 그 속에서 소비하고 살았던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근처 일본에서는 고베 대지진과 지하철 사린 가스 살포 사건이 일어났다. 옴진리교라는 컬트적 색채를 띠는 종교의 교주의 지령 아래 붐비는 통근 시간 지하철 안에 치명적인 독가스가 살포되어 무고한 시민들이 다치고 피해를 입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외국에 있다 귀국해 있던 시점이었다. 그는 이 날 지하철에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익명화 속에 침몰되어 매스컴에서 무람없이 살포되는 것에 거부감을 느꼈다. 그는 피해자들의 이야기들을 듣고 그들의 이름을 그들의 개별적인 삶들을 건져내고 싶었다. 다만 그것은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것이어야지, 그 어떤 부담감이나 타의에 의한 것이어서는 안 되었다. 하루키는 소설을 쓰는 대신 그들의 삶 속으로 1년 남짓 걸어들어갔고 그것의 집적물을 가지고 걸어 나왔다.

 

어디에서 태어나고 어떤 첫인상을 가지고 있고 어떤 삶의 여정을 걸어왔는 지가 이야기되고 나면 그들은 어김없이 3월 20일 사린 가스가 살포된 그 지하철에 올라탄다. 때로는 3분 먼저 집앞에 온 버스 덕택에 타지 않아도 됐을 그 지하철에 타는 불운에 처하기도 했다. 근무교대가 끝나고 지원을 나온 덕에 사린 가스를 마신 역무원도 있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가스를 들이마시고 비틀거리면서도 그들은 그게 어떤 고의적인 악의에서 나온 독가스이고 빨리 병원으로 가서 해독제를 맞아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쓰러져 바라보는 '저쪽 길'의 사람들은 여느 때처럼 바쁘게 출근길을 가고 있었다. 회사에 가서야 비로소 뉴스를 보고 자신이 사린 가스를 마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처치에 들어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아내가 출산을 앞둔 에이지라는 사람은 아내와 딸, 늙은 어머니와 아버지를 두고 작별인사도 제대로 못한 채 출근길에 짧은 생을 마감하기도 했다. 하루키 앞에서 아내는 그를 처음 만나던 날, 사랑에 빠졌던 시간들을 이야기한다. 다시 돌아와 그의 허망한 죽음 앞에서 모든 참사와 비극이 타자와 되는 것에 대하여 그녀는 한탄한다. 부지런하고 효녀였던 여동생이 식물인간이 되었다 힘겨운 자활을 하는 여정에 동참한 오빠는 여동생 대신 여동생이 항상 써왔던 일기를 대신 쓴다. 하루키는 아직 회복되지 않아 자신의 의사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그녀를 만나 그녀의 손을 잡는다.

 

이들의 이야기는 서로의 기억들의 교차로 부정합이다. 기억은 완벽한 사실들의 집적이 아니다. 하지만 하루키는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이러한 집합적 이야기 속에 내재된 팩트를 뛰어넘는 진실에 주목한다. 지하철 사린 사건의 피해자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그는 사린 사건의 피해도 개개인이 살아온 내력과 상처를 처리하는 패턴에 무관하지 않음을 깨닫는다. 개별의 이야기들을 취합하는 과정에서 역시 하루키는 이러한 예고되지 않은 대형 재난에 대처하는 구조 시스템이 얼마나 허술한 지 그리고 거기에서 일어나는 기적들이 얼마나 개개인의 개별적인 선의와 구조 의지에 기대는 지를 발견한다. 이것은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하루키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이러한 것에 멈추지 않는다. 이 대목을 읽는 순간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우리는 어떤 제도=시스템에 인격의 일부를 맡기고 있지는 않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 제도는 언젠가 당신을 향해 어떤 '광기'를 요구하지 않을까? 당신의 '자율적 파워 프로세스'는 올바른 내적 합의점에 도달해 있는가? 당신이 지금 갖고 있는 이야기는 정말로 당신의 이야기일까? 당신이 꾸고 있는 꿈은 정말로 당신 자신의 꿈일까? 그것은 언제 어떤 악몽으로 변해버릴지 모르는 누군가의 꿈이 아닐까?

