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버거의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은 그간 읽어왔던 전형적인, 전통적인 소설이 아니다. 이것은 존 버거가 화자를 빌려 유럽의 도시들을 테마로 한 그의 삶에서 이미 고인이 된 어머니, 스승, 동창, 여자 친구에게 바치는 진혼곡으로 느껴진다. 그들은 사선을 이미 지나와 과거가 된 현재를 살기도 하고 그들이 잃어버린 미래를 '그'의 곁에서 경험하기도 한다. 마지막 장면은 그가 갓 결혼한 친구 신혼 부부를 기다리며 요리를 한다. 사랑을 하고 웨딩드레스를 입고 아이를 낳는 이 모든 찬란한 시간들이 결국 과거형이 되고 부서지게 될 거라는 것을 의식하는 그는 읽는 우리들의 저마다의 그 과거의 잃어버린 사람들, 사랑들의 현을 건드린다. 존 버거의 미덕은 이 찰나의 아름다움을 무용하고 무의미한 것으로 냉소해버리는 한계에 갇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럴 것임을 알아도 여전히 그 연약하고 이내 잊혀질 것들을 향유하는 인간들의 그 무모한 시도, 희망, 꿈의 무게를 세심하게 조율하는 일, 그는 마치 극도로 신중하고 유능한 피아노 조율사 같다. 그가 맞춰 놓은 건반을 두드리며 공명하는 기억들, 사랑들은 절절하다.






인간의 특징들 중에서 제일 소중한 것은 부서지기 쉬움이다. 이게 없는 경우는 없다.

- 존 버거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


한국의 독자들에게 남긴 서문에서 그는 얘기한다. "죽은 이들이 결코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다는 건 여러분도 나만큼-아니 어쩌면 더- 잘 알고"있다고. 그 앎의 형상화가 이 거장의 언어로 이루어질 때 우리는 비로소 그가 인용한 보르헤스를 깨닫는다. "우리는 이미 그 사람의 소유가 된 것만을 줄 수 있다."는 그 자명한 진실을...어쩌면 우리는 우리 안에 이미 있었던 그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깨치기 위해 이 처절하고 연약하고 고단한 삶의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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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이 세상에는 없는 카톡 친구의 프로필을 보면 형언하기 힘든 감정이 든다. 나는 그를 차마 삭제할 수 없다. 모르는 사람이 나의 카톡 친구 목록을 본다면 설마 이 친구가 이미 세상에 없다는 가정은 하기 힘들 것이다. 디지털 플랫폼은 의도치 않게 망자를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고정시켜 놓았다.

















심리학자 일레인 카스켓은 이러한 디지털 시대의 죽음에 대해 여러 사례와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의 의견, 저자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놀라운 통찰을 보여준다. 여기, 이 서재에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내 자신이 남기는 디지털 발자국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우리의 일상과 우리의 자아는 이제 더 이상 내밀한 것이 아니다. 페이스북, 인스타 등에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지인들과의 대화의 족적은 수시로 메신저앱으로 남는다. 이 조각들은 다 한데 뭉쳐서 우리가 더 이상 존재하기를 멈추게 될 때 특별하고 번거로운 유산이 된다. 그것은 유족들에게 숙제로 남는다. 더 이상 손으로 쓴 편지, 사진 몇 장, 일기책 몇 권의 유물이 망자의 유산의 전부가 되던 시대가 아닌 것이다. 여전히 삭제되지 않은 페이스북 계정, 트위터, 이메일 계정에서 때로 적절한 마침표를 얻지 못하는 죽은 자들의 이야기는 어쩐지 좀 섬뜩하기도 하다. 


