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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여자를 만나는 일에 관하여. 

하루키와는 그렇게 만났다. 그때가 스무살이었는지, 스물두살이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매일 붙어 하루를 고스란히 공유하고 완벽한 이상형이라며 서로의 짝사랑 상대를 신격화하는게 소일거리였던 나와 그녀. 그녀는 갑자기 하루키에게 완전히 빠졌다. 하루키는 일순간 교주가 되었다. 사실 하루키가 아니더라도 그 나이때는 무언가 완전하게 몰입하고 찬탄할 대상을 하이에나처럼 찾아 헤매는 시기이니까. 그리고 그녀는 하루키의 책을 읽을 것을 강권하기 시작했다. 절독시기였던 나는 모든 문자화된 것을 거부하는 것이 무슨 젊음의 특권인마냥 살고 있었기에 그녀의 청을 유야무야 밀어내고 있었다.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정말 눈물나도록 예쁜 얘기가 있다고 마침내 그 빌려온 책을 나에게 넘겨주고 제발 읽으라고 부탁했다. 

장편도 아닌 단편을 읽을 도리밖에 없었다. 친구를 위하여 그리고 어쩌면 또 같이 방방 뛰며 흥분해댈 재료거리가 될 수도 있으므로. 제목도 참으로 그럴듯하지 않은가. 100퍼센트라니. 

화장실에서 그 짧은 단편을 심드렁하게 읽어내고 나는 하루키는 나와 맞지 않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니까 단편소설이 아니라 하나의 공상 같은 거였다. 누구나 한번쯤은 떠올렸을 법한. 서로에게 완벽한 이상형이던 소년 소녀의 엇갈린 재회. 그 빛나던 시절의 기억이 얼마나 찰나적이고 몽환적인 거였었는지에 대한 조금은 씁쓸한 깨달음 같은 거. 

<상실의 숲> 여동생이 빌려와 자기것마냥 반납하지 않고 떡하니 소장하고 있던 그 책을 무척이나 불성실하게 통독하고 역시나 나는 그와 맞지 않는다고 느꼈다. 청춘소설의 대명사, 젊은 날의 하나의 이정표마냥 추앙받는 그 책을 나는 제대로 이해하고 느끼지 못했다. 

그런 하루키가 육십이 넘어 21세기를 맞고도 건재하다니. 하루키의 에세이를 읽으려고 결심하게 된 것은 박완서 덕분이었다. 여든의 노작가의 진솔한 감상평과 과장되지 않은 칭찬은 그 무엇보다 강력한 하루키 마케팅이었다. 나에게는.

 

이 책을  읽고 하루키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이 책은 거의 유일한 하루키의 개인적 고백담이라고 한다. 달리기에 대한 얘기는 사실 하나의 메타포이고 그 속에 하루키가 소설가로서 살아가는 삶에 대한 진솔하고 담백한 이야기가 스며들어가 있어 재미있고 진지하게 읽힌다. 문득문득 비어져 나오는 그의 삶을 통한 깨달음에 대한 작은 경구들은 내가 살아나가고 사람을 만나고 읽고 쓰는 일에 대해서도 하나의 엄중한 조언으로 작용한다. 

그는 82년에 달리기를 시작해서 23년간 스물세 번 풀코스를 완주했다고 한다. 결승점에 도달하면 이제 더 이상 뛰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지배한다는 그의 진심어린 고백은 사실 뛰는 일이 전업작가로서의 성실하고 치열한 자세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과 맞닿아 있다. 그는 더 잘 쓰기 위해 처절하게 성실하게 언제나 달리고 있다. 재즈 클럽을 운영하며 야구를 관람하던 그가 갑자기 하늘에서 춤추듯 내려왔다는 소설을 쓰고자 하는 욕구하나로 우연찮게 소설가가 되었지만 그 후로는 현실에서의 인간 관계보다 독자들과의 그 관념적인 인간관계를 더 무게중심에 두고 자신의 사적 즐거움을 뒤로 미루고 근육을 훈련하듯 글쓰는 일에 집중하는 그의 모습은 그가 보여지는 것보다 더 진중하고 성실한 작가임을 알게 한다.  

지는 일에 길들여져 있다. 세상에는 내 능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산만큼 있고, 아무리 해도 이길 수 없는 상대가 산더미처럼 있다.-p.145  
 

문학성과 상업성의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것으로 호평받는 그가 지는 일에 길들여져 있다는 고백에 순간 뜨악해졌다. 거액의 선인세 논란의 중심에까지 있었던 그가 보는 세상은 의외로 불공평하고 불가항력적인 것들 투성이었다. 성공한 자가 보는 세상은 손안에 잡아 챌 수 있을 만큼 작고 또 그는 이기는 일에 익숙해져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나는 아직 더 커야 하나 보다. 세상과 사람을 여전히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다. 개개인의 한계를 오만하게 초월하라고 초월할 수 있다고 꼬드기는 대신, 그는 그 한계를 직시하기를 권한다. 다만 그 한계 속에서 효과적으로 자기를 불태우기를 권한다. 달리기와 사는것이 다르지 않은 이유다. 이 당연한 얘기가 그의 입을 통해 나오니 청량감이 있다.  

