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책 사이를 번갈아 지나다니고 있다.
<스토너>의 존 윌리엄스의 <아우구스투스>의 문체는 번역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문체나 전반적인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서 한 사람이 썼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다. <아우구스투스>는 아무래도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사람들의 서신 교환으로 스토리를 끌고 나가니 <스토너>의 일대기적 흐름처럼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 외삼촌 카이사르의 후계자가 된 젊은 옥타비우스가 위대한 아우구스투스가 되어가는 과정의 중반에 와 있다. 등장인물들은 서로 다른 내심을 가지고 철저히 서로를 오해하며 자신만의 진실을 구축해 나간다. <스토너>가 한 가느다란 실에 삶을 걸어 차근 차근 설명해 나갔다면 <아우구스투스>는 여러 삶이 병치되고 엇갈리고 만나며 숙성된다. 아직 다 가지 못해 뭐라 말하긴 어렵지만 역시 존 윌리엄스는 역사적 인물의 삶을 설득력 있게 그려내리라 믿는다.
<숨결이 바람 될 때>는 삼십 대 후반에 급작스럽게 암 말기 진단을 받은 신경외과의의 죽기 전에 미처 완성하지 못하고 간 이야기다. 엄친아라는 진부하고 경직된 가치평가가 암시되는 말을 갖다 붙여도 어색하지 않을 그가 하필 그 모든 것을 본격적으로 완성해 가려 할때 닥친 삶의 종결이 슬프고 서늘하다. 학부에서 문학을 공부한 저자의 문장이 너무나 섬세하고 아름답다. 아픈 몸을 이끌고 계획된 여정을 강행하며 방문한 친구집에서 친구의 아이들이 지친 저자 주위에서 노는 장면과 십오년 전 여름 캠프 카운셀러를 했을 때 해변에서 죽음에 관한 책을 읽으며 주변에서 아이들이 뛰놀던 광경을 오버랩시키는 대목에서 숨을 잠시 몰아쉬게 된다. 그는 스스럼없이 자신을 죽어가는 몸으로 표현한다. 모든 계획했던 것들, 꿈꾸던 것들이 좌절되고 그 불가항력적 죽음에 먹혀 들어가는 몸을 바라보는 시선이 때로 지나치게 건조해서 자꾸 멈추게 된다. 사실 그것 안에 가라앉은 작가를 꿈꾸었던 이 청년이 바라보았던 그 아름다운 것들의 흔적이 보여서다. 사뮤엘 베케트가 했던 말, '나는 갈 수 없다. 갈 것이다.'라는 이 모순의 접점에 그가 서 있다. 그가 기억하는 말, 스토너도 그랬고 아우구스투스도 그랬고 결국 모두가 그럴 것이다. 갈 수 없지만 모두가 가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