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무더운 여름이 가고 새로운 학년이나 일을 시작했다면 비교적 익숙해지고 친밀감을 나눌 사람들도 생기는 가을이 좋았는데 이제는 말 그대로 공활한 가을 하늘을 보면 이제 또 한 살 먹겠구나, 싶고 모든 번성하던 것들이 오그라들고 소멸하는 겨울이 마치 삶처럼 연상되어 좀 쓸쓸해진다. 그래서 그렇게 많은 작가들이 어떤 이야기를 그릴 때 특히 사랑이 시작되거나 청춘을 거론할 때 봄이나 초여름을 배경으로 했구나, 싶다.

 

 

 

 

 

 

 

 

 

 

 

 

 

 

 

 

 

 

유명인들의 마지막을 그린 작품은 좀 진부해지기 쉽다,는 선입견을 깨어 준 이야기다. '바이올렛 아워'는 마치 퍼플 레인처럼 그냥 소리내어 말해보는 것만으로 무언가 좀 몽환적이고 아련해진다.  저자가 T.S. 엘리엇의 <황무지>에서 따온 것으로 "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하고, 바다로부터 어부를 집으로 돌아오게 하는 저녁 시간"을 뜻하는 말로 일종의 삶에서 죽음으로 넘어가는 그 해거름의 언어로 차마 다 담아낼 수 없는 미묘한 색깔의 은유다.

 

인간의 정신, 정서를 이야기할 때 프로이트를 배척하고 가능할까? 그의 이론을 지지하든 반대하든 그는 그 모든 이야기들을 가로지르는 빛의 명암이다. 그런 그도 구강암으로 투병하던 말년 죽음 앞에 비교적 씩씩한 듯 보였지만 종종 무너졌다.

 

 

"사랑하는 H.D. 당신이 보내 준 선물 잘 받았습니다. 내가 이미 칭찬과 질책에 둔감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나만의 착각이었더군요. 당신의 친절한 생일 축하 편지를 읽고 감동해서 가슴이 울컥했습니다. 내가 이미 마음이 굳어 버린 걍팍한 노인으로 전락했다고 생각했거든요...... 내 나이가 되면 사는 게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봄은 여전히 아름답고 사랑도 아름답기 그지없습니다. 고맙습니다."

-P.55

 

"내 나이가 되면 사는 게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봄은 여전히 아름답고 사랑도 아름답기 그지없다."는 프로이트의 고백이 절절하게 들린다. 죽음을 앞두고 삶에의 애착이 줄어드는 것은 아닐 것이다. 여전히 아름다운 것들을 아름답게 느끼는 자신의 여린 부분들 응시하는 게 천하의 프로이트로서도 쉽지 않았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 되레 그를 더 인간적으로 느끼게 해준다.

 

김중혁 작가의 소설은 읽어보지 못했다. 그가 <빨간책방>에서 이동진과 솔직담백하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사투리 섞인 어떻게 보면 촌스러운 어투로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면 이상스럽게 마음이 편해진다. 싫거나 재미없으면 솔직하게 표현하는 그 가식 없는 담담한 모습도 좋다. 그런데 아아, 이 책을 읽고는 더더욱 좋아졌다. 김연수의 친구답게 그도 음악을 참 좋아하는 작가였다. 팝도 그렇지만 페퍼톤스, 이아립, 스웨터, 가을방학 같은 언제나 청춘이어도 언제나 조금 설레어도 괜찮을 것 같은 가수들의 음악들을 내가 찾아들으며 막 뛰는 가슴을 진정시켜야 하게 만들다니... 마흔의 아줌마가 이렇게 좀 설레어도 되는가 싶은 불안감이 들 정도로 좋은 노래들을 그 덕분에 듣게 되어 더욱 이 더위 끝에 기습하듯 쳐들어온 가을을 물씬 즐기게 만들었다.  

 

 

 

 

 

 

 

 

 

 

 

 

 

 

 

 

 

 

그래, 분명 조금 설레어도 괜찮을 거야. 프로이트가 노년에 접어들어도 하지 못한 일을 감히 어떻게 내가 그의 반 정도 나이에 할 수 있게냐고 정당화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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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6-09-01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지 않아도 바이올렛 아워 저도 눈독들이게 되더군요.
근데 브랑카님 요즘 이쪽에 부쩍 관심이 많아지셨나 봅니다.ㅎ

blanca 2016-09-01 15:36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오늘도 또 죽음에 관한 책을. 이런 제가 저도 지겨워요--;;;;

stella.K 2016-09-01 18:08   좋아요 0 | URL
아유, 왜 그러십니까? 이 분야도 알아야합니다.
이렇게 흥미롭게 나와주니 고마운 거죠.^^

