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심한 저질 체력에 근육량도 형편 없지만 어떻게든 운동을 생활화하려 노력하는 편이다. 이런 사설은 지난 주 일어났던 비극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한동안 운동을 쉬다 다시 운동을 시작했고 많이 아주 많이 무리했다. 하필 1킬로 아령이 근처에 보이지 않고 평상시 무거워 잘 쓰지도 않는 3킬로 아령이 옆에 있길래 그걸 들고 상체 운동을 아주 열심히 했다. 생각보다 무겁게 느껴지지 않아 신 났다. 다음 날 지하철을 타며 모든 에스컬레이터 대신 계단을 다 걸어 올라가는 기염을 토했다. 아, 나 체력이 이렇게 올라오나봐. 이거야. 그 다음날은 석촌 호수 주변을 다 돌았다. 2.4킬로 정도? 비극의 서막은 그날 오후에 올랐다. 이상스럽게 몸이 가라앉았다. 열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장렬히 전사했다. 


그로부터 과장 좀 보태 일주일 후에 깨어났다. 임파선도 붓고 열도 나고 입안은 다 헐고 약 때문에 속은 쓰리고. 내 몸에 가했던 그 모든 하중이 통렬히 나에게 복수했다. 이런 거였다. 결국 이럴 것을. 그 기간 나는 아주 몸에 대해 나이듦에 대해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하루키가 왜 그렇게 몸타령을 했는지 젊은 시절부터 왜 그렇게 몸 관리 연설을 했는지 절절하게 이해가 갔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기간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읽었다. 젊은 작가들이 쓴 이야기. 수상 작가들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담은 코멘터리 북에서 성혜령 작가의 글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혜령 작가는 청소년 시기 암투병을 했다. 지금은 건강히 회복해서 직장도 다니고 있지만 그 경험에서 얻은 통찰은 여전히 유효하다. 자신에게 주어진 생의 유한함에 대한 자각과 정기 검진이 주는 그것에 대한 각성, 나에게서 아주 긴 미래를 상정하지 않는 신중함, 그리고 지금 여기 이 현실이 가지는 의미와 가치. 그런 것들은 정말로 사소한 것이 아니다. 그러한 것을 품고 나온 작가의 이야기 그 자체도. 


















김멜라의 <제 꿈 꾸세요>는 죽은 자가 산 자의 꿈으로 찾아가는 여정에 대한 이야기인데 몽환적이면서도 유쾌하고 또 어쩐지 서글프다. 과거의 가장 아름다웠던 기억 속으로 찾아갈 수 있다면 나도 가고 싶은 날이 있다. 그건 아마도 중학교 시절 시험이 끝나던 날이 될 것이다. 나도 주인공처럼 우리가 시험 끝나던 날 사먹던 시장통의 떡볶이를 먹으러 가고 싶다. 주인공의 엄마가 좋아하던 커피포리에 빨대를 잘 조준해 달라 부탁한 마무리에 괜히 콧날이 시큰해졌다. 불가역성을 가능성으로 변환할 수 있는 건 소설 안에서만 가능한 이야기겠지. 


성혜령의 <버섯 농장>은 도발적인 작품이다. 한동안 연락이 없던 친구와 그 친구의 기묘한 복수 여정에 동행하게 되는 주인공의 이야기는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지대에서 긴박한 클라이맥스를 형성한다. 언제나 그렇듯 사적 복수가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 제기와 지금 청년 세대들이 당면한 기성 세대와의 갈등의 지점에 대한 복합적 이해, 젊은 여성이 가진 자본으로 다시 그들이 계층화되고 그것이 가로막는 서로의 소통에 대한 예리한 통찰은 서늘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그들은 그 남자를 과연 죽였을까? 


