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하루키한테 빠져서 인터넷으로 하루키에 관해 이것저것 검색을 시작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친정엄마 연배인 줄 알았는데 아버지보다 한 살 더 많았다. 사람이 나이가 들기 시작하면 어떤 유연성이나 청취력 같은 부분에 분명 한계가 오는 것 같은데 그의 소설을 읽어보면 당최 이것은 아주 많이 깨달아 버린 똑똑한 젊은이의 분위기니 참.
그래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드디어 그의 부인 사진을 찾아 떠나기 시작했다. 아, 안 나온다, 더 궁금하다. 그러다 찾았다......
음..... 놀랐다. 하루키가 더 괜찮아 보였다.
그러다 뜬금없이 김영하의 인터뷰를 읽고 그가 전업 작가로 생활하기 힘들다,는 고백을 듣고 놀란다. 하루키와는 또다른 세상이다. 책이 안 팔리는 시대, 소설은 더더욱 안 팔리는 시대, 김영하 정도의 인지도와 해외 유수의 신문에 고정 칼럼을 싣고 수 권의 책이 외국어로 번역되어 있고 한때 대학에 적도 두었던 사람마저 전업 작가로 생계유지가 안 된단다. 그렇다면 나머지 작가들의 생활이 얼마나 어려울 지는 상상하기도 힘들다. 그들의 이야기에 기대어 살아가는 나로서는 덩달아 우울해진다. '이야기' 없이 살 수 있을까?
다시 하루키로 돌아오면 하루키는 경제적 문제에서는 적어도 완전히 해방된(물론 그의 내밀한 경제 사정을 알 길은 없다) 작가다. 물론 거기에는 또다른 비판의 시각들이 있다.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들에 우리는 좀 더 엄격한 기준을 들이대는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들의 삶도 그들의 소비도 그들의 발언도 좀 더 책임감 있고 좀 더 대의에 헌신하기를 바라는 기대감이 분명 있다. 왜냐하면 '이야기'는 그 '이야기'를 만들어 낸 사람의 생각, 판단, 삶에 대한 태도에서 결코 독립되어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가난한 작가도 지나친 부자 작가도 그래서 독자 입장에서는 안타까운 부분이 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마치 바닥에 떨어진 불꽃들처럼 어딘가로 가는 차들의 행렬을 보다 갑자기 나의 기억들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살고 또 살아도 결국은 그것은 쌓인다기 보다 단편적인 기억들의 흩뿌림 정도로 느껴지면 너무나 허무하다. 어떤 전후맥락을 가지고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작가들은 그래서 혜택받은 존재인 것 같기도 하다. 이야기를 만들 수 없으니 작가들이 만든 이야기를 소비하며 살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러한 작가들이 살 수 없다면 너무 가혹한 세상일 것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