당연히 이 세상에는 100%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건 젊은 날의 향수 같은 거다. 있다고 믿으며 보내는 그 시간들도 나름대로 소중하다. 뒤돌아 보면 눈물나는 시간들이다. 그 소년과 소녀는 서른이 넘어 우연히 골목길에서 재회한다. 그런데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다. 슬프지만 괜찮다. 가능하다고 여겼던 시간들이 스러지고 이제는 현실을 직시할 차례다. 우리는 그 다음으로 85%, 혹은 65% 정도의 삶을 살게 된다. 그건 체념과는 다른 것같다. 거기 안에서 100%를 추구하는 것. 그 정도의 얘기인 것 같다. 

태어나서 단 한번도 무지개를 보지 못했다. 라디오 DJ가 청취자들이 무지개를 봤다고 사연을 보내온다고 했다. 나는 무지개도 못 본 인생이라 생각하며 베란다로 걸어 나갔다. 세상에. 빨주노초파남보의 그 그림책 속 무지개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무지개라고 알만한 것이 천상의 다리로 걸려 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무지개를 본 날이다. 이런 날도 있다. 라디오에서는 스티브 바라캇의 Rainbow Bridge가 흘러 나온다. 너무 좋아했던 그 노래. 그리고 무지개. 골목길 모퉁이에서 우연찮게 마주친 나의 과거의 100% 같은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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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8-10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궁금증 하나 - 그럼 당시 blanca님의 그 "신격화한" 짝사랑 상대는 누구였나요?
궁금증 두울 - 오늘 무지개를 처음 보신 걸까요? .. 그렇담 읏!
궁금증 세엣 - 오늘은 "다음뷰" 를 안하셨는데. 이유라도 있을까요?

여름밤에 읽는 청량한 글이었습니다. 근데 이상한걸로 궁금증이 생기네요~ blanca님 :D

blanca 2010-08-11 14:56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 ㅋㅋㅋ 스무 살의 짝사랑은 회고해 보면 참 유치하잖아요. 근데 누구라고 하면 바람결님이 아실까요?^^;;; 무지개 정말 첨 봤어요. 정말로. 일기쓸라구요. 다음뷰~ 지금이라도 하죠,^^

blanca 2010-08-11 15:35   좋아요 0 | URL
그런데 안되네요--;;

마녀고양이 2010-08-11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호호홋, 드디어 내가 아는 책이....... ^^
나 하루키 팬인거 알져? 특히 에세이 집에서. 성향 탓인가봐여. 난 좀 현실적이면서, 쿨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그러면서도 깊이는 잃지 않는 책들이 좋거든요.. 자기 감정에 겨운 책들이나, 너무 관계가 거미줄같은 책은 잘 못 읽겠어요.

blanca 2010-08-11 14:58   좋아요 0 | URL
아, 마녀고양이님이 하루키 팬이시군요. 1Q84 혹시 읽으셨어여? 대체 얼마나 잼나길래 그리도 1위를 상중하가 오랫동안 압도적으로 지키고 있는지 넘 궁금한데 쉽게 읽게 되진 않아서요^^;; 저도 요새는 등장인물 이름 다 잊어버리고 관계는 중간쯤 오면 다 엉망되서 사람이 지나치게 많이 나와서 이리 저리 얽힌 책은 별로더라구요.

마녀고양이 2010-08-11 18:56   좋아요 0 | URL
1Q84 얼마전에 리뷰 올렸어요..
사실 책이 의도하는 바가 파악이 안 되서, 최근 하루키 인터뷰를 찾아서 올린게 더 많지만. ^^
역시 하루키 소설 어려워여~

비로그인 2010-08-15 22:55   좋아요 0 | URL
ㅎㅎㅎ 블랑카님, 백년의 고독에 단단히 데이셨군요.

저는 작가로서의 하루끼는 안좋아하는데 [달리기를~]은 계속 마음에 남는 에세이집이었어요. [먼 북소리]도 읽을까 생각중이에요.

마태우스 2010-08-14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키가 60을 넘었다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전 40대 후반이거나 50대 초반, 이 정도 생각했는데... 하여간 훌륭한 작가들의 에세이는 읽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혹독할 정도로 자신을 단련시키는 광경이 눈에 들어오더라구요. 하루키가 마라톤 애호가라는 것도 처음 알았네요. 100%는 없지만, 그걸 향해서 달려가야겠지요...

blanca 2010-08-14 21:41   좋아요 0 | URL
저도 나이듣고 깜놀했어요. 그렇게는 도저히 안보이던데. 역시 자기관리가 한몫 한 것 같아요. 예. 유명인들의 에세이는 남는 게 꼭 한가지가 있더라구요. 좀전에 엄청 큰 소리로 천둥이 쳐서 깜짝 놀랐습니다.--;; 마태우스님은 혹시 들으셨는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상찬을 바치는 작품이 있다. 유명인들이 추천 도서 목록 고전에 거의 반드시 올리는 소설이 있다. 소설의 죽음을 이 책을 책장에 꽂아두고 얘기하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메시지까지 싸안고 있는 그 책. 