현호정의 <연필 샌드위치>를 읽으며 내가 왜 앓는 동안 그렇게 음식을 넘길 수 없었는지 그럼에도 단 음료에 집착했는지 그 이유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건 나의 개별적 경험이 아니었다. 먹는다는 일은 단순한 것이 아니다. 누군가는 다른 누군가를 먹여야 한다. 내가 먹는 일은 때로 내가 억지로 연장하는 생으로 인해 돌봄 노동을 제공하는 이에게 고통이 될 수도 있다. 먹기 싫어도 먹어야 이어질 수 있는 삶이 가진 은근한 폭력성. 그것은 나에게도 타인에게도 단순한 의미를 가지는 게 아니었다. 무심코 넘겼던 먹는다는 행위에 대해 생각해 볼 계기를 준 이야기였다. 


일곱 편의 작품이 고르게 잘 읽혔고 현실이 환상, 꿈, 과거와 교차하고 섞이는 서사가 많았다. 우리가 규정하고 확정하는 현실의 근간을 흔들고 진짜는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탐색, 그럼에도 그 탐색을 구조화하는 과정에서 읽히고자 하는 의지가 보여 어렵지 않았다. 


나는 더이상 젊다고 할 수는 없는 나이지만 젊은 작가들이 하는 이야기에 여전히 공명할 수 있다는 건 안도감을 주는 동시에 어떤 도전 의식을 일깨운다. 내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그저 감상하고 감당하는 수준에서 의문을 제기하고 방향 전환을 모색할 수 있는 용기를 주는 이야기들은 여전히 나를 깨어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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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a 2023-04-08 11: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읽고 싶어지는 리뷰네요. 좋은 책 소개 감사드립니다.
건강하세요. 건강이 최고죠. 저도 요즘 아 이러다 갑자기 가는 수도 있구나 실감했어요. ^^;;

blanca 2023-04-08 16:57   좋아요 1 | URL
Persona님, 반갑습니다. 죽음이 사실 멀리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잊고 일상을 살다 한번씩 아프면 다시 상기하게 됩니다.

cyrus 2023-04-08 19: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자주 가는 책방지기가 <젊은 작가 수상작품집>을 읽고 계시던데, 오늘 <연필 샌드위치>에 묘사된 어떤 문장이 뭘 의미하는지 궁금해하시더라고요. <연필 샌드위치>에 대한 그분의 감상을 듣고 보니 초현실적인 느낌이 나더라고요. ^^

blanca 2023-04-09 09:57   좋아요 0 | URL
꿈 속에서 연필로 샌드위치 만드는 장면이 의미하는 바가 식이의 폭력성 같기도 하고 그 근저에 깔린 돌보는 자의 희생을 감춘 것 같기도 하고 묘하게 복합적 의미가 연상되는 작품이었어요. 개인적으로 올해 수상작들은 생각의 여지가 많고 여운도 길었어요.

다락방 2023-04-10 12: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느 순간부터 젊은 작가상 작품집 안읽어야지 하게 되었는데 블랑카님의 리뷰를 보니 또 읽어볼까 싶어지네요.
인생의 흐름을 같이 타고 있는 것 같아요, 블랑카 님과 저는요. 그래서 블랑카 님의 글을 읽는 것이 참 감사하고 좋아요.

blanca 2023-04-10 13:17   좋아요 0 | URL
제가 안 젊으니까 ㅋㅋ <젊은작가상 작품집>은 해마다 숙제처럼 읽습니다. 올해 좋았어요. 그리고 그 마일리지로 살 수 있는 코멘터리 북이 생각보다 너무 좋아 놀랐어요. 인터뷰 내용들이 다 참 깊더라고요. 어떤 해는 솔직히 기대 이하인 적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올해는 잘 읽히고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들더라고요. 노안이 없는 젊은 그들이 부럽네요. ^^;;
 

자식을 키우는 일만큼 인생의 부조리를 강렬하게 느끼게 되는 경험은 없는 것 같다. 이를테면 내가 애를 쓰고 용을 쓴다고 해서 그 아이가 내가 바라는 대로 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양육자가 툭 무언가를 놓아 버리면서(이건 에고가 될 수도 있고, 포장된 모성애가 될 수도 있다.) 그 지점에서 아이는 제 인생의 방향과 소명을 찾아 잘 독립하기도 한다. 양육은 그래서 삶에 대한 연습과도 비슷하다. 내가 원한 바대로 계획한 대로 절대로 풀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의미가 있기를 소망한다.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가 기대하지 않은 가르침을 준다. 새로운 균형점을 찾는다. 그 지점이 때로 더 좋기도 하다.