매번 디지털 기기를 사용할 때마다, 당신은 죽은 뒤 남길 디지털 기념비에 벽돌 하나를 더 얹거나 자서전에 문장 하나를 더 추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레인 카스켓 <디지털 시대의 사후 세계>


저자는 이러한 디지털 자아의 접근성이 특히 가족에게 남기는 딜레마를 지적한다. 가족은 역설적으로 페이스북이나 인스타의 친구가 아니다. 심지어 망자의 애도를 위해 모인 친구들의 사이트에 접근을 거부당하기도 한다. 그것은 때로 판도라의 상자가 되기도 한다. 이미 죽은 자의 프라이버시는 자연인의 법률적 권리에 포함되지 않는 것인가에 대한 논쟁적 지점도 있다. 우리가 형성해 놓은 고인의 이미지가 때로는 와르르 무너져내리기도 한다. 이것은 21세기 디지털 시대가 여전히 죽음 앞에서 제대로 된 합의나 충분한 숙고가 없이 우왕좌왕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기업들도 유족들도 죽음과는 멀다고 생각하는 수많은 사용자들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눈부신 기술의 최첨단의 시대에 불멸의 환상을 자본주의적 욕망에 덧씌우지만 여전히 그것은 죽음에서 백전백패다. 


이 책이 그런 딜레마, 모순에 대한 방향이나 해법을 제시해주는데까지 나아간 것은 아니다. 그건 다시 여기 현재에서의 삶으로 회귀하는 한계를 깨지 못한다. 그럼에도 아무도 감히 묻지 못했던 디지털 시대의 죽음 이후에 대한 질문들은 유효적절하다. 내가 인터넷에 쓰는 댓글, 블로그에 올리는 글, 친구들과 주고받는 카톡 메시지들이 죽어서도 남는다고 생각하면 그것에 대해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기본 자세의 전환을 요구한다. 


디지털은 우리가 원하지 않든 원하지 않든 우리의 족적을 남긴다. 그것은 영원할 것 같지만 허무하게 삭제되어 버릴 수 있는 불안정한 것이다. 때로는 편항적인 왜곡으로 선별 편집될 우려도 있다. 그럼에도 때로 남은 자들은 그 흔적에서 때로 위안을 얻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을 여기에서 통제할 도리는 없다. 의식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이야기는 한계이기도 하고 위로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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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03-04 18: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저는 어제도 먼 다리 건너 어떤 분의 죽음을 추모하며 저녁 내내 죽음을 이야기했는데,
죽음 후의 디지털 영생은 생각지 못해본 부분이네요.

blanca님 친구분의 카톡을 지우지 못하신 마음, 확 옵니다..

Black Mirror에서 이런 내용 다룬 에피소드가 있는지 기억을 뒤지고 있어요.

blanca 2021-03-05 13:36   좋아요 1 | URL
아, 북사랑님 안 그래도 그 드라마 얘기 여기에 나와요. 제가 그래서 넷플릭스 찾아볼까 생각 중이었어요.

감은빛 2021-03-06 08: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사용하는 SNS 중에 이미 돌아가신 분들의 계정이 남아있는 경우가 몇 있어요. 그 계정이 돌아가신 후 그대로 멈춰있는 경우도 있고, 이후에 가족이 그 계정에 글을 남기는 경우도 있더라구요. 어쩌다 그의 기일에 글이 올라오면 오늘이 그 날이었구나 깨닫게 되기도 하구요.

가끔 아이들이 내 디지털 기록들을 찾아 읽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져요. 큰 아이는 이미 오래전부터 제 페이스북과 인스타계정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제가 아주 가끔 올리는 일상을 다 체크하고 있고, 작은 아이도 최근에 인스타 계정을 팔로우하더니 제가 몇 년간 올린 모든 게시물에 죄다 ‘좋아요‘를 찍더라구요.

그런데 아이들은 제가 아주 오래전부터 블로그를 이용해왔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어요. 예전에 주로 썼던 다른 블로그는 서비스가 종료되어 이제는 없어졌고, 이 알라딘 서재도 언제 없어질지 알 수 없지만, 언젠가 아이들이 이 서재를 발견하고 글을 읽으면 어떤 생각을 할까 정말 궁금해요. ㅎㅎ

아참, [블랙 미러] 시리즈는 정말 잘 만들었어요. 한 편 한 편 담고 있는 문제의식과 풍자가 정말 좋았어요. 대부분 마치 영화처럼 짜임새가 좋고, 익숙한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를 볼 수도 있구요.

blanca 2021-03-06 13:50   좋아요 0 | URL
아빠 SNS에 ‘좋아요‘를 누르는 아이 모습이 상상되어 귀엽네요.^^
저는 아직 사실 잘 모르겠어요. 죽음과 글, 남기고 가는 것. 아직은 더 시간이 지나서 좀 초연하고 거리두기가 되 어야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을 듯합니다. <블랙 미러>그렇게 얘기하시니 한번 봐야겠네요.
 