 

 

 

 

 

 

 

 

별 다섯 개가 거개인 리뷰를 몇십 개를 달고 있는 소설도 흔치 않다. 그것도 고전중에. 그러니 나는 언제나 항상 이 책을 읽어야 한다는 강박에 휩싸였다. 그리고 칠레의 작가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의 그 독특하고 유머러스하고 야하고 그럼에도 아름다운 그 남미의 문학 특유의 분위기에 완전히 중독되어 남미 작가들에 아낌없는 지지를 보내며(고작 두 권 읽고) 이 책을 시작했다. 

그.런.데. 폭염과 더불어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 같은 이름이 몇 대에 걸쳐 반복되고 죽었다 살아나고 이모랑 했는지 여동생이랑 했는지를 헷갈리는 등장인물과 더불어 완전히 미로를 땀을 뻘뻘 흘리며 헤매다 끝나고 말았다. 그러니 나는 이 책의 리뷰를 적을 자격이 없다. 일단 성실하지 않은 독서였고 그 마술적 리얼리즘에 완전히 몰입하지 않은 딱딱한 감수성을 견지했으며 근친상간이 가지는 더 큰 문학적, 예술적 은유를 떠올리지 못했으니 이 책을 논하지 못하겠다. 

다만 지금까지 읽은 그 어떤 소설보다 독특했고 기묘했고 매력적이었다는 것만 얘기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기필코 시원한 바람이 불면 다시 제대로 이 책에 빠져보리라. 이 책은 딱딱하고 까칠한 눈으로는 절대로 온전하게 즐길 수 없다는 것만을 깨달았다. 

남미에는 아주 독특한 설명할 수 없는 매력이 있는 것 같다. 고등학교 때 포장마차에서 오뎅을 사주며 잘 먹는 나를 흡족해하며 지갑을 털어댔던 절친은 지금 베네수엘라에 가 있다. 그녀는 과테말라에 있다 베네수엘라로 가며 미스 베네수엘라가 되겠다고 싸이의 대문글에 적었다. 그 독특하고 남을 의식하지 않는 나의 사랑스러운 친구를 떠올리며 남미의 그 문화에 한 번 젖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중복날 우리 가족은 칼국수를 먹으러 갔다. 허름하고 무뚝뚝한 그 작은 칼국수집에 근처 대학교의 농구팀 비슷한 젊은 청년들이 대거 들어서자 그 무뚝뚝하던 종업원 아줌마는 그간 본적 없던 애교와 너스레를 발휘하셨다. 정말 친절하셨다. 싸인 한 장씩 해달라고 세 번 반복하시며. 

분홍공주님은 아예 그쪽으로 돌아앉아 한참 그 오라버니들을 완상하시더니 돌아앉아 갑자기 음흉하게 웃는다.  
그건 분명 아주 의미있는 웃음이었다.

그렇다. 여자들은 남자들을. 남자들은 여자들을 좋아한다. <백년의 고독>도 결국은 그런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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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7-29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이 미로를 헤맸다는 책이면...난 안볼래.
저번에 블랑카님의 리뷰보고...그거 읽었다가...나 한참 헤맸어요.ㅠㅠ

blanca 2010-07-30 15:42   좋아요 0 | URL
마기님~ 그게 뭐예요?^^;; 괜히 미안해질라고 해요^^;; 좀 시원해져야 책 내용도 머리에 들어올 것 같아요. 당분간은 좀 가벼운 걸 찾아 볼라구요. 아, 정말이지 너무 더워요!

비로그인 2010-07-30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덥죠 blanca님 !

전.. 후에 라블레의 가르강튀아 / 판타그뤼엘 읽을때 느낌이 좀 유사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온갖 것들이 마구 뒤섞여 있는 듯 하지만 그 속에는 뭔가 질서가 있는 듯하고, 그 질서란 다름아닌 옛부터 내려오는 피할 수 없는 인간의 그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여자들은 남자를, 남자들은 여자를 좋아하는" 것도 그런걸까요..? ^^

참! 제가 읽은 어느 책에 의하면 (정확히 몇살인지 기억이 나질 않지만..) 3-4살정도가 되면 여자아이들은 남자아이들에게 어떤 유혹의 제스처를 본능적으로 할 수 있다고 하던데요~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분홍공주님" 도 이제 그런 나이가 된걸까요? ㅎ

blanca 2010-07-30 15:44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아, 진짜 오늘 제대로 덥네요. 끈적끈적하고. 하하하. 제가 딸애를 키우면서 느낀 건데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남자애들 앞에서 달랐어요 ㅋㅋㅋ 바람결님 얘기 들으니 이제야 이해가...여성으로 키워지는 게 아니라 타고난 여성적 본능이 있는 것 같아요. 진짜 신기해요. 가르강티아/판타그뤼엘. 제목부터가 어렵네요^^;; 그런데 아마도 번역본이라 그런 면도 있을 것 같아요. 원서로 접하면 또다른 느낌일 것 같은데...