정말 좋은 책이다. 작법 책으로 환원해서 받아들이면 곤란할 정도로 인생에 대해 가르쳐 주는 게 더 많은 책. 작가와 관련 없이 그냥 모두가 읽었으면 하는 책이다. <바르도의 링컨>으로 맨부커상을 수상한 저자 조지 손더스가 시러큐스 대학 문예 석사 과정에서 25년간 젊은 작가들에게 한 강연의 핵심을 담은 책이다. 그가 선별한 체호프, 고골, 톨스토이, 투르게네프의 단편 일곱 편의 전문이 실제 실려 있고 이 작품들을 함께 읽는다. 그의 사전 안내 사항처럼 이 훌륭한 일곱 편의 단편은 "꼼꼼하게 구축된 세계 축적 모형"이므로 그것을 함께 읽는 과정은 결국 세계와 그 세계 안의 우리의 삶과 우리 자신을 함께 들여다보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의 위트와 재치를 겸비한 조지 손더스의 안내와 해석, 문제 제기는 전략적 삶의 독해의 지점으로 우리를 끌어들임으로써 시야를 확장하고 삶의 축소성을 해체하고 확장한다. 지금, 여기에서의 자잘한 고민들 안에서 갇혀 있는 우리를 해방시켜 더 심원한 의미의 삶의 지평을 조감하게 해준다. "기본적으로 우리 자신의 읽기를 지켜보는 것"은 우리의 내면을 성찰하는 일이기도 하다. 잠복된 욕망, 잊힌 기억들, 간과한 문제들은 다시 떠오르고 더 나은 해법을 향해 출항하는 여정에 그는 기꺼이 동행한다. 


제사에도 인용된 체호프의 <구스베리>를 통해 그가 처음으로 톨스토이를 만나 수영을 했던 일화를 통한 두 위대한 작가의 교감에 대한 이야기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두려워하면서도 서로에게 얽매이지 않기를 바랐던 두 마음은 각자의 위대한 성취를 통해 드러나고 작품을 통해 공명한다. 비를 맞으며 호수에서 수영하는 이반이 행복의 부조리함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구스베리>는 결국 체호프가 사랑했던 톨스토이의 모순적인 모습에 대한 구체적인 응축체였던 것일 수도 있다는 저자의 해석은 우리가 결국 쓰기와 읽기를 통해 만나는 지대에 삶의 부조리함을 통한 연결의 실종을 복원하고 의미를 꿈꾸고 사랑을 지향하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나가야 함을 시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다시 돌아와서, 그 부조리함 속에서 그럼에도 의미와 연결이 가능한 쓰기와 읽기에 대한 희망을 다시 찾는 이야기를 읽게 되어 기쁘다. 조지 손더스의 학생 시절, 교단에서 그에게 체호프를 낭독해 준 대작가 토비아스 울프가 쓰는 일에 대한 모든 무의미한 이야기를 일소시켜준 것처럼 그의 이야기 또한 읽는 이들에게 그런 의미를 준다. 사는 일도 그러하다. 언뜻 부조리하고 불합리해 보이는 나날들, 희망과 이상을 짓밟는 것처럼 보이는 일들, 그 가운데에서도 나아갈 이유와 힘을 주는 이야기들을 듣게 되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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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3-17 09:4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바르도의 링컨 사두고 안읽었는데 작가의 다른 책도 블랑카 님은 읽고 이렇게 근사한 페이퍼를 적어 주셨네요. 저는 느끼는 바, 생각하는 바를 항상 정확히 표현하지 못하는 것 같은 안타까움을 스스로 저 자신에게 가지고 있는데, 블랑카 님은 항상 정확하게 표현하시는 것 같아 그 점이 참 부럽습니다.
이 페이퍼도 언제나처럼 너무 좋아서 이 책도 담아갑니다.