어떤 책은 그 책으로 가는 다리가 된다. 그렇다고 그 '어떤 책'이 사소한 것은 아니다. '그 책'은 이제 그 '어떤 책' 없이 떠올릴 수 없게 된다. 

















남의 소설을 읽지 않는  소설가들이 있다. 남의 글을 읽지 않는 작가들처럼 나는 그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가장 잘 읽을 수 있는 사람이 가장 잘 쓸 수는 없을지언정 읽지 않는 사람이 자기 아집이나 편견에 갇히지 않기란 쉽지 않다. 어슐러 르 귄의 서평은 그러한 면에서 대단히 놀랍다. 그는 대단한 작가이기에 앞서 성실하고 열정적인 독자다. 그의 서평들은 놀랍다. 전문적인 비평과 독서를 즐기는 평범한 독자 사이의 균형감이 빛난다. 모두가 열광하는 작가나 이야기에 대한 결정적인 취약점에 대해서도 솔직하다. 그런 그가 끝까지 사랑하고 경의를 표하는 작가가 있다. 


그는 나와 같은 세대의 소설가 중에서 내가 몰랐던 것, 아니 어쩌면 내가 아는줄 몰랐던 것들을 말해 주는 유일한 소설가다. 내가 아직도 배우게 되는 유일한 소설가다.

-어슐러 K. 르 귄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


그 작가는 주제 사라마구다. 르 귄은 그를 극찬한다. 아니, 이 작가를 사랑한다. 그 사랑과 열광이 너무 절절하게 전해져 와서 이 대목을 읽고 사라마구의 그 뭐라도 다시 찾아 읽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다. 


















노벨 문학상을 탄 팔십이 훌쩍 넘은 노작가는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고 그럴 듯하게 윤색하는 대다수의 다른 이들이 걷게 되는 그 길과 거꾸로 걸어간다. <작은 기억들>은 포르투칼 소년의 이야기다. 사고를 치고 여자 친구를 사귀고 이웃의 불륜 현장을 목격하고 짐짓 시치미를 떼는 사춘기 소년의 고백들은 절로 킥킥 웃게 하고 때로 아슬아슬해서 식은땀을 흘리게 하고 애잔해서 자주 눈물 짓게 한다. 그러나 전 생애를 회고하는 것보다 오히려  이 소년기의 이야기가 위대한 노작가를 더 생생하게 떠올리게 한다. 사라마구가 팔순이 될 때까지의 자신의 전 생애를 이야기하는 것보다 곱절은 더. 이 익살맞고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악동의 모습에서 우리는 미래의 디스토피아적 세계를 치밀하게 직조한 작품을 써 낼 작가의 탄생을 예감하게 된다. 


"너였던 소년이 이끄는 대로 내버려두거라."

-[훈계의 책]에서


그가 자랐던 아지냐가 마을의 눈부신 풍광에 대한 찬란한 묘사와 조부모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절창이다. 


아흔 살 인생의 평정심과 한 번도 잃은 적 없는 소녀 시절의 불꽃으로. 세상은 참으로 아름답단다. 그래서 죽는 것이 너무도 슬프단다.

-주제 사라마구, 작은 기억들


발랑 까진 소년기의 에피소드를 고백하며 "그랬다. 그때는 참으로 순수한 시절이었다."라고 짐짓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작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비로소 르 귄이 왜 유독 이 작가를 사랑했는지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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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박완서에 빠져 그의 글 전부를 읽겠다고 덤빈 적이 있다. 그는 이야기꾼이다. 별스럽지 않은 소재에서 끌어내는 이야기가 어찌나 맛깔스러운지 읽는 재미를 톡톡히 준다. 개성 근처의 박적골에서의 유년 시절의 자전적이 이야기, 6.25의 상흔이 개개인의 삶에 미친 여파, 중산층의 삶의 허위 의식, 위악, 속악함에 대한 형상화가 주종을 이룬다. 


소설뿐 아니라 하루키처럼 그의 소설적 재료의 원형들인 것 같은 그의 에세이 또한 참 좋다. 소설보다 오히려 더 절제되어 있고 때로 소설보다 더 드라마틱한 경우도 많다. 언어를 통과하는 삶의 깨달음과 비의들이 다시금 봐도 하나하나 직접적으로 와닿는다. 어릴 때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대목들도 이제 지금에 와서 읽어보니 세월과 더불어 더없이 공감된다. 

