금욜은 많은 것들이 용서되는 요일인 것 같아요^^

루체오페르 2010-07-30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다. 여자들은 남자들을. 남자들은 여자들을 좋아한다!

명쾌합니다!^^

blanca 2010-07-30 15:45   좋아요 0 | URL
루체오페르님. 그건 유아부터 노인까지 두루두루 적용되는 유일하게 예외가 아주 적은 명제인 것 같아요 ㅋㅋㅋ 며칠 전 병원에서 자원봉사하시는 이쁜 할머니들 주변에 할아버지들이 둥글게 둘러싼 것도 봤어요^^

비로그인 2010-07-30 0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남미를 좋아하지 않아요. (그래서 도리어 그 감성을 이해할 수 있는 이들을 보면 부럽기까지 합니다. 제가 아는 남미는 음악으로 모든 것이 채워져 있어서, 음악 이외의 무엇을 즐겨본 적이 없었어요)아는 것도 없고 관심도 없고 더운 나라들을 내가 싫어한다는 걸 명백히 확인하게 되었어요. 이 책은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좋다고, 훌륭하다고 칭찬하는 소설이지요. 하지만 저도 길잃은 1인입니다. 이름을 못외워서 길을 잃었다니 무식해 보이지만 어쩌겠어요, 그게 저인걸요. 하지만 이름을 기억 못한다는 이 사항이 뭔가 뒤틀렸던 건,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을 때였지요. 정말 하나도 헛갈리지가 않았어요.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부르고, 애칭이 따로 있는 그 이름들 속에서 전 길을 잃지도 않았고 찬탄해 마지않으며 읽었더랬어요. 그래서 내 나름대로의 이상한 논리가 그 때 생겨났습니다. 난 더운 나라에 적응을 못하는구나.

이 거대한 문학의 지도 앞에서 날씨 운운이라니요. 무식하지만 저의 책읽기 자체가 벼룩같은 걸, 깨달아서 그나마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그나마 똑같이 더워도 이슬람에선 길을 잃지 않으니(옆에 있는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은 저의 베스트 중의 하나여요) 이상야릇하지만요.


그러나 이 책을 내가 좋아할 수 있었던 단 하나의 강력한 이유는, 역시 문체였어요. 그 남자의 마지막 말은 아직도 기억합니다. 어쩌면,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었을까요. 그 하나만으로도 이 책은 반짝반짝 빛이 나요. 물론, 어디 가서 읽었다 말하기 면팔리지만 말입니다.(하나더-반가워요! 나 혼자만이 아니었어요!)

blanca 2010-07-30 15:48   좋아요 0 | URL
쥬드님! 정말 비슷한 감상이에요. 저는 이름이 너무 헷갈리더라구요. 천 개의 찬란한 태양! 저 이 소설 읽고 정말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나요. 전직의사가 사람들은 그저 전쟁만 맨날 해대는 존재감 없는 나라로 오인한 아프가니스탄을 그렇게나 아름다운 역사와 향토색, 사랑이 있는 나라로 복원해 냈다는 게 정말 감동이더라구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도 언젠가는 꼭 읽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데 또 의욕이 생기네요.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을 다시 들춰보고 싶어집니다.

프레이야 2010-07-30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음사 것의 표지가 더 마음에 드네요.
이 책의 유머에 젖으려면 저부터 무장해제하고 흥청망청 읽어야겠단 생각,
저도 비슷하게 했더랬어요.
아무튼 블랑카님의 결론이 아주 간명하고 정확하네요.^^
그리고 분홍공주님 귀여워요. ㅎㅎ

blanca 2010-07-30 15:49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그러니 이게 다 말도 안된다,고 시비 걸듯이 땀흘리며 읽었으니 저는 난중에 좀 상태 좋을 때 제대로 다시 읽어야 할 듯해요. 어젠 정말 그녀가 너무 웃겼어요 ㅋㅋㅋ 사실 저도 좀 흘낏 흘낏 보긴 했었거든요.

마녀고양이 2010-07-30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ㅎㅎ, 분홍공주님의 웃음이 너무 궁금해여, 아이 보고 시퍼라.

이 더운날,, 저는 어려운 주제는 근처도 안 갑니다. "테메레르"에 홀랑 빠져서 삼일만에 벌써 4권 들어가고 있습니다. 거의 "테메레르" 폐인으로 집안꼴이 엉망이랍니다, 현재.