blanca 2023-03-17 13:10   좋아요 1 | URL
다락방님, 저도 쓸 때 그래요. 항상 그 언저리까지 갔다 마는 느낌, 답답해요. 아, 이 책은 정말이지 기대 이상이었어요. 읽고 또 읽어도 여전히 좋은 책들이 계속 나와서 참 좋아요. 두꺼운 책은 부담 가지고 시작하는데 전혀 지루하지 않았고 그 러시아 단편 읽는 느낌도 정말 좋았고, 무엇보다 작가가 글을 정말 잘 쓰더라고요. 문장 하나하나가 비범해서 참 부럽더라고요.

잠자냥 2023-03-17 13: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 장바구니에 담아두고 살까말까하면서 계속 뒤로 밀리기만 했는데 블랑카 님 글 보고 사기로 결정했습니다.
땡투는 블랑카 님께. ㅎㅎ (근데 이번달은 그만 사야 해서 ㅋㅋㅋ 담달에 땡투 들어갑니다~)

다락방 2023-03-17 14:55   좋아요 2 | URL
저도 땡투 누르고 장바구니엔 넣어뒀어요. 문제는 언제 결제할 것이냐... ㅋㅋㅋㅋㅋ

blanca 2023-03-17 18:47   좋아요 2 | URL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저도 소장하려고 줄도 엄청 그었네요.

그레이스 2023-03-27 08:09   좋아요 1 | URL
저도 장바구니에서 계속 아래로 내려가는 중이었는데... 구매 버튼을 누르기로!

페크pek0501 2023-03-17 22: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세차하고 나면 비 온다는데 저의 경우 책을 사고 나면 꼭 더 좋은 책이 발견된다는...
blanca 님이 좋은 책이라 하시니 꼭 구매해야 할 것 같습니다...^^

blanca 2023-03-18 08:47   좋아요 2 | URL
페크님, 일단 선별한 단편 일곱 편 읽는 재미만 해도 이 책 살 가치가 있는데요, 그 소설들을 함께 읽는 거예요. 감상, 아쉬운 점, 저자의 일화. 정말 강의 듣는 느낌이었어요.
 
암스테르담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24
이언 매큐언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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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든 상황이 좋을 때에 좋은 우정을 유지하기란 쉽다. 그러나 각자의 상황이 여의치 않고 하필 서로가 친구의 약점을 정확히 알고 그것을 누를 단추 앞에 서 있을 때 우리는 과연 어떻게 행동하게 될까. 그때에도 우리는 담백하고 좋은 친구로 그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내 삶이 엉망인데 하필 친구가 나의 열등감을 자극하고 거기에 더한 무엇을 투척해 준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그 우정을 유지할 수 있을까? 이언 매큐언의 블랙 코미디는 여기에서 벌어진다. 기본적으로 그는 낭만화와 이상화를 경계한다. 우리 모두가 각자의 욕망을 가지고 그것을 둘러싼 페르소나로 사회에서 기능할 때 벌어질 수 있는 참극은 가까이에서 지켜보면 터무니없이 힘을 잔뜩 준 진지한 희극에 가깝다. 고작 단지 그것 때문에 우리는 서로와 자기 자신을 파멸시킬 수 있는 어리석은 존재다. 


여기서 만나 얼싸안았던 친구들은 떠났다.

각자 저마다의 과오를향해.

W.H. 오든 [십자로]


제사에 인용된 오든의 [십자로]는 <암스테르담>의 핵심 메시지를 응축하고 있다. 친밀한 우정을 나누고 서로를 믿어서 심지어 각자가 쇠락해졌을 때의 안락사의 동반자로 생각했던 클라이브와 버넌은 그 과오에서 결국 다시 만난다. 


