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교보문고였을 것이다. 초등학교 6학년, 나는 거기에 서서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읽었다. 물론 중역본이었고(당시는 그랬다), 축약본이었다. 무척 지루했고 음울했지만 나는 "읽었다"고 이야기하고 싶은 허영으로 서서 온전치 않은 <죄와 벌>을 말 그대로 활자만 읽었다. 이후로 나는 내가 <죄와 벌>을 읽었다고 착각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대학생 청년이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고 창녀와 유형을 가는 이야기로 그렇게 기억하면서...





다시 <죄와 벌>을 읽기로 결심한 것은 팟캐스트를 듣고 전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죄와 벌>을 평생에 걸쳐 여러 번 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였다. 이렇게 활자가 폄하되는 시대에 1800년대의 러시아어로 쓰인 분량도 적지 않은 책이 여전히 읽힌다는 건 분명 그걸 읽음으로써 얻는 게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죄와 벌>의 완역본을 제대로 읽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음과 동시에. 


다시 읽은, 아니 처음부터 제대로 읽은 <죄와 벌>은 놀라웠다. 놀라운 현재적 가치를 지닌 그야말로 위대한 작품이었다. 전혀 지루하지 않았고 고답적이지 않았고 몰입이 어렵지 않았다. 무엇보다 청년 라스콜니코프가 고작 스물세 살이었다는 점. 가난한 법대생이 아니라 정말 처절할 정도로 극한 빈곤에 시달려 대학 생활도 지속할 수 없었던 비참한 상황이었다는 점. 폭력적이고 충동적인 성격이 아니라 오히려 누군가 어려움에 처하면 바로 뛰어들어 도와주고야 말았던 내적 선함을 간직했던 청년이었다는 점. 끝까지 자백과 은폐 사이에서 갈등했다는 점. 그러한 점들이 새롭게 읽혔다. 그리고 친구 라주미힌. 라스콜니코프 곁을 끝까지 지키고 그의 여동생과 어머니를 책임지는 그의 우정이 감동적이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위대한 점은 그가 창조하는 캐릭터가 가지는 설득력이다. 많은 작가들이 죽어 있는 전형적인 인물을 자신의 각본대로 움직이기 위해 활용한다. 잠깐 흥미로운 에피소드로 스토리 자체에 몰입하거나 재미를 느꼈다는 착각을 할 수는 있지만 진짜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와 같은 인간을 창조해내지는 못한다고 생각한다. 이 지점에서 소설이 하나의 성취로 가는 경계가 나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인물들은 모두 살아서 지면을 뚫고 나온다. 특히 라스콜니코프의 여동생 두네치카에게 흑심을 품고 덤볐다 자살을 택하게 되는 스비드리가일로프의 죽음 전 행적은 인상적이다. 여자를 탐하고 아내를 독살했다는 의혹까지 받는 그가 죽기 전 택한 일은 놀랍게도 자선이었다. 부모를 잃고 의지가지 없어진 소냐의 동생들이 살아나갈 방도를 세심하게 마련해 준다. 유들유들하게 라스콜니코프를 압박해 오는 판사 포르피리 페트로비치 또한 의외의 면을 보여준다. 그는 언뜻 라스콜니코프의 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에게 삶 그 자체의 가치를 깨닫도록 주도면밀하게 이 청년에게 접근해서 감형을 유도해 낸다. 이 둘은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과는 다른 내면을 지니고 궁극의 영향을 주인공에게 끼치게 된다.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르고 그 사실을 고백할 수 없지만 결국 지금 이 세계를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껴안고 어머니 앞에 선 아들의 장면은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저릿했다. 



"아, 어쩜 이렇게 더러워졌니."

"어제 비를 맞았어요, 어머니......"


이 짧은 대화만으로 모든 것을 모자는 소통한 것처럼 보인다. 둘이 미처 주고받지 못한 말들 사이로 엄청난 고통의 시간들이 지나간다. 어머니는 전도유망했지만 가난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아들에게 이루지 못할 희망을 끝내 환각처럼 간직한다. 살인자로 유형을 떠난 아들. 