루체오페르 2010-07-30 10:41   좋아요 0 | URL
오홋 마녀님을 그렇게 빠지게 만들다니...테메레르 관심은 갔는데 상당히 재밌나 보군요.

blanca 2010-07-30 15:50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테메레르가 뭐예요? 검색해 볼게요. 하여튼 시리즈는 섣불리 시작하며 안되기에 나중을 기약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이 토지 읽다 살림을 완전히 놓았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요 ㅋㅋ 분홍공주 대신 저를 보여드리죠^^

비로그인 2010-07-30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저는 [백년동안의 고독] 신봉자 중의 하나에요. 옆에 가계도 하나 놓고, 별 생각없이 그냥 굽이굽이 같이 흘러가는거지요. 냉철함 보다는 속편하고 감정적인 저같은 타입에 맞는 책인걸까요?

얼마전에 [광대 샬리마르]를 정말 힘들게 읽었어요. 몇페이지 미리보기만 하고 책을 사선 안된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지요. 온갖 풍이 뒤섞인 반전소설이라고나 할까요? 게다가 낯설은 카슈미르 이름들이 때론 이름으로, 때론 성으로, 때론 이름+미들네임, 혹은 직함으로 불리니 날도 더운데 더 씩씩거리면서 읽었다지요..

지금은 [여명]을 기다리고 있는데, 수요일에 '바로드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서점서는 양장본 재고가 없다고 집으로 보내준다더니 큰 길 건너면 코앞인데 아직도 안 왔어요. ㅜㅜ

blanca 2010-07-30 15:52   좋아요 0 | URL
만치님! 가계도를 뜯어서 옆에 둘 생각을 저는 왜 못한 걸까요? 저 완전 바보인가봐요--;; 광대 샬리마르 읽고 싶었는데 아...그렇군요. 소설 제대로 읽으려면 가계도를 작성하든지 이름을 주욱 적어넣고 시작해야 될 것 같아요. 심지어 한국 소설도 헷갈리는 저인걸요 아, 여명 양장본으로 신청하셨군요. 저는 무엇보다 얇아서 강력 권합니다. 오늘은 왔을까요?

하이드 2010-07-30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중남미 소설 시작한 것이 백년의 고독과 보르헤스 ^^ 다르면서도 공통된 엄청난 뭔가가 있어요.
마르크 레비의 <너 어디에 있니?>를 추천합니다. 제가 정말 좋아하는 소설인데, 이 책을 보고 의외로 '중남미' 라는 곳에 대해 깨닫기도 했구요.

blanca 2010-07-30 15:53   좋아요 0 | URL
하이드님, 보르헤스를 읽으셨다니 저는 맨날 읽지도 않아 놓고 아는 척 하잖아요 ㅋㅋㅋ 보르헤스...언젠가는 꼭 도전해 보겠습니다. 하이드님이 중남미 소설에 일가견이 있으시잖아요. 마르크 레비의 소설! 예, 장바구니에 담아둘게요~

stella.K 2010-07-30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 읽다 포기했는데 지금 읽으면 재밌게 읽히려나 모르겠어요.
난 왜 노벨문학상이면 경기부터 하는지 모르겠습니다.ㅜㅜ

blanca 2010-07-30 23:32   좋아요 0 | URL
스텔라님~ 제 일천한 경험상 노벨상 수상작이 기똥차게 재미있을 확률은 낮은 것 같아요. ㅋㅋㅋ

순오기 2010-07-30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이 책을 여기저기서 추천해도 전혀 땡기지 않아서 읽을 생각도 안 했어요.
난해한 책 읽으며 골 아프기 싫어요. 예전보다 더 많이~~~ ^^
칼국수는 잘 해 먹는데, 올 여름엔 아직 팔칼국수를 안 했어요.
거의 저녁 메뉴는 잔치국수나 콩물국수로 때우고 있어요.ㅋㅋ

blanca 2010-07-30 23:33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팥칼국수 은근히 손 많이 가지 않나요? 저도 완전 면킬러라 잔치국수 엄청 해먹었어요. 그런데 역시나 자꾸 먹으니까 속이 좀 안좋더라구요. 콩물국수. 저도 콩 직접 갈아서 해먹고 싶은데 도저히 엄두가 안나서요.