희선 2016-09-03 0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음을 이야기한다 해도 거기에서 말하는 건 삶이 아닌가 싶어요 blanca 님은 살아가는 일을 많이 생각해서겠지요 평소에는 잊고 지내다 이런 책을 보면 삶이 아름답다고 깨달을 것 같습니다 어떤 이야기가 담겨있는지 잘 모르는데 아는 척을... 언제나 설레도 괜찮지 않을까요


희선

blanca 2016-09-03 15:48   좋아요 0 | URL
언제나 설레어도 괜찮을 거라는 희선님의 얘기가 참 좋네요.^^
 
숨결이 바람 될 때 - 서른여섯 젊은 의사의 마지막 순간
폴 칼라니티 지음, 이종인 옮김 / 흐름출판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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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하여 죽을 때까지 과연 공부를 다 마칠 수 있을까? 아니 과연 죽음을 더 안다고 해서 죽음이 덜 두려워지거나 삶이 더 의미 있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와 동갑인 이 사람이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죽음도 결국 삶의 일부이고 내 안에 쌓여 가고 있고 삶의 의미를 결정짓는 건 그 종결의 무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한다. 너무나 아름다운 문장들, 담대하고 따뜻하고 고귀한 삶과 죽음에 대한 그의 태도, 그 만큼이나 성숙하고 진중한 아내의 후기까지 아련한 여운이 오래 사라지지 않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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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vis 2016-08-28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분과 동갑이라 더 읽고싶었는데 blanca님도 닭띠?^^리뷰 감사합니다

blanca 2016-08-29 10:32   좋아요 0 | URL
아...clavis님 제가 지금 서른여섯이라면 흠, 너무 좋겠지만 이 책 출간 당시의 나이인 듯해요. --;; 과거형이랍니다. 나이가 들통나네요. ㅋ

cyrus 2016-08-29 13:46   좋아요 0 | URL
글을 쓸 때 나이와 관련된 간접적인 언급을 해도 쉽게 들통나는군요.. ^^;;

수이 2016-08-28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제 막 펼쳐요_

blanca 2016-08-29 10:34   좋아요 0 | URL
아, 야나님도 이 책 보고 계세요? 솔직히 너무 다운되는 책은 읽지 않으려 하는데 결국 이 책 읽고 어젯밤에 눈물을 줄줄...요새는 생로병사를 생각하면 가슴이 너무 막막해져요. 어른들이 죽고 나면 다시는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는 게 좋은 거라는 불교적 윤회관도 이제는 수긍이 갑니다. 삶에는 반드시 소멸과 종결이 있으니까요. 하늘이 너무 아름다워서 야나문에 가보고 싶게 만드네요...언젠가 용기내어 꼭 가보고 싶어요.

자목련 2016-08-29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오늘쯤 도착할 것 같아요. 펼치기가 두렵기도 하고, 그 아름다운 문장에 궁금하기고 하고...

blanca 2016-08-29 10:59   좋아요 0 | URL
저자가 학부에서는 문학을 전공했어요. 문학적 소양이나 삶에 대한 통찰이 정말 놀라워요. 너무 아까운 사람이지만 또 어쩌면 그렇게 불꽃처럼 자신의 재능을 순간에 발산하고 간 것 같기도 해요. `죽음`에 대해 자신이 주체가 되어 이렇게 사려 깊고 예리하게 응시하며 표현한 책이 또 있을까 싶어요. 자목련님의 리뷰 기다릴게요...

stella.K 2016-08-29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저도 읽고 싶어지네요. 아름다운 문장이라니...!
읽고 싶은 책은 쌓여만가고 읽는 속도는 점점 느려지고....ㅠ

blanca 2016-08-30 12:42   좋아요 0 | URL
이 책 정말 좋아요. 스텔라님도 좋아하실 듯해요. 이 세상에서 제일 힘든 힘든 일 중 하나가 `책참기` 아닐까요?^^;;

Jeanne_Hebuterne 2016-09-04 0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어느 정신분석의와 이야기를 하다가 그가 묻더라고요. 죽는 게 두렵냐고.
전 단박에 아니요, 전 지금 죽어도 좋아요. 했더니 그가 다시 묻지 뭡니까.
그럼, 오랫동안 안죽고 많이 아픈건요? 가령 치매, 반신불수, 그런 걸로 늙어서 십 년이고 이십 년이고 침대에 누워있다가 죽는 건요?
말문이 막히고 숨이 막히고 기가 막히더라구요.
그의 핵심이 너무나도 단호하고 간결해서요.