-p.712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어떤 선의와 대의를 위해 헌신해야 할 것 같은 종교 집단이 비록 그것이 약간의 컬트적인 요소가 있는 신흥종교일지라도 대다수의 무고한 시민들을 살상하기 위해 무차별적으로 독가스를 살포하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는 일일 것이다. 하루키의 시선은 이제 '저쪽'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지대를 더듬는 것으로 나아가려 한다. 혐오스럽고 괴이한 '저쪽'을 균질하고 단일하게 파악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자발적으로 '저쪽'으로 걸어들어간 사람들도 익명성에서 구출해내어 '이쪽'을 비추는 거울상으로 면밀히 들여다보려 했다. '저쪽' 사람들도 한때 분명 '이쪽'에서 '우리들'과 함께 있었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하루키는 옴진리교 신도이거나 한때 그 종교에 귀의했던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들었던 성실하고 진지한 청취자의 자세를 견지하기는 하지만 여기에서는 조금 더 적극적이고 비판적인 그를 만날 수 있다. 그저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 지나치게 왜곡되거나 편중된 지점으로 가려는 그들의 이야기를 적절한 균형추로 바로잡으려는 시도가 보인다. 평범하고 여느 사람들보다 조금 더 진지하거나 더 외로움을 느끼거나 했던 이들은 저마다의 개인적인 고민, 건강 상의 고민들로 우연히 옴진리교와 만나게 된다. 그러나 교주 아사하라가 제시한 그 평면적이고 단순한 세계관은 너무나 허술하고 빈약한 실체로 인해 곧 한계를 드러내게 되고 사람들도 그에 대한 실망감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옴진리교에 귀의하여 부정합과 모순이 난무한 세계를 등지고 단순하고 평면적이고 명쾌한 지향을 향해 몸과 마음을 맡길 수 있었던 지난 시간을 그들은 후회하지 않는다. 사람을 죽이고 사회를 교란시키려 했던 폭력을 걷어내고 남은 정경은 또다른 우리의 못나고 아픈 구석이다. 첨언처럼 덧붙인 하루키와 심리학자 가와이 하야오와의 대담 내용은 우리 인간 내부의 악하고 약하고 못난 구석을 부정하지 않고 직시한다. 그것을 무조건 거부하고 부인할 때 그리고 우리의 모습을 순수와 선으로 포장할 때 악은 기어나와 스스로를 형상화한다. 하루키가 왜 이토록 꾸준히 지하와 그리고 인간 내부의 부정적인 괴물 같은 면에 천착했는 지에 대한 단서가 나오는 대목이다.

 

나는 '나'를 온전히 신뢰하거나 단정짓지 않게 되었다. 물론 상식과 선과 타인에 대한 선의를 기반으로 하루 하루를 살려고 노력은 한다. 하지만 내 자신을 어떤 사건이나 어떤 상황에서 면밀히 들여다 보면 분명 거기에는 부정하고 싶은 내부의 정경이 있다. 그것을 뿌리째 소거해 버릴 수만 있다면 사는 게 얼마나 편하고 단순하겠는가. 그러나 그러한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지점에서부터 어떤 비극은 시작될 지 모른다. 타인의 그것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복합적이고 유동적이다. 애거서 크리스티가 소설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오늘은 자선을 행한 사람이 내일은 극도의 추하고 이기적인 행동에 전전긍긍할 수도 있다. 어느 한 면으로 그 인간을 다 설명, 판단할 수는 없다. 절대적으로 선하고 절대적으로 악하다는 심판을 내리는 지점에 분명 폭력의 맹아가 있다. 하루키는 어떤 판단을 정지하고 명확한 다수의 시점을 만들어내는 데 필요한 '재료'를 제공하는 데에 집필의 목적을 두었다 한다. 하지만 분명 이 지점은 대단히 웅변적이지만 더 나아가려다 머뭇거리고 만 것만 같아 아쉽기도 하다. 아니, 어쩌면 이 지점에서 어떤 대안을 제시하고 어떤 판단을 시작하는 것부터가 또다른 폭력과 오만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인식과 지각, 판단의 외연은 분명 또다른 어떤 한계 안에 봉착할 것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갈 수 있는지 끊임없이 궁금해 하며 가능성을 시험해 보는 게 삶의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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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1-20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 세월호 참사에 대한 <금요일날 돌아와줘> 책이 나온 걸 보고 하루키 <언더 그라운드> 생각을 했거든요. 하루키 책 중에 가장 하루키답지 않은 책이기도 한데, 이 책처럼 그 책도 객관적으로 뭔가를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그 생각을 했어요. 눈물 속에 오기와 미움만으로 맴돌지 않게 말이죠. <약속된 장소에서>는 읽지 않았는데 출판사 의도이든 아니든 하루키는 책임감있게 두 세계의 무너짐들을 대비하여 보여주는 마무리를 하려 했구나 싶군요.
오래전 누군가 대구 지하철 참사에 대한 소설을 쓰려고 했는데 지인들이 그건 아픔을 섣불리 건드리는 것 같다, 유족에게 더 아픔을 주는 일이다 비난조여서... 우리나라는 얼른 덮고 지나가려거나 회피하는 정서가 너무 많은 게 아닌가 절망스러웠던 순간이 생각납니다...
우리가 마무리하지 못했던 과거는 되풀이되었고, 세월호 사건을 다시 겪으며 <삼풍>웹툰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통곡의 댓글을 올렸던가 다시 뼈아픈...
한강 작가 <소년이 온다>도 귀감이 되는 사례겠죠.

