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을 키우는 일만큼 인생의 부조리를 강렬하게 느끼게 되는 경험은 없는 것 같다. 이를테면 내가 애를 쓰고 용을 쓴다고 해서 그 아이가 내가 바라는 대로 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양육자가 툭 무언가를 놓아 버리면서(이건 에고가 될 수도 있고, 포장된 모성애가 될 수도 있다.) 그 지점에서 아이는 제 인생의 방향과 소명을 찾아 잘 독립하기도 한다. 양육은 그래서 삶에 대한 연습과도 비슷하다. 내가 원한 바대로 계획한 대로 절대로 풀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의미가 있기를 소망한다.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가 기대하지 않은 가르침을 준다. 새로운 균형점을 찾는다. 그 지점이 때로 더 좋기도 하다.
정말 좋은 책이다. 작법 책으로 환원해서 받아들이면 곤란할 정도로 인생에 대해 가르쳐 주는 게 더 많은 책. 작가와 관련 없이 그냥 모두가 읽었으면 하는 책이다. <바르도의 링컨>으로 맨부커상을 수상한 저자 조지 손더스가 시러큐스 대학 문예 석사 과정에서 25년간 젊은 작가들에게 한 강연의 핵심을 담은 책이다. 그가 선별한 체호프, 고골, 톨스토이, 투르게네프의 단편 일곱 편의 전문이 실제 실려 있고 이 작품들을 함께 읽는다. 그의 사전 안내 사항처럼 이 훌륭한 일곱 편의 단편은 "꼼꼼하게 구축된 세계 축적 모형"이므로 그것을 함께 읽는 과정은 결국 세계와 그 세계 안의 우리의 삶과 우리 자신을 함께 들여다보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의 위트와 재치를 겸비한 조지 손더스의 안내와 해석, 문제 제기는 전략적 삶의 독해의 지점으로 우리를 끌어들임으로써 시야를 확장하고 삶의 축소성을 해체하고 확장한다. 지금, 여기에서의 자잘한 고민들 안에서 갇혀 있는 우리를 해방시켜 더 심원한 의미의 삶의 지평을 조감하게 해준다. "기본적으로 우리 자신의 읽기를 지켜보는 것"은 우리의 내면을 성찰하는 일이기도 하다. 잠복된 욕망, 잊힌 기억들, 간과한 문제들은 다시 떠오르고 더 나은 해법을 향해 출항하는 여정에 그는 기꺼이 동행한다.
제사에도 인용된 체호프의 <구스베리>를 통해 그가 처음으로 톨스토이를 만나 수영을 했던 일화를 통한 두 위대한 작가의 교감에 대한 이야기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두려워하면서도 서로에게 얽매이지 않기를 바랐던 두 마음은 각자의 위대한 성취를 통해 드러나고 작품을 통해 공명한다. 비를 맞으며 호수에서 수영하는 이반이 행복의 부조리함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구스베리>는 결국 체호프가 사랑했던 톨스토이의 모순적인 모습에 대한 구체적인 응축체였던 것일 수도 있다는 저자의 해석은 우리가 결국 쓰기와 읽기를 통해 만나는 지대에 삶의 부조리함을 통한 연결의 실종을 복원하고 의미를 꿈꾸고 사랑을 지향하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나가야 함을 시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다시 돌아와서, 그 부조리함 속에서 그럼에도 의미와 연결이 가능한 쓰기와 읽기에 대한 희망을 다시 찾는 이야기를 읽게 되어 기쁘다. 조지 손더스의 학생 시절, 교단에서 그에게 체호프를 낭독해 준 대작가 토비아스 울프가 쓰는 일에 대한 모든 무의미한 이야기를 일소시켜준 것처럼 그의 이야기 또한 읽는 이들에게 그런 의미를 준다. 사는 일도 그러하다. 언뜻 부조리하고 불합리해 보이는 나날들, 희망과 이상을 짓밟는 것처럼 보이는 일들, 그 가운데에서도 나아갈 이유와 힘을 주는 이야기들을 듣게 되어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