blanca 2016-09-05 11:10   좋아요 0 | URL
사실 최근에 이르기까지 저는 죽음의 주체로 저를 상상해 본 적은 없는 것 같아요. 그랬더라도 그건 지극히 추상적이었죠. 그런데 주변에서 아프고 죽기도 하고 이런 구체적인 죽음을 목도하게 되니까 이제 자꾸 나를 대입해서 생각해 보게 되고 또 `죽음`은 결국 `죽기까지의 그 지난하고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과해야 나오는 결론이라는 것에 이르니 너무 두렵고 이 생의 모든 일들이 좀 사기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굉장히 혼란스러워요. 그래서 쟌느님이 얘기하신 그 의사의 핵심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해 봅니다.
 

존 윌리엄스는 운명의 불가항력, 상황이 존재에 가하는 압력에 자신의 주인공들을 겸허히 승복시킨다. '스토너'도 그랬고 심지어 로마 제국의 황제 아우구스투스조차도 그 앞에서는 영웅으로 보이지 않는다. 개개인이 특별하고 존엄하다는 생각과 대척점에 있는 것은 아니다. 존 윌리엄스는 개개인을 존중한다기보다는 '삶' 그 자체에 경외감을 가지는 듯하다. 그가 그리는 이야기들은 평범해지는데 그 행간의 비의가 빛난다. 엄청난 서사가 있는 것도 아닌데 다 읽고 나면 숙연해진다. 그 어떤 책보다 그의 이야기를 읽지 않은 이에게 그 감동을 온전히 전하는 일은 어려울 것같다. 그것은 그의 이야기를 읽고 난 다음에 각자의 몫으로 돌아간다.

 

 

 

 

 

 

 

 

 

 

 

 

 

 

 

 

아우구스투스를 이야기하지 않고 로마 제국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의 업적은 죽어서도 로마 제국으로 남는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사실 그런 것에 대한 칭송이 아니다. 숙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죽음 뒤에 갑자기 로마 제국의 통치자가 된 소년이 결국 강력한 로마 제국을 이루어 내지만 지기지우들을 잃고 숱한 배신, 반역, 정적들의 궐기 속에 고독하게 버티다 점점 자신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그 숱한 권력 싸움, 야욕에 초연해지며 조금씩 물러나며 오히려 자신의 존재라는 본질적 영토 안에 침잠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심중도 친구, 신하 들에게 보낸 서한으로 짐작할 뿐이다. 그는 관찰하고 서술하고 관조하고 쓴다. 존재라는 본질적 감옥을 치고 나올 수 없는 인간의 비장한 운명에 대한 앎은 그의 본질적 무게다. 존 윌리엄스는 또 하나의 스토너를 불러온다. 어쩔 수 없었던 것들, 어쩌지 못하는 것들 앞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존재의 서늘함은 황량하다.

 

하지만 작가가 그리는 여성은 그의 남자 인물들처럼 입체적이지 않다. 아우구스투스의 딸 율리아의 자유분방함도 그녀의 기질로만 설명하기에는 어딘가 좀 설득력이나 매력이 떨어진다. 아버지에 대한 배신 또한 우발적이다. 아우구스투스가 사랑하지 않았지만 존중했던 아내 리디아도 그렇다. 상황이나 관계의 힘에 하중이 실리다 보니 하나의 연결선이 끊어지면 그의 인물들은 조금씩 위험해진다.

 

 

"젊은이는 미래를 모르기에 삶을 일종의 서사적 모험으로 여기지. <중략> 중년이 되면 꿈꾸던 미래를 겪었기에 삶을 비극으로 본다네. 자신의 힘이 아무리 위대한들, 신이라는 이름의 사고와 자연을 이길 수 없으며, 결국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까. <중략>" p.362

 

운명을 깨닫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비통한 면이 있다. 꿈꾸는 미래가 오늘로 치환되는 것은 아니라는 깨달음은 현실적이지만 나이듦이기도 하다. 유한한 생 앞에서 시간의 강력한 힘을 대비시키는 작가의 힘은 역사 속의 위대한 영웅이라 해서 별다르지 않다. 이 단순한 명제가 작가 앞에서는 폄하되지 않는다. 아우구스투스는 내려오고 같이 걷는다. 그리고 결국 가야 할 곳으로 사라진다. 아무리 위대해져도 결국 승복해야 하는 존재의 한계다. 그를 통해 삶을 연습한다. 불가능하지만 작가는 자꾸 그렇게 유도한다. 그의 이야기를 읽고 나면 언제나 한뼘쯤 조금 더 내 안으로 들어간 듯한 환각이 드는 것은 그 이유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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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책 사이를 번갈아 지나다니고 있다.