잡문 하나를 쓰더라도, 허튼소리 안 하길, 정직하길, 조그만 진실이라도,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진실을 말하길, 매질하듯 다짐하며 쓰고 있지만, 열심이라는 것만으로 재능 부족을 은폐하지는 못할 것 같다.

-박완서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글은 때로 인장 같다. 사소하고 하찮은 일이 아니다. 두고두고 남아 내 자신의 정체성의 조각처럼 여겨질 수도 있고 세상에 대한 하나의 시선이자 입장으로 자리매김할 수도 있다. 박완서 정도의 작가가 스스로에게 들이대는 엄정한 잣대의 울림이 큰 이유다.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의 제목은 여기에서 왔다. 그것은 언뜻 미소해 보여도 엄청난 것이다. 진실은 쉽지 않고 때로 눈앞의 이익해 반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럴 때 망설임 없이 밀고 나가는 힘은 스스로를 다잡으며 나온다. 세태에 휩쓸리고 사리사욕에 흔들리다 보면 진실은 저만치 물러가 버릴 때도 있을 것이다. 글을 쓰는 일은 삶을 사는 일과 같다는 작가의 언질처럼 들린다.


그에게는 그만을 위한 서재가 없었던 시절이 길었던 모양이다. 남편이 생존해 있을 당시 그의 옆에서 피고한 몸으로 하루를 글쓰기로 마감하는 정경이 그려져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번듯한 서재보다 그러한 글쓰기가 더 익숙하고 좋다는 그의 고백이 귀엽다. 


마지막에 대한 바람을 눌러 적어놓고 싶었다. 


그리고 남편을 사랑하고 싶다. 가족들의 생활비를 벌어 오는 사람으로서도 아니고, 아이들의 아버지로서도 아니고, 그냥 남자로서 사랑하고 싶다. 태초의 남녀 같은 사랑을 나누고 싶다. 

이런 찬란한 시간이 과연 내 생애에서 허락될까. 

-중략-

가을과 함께 곱게 쇠잔하고 싶다.

-박완서<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그의 소망을 닮고 싶다.  그는 이미 이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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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21-02-18 07: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박완서님의 글. 저도 참 좋아하는데 blanca님 페이퍼 보니 이 책도 얼른 읽고 싶네요.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작가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blanca 2021-02-18 16:36   좋아요 0 | URL
여전히 좋아요... 마음이 참 재독한 글도 있는데도 여전히 새롭고 울림이 있네요.
 

나는 코로나를 낙관하지 않는다. 단기간에 깔끔하게 끝나고 모두 한꺼번에 마스크를 벗어버릴 날이 조만간 올 거라고 개인적으로 믿지 않는다. 국경을 예전처럼 자유롭게 넘나들고 지구촌 일일 생활권이 회복될 거라 쉽게 낙관할 수도 없다. 특히 유럽의 상흔은 더 오래 남을 거라 생각한다. 이민자와 여행자에 대한 관용과 너그러움은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 국가가 방역을 위하여 개인을 통제하는 것이 당연시될 때 그것은 전체주의로 흐를 위험성도 직시해야 하는 일과도 맞닿아 있다. 우리는 서로를 믿지 않고는 인간적인 신뢰에 기대지 않고는 도저히 방역을 달성할 수 없다. 


이것은 지구의 인간에 대한 반격이다,라고 쉽게 단정지을 수는 없다. 야생동물의 포획과 가금류의 집단 사육이 코로나의 단초를 제공했으리라 보는 시선은 그것의 일부일 것이다. 지구의 온난화가 바이러스의 활성화를 도왔다는 것 또한 전부일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결국 우리의 존재 자체로 코로나에 기여했다. 그리고 그것을 막고자 쓰고 버리는 일회용 마스크들, 일회용 식품 용기들은 역설적으로 다시 지구 환경 파괴에 일조하고 있다. 그것은 다시 지구의 온도를 올리고 바이러스가 증식하기 쉬운 환경을 만든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우리는 살기 위해 끊을 수 없다. 그것은 분명 암담한 역설이다. 우리는 살기 위해 끊임없이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대지와 마시고 있는 공기와 물을 더럽히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살기 위해 사랑과 접촉과 신뢰를 거부해야 하는 비대면의 관계의 풍토에도 적응해야 한다. 때로는 이것이 인간인가, 이것이 삶인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친구를 만나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는 일, 부모님과 식사를 하는 일, 연인과 입맞추는 일이 가해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아찔하다. 나의 모든 일상이 최악의 경우 심판의 대상이 될 수 있고 간접적 가해가 될 수 있다. 




















