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윌리엄스는 운명의 불가항력, 상황이 존재에 가하는 압력에 자신의 주인공들을 겸허히 승복시킨다. '스토너'도 그랬고 심지어 로마 제국의 황제 아우구스투스조차도 그 앞에서는 영웅으로 보이지 않는다. 개개인이 특별하고 존엄하다는 생각과 대척점에 있는 것은 아니다. 존 윌리엄스는 개개인을 존중한다기보다는 '삶' 그 자체에 경외감을 가지는 듯하다. 그가 그리는 이야기들은 평범해지는데 그 행간의 비의가 빛난다. 엄청난 서사가 있는 것도 아닌데 다 읽고 나면 숙연해진다. 그 어떤 책보다 그의 이야기를 읽지 않은 이에게 그 감동을 온전히 전하는 일은 어려울 것같다. 그것은 그의 이야기를 읽고 난 다음에 각자의 몫으로 돌아간다.

 

 

 

 

 

 

 

 

 

 

 

 

 

 

 

 

아우구스투스를 이야기하지 않고 로마 제국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의 업적은 죽어서도 로마 제국으로 남는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사실 그런 것에 대한 칭송이 아니다. 숙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죽음 뒤에 갑자기 로마 제국의 통치자가 된 소년이 결국 강력한 로마 제국을 이루어 내지만 지기지우들을 잃고 숱한 배신, 반역, 정적들의 궐기 속에 고독하게 버티다 점점 자신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그 숱한 권력 싸움, 야욕에 초연해지며 조금씩 물러나며 오히려 자신의 존재라는 본질적 영토 안에 침잠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심중도 친구, 신하 들에게 보낸 서한으로 짐작할 뿐이다. 그는 관찰하고 서술하고 관조하고 쓴다. 존재라는 본질적 감옥을 치고 나올 수 없는 인간의 비장한 운명에 대한 앎은 그의 본질적 무게다. 존 윌리엄스는 또 하나의 스토너를 불러온다. 어쩔 수 없었던 것들, 어쩌지 못하는 것들 앞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존재의 서늘함은 황량하다.

 

하지만 작가가 그리는 여성은 그의 남자 인물들처럼 입체적이지 않다. 아우구스투스의 딸 율리아의 자유분방함도 그녀의 기질로만 설명하기에는 어딘가 좀 설득력이나 매력이 떨어진다. 아버지에 대한 배신 또한 우발적이다. 아우구스투스가 사랑하지 않았지만 존중했던 아내 리디아도 그렇다. 상황이나 관계의 힘에 하중이 실리다 보니 하나의 연결선이 끊어지면 그의 인물들은 조금씩 위험해진다.

 

 

"젊은이는 미래를 모르기에 삶을 일종의 서사적 모험으로 여기지. <중략> 중년이 되면 꿈꾸던 미래를 겪었기에 삶을 비극으로 본다네. 자신의 힘이 아무리 위대한들, 신이라는 이름의 사고와 자연을 이길 수 없으며, 결국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까. <중략>" p.362

 

운명을 깨닫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비통한 면이 있다. 꿈꾸는 미래가 오늘로 치환되는 것은 아니라는 깨달음은 현실적이지만 나이듦이기도 하다. 유한한 생 앞에서 시간의 강력한 힘을 대비시키는 작가의 힘은 역사 속의 위대한 영웅이라 해서 별다르지 않다. 이 단순한 명제가 작가 앞에서는 폄하되지 않는다. 아우구스투스는 내려오고 같이 걷는다. 그리고 결국 가야 할 곳으로 사라진다. 아무리 위대해져도 결국 승복해야 하는 존재의 한계다. 그를 통해 삶을 연습한다. 불가능하지만 작가는 자꾸 그렇게 유도한다. 그의 이야기를 읽고 나면 언제나 한뼘쯤 조금 더 내 안으로 들어간 듯한 환각이 드는 것은 그 이유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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