기억의집 2010-07-30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핫, 저는 이 책을 백년의 고독이 아닌 백년동안의 고독으로 번역되었을 때 읽었어요. 저는 야하면서도 남미 문학 특유의 낙천적이고 늘어지는, 그렇게 읽었던 것 같아요. 무척이나 재밌게 읽었던 소설인데. 전 이 작품으로 마르케스가 좋아졌는데 그의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인가 뭔가 하는 소설은(블랑카님이 백년의 고독에 대해 말씀하신 것처럼 ) 도.저.히 몰입이 안 되더라구요. 백년은 그 때 첨 선뵈인 남미의 마술적 리얼리즘인가 뭔가 하는 소설적 기법이 독특하고 우리 문학의 기법하고 달라 몇 번을 읽었는지 제가 셀 수 없을 정도였는데........ 창녀는 읽다가 접었어요. 휴~~~

그리고 오늘 책 보냈는데, 그림책 두 권도 함께 보냈어요. 사실 그림책 더 챙길려고 했는데 어떤 스탈을 좋아하는지 몰라서 더 못 넣었어요. ^^

blanca 2010-07-30 23:36   좋아요 0 | URL
기억의집님! 마술적 리얼리즘은 하도 들어서리 저도 읽기도 전에 알고 있었다니까요. 저도 아무래도 한 번 더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 그림책까정..이건 거꾸로 되는 거잖아요. 아...너무 고맙습니다. 저 기억의집님 덕택에 토마스 로커 나무책에 구름책까지 구입했답니다. 받으면 말씀드릴게요.

2010-07-30 23: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31 18: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02 2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01 22: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02 15: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02 16: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진지함과 가벼움이 조화를 이루기란, 몸매는 섹시하고 얼굴은 청순하며 지적인 여성을 앞에 두기를 바라는 마음만큼이나 
곤란하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런데.  그 잡탕의 미학을 실현한 작가를 결국 너무 늦지 않게 만나고야 말았다. 깔깔대고는 웃다가 지나치게 야한 장면에서는 괜히 응큼하게 심호흡을 해보다가 결국 질질 짜는 자신을 발견할 때의 당혹감이란. 독자를 이렇게 무장해제시키고 괜히 민망해서 얼굴을 쓰다듬게 만드는 작가가 현존하고 있다는 사실에 아연해졌다.

최후의 자지러지는 소리가 끝을 맺자 온 밤이 질퍽해졌고...  p.135

유물론자가 뭐요? 코스메가 입게 거품을 물고 말했다.
"장미와 통닭 중에서 하나를 골라야 할 때 항상 통닭을 집는 사람이죠." p.103  

그 순간 잔잔하던 바다에 반짝이는 고기 떼가 수면 위로 뛰어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형언할 수 없이 거대한 달이
마리오를 환하게 비추었다. 베아트리스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는 순간 '영원'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p.91

검은 물이 바다를 바라보는 네루다의 집과.  역시 물로 화해 버린 유리창 너머로 지금 떠오르는 물의 집과, 사물의 집이었던
시인의 눈과, 말의 집이었던 시인의 입술을 복되게 적시고 있었다. p.157 

영화 <일 포스티노>의 원작인 이 작품은 칠레의 작은 어촌에 있는 단출한 우체국에서 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받을 편지만을 배달하게 된 한 젊은 집배원이 사랑에 빠지고 시를 알아가고 마침내 시인이 투신한 사회적 가치에 발을 담그게 되는 얘기다. 새벽이 다하고 포도주가 바닥날 때까지 휘어 감고 탱고를 추고픈 허리의 소녀에게 대시인의 훈수를 받아 사랑의 작전을 펴나가는 청년의 무모한 열정과 그 열정을 적절하게 밀고 당기며 세상을 보는 프리즘에 대어 주는 시인의 사랑스러운 노련함은 작가의 재기발랄하고 걸쭉한 입담으로 투명하고 끈적끈적하고 반짝거린다.  

실제 노벨 문학상을 받고 칠레의 국민 시인으로 추앙받는 파블로 네루다에게 바치는 오마주로도 해석될 수 있는 이 작품은 잡탕의 미학을 실현한 것으로 자평했던 작가의 익살스런 눈으로 또다른 유머러스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비틀즈의 <우체부>에 맞추어 몸을 흔드는 노시인의 모습을 묘사한 풍경은 절경이다. 문자 텍스트로 영상의 애드벌룬을 띄우는 비법을 작가에게 전수받고 싶을 정도로 그의 문장들은 살아서 꿈틀대며 냄새를, 소리를, 이미지를 뿜어낸다. 그러니 인내심을 손톱 만큼도 발휘하지 않아도 이 소설은 무난하게 읽어내려 가게 된다.  