저자 정혜윤은 피렌체의 보카치오가 흑사병으로 부모와 친구를 잃고 쓴 <데카메론>의 열 가지 주제를 가지고 21세기의 코로나 시대의 사랑의 이야기를 쓴다. 디스토피아를 통과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현실의 감각을 중세에서 근대를 향해 나아가고 있던 시대의 인문학자의 농염한 사랑의 테마로 재편한다. 그것은 여기에서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이 지엽적이고 구체적인 재해를 조금 더 본질적이고 거시적인 안목에서 다시금 통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욕망하고 생존하느라 짓밟고 간과했던 것들을 비로소 응시할 수 있는 관조의 시간을 선물받는다. 그것은 아프고 사무치는 일이다. 우리가 파괴하고 우리가 떠나보낸 지구의 근원적인 아름다움, 생명들을 다시금 찬찬히 돌아봐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카뮈의 <페스트>, 루이스 세풀베다의 <연애 소설 읽는 노인>, 마거릿 애트우드의 <오릭스와 크레이크>, 어슐러 K. 르 귄의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 등 수많은 텍스트들이 정혜윤의 언어를 통과하여 정리되고 팬데믹의 시대의 각주이자 미주가 된다. 우리가 막상 온몸을 담그고 있어 그 어떤 전체적인 조망도 불가능한 현실이 무언가 조금 더 투명하고 명징하게 떠오르는 느낌이 드는 읽기다. 


그녀는 잃어버린 사랑, 회복기의 사랑에 기댄 낙관을 이야기한다. 우리가 그럴 수 있을 때 우리가 꿈꾸는 내일은 디스토피아를 통과하고 유토피아로 상승한다. 믿고 싶다. 아이들이 마스크를 벗고 친구와 함께 떡볶기를 먹고 노래를 부르는 게 꿈이라는 건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그건 내가 누렸던 어제인데 그 어제를 마치 내일처럼 기약해야 하는 건 참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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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2 2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2-13 09: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감은빛 2021-02-13 20: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역시 인류가 코로나19 바이러스를 쉽게 극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어요. 이 전대미문의 팬데믹은 과연 얼마나 더 인류와 지구 곁에 머물지 궁금합니다.

blanca 2021-02-14 10:49   좋아요 0 | URL
감은빛님은 더 잘 체감하실 것 같아요. 인정하고 나면 순간순간 더 마음이 내려앉아요....그냥 인간의 존재 자체가 지구에 해가 되는 느낌... 생각이 많아지는 요즘입니다...

단발머리 2021-02-15 10: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작년 3월, 4월이 제일 힘들었구요. 차라리 지금은 반 정도 포기한 상황인데 조카 아이를 보면 이제 초등 2가 되는 조카를 생각하면 맘이 그렇게 우울해요. 학교 들어가서 제일 먼저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옆에 친구랑 이야기 하지 마‘였구요. 짝궁이 뭔지 몰라요. 거리두기 때문에요 ㅠㅠㅠ
저도 이 책 찾아서 읽어봐야겠어요. 나온 줄은 알고 있었는데 블랑카님이 읽으셨다니 저도 읽어야겠다는 그 어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감염 도시>가 기억나네요. 저 그 책도 블랑카님 소개로 읽게 되었더랬죠^^

blanca 2021-02-19 15:40   좋아요 0 | URL
흑, 제 아이가 그 코로나 1학년입니다. 친구들 얼굴도 잘 몰라요. 요새는 아이들 몸을 서로 터치하는 놀이를 하면 애들이 운다면서요. 저도 어느새 마스큼 안 쓰고 걷던 때가 너무 비현실적으로 느껴져요. <감염 도시> 다시 읽어 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