마흔 여섯에 죽은 몰리 레인의 장례식에서 한데 모인 중년의 네 남자들은 남편 조지를 비롯해서 모두 어떤 시기이든, 어떤 형태로든 그녀와의 한 시절을 공유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대학교의 하숙집에서, 직장에서, 가정에서. 차기 총리로 부상하는 외무장관 가머니 또한 그랬다. 그는 몰리에게 자신의 독특한 성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사진을 찍게 한다. 이 사진은 세상에 드러날 시 그의 정치 인생을 일거에 무너뜨릴 수 있는 은밀한 비밀이었다. 그의 이런 복장 도착 사진 특종건을 둘러싼 긴장감은 언론인 버넌과 작곡가 클라이브의 갈등에서 정점에 이른다. 둘의 의견차는 작곡가 클라이브가 하필 자신의 음악적 영감의 순간에 목격하게 되어 무심코 방관하게 된 강간 사건의 증언을 둘러싸고 우정의 파열음을 내고 만다. 가머니의 사진 보도로 언론사에서 조기 퇴직을 하게 된 버넌은 자신의 좌절감을 친구 클라이브가 보낸 엽서에 모두 쏟아내고 마침내 복수하기로 결심하고 클라이브는 클라이브대로 자신의 은밀한 방조를 경찰서에 고발한 친구 버넌에 대한 배신감으로 몸을 떨게 된다. 서로의 윤리적 결점을 각자의 위치에서 심판하고 고발하며 둘은 각자의 윤리의 염결성과 입지의 정당성을 변호하게 되지만, 재회한 곳은 바로 그 서로가 얼싸안았던 그 지점이다. 암스테르담은 결국 이 두 친구에게 남긴 마지막을 깔끔하게 끝맺음 할  합리적이고 호의적인 장소로서의 첫인상과는 달리 의도치 않았던 죽음의 장소로 둔갑하게 된다. 배신과 어처구니 없는 사고의 장소로. 


우리 모두는 어떤 면에서 결백하지 않다. 윤리의 자잘한 체로 거르면 그 위에 떠오를 많은 죄과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존을 영위하는 우리들을 포박한다. 그 위선이 드러날 때 각자가 추구했던 이상화된 길은 오명과 오점으로 얼룩진다. 선한 처음의 의도에서 벗어나 저마다 목표하지 않았던 엉뚱한 곳에서 서로 반목하고 어처구니 없는 결말을 맞을 수도 있다. 이런 삶의 아이러니를 이언 매큐언보다 더 생생하게 설득력 있게 그릴 수 있는 작가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서로 사랑했던 친구를 죽이게 되는 비극이 희극처럼 느껴지는 건 그게 바로 삶의 아이러니의 핵심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진짜 나의 그 머나먼 간극에서 이언 매큐언이 만들어낸 정밀한 촌극. 인간은 생각한 것처럼 대단치도 그렇다고 함부로 폄하할 존재도 아니라는 명징한 자각을 주는 작품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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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7 12: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3-17 13: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조율하는 나날들 - 조현병에 맞서 마음의 현을 맞추는 어느 소설가의 기록
에즈메이 웨이준 왕 지음, 이유진 옮김 / 북트리거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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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안전하다는 인식은 환상이다. 이 환상은 곧 깨어지기 마련이다. 그래도 대부분은 다시 그 환상으로 귀환한다. 영원히 살 것처럼 지금 이 상태가 공고한 것처럼 믿는다. 믿어야 견딜 수 있는 게 일상이므로.


그런데 이 환상에서 매일 반복적으로 깨어나는 사람들이 있다. 조현병도 그 중 하나다. 이 책의 저자 에즈메이 웨이준 왕은 대만계 미국인으로 예일대 학생이었다. 조현정동장애 양극형이라는 복잡한 진단명은 그녀가 스스로의 삶을 설명하는 서사를 해체한다. 즉 그녀는 스스로의 서사를 끊임없이 해체하고 재조직해야 하는 평생의 과업을 부여 받는다. 이민자의 자녀로 남들이 부러워하는 아이비리그 대학생이 되었지만 결국 그녀는 자신의 병 때문에 교정에서 쫓겨나다시피 한다. 사람들은 다른 정신질환보다 조현병에 걸린 사람을 더욱 위협적으로 인식한다. 더 이질적으로 느낀다. 그녀가 입원했던 병원에서 생긴 위계의 가장 최하위층을 점했던 환자들이 조현병 환자들이었다는 얘기는 정신 질환자들의 공간 속에서도 '한 존재의 파멸적 중단'을 암시하는 조현병에 대한 공포를 암시한다. 