집배원 마리오가 프랑스의 대사로 떠난 네루다를 위하여 바람에 울리는 작은 종들의 소리부터 사랑의 결실이 태어나는 소리까지 작은 포구 마을의 모든 소리를 세심하게 녹음하는 장면의 서정적 아름다움과 군부 쿠데타로 감금되다시피 한 노시인의 죽음을 지키는 장면의 처절한 진지함은 안토니오 스메르타가 실현한 문학적 성취를 방증한다. 결국 <네루다의 우편 배달부>는 눈물을 닦으며 문을 닫고 나오게 만든다. 시는 읽는 사람의 것이라며 세상 모든 사물을 메타포로 이해하는 그 거대한 은유의 미학까지 넌지시 찔러 준 후 결국은 인간의 잔인한 권력욕에 스러지고 마는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농밀한 응시까지를 체험하게 되면 또다른 그의 작품을 찾아 헤매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이 책은 아름다운 지구별 볕뉘에서 몸을 데우는 소외된 자들이 꿈을 꾸고 마침내 이루었다 생각하고 그러다 스러져 가는 이야기이다. 감옥에서 사면되어 나온 미소년 좀도둑이 삼류 극장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된 발레를 사랑하는 소녀와 사랑에 빠지고 그녀의 꿈의 실현을 몰래 기획하고 조력하고 또 함께 출소한 소위 기품있는 대도인 베르가라 그레이와 멋지게 한탕하고 '한탕은 조금도 흠잡을 데가 없는데 대체 난 왜 죽는 거지?' 자문하며 죽어가는 얘기다.^^ 

신파적 요소와 누와르적 분위기가 물씬한 이 소설의 특별한 지점은 시원하고 드넓은 태평양을 지척에 두고도 스모그에 둘러싸여 득시글거리는 가낭뱅이들과 독재에 반대하다 머리를 잘린 아빠를 둔 소녀의 절망과 독재시절 기업가들로부터 받은 검은돈을 금고에 보관하고 떵떵거리는 파렴치한 인간에 대한 분노가 민주주의의 세례를 받고도 정작 소외된 이들의 체념과 맞물려 형상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스카르메타는 언제나 진지하고자 하는 작가는 아니지만 언제나 자신이 텍스트의 빗장을 열고 사회적 현안을 치열하게 응시하고 비판하고자 하는 책임감을 등에 지고 다니는 것 같다. 이런 그의 윤리의식은 그의 이야기를 지루하고 건조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되레 생동감 있고 적당히 달콤한 슬픔의 독특한 기류를 흐르게 한다. 

마지막 젊은 앙헬과 나이 든 베르가라가 금고의 돈을 터는 장면에서 등장한 레이먼드 카버의 <노란 장미 세 송이>의 체호프의 임종을 그린 작품에 대하여 주고받는 얘기들은 부조화스러우면서도 독특한 잔상이 남는다. 인생이란 마치 이런 것이라는 듯한. 또 예술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는 듯한. 도둑질하며 위대한 체호프를 연호하고 죽으며 난 잘했는데 왜 죽는 거지?라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모여 살아가는 곳. 지구별에 대한 시원한 조망이 가능한 그런 얘기다. 

지구는 수많은 행성들 사이에서 저만의 꿈을 꾸며 자전하는 미친, 그러나 다정한 별이었다. 그리고 우연히 지나치는 것들 하나하나는 모두 위대하고 바꿀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p.449 

자전하는 미친, 그러나 다정한 별에서 이런 작가의 얘기를 듣는 행복을 마다할 이유가 없을 것 같다. 그는 독자를 존중하고 추어줄 줄 아는 정말 드문 작가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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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7-24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눈으로 읽으니 이렇게 아름다운 감상이 흘러나오나 봅니다.
내 블랑카님의 눈을 직접 봐야겠어!

blanca 2010-07-25 16:26   좋아요 0 | URL
마기님~그 날 너무 실망마세용 ㅋㅋㅋ

굿바이 2010-07-25 0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짝짝짝짝작!!!!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는 작정하지 않아도 작가의 호흡과 리듬을 따라갈 수 있는 작품이었어요.
쿵쾅쿵쾅거리다 털썩 주저앉게 하는 이 책은 살덩어리로 태어난 것에 감사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어요. 제 책장에 꽂혀 있었던 것을 잊고 있었는데, 너무 반가워요~^^

blanca 2010-07-25 16:27   좋아요 0 | URL
굿바이님!! 읽으셨군요. 살덩어리로 태어나다, 이 표현 넘 와닿습니다. 정말 흥겨운 음악을 듣는 느낌이었습니다. 굿바이님과 그 느낌을 공유하게 되어 기뻐요^^

비로그인 2010-07-25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리신 글이 마치 잘 짜여진 광주리 같아 너무 좋습니다.

시적 은유, 삶이 가져다 주는 또 다른 의미의 선물인 아이러니. 이런 것들을 발견할 수 있나봅니다.

더 많이, 보았던 것을 다시 보게 하는 시선, 오늘 아침을 풍요롭게 하는 생각들. 오늘은 이런것들을 담아 갑니다.

blanca 2010-07-25 16:28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 안그래도 저 오늘 이쁜 담양 광주리 사가지고 들어왔어요^^;; 감사합니다. 이 책 한 번 꼭 읽어 보셨으면 좋겠어요. 바람결님도 분명 아주 좋아하실 것 같아요. 참, 그런데 혹시 유진 프리즌이란는 첼로리스트 아세요? 뉴에이지로 가긴 한 것 같은데...완전 뜬금없는 댓글들이지요^^;;

비로그인 2010-07-25 19:39   좋아요 0 | URL
네 꼭 말씀처럼 잊지 않고 다시, 전해주신 얘기생각하면서.. 깊게 들여다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유진 프리즌.. 지금 검색해서 그의 곡 하나 듣고 왔습니다.
퍽이나 짧아진 여름 저녁만큼 아련하니 좋네요. 오늘은 이곳 저곳에서 첼로 소리나 많이 나는 날이네요.