결국 자백하고 소냐와 함께 유형을 떠난 라스콜니코프의 엔딩. 마침표는 사랑의 발아다. 나는 이런 결말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도스토옙스키는 음울하고 절망적인 비관적인 결말을 예정하고 글을 쓰는 사람인 줄 오해했다. 이런 아름다운 아쉬운 결말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살인자의 이야기를 삶으로 사랑에 대한 기대로 끝낼 수 있는 작가가 이 지구상에 이 작가 말고 또 있을까? 나는 알지 못한다. 끝까지 참회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악행을 정당화하지도 않으면서 읽는 이들이 사랑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그런 인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작가도.


하지만 여기에서 이미 새로운 이야기가, 한 인간이 점차 새로워지는 이야기가,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점차 옮겨가고 지금까지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현실을 알아가며 점차 다시 태어나는 그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것은 새로운 이야기의 주제가 될 수 있겠지만, 지금 우리의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을 맺는다.

-<죄와 벌> 도스토옙스키


선과 악의 경계, 죄와 벌의 간극, 생과 죽음의 거리, 이 모든 걸 기꺼이 해체하여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의 지형도를 펼쳐낼 수 있는 그러한 책을 읽을 때 느끼는 감동은 읽는 일이 가지는 가치를 재발견하게 한다. 나는 오늘 비로소 제대로 <죄와 벌>을 처음으로 읽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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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1-09-15 19:2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두 올해안 죄와 벌은 꼭 다시 읽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올해가 도끼쌤 탄생 200주년이라 해서 나름 추모하려구요!ㅎ 30대에 읽은 어설픈 감정만 가지고 있는데 이 책을 이해할수 있는 좋은 키워드를 많이 던져 주셨네요! 감사드리구요, 즐건 독서하시구요!ㅎ

blanca 2021-09-16 10:26   좋아요 0 | URL
막시무스님, 왜 사람들이 도끼, 도끼 하는지 벌써 태어난 지 200년이 된 작가의 책을 여전히 이야기하고 읽는지 저는 이제야 알겠더라고요. 이 사람은 뭔가 경계를 넘어서 훨훨 날아간 사람인 것 같아요. 책의 문장들이 살아 있어요.

다락방 2021-09-15 19:3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죄와 벌 다시 읽겠습니다. 저는 열린책들 읽었었는데 아 열린책들로 다시 읽을까요(가지고 있습니다) 블랑카 님처럼 문동으로 읽을까요. 아 너무 빨리 읽고 싶어요!!

막시무스 2021-09-15 19:51   좋아요 2 | URL
책을 읽겠다는 강한 의지는 구매로서 완성된다는 신념을 가진 1인으로서 문동판 구매를 적극 권장드립니다!ㅎ

다락방 2021-09-15 20:05   좋아요 2 | URL
아아.. 왜 이러시는 겁니까……. 흑흑 ㅜㅜ 그게 낫겠죠? 🙄

blanca 2021-09-16 10:27   좋아요 1 | URL
ㅋㅋㅋ 다락방님, 우리의 재독은 소비를 합리화한다. 저는 요새 이렇게 새로 나온 버전으로 다시 고전을 읽는 재미에 빠져 있답니다. 새 종이의 감촉을 느껴 보시죠. 가독성이 정말 좋더라고요.

새파랑 2021-09-15 21:4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글 보니까 죄와벌을 다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전 이 책 너무 좋더라구요. 좋은 책은 다시 읽을수록 느낌이 다르더라구요~!!

blanca 2021-09-16 10:28   좋아요 1 | URL
고전이 왜 고전인지 알겠더라고요. 진짜 마지막 장 읽는데 더워 죽겠는데 온몸에 소름이 돋더라고요. 작가는 그냥 태어나는 것 같아요.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접신들린 작가 같아요. 인물들이 만들어진 게 아니라 그냥 도스토옙스키한테 쏟아져 들어온 느낌....