이 책은 말 그대로 조현병을 진단 받은 저자가 매일 사투를 벌이며 삶 속에서 '조율하는 나날들'에 관한 이야기다. 중단된 학업을 다시 이어가고 다시 사랑을 찾고 우정을 회복하고 길을 떠나고 직업을 가지고 살아나가는 이야기는 묘하게도 무겁거나 비극적이지 않다. 그 안에서 찾아나가는 균형점, 자신의 정신병을 삶에 정체성에 통합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가 그 안에 있지 않다 할지라도 생에서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여러 비극적인 일들에 어떤 태도로 접근해야 할지에 대한 간접적 참조점을 제시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나가는 일에 대한 이야기는 신비롭다. 막연한 희망, 위선, 위장의 장막이 벗겨지고 드러난 생의 속살은 차갑고 날카롭지만 우리가 그 안에서 숨쉬는 일에 대한 가치를 일깨워 준다. 슬프고 괴로워도 뚫고 나가는 그 어떤 지점에서 우리 모두는 만난다. 


저자는 자신이 이미 죽었다고 믿는 '코타르 증후군'을 경험하게 된다. 살아있기에 아플 수 있고 이별로 인한 상실감을 경험할 수 있다는 인식 자체가 아예 해체되는 경험이다. 이 안에서 나는 이미 죽었으므로 사람들을 사랑할 수도 없고 따라서 헤어질 수도 없다. 우리가 살면서 느끼는 고통 자체가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묘한 경험인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지옥의 형벌 속에서는 죽음이라는 희망조차 없으며 지독한 고통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그래서 사실, 상처, 비탄은 그 나름대로 끔찍한 것들이지만, 지옥의 형벌을 받는 죽은 여자에게는 무척이나 인간다우며 살아 있고 아름다운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을.

-pp.236


에즈메이 웨이준 왕은 섣부른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지만 감히 그 지옥에서 걸어나와 다른 형태의 '조율하는 나날들'을 맞이하기를 기원해 본다. 그녀가 통과한 그녀만의 '조율하는 나날들'이 "내 삶이 어떻게 전개되든 나는 살아가게 되어 있고, 내 삶이 어떻게 풀리든 나는 것을 견뎌내기 위해 창조되었다"는 그녀의 말이 주는 희망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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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절대 20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모든 것에 과도하게 힘을 줬고 최선을 다하면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얻게 될 거라고 맹신했다. 심지어 관계까지. 그런 것들을 떠올리게 했던 이야기.
















직장, 사랑, 어쩔 수 없이 생겨나는 각종 위계, 계층, 계급, 그래도 진심이고 순수하고 싶은 마음들과 끊임없이 싸워야 하는 나날들에 대한 섬세한 묘사에 공감이 갔다. 남성 작가가 쓴 여성 이야기지만 그 여성의 마음과 시점에 최대한 근접해 가려 애쓴 흔적과 상대에 대한 마음이 전적으로 순수하지 않아도 그것 또한 사랑임을 간파한 예리한 시선이 놀라웠다. 누군가를 사랑한다 말할 때 우리는 전적으로 순수하지 않다. 그 사람의 외모, 그 사람이 가진 것들을 모두 포함한 얘기다. 어떤 사랑을 포기할 때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비겁함도 그렇다. 하상수가 찌질하지도 비겁하지도 않다고 느낀 건 그 때문일 것이다. 