blanca 2015-01-20 18:01   좋아요 0 | URL
저도 대구지하철참사가 떠올랐어요. 어쩌면 더 많은 피해와 참혹한 슬픔을 안겨준 사건인데... 아픔을 말하는 순간부터 치유가 시작된다고 한다면 더 안타까운 부분이 있어요. 우리나라 정서로 소설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있다면 하루키 식의 르포는 더욱 힘들것 같아요. 한강 작가 책은 아직 읽어보지 못했는데, 기회가 되면 읽어보고 싶어요..
 

누군가의 삶을 편견 없이 또 어떤 선입견에 기초한 재단 없이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기란 어쩌면 하나의 헛된 기대이자 망상, 무모한 시도로 결론나고 말지도 모른다. 시간의 풍화 속에 바랜 사실 들은 그 자체로 마멸, 퇴색되어 남을 것이고 또 어떤 선후 관계나 전후 상황이 소거되고 남은 것은 중립적이고 객관된 진실이 아니라 얼개가 무너진 쇠락한 잔해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게다가 하필 그 누군가가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누구라면, 내가 증오하고 반면교사로 삼고 싶은 이라면, 그의 일생을 내가 복기하는 자체가 그저 그 '누군가'를 빗대어 나의 이야기를 하고자 했던 몸짓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한계를 어떻게든 뚫고 나가려고 하는 그 처절한 노력이 비어져 나올 때 우리는 비로소 수긍할 수 있다. 아니 수긍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시인 안도현이 쓴 백석의 평전이 그러한 한 가지 예가 될 수 있을 것같다. 솔직히 유명한 시인이 줄곧 존경하고 사랑해 왔던 게다가 북한에서 중년과 말년을 보내고 사망한 시인의 삶을 복원하였다 했을 때 어떤 가정,느낌, 감상이 많은 부분을 차지할 것이라고 오해했다. 하지만 막상 안도현 시인이 백석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하여 백석을 다시 읽는 일환으로 복원해 낸 그의 평생은 최대한 드러난 진실, 그것을 단초로 추측할 수 있는 것들의 망을 벗어나지 않기 위한 노력들이 두드러졌다. 그 틈새에서 빠진 것들에 대한 상상의 몫은 오롯이 우리들에게 돌아온다. 그리고 그 과정 자체가 하나의 읽기이자, 백석과의 만남의 일환이 될 것같다.

 

 

 

 

 

 

 

 

 

 

 

 

 

 

 

 

 

 

해방 이후 만주에서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로 귀향하는 백석의 행로에서 출발하는 이야기는 이윽고 오산학교 앞에서 하숙을 치며 생활한 부모 밑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는 그의 유년기와 오산학교 시절로 회귀한다. 일본 유학을 거쳐 조선일보 기자로 재직하며 평생의 지기들과 실패하는 첫사랑으로 남게 되는 여인과의 만남 들이 생생하게 시인의 필체로 떠오른다. 군데 군데 삽입되는 그의 시들은 평북 방언들로 처음 대할 때는 어렵게 들리지만 몇 번 되뇌이면 무어라고 언어화하기 힘든 친밀감과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눈과 귀와 마음의 비늘을 벗겨낸다.