라로 2021-09-15 22: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글을 읽으니 다시 제대로 읽고 싶어져요!!! 저도 열린책으로 읽었는데 문동으로 다시 읽어볼까요? 그런데 전자책이 없네,, 철푸덕

blanca 2021-09-16 10:30   좋아요 0 | URL
이미 읽으셨군요! 저는 한 권짜리(말도 안 되는 축약본이죠) 완전 오독한 상태에서 제대로 처음 읽으니 정말 너무 너무 좋더라고요. 너무 짧아서 화가 날 정도였어요. 고전은 언제나 다시 읽어도 새로운 감상이...아, 그런데 왜 전자책이 없을까요? 조금 기다리시면 나오지 않을까요? 보니까 세문은 거의 전자책으로 나와 있더라고요.
 

우리나라에서 이십 대와 사십 대가 친구가 될 일은 없다. 친구가 되는 선결 조건은 전제는 일단 연령대가 같아야 한다. 세상을 보는 시선, 세상에 대해 가지는 불만, 기쁨을 느끼는 지대가 겹쳐야 비로소 대화는 시작된다,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생각한다고 나는 여긴다. 비슷한 연령대의 친구가 아닌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나에게 하는 조언이나 의견은 잔소리가 된다. 발끈한다. 요즘 애들은 저러니까 안 돼, 저 아줌마는 꼰대스러워. 모든 이해와 곡해는 세대차로 환원된다. 서로가 서로를 배제하고 경계한다.


아주 예쁜 이탈리아 친구는 나보다도 훨씬 나이가 어렸는데 나를 자신의 친구라고 불렀다. 아이가 동갑이라 친해진 우리는 서로의 나이를 끝까지 모른 채 헤어졌다. 그래서 우리는 정말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우리가 나이 차가 많이 난다는 이유로 애초 친구가 될 수 없다고 여겼다면 우리가 나눴던 그 수많은 교감의 시간은 오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 우정을 그리워한다. 그러한 우정은 나이가 절대적인 경계라 여겨지는 사회에서는 바랄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그런 교감은 간접적으로 읽기를 통해서 가능할까.
















젊은 작가 서이제의 문장은 특이하다. 확실한 단언형이 아니라 의심과 머뭇거림, 전복과 도치의 그것들로 해체된다. 그런데 어렵지 않다. 난해하지 않다. 그 흐름은 무언가 어떤 리듬감이 있어 이탈하지 않게 하는 힘이 있다. 내가 느꼈던 모든 것들, 그리고 심지어 지금 느끼는 것들이 혼재되어 공감을 자아낸다. 나는 서이제 작가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서이제 작가는 내가 이십 대에 느꼈지만 미처 언어화하지 못한 추스르지 못한 감정들을 언어로 소환한다. 지금도 여전히 내게 있는 것들을 환기한다. 


길을 걷고 있을 때는 내가 어디쯤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길을 잃었을 때, 앱으로 지도를 보면 내가 어디쯤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내가 어디쯤 있는지 알고 있다면, 나는 이런 말도 할 수 있었다. 이제 거의 다 왔다고 조금만 더 참으라고. 또는 반쯤 왔다고 힘내라고. 또는 한참 멀었다고. 지도를 보면 지금 내가 잘 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현 위치와 내가 가야 할 길, 그러나 삶에는 지도 같은 게 없어서, 그런 건 있을 수가 없어서, 나는 내가 잘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한 채, 그저 살아야 했다. 

-서이제 <(그) 곳에서>


우리가 소환하는 청춘에 대한 미화된 이상화된 그리움과 지금 청춘이 그들의 젊음에 대하여 느끼는 현실적 결핍의 간극에 대한 이야기도 와닿았다. 경제적 성장기에 향유한 우리들의 청춘과 잔치가 끝난 뒤의 그 허탈한 공간에서 방황하며 자신이 살 곳을 찾아 헤매어야 하는 오늘날의 청춘과의 거리에 대한 이야기에 가슴이 저릿했다. 어쩌면 우리는 여기에 대하여 더 이야기했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젊음은 무조건 좋은 것이다,라고 지금 한창 힘든 젊음에게 얘기하는 것은 결국 의사소통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인지도 모른다. 