드라마에서는 직장에서의 직군 간의 긴장 관계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소위 금수저인 박미경 대리는 좋은 사람이다. 좋은 사람인데 그녀가 무심코 안수영 주임에게 하는 배려들, 이를테면 명품 가방을 선물하거나 안 주임이 예쁘다고 한 목걸이를 선뜻 풀어 준다거나 하는 행동이 가지는 어떤 뉘앙스에 대한 이야기다. 그건 또 다른 의미에서 악의로 인한 행동보다 더 상대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실수가 된다. 서로에게 하는 배려가 그 조직의 기저에 깔린 차별을 공고히 하는데 저도 모르게 기여하는 경우가 있다. 이제 그러한 것들이 보인다. 그러면서 그때는 읽지 못했던 것들의 의미와 내가 저지른 실수들과 내가 받은 상처를 다시 복기하게 됐다. 미처 모르고 지나쳤던 것들. 지점 남자 동기와는 달리 내가 배우고 싶었던 일이 아니라 각종 자질구레한 서무 업무들이 주가 되었던 일, 나와 동갑이었던 남자 아르바이트생, 그에게 뭔가를 부탁할 때 그 어려웠던 마음. 하루하루 안 힘든 적이 없었다는 안 주임의 눈물나는 고백의 무게들이 가로지르고 간다. 


왜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을까? 먹고 사는 일의 비장함에 갇혀 인간들이 기본적으로 서로 주고 받는 정과 사랑, 배려에 갑각류처럼 몸을 움츠렸던 것도 같다. 내 상처에 골몰해 타인들의 상처에 정작 무감각했던 것도 같다. 고마웠던 사람들도 많고 이제서야 이해할 수 있는 추했던 언행의 사람들도 있다. 


사랑의 이해는 내가 사랑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의 이득과 손해를 저울질하는 행위와 겹친다. 중의적인 의미에서 그 이해는 의미를 가진다. 전적으로 순수한 감정도 오직 속물적인 계산도 아니다. 조건을 찾아 떠난 사람도 사랑에 모든 걸 맡긴 사람도 다 그 시간에서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내가 원하는 걸 정확히 아는 게 핵심일지도 모른다. 생활의 무게, 사랑의 진정성 어느 한 쪽도 소흘히 할 수 없는 인생의 화두니까.


















처음에는 순간에 대해서 쓰려고 했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바로 그 순간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그러나 글을 쓰기 시작하자, 그것은 하나의 순간이 아닌 동시에 존재하는 많은 순간들이 되었다. 글은 모든 순간에 있었다.

-배수아 <작별의 순간들>


음악 같은 산문. 문장 하나하나를 곱씹게 되는 배수아의 글. 독일에서 '베를린 서가의 주인'과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음악을 듣고 투야 울타리 너머의 정원에 대해 하는 이야기들을 듣다 보면 하루하루 그들의 별일 일어나지 않고 오직 문학 안의 텍스트와 교유하는 그 은은한 삶에 가만히 동행하는 듯한 환각을 주는 환상적인 이야기였다. 한 장, 한 장 책장이 줄어들 때마다 '작별의 순간'들로 가는 것 같아 아쉬웠다. 마치 삶처럼. 이 모든 지금과 이 모든 열심이 결국 무로 화할 것이라는 끊임없는 자각을 일깨우는 조종 같은 그녀의 문장들이 탐스럽다. 언제나 끝내지 못한 책처럼 물러나는 마지막 문장까지 다 그러모아 기억의 창고에 넣어두고 싶다. 사는 일은 완성하는 것이 아니고 잘 사라지는 일이라고. '작별의 순간들'을 음미하는 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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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주나무 2023-02-15 18: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남성 작가가 쓴 여성 이야기! 그 어려운 걸 해냈단 말인가요? 무척 궁금해지네요^^

blanca 2023-02-15 21:48   좋아요 0 | URL
여성 독자로서 개인적으로 여성 묘사에 대한 아쉬운 대목들이 있지만 그걸 제외한다면 몰입해서 아주 재미있게 읽었어요. 원작이 좋아서 드라마도 잔잔한 서정성을 갖추게 된 것 같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