 

 

 

 

 

 

 

 

 

 

 

 

 

 

 

 

<스토너>의 존 윌리엄스의 <아우구스투스>의 문체는 번역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문체나 전반적인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서 한 사람이 썼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다. <아우구스투스>는 아무래도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사람들의 서신 교환으로 스토리를 끌고 나가니 <스토너>의 일대기적 흐름처럼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 외삼촌 카이사르의 후계자가 된 젊은 옥타비우스가 위대한 아우구스투스가 되어가는  과정의 중반에 와 있다. 등장인물들은 서로 다른 내심을 가지고 철저히 서로를 오해하며 자신만의 진실을 구축해 나간다. <스토너>가 한 가느다란 실에 삶을 걸어 차근 차근 설명해 나갔다면 <아우구스투스>는 여러 삶이 병치되고 엇갈리고 만나며 숙성된다. 아직 다 가지 못해 뭐라 말하긴 어렵지만 역시 존 윌리엄스는 역사적 인물의 삶을 설득력 있게 그려내리라 믿는다.

 

<숨결이 바람 될 때>는 삼십 대 후반에 급작스럽게 암 말기 진단을 받은 신경외과의의 죽기 전에 미처 완성하지 못하고 간 이야기다. 엄친아라는 진부하고 경직된 가치평가가 암시되는 말을 갖다 붙여도 어색하지 않을 그가 하필 그 모든 것을 본격적으로 완성해 가려 할때 닥친 삶의 종결이 슬프고 서늘하다. 학부에서 문학을 공부한 저자의 문장이 너무나 섬세하고 아름답다. 아픈 몸을 이끌고 계획된 여정을 강행하며 방문한 친구집에서 친구의 아이들이 지친 저자 주위에서 노는 장면과 십오년 전 여름 캠프 카운셀러를 했을 때 해변에서 죽음에 관한 책을 읽으며 주변에서 아이들이 뛰놀던 광경을 오버랩시키는 대목에서 숨을 잠시 몰아쉬게 된다. 그는 스스럼없이 자신을 죽어가는 몸으로 표현한다. 모든 계획했던 것들, 꿈꾸던 것들이 좌절되고 그 불가항력적 죽음에 먹혀 들어가는 몸을 바라보는 시선이 때로 지나치게 건조해서 자꾸 멈추게 된다. 사실 그것 안에 가라앉은 작가를 꿈꾸었던 이 청년이 바라보았던 그 아름다운 것들의 흔적이 보여서다. 사뮤엘 베케트가 했던 말, '나는 갈 수 없다. 갈 것이다.'라는 이 모순의 접점에 그가 서 있다. 그가 기억하는 말, 스토너도 그랬고 아우구스투스도 그랬고 결국 모두가 그럴 것이다. 갈 수 없지만 모두가 가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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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16-08-23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숨결이 바람이 될때는 본인도 마음 아프지만 남겨진 사람들이 더 힘겨웠을 것 같아요. 삼십대 후반... 너무 젊어요. 이 백세시대에...

blanca 2016-08-24 09:41   좋아요 0 | URL
죽음 자체가 불합리한 면이 많지만 연령대에 맞지 않는 죽음은 더더군다나 그런 것 같아요. 게다가 투병 중에 예쁜 딸까지 남기게 된다고 하니 더 못 읽겠어요. 순리라는 말이 이렇게나 힘든 것인지 몰랐어요. 마치 쉬운 것 같지만 그렇게 안 풀리니 어른들이 순리 얘기를 하는 것 같아요.
 
시바타 신의 마지막 수업 - 전설의 책방지기
이시바시 다케후미 지음, 정영희 옮김 / 남해의봄날 / 2016년 7월
평점 :
절판


젊은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고 자신의 논리나 지론을 강제하거나 훈계하지 않는 여든넷의 노인을 보편적으로 떠올리는 것은 쉽지 않다. 무엇보다 팔십이 넘어 현역에 있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산업구조다. 팔십이 넘어 자녀나 친척이 아닌 젊은 세대들과 동등하게 이야기하고 시간을 보낼 기회를 손쉽게 얻는다는 것도 그렇다. 젊은 사람들이 자신의 기준에 벗어난 행동을 하거나 공중 도덕을 지키지 않을 때 그 당연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대결 구도로 희화화 되는 요즘이다. 소통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소통의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나이듦은 불통의 노년의 집단으로 희석된다.