돈이 되지 않는 무용한 것들을 꿈꾸는 이야기. 그래서 야단맞다 넘어지는 이야기. 그러한 이야기들에 마음이 가라앉을 찰나에 서이제 작가의 문장들은 부력을 부린다. 진지한데 한없이 무겁지만은 않은 이야기들로 읽는 이들도 덩달아 떠오를 수 있는 그런 이야기들을 만드는 작가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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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이라는 건 언뜻 절대적일 것 같지만 상황에 따라 대단히 상대적이다. 모두 여성인 집단, 남성이 대다수인 집단에서 내가 여성으로서 느끼는 감각은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홍일점인 집단에서 일 년 정도 근무하며 나는 내가 당하는 어떤 불합리, 부당한 일들을 대부분 내가 여성이라는 성정체성을 통과한 후 해석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됐다. 분명 그것과 상관 없는 상황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점점 더 그렇게 됐다. 그건 내가 평등하게 대우 받거나 평가 받지 못한다는 반복된 경험에서 비롯된 편향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어떤 경험을 반복해서 하게 되면 나는 때로 그 경험의 소유자가 아니라 노예가 된다. 


몇 년 전 해외에 있으면서 백인들 속에서 나는 또 비슷한 경험을 했다. 점점 그들이 하는 말, 행동들을 내가 아시아 여성이어서 이렇게 말하는 건가? 내 피부 색깔이 이러해서 그런 건가? 내가 백인이어도 그랬을까? 스스로에게 반문하게 됐다. 분명 전혀 인종과 상관 없는 상황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 프리즘을 통과해서 사람들의 나에 대한 시선을 자꾸 해석하게 됐다. 심지어 내가 흑인이었다면? 이런 가정을 하게 된 적도 있다. 전적으로 인종차별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아직도 남성과 여성인 것이 사소한 일이 아닌 것처럼 링컨이 노예 해방을 선언한 지 백육십 년 가까이 흘렀음에도 피부 색깔은 여전히 중요했다. 의식하거나 미처 의식하지 못했거나 아시아 여성과 백인 여성과 흑인 남성과 백인 남성의 삶은 여러가지 의미에서 다르게 흘러간다. 
















백인의 외모를 갖춘 흑인 여성이 백인 행세를 하는 것. 그럴 수밖에 없는 그 상황을 상상해 본다. 흑인 여성으로 사는 삶이 백인 여성으로 사는 그것과 전혀 다른 열등한 경로를 가고 마침 자신이 백인과 비슷한 용모를 갖추고 있다면 분명 유혹적인 상황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자신들의 리그를 떠나간 친구가 마침내 다시 돌아왔을 때 느낄 이중적인 감정은 짐작이 간다. 아이린은 친구 클레어의 패싱의 비밀을 지켜주고 싶기도 하고 그것에 공모한 죄책감에 괴로워하기도 하며 한편 그녀가 파멸하기를 바라는 욕망 사이에서 갈등한다. 패싱을 단죄하는 것 같은 결말이 씁쓸하다. 


안온한 자리, 절대적인 안정은 삶에서 없다. 고정적인 정체성도 없다. 우리가 여기에서 지금 누리는 것들은 결국 지금 우리의 욕망의 상한선 아래에서 맴돈다. 노화와 죽음을 배제한 욕망은 환상 그 자체다. 그러나 그 환상 없이 일상을 지속하기란 어렵다. 이 모순의 줄타기가 삶이다.
