 

그러나 무엇보다 백석의 전성기는 함흥의 영생고보 영어 교사 시절인 듯하다. 그때의 모습은 제자들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각인되고 추억된다. 올백 머리, 최신식 양복, 50 명의 학생들의 이름과 얼굴을 단번에 매치하고 출석을 부르는 놀라운 기억력, 출퇴근을 나귀로 하고 싶어하는 엉뚱하고 낭만적인 모습. 그리고 평생을 그를 그리워하며 여든이 가까운 노구를 이끌고 그에 대한 추억, 사랑, 아쉬움을 술회했던 함흥권번 소속의 기생이었던 자야와의 만남. 그녀의 백석과의 로맨스는 그녀와 원고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함께 집필하다시피 한 시인 이동순 교수의 책으로 만날 수 있다.

 

 

 

 

 

 

 

 

 

 

 

 

 

 

시인으로서의 백석의 쇠락은 해방 이후 그가 고향인 북한에 남음으로써 시작되는 듯하다.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그는 예전 같은 아름다운 토속의 방언으로 된 감각적이고 전아한 시들을 더 이상 발표하지 못한다. 대신 아동을 대상으로 한 동시들, 러시아어 문학 작품 등의 번역 등에 매진하다 북한에서 가장 추운 지방의 하나인  삼수의 협동농장에 현지파견을 나가게 된 백석은 몸에 익지 않은 육체 노동을 하며 젊은 시절 영롱한 문학혼이 응축되어 있던 그만의 시어 대신 사회주의 체제에 어느 정도 복무하는 교조적이고 선동적인 시 몇 편을 남긴다. 북에서의 그의 문학은 사실 문학이라기보다는 어떤 생존을 향한 몸짓 같아 안쓰럽다. 죽는 그 날까지 시인의 이름을 잃어버린 그의 생애를 한정된 자료로 추적하며 안도현 시인은 그러나 섣불리 그의 삶이나 문학적 성과를 단정짓지 않는다. 시인의 이름을 잃어버린 자연인으로서의 그의 삶의 의미나 무게에 대하여 말을 아끼는 안도현 시인의 모습은 단정한 말줄임표 같아 와닿는다.

 

백석이 태어나 자라 늙고 죽은 시대는 유달리 개인의 삶을 질곡으로 치닫게 할 우여곡절이 많은 시공간이었다. 많은 작가들이 일본에 협력하거나 이념에 복무하기를 강요받았다. 그가 적극적으로 시대의 격류에 저항하거나 야합한 흔적은 없지만  그 누구보다도 시인의 표현처럼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려 했다. 그를 내리 눌렀던 질곡의 삶도 그 자체도 가고 난 지금, 안도현 시인의 말처럼 "첫눈이 내리는 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말은 백석 이후에 이미 죽은 문장이 되고 말았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오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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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창고 2015-01-13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빨간책방 듣고 장바구니에 담아놓고 아직 주문못한책이예요
어제 재방으로 듣고 박씨봉방은 검색해서 베껴쓰고 혼자읽어보고 했는데
넘 좋고 쓸쓸하고 슬픈것이 머랄까 이런느낌이 행복한거라고 하려고요

blanca 2015-01-14 15:53   좋아요 0 | URL
아, 이 책이 빨책방에 나왔었군요! 맞아요, 저도 시는 문외한인데 백석시는 방언 때문에 정확하게 의미를 못 알아차려도 그냥 읽는 것만으로도 시란 이런 것이구나, 싶어요.

Nussbaum 2015-01-14 0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도 그는 단호하다기 보다는 때론 엉뚱한 구석이 있는 선생님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치만 눈빛은 꽤나 날카롭고 말하는 문장 사이에 나오는 다양한 생각들은 매우 지적인 것이어서 학생들이 그에 대해 받은 인상은 꽤나 강렬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마침 책장 뒤에 백석 시집이 있길래 펼쳐보았더니 2010년 어느 커피숍에서 읽었는지 커피 영수증이 있네요. 살짝 바랜 종이가 지난 날을 거스릅니다.

이 밤에 통영, 흰 바람벽이 있어, 여우난골족 같은 시를 뒤적이네요.

blanca 2015-01-14 15:55   좋아요 0 | URL
엉뚱하기도 하고 좀 결벽성도 있고 학생들이 꽤나 고생 좀 하게 한 영어 선생님이었다고 하네요.^^ 맞아요, 두고 두고 백석의 수업 시간을 추억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더라고요. 아! 저는 백석 시집에서 엉뚱한 채소 이름(장볼 것) 잔뜩 적은 메모 발견했어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