 

시바타 신은 여든넷의 책방지기다. 아직도 버스를 타고 지하철역에 가서 지하철을 타고 이와나미 북센터에 출근한다. 거의 반세기에 걸쳐 서점 현장에 있어 왔다. 서점 업계의 저널리시트인 거의 사십 년 차이가 나는 저자가 그와 마주 앉아 그의 삶과 일본의 서점계의 역사를 듣고 이런 저런 소회를 나눈다. 그는 "젊은 사람을 억누르지 않는 사람이다." 따라서 미주알 고주알 자신의 업적을 나열하거나 고리타분한 옛날 이야기를 늘어놓는 대신 눈을 반짝이며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저자의 의견이나 생각을 "그럴 수도 있겠어. 나중에 한번 시도해 볼게."라고 이야기한다. 정작 자신의 이야기에 이르면 심드렁해진다. 어떤 '주의'나 '이상'을 회의한다. 그 무엇도 강제하지 않는다. 대쪽처럼 곧지 않고 현실에 발을 깊숙히 담그고 변화와 시류를 수긍한다. 그는 나이듦을 뒤집어 쓴 젊음의 모습 같다. 둘의 대화는 도발적이면서 담담하다. 갈피짬마다 끼어드는 그의 삶의 역사의 요약은 쉼표 같다.

 

내 나이쯤 되면 뭐가 옳은지, 뭐가 정답인지는 전혀 재미가 없어.

-p.54 이

 

 

그에게 책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책을 파는 행위나 장소도 이상화되지 않는다. 현대의 대량 자본주의 논리에는 염증을 느끼지만 서점도 자금융통을 해야 하는 장사이자 사업이다. 꼭 이렇게 해야한다,거나 절대적인 것은 그 앞에서 흔들린다. 오직 그는 하루 하루를 성실히 살아갈 뿐이다. 죽음도 그러하다. 그가 인용하여 자기화한 죽음에 대한 이야기도 닮아 있다. '죽음'은 그 순간, 그 사람은 이승의 말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1인칭을 가질 수 없다는 이야기는 곧 '죽음'에 대한 이야기 자체도 불가능한 영역이므로 주어진 오늘을 충실히 살아가야 한다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어쩔 수 없는 것들은 이미 그의 관심사가 아니다. 다만 할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치로 끌어내는 것 뿐이다. 그런데 이런 담담한 보통의 자연스러운 그의 나날들이 참으로 눈부시게 빛난다. 자신의 공과를 과시하며 그악스럽게 질주하는 나이 든 자들이 권력을 탐하고 있는 오늘을 무색하게 한다. 나이듦이나 노년이 세상을 나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그들의 포기할 줄 모르는 탐욕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여든 넷의 책방지기 앞에서도 출판계나 책에 대한 작은 희망의 불씨가 낙관적으로 점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조차 그는 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본다. 외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의 찰랑이는 물결 속에 이 나이든 자는 초연하게 그러나 그 물살에 가끔 손을 적셔가며 저벅 저벅 걸어나간다. 어쩌면 이 책은 책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러한 삶을 받아들이는 자세의 유연함에 대한 이야기인 지도 모른다.

 

자본주의의 가장 집약된 형태랄 수도 있는 대형 커피숍 체인의 창가 자리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다 그의 이야기를 듣다 말다 한다. 젊은 아이들은 저마다 내일을 품고 오늘을 소비하며 거리를 가른다. 모든 것은 모순이다. 절대도 순수도 순전함도 어떤 순간에는 폭력이 된다. 그런 이야기를 노인이 하고 중년이 듣는다. 이야기를 하는 것도 듣는 것도 찰나지만 결국은 무언가가 남아 보탠다. 그런 게 나날이 되고 삶이 된다. 그런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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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8-22 14: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덕후들 사이에서 많이 알려진 전국의 헌책방들은 연세가 많은 분들이 운영하고 있어요. 지금 운영하고 계신 분들이 안 계시면 헌책방은 문을 열 수 없어요. 헌책방 주인장 분들을 만날 때마다 걱정이 많아요. 혼자서 책들을 다 받고, 관리할 수 없어요. 힘든데도 얼마 안 되는 책방 손님들을 위해서 꿋꿋하게 가게에 나오십니다. 정말 대단하고, 고마운 분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