오십 대가 되어 추방당한 고향 베네치아로 돌아가기 전 카사노바는 한때 후의를 베풀었던 올리보의 영지에서 그의 조카딸을 만나 애욕을 품게 된다. 더 이상 젊음도 외적 매력으로도 젊은 여자를 유혹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는 과정은 비참하다. 모두가 카사노바라고 생각했던 그 화려한 성적 매력은 연기처럼 허무하게 사라졌다. 어쩌면 그때부터가 진짜인지도 모른다. 우리를 우리이게 만드는 그 모든 것들을 걷어내고도 우리는 스스로를 여전히 확인할 수 있을까? 그 진지한 물음에 정답은 없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아이즈 와이드 셧>의 원작이 된 <꿈의 노벨레>는 단지 부부의 성적 판타지의 화려한 향연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관한 진지한 성찰이다. 의사 프리돌린이 자신의 욕망에 눈을 뜨게 되는 과정에서 환자의 죽음을 경험하는 건 우연이 아니다. 우연히 참석하게 된 가장 무도회에서 만난 욕망의 대상이 딱딱한 시체로 돌아왔을 때 그가 느낀 허무와 놀라움에 대한 묘사도 그러하다. 우리가 딛고 선 생의 지반은 어쩌면 모두 허위인지도 모른다. 진짜라고 여겼던 것들을 해체하고 정상과 비정상, 현실과 환상의 경계의 철책을 과감하게 허무는 슈니츨러의 글쓰기는 경이롭다. 마침내 프리돌린이 아내 곁에 누웠을 때조차 우리는 그것이 그가 원래의 삶으로 안온하게 귀가한 것이 아님을 알아차린다. 좌절된 욕망의 집적이 생임을 암시하며 작가는 비정하게 떠나버린다. 이것은 <패싱>도 다르지 않다. 다른 세계로 자신의 욕망이 실현되는 곳으로 건너갔다고 생각한 순간 파멸하는 인물들의 모습은 씁쓸하다. 이야기는 대안의 세계가 아니라 그 세계에 대한 환상을 그리는 것으로 그친다. 


결국 돌아오는 곳은 여전히 우리가 도망가려고 애썼던 바로 그 현실이다. 여전히 욕망은 실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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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아이는 로알드 날의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 흠뻑 빠졌다. 작가 로알드 달이 이미 죽었다는 얘기에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진짜처럼 느껴지는 환상적인 세계의 건설자가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모양이다. 지금 여기에서 감동을 느끼는 이야기의 화자가 저 세상에서 나에게 말을 거는 듯한 읽기는 죽음이 가지는 불가해성의 정점을 통과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나도 최근에 아이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김희준 시인은 1994년생인데 불의의 사고로 이미 이 세상에 없다. 유고가 된 시집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은 깊고 넓고 새롭다. <행성표류기>는 산문인데 우주 여행자인 '나'를 화자로 하는 만큼 소설로도 읽힌다. "내 몸에는 은하가 흐르고 유전자에는 외계가 섞여 있다."는 시인의 고백을 근거로 삼자면 그 '나'는 어렸을 때부터 천계도감을 끼고 살았던 우주의 별이 되어버린 시인 그 자체로도 보인다. 


목동자리, 처녀자리, 궁수자리, 백조자리, 오리온자리마다 얽힌 시인의 언어로 재해석되어 재창조된 신화 속에서의 이야기들은 거대한 산문시이자 인생에 대한 오묘한 철학책처럼 읽힌다. 별자리마다 지도를 구해 다음 행성으로 이동하는 여행자는 현실을 떠나 있는데 어쩐지 '생의 곡진함'을 품고 있다. 


크리스마스트리성운은 오리온대성운에 속해 있다. 헤아릴 수 없는 별이 성운 안에서 태어나고 늙어간다. 생과 사가 동시에 이루어지니 성운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 어느 곳이라고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김희준 <행성표류기>


스콜처럼 하늘에서 편지가 내려 살아있는 글씨가 손바닥에 묻는다는 백조자리의 이야기는 김희준 시인의 편지가 읽는 이에게 어떻게 내려 꽂혀 인장을 만드는지에 대한 은유처럼 들린다.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시인의 언어가 살아 있다. 그녀의 세계는 이렇게 허무하고 신산한 현세의 삶을 해체하여 우리가 잃어버린 진짜를 진정으로 그리워하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마무리는 분명히 있어, 엄마.

                                          2020년 6월

예언 같은 말. 그것은 어쩌면 시인 그 자신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보내는 하나의 거대한 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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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를 쓰지는 않는다. 대신 플래너에 매일매일 일어났던 중요한 일들과 단상을 적는다. 아마 스무 살 때부터였을 것이다. 그때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가느다란 펜으로 이제는 알아보기도 힘들 만큼 깨알 같은 글자들로 대단치도 않은 일에 겁나 호들갑을 떨며 아무도 알고 싶지 않을 디테일들로 채워졌다면 이제는 "오늘 ~가 왔다. 후회한다, 두렵다. 기쁘다. 좋다." 등등 초 단답형의 단문들로 내 일상들이 설명된다. 그마저도 너무 피곤할 때는 공란이다. 그래서 분명 중요한 일들이 있었고 많은 생각들이 지나갔을 한 주가 통으로 공백일 때가 있다. 그 공간은 나의 피로와 권태를 설명한다. 이제 정말로 기억하고 싶은 특별한 일들은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매일매일 일기를 쓸 거리들로 충만했던 과거들을 그리워한다. 하지만 때로 너무 벅차서 이를테면 기쁘면 너무 신이 나 잠이 오지 않았고 조금이라도 긴장되면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이 모든 감정들이 과대하게 부풀어 올랐던 그 시기의 격렬함이 피곤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니 단 한번이면 충분한 걸까? 그런 시간들은.

















아, 정말 최고였다. 너무 좋아서 잠시 저자 문보영의 일기 구독 서비스를 신청할까도 해봤지만 지금은 신청 기간이 아니다. 남의 일기를 읽는 게 이렇게 즐거운 일인줄 몰랐다. 사생활 염탐 차원의 얘기가 아니다. 모든 익숙한 사물들, 풍경들이 저자의 시선을 통과하면 그녀의 언어를 통해 전혀 낯선 신비로운 것들로 돌변한다. 새로울 것 없는 방의 구조도를 삐뚤빼뚤하게 그려서 그 방 안의 동선을 통해 한 편의 글을 써낼 수 있는 작가라니. 재기와 재치가 글마다 뿜어져 나온다. 대학 시절 우연히 듣게 된 시인의 강의를 시작으로 그가 운영하는 종각에서의 시 수업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함께 시를 배우며 등단하게 된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언뜻 김연수의 <세상의 끝 여자 친구>를 떠올리게 한다. 종각으로 가는 지하철에서 시를 퇴고하고, 오는 길에 오십 번씩 읽었다는 이야기는 그렇게 해서 결국 등단하게 된 그녀가 쓴 <일기시대>가 깊고 여러 층위를 가지게 된 연원을 짐작하게 해준다. 무언가를 깊이 사랑하게 되면 그렇게 되면 결국 드러나지 않더라도 내면에서 숙성하는 것이 있고 그것은 마침내 무르익어 바깥으로 드러난다. 그녀의 이야기는 사적인데 시시콜콜하지 않고 무겁지 않은데 진지하다. 보고 듣고 경험하는 모든 것들이 자신만의 시선과 정제된 언어로 재편된다. 


인생의 대부분의 시간 나는 너무 사람이다. 그래서 종종 사람이 아닌 시간이 필요하다. 가끔 사람으로부터 멀어지려는 나 자신을 응원하고 싶다.-문보영 <일기시대>


아, 바로 이거였다. 나도 너무 사람이어서 너무 사람만 되려 해서 문제였던 거다. 그래서 내 플래너의 몇 주는 텅텅 비어버린 것이겠지. 이젠 사람이 아닌 곰탱이도 되고 나무늘보도 되고 돼지도 되면서 버티지 말고 그냥 즐겨야지. 


그래도 일기를 다시 쓰지는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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