주말 잘 마감하세요 ^^

후애(厚愛) 2010-07-25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캡쳐 이벤트>하는데 참여하세요~ ^^
알라딘 마을에 소문내고 다녔더니 부끄럽고 재밌고.. ㅎㅎㅎ

blanca 2010-07-25 16:28   좋아요 0 | URL
옙! 후애님 갈게요. ^^

순오기 2010-07-25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전하는 미친, 그러나 다정한 별... 제목만 보곤 뭔가 했어요.^^
같은 책을 읽고도, 이렇게 멋진 글로 풀어내는 걸 보면 정말 감동스러워요!

blanca 2010-07-26 21:33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의 리뷰 읽고 구입한 겁니다. 순오기님이 좋다고 한다면 그건 확실하다 싶어서요.^^ 고마워요. 이 책을 읽게 해주셔서....

마녀고양이 2010-07-25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일 포스티노가 그리 좋다면서요... 아직도 못 봤어요.

진지함과 가벼움의 조화,,, 블랑카님. 양파처럼 그렇게 다양한 면을 가진 사람이 되고픈 생각을 해여.
항상 "저건 양파다...." 하고 알 정도의 일관성을 가지면서도, 또한 다이내믹하고픈 맘은 너무 큰 욕심일까요?

blanca 2010-07-26 21:33   좋아요 0 | URL
마녀 고양이님, 양파 같은 사람. 진짜 매력적이에요. 마녀 고양이님 양파 같은 여인 아니었어요? 이미 그런 걸로 알고 있는데요^^
 

고향을 감미롭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허약한 미숙아이다.
모든 곳을 고향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이미 상당한 힘을 갖춘 사람이다.
그러나 전 세계를 타향이라고 느끼는 사람이야말로 완벽한 인간이다.
-에드워드 사이드 <오리엔탈리즘>중  

여러 가지 사정으로 자원하긴 했었지만 막상 '이천'이라는 도시로 직장 발령이 나자 문득 아연해졌었다. 스물 아홉의 길목에 들어서고 있었다. 두렵고 답답하고 돌아나오고 싶었다. 버스를 타고 이천 집으로 퇴근하며 나는 길을 잃어버렸다. 가슴은 두망망이질치고 버스는 종점으로 종점으로 저무는 해와 언제까지나 어디에나 가버릴 듯 털털거리고 또 털털거리며 가고 있었다. 

이윽고 종점. 승객은 나혼자. 울어버리고 싶었다. 스물 아홉의 여자가 집에 못 가 울어버리면 기사는 집에 데려다 줄 것인가. 나의 집 주소를 읊었다. 바보처럼. 기사는 걱정스레이 나를 시내까지 데려다 주고 거기에서 집에 가는 방법을 신신당부했다.  

타박 타박. 그게 시작이었다. 그리고 이 년. 나는 그 시간들을 잊지 못한다. 그리고 내가 이천에 있었는데, 이천이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거들먹거리기까지 하며 마치 그곳이 나의 고향이었던 듯 되뇌인다. 

나는 고향을 감미롭게 생각하는 종족이었다. 연고도 없는 타향에서 이 년을 묵으며 이방인으로 산다는 것에 대하여 그리고 자연스레이 그 타향에 녹아 들어가는 과정에 대해 조금은 고민했었다고 한다면 가소롭게 들릴 지도 모르겠다. 이방인으로 출발하는 것은 언제나 두렵다. 그러나 그곳이 고향이 될 수도 있겠다,고 자만하게 되는 그 허수룩한 몽상으로 발을 들여놓게 되는 시점 나는 새로운 곳에 낯선 이로 섞여 들어가 하나의 삶을 튼다는 것이 가지는 매혹에 매료되게 된다. 

 

하물며 마흔이 넘은 동양 여자가 스웨덴의 웁살라라는 중세의 흔적이 떠도는 도시에 역사학 석사 과정에 들어가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 터키, 미국, 스웨덴에서 온 나어린 이방인들과 투닥거리고 어울리고 이해하고 오해하고 눈물흘리는 얘기는 얼마나 드라마틱하고 얼마나 다이나믹할 것인가. 

이 책은 스웨덴 그 자체에 대한 감상과 이해도 뭉근하지만, 다양한 나라에서 온 다양한 가치관을 지닌 젊은이들이 서로의 시선을 맞추고 때로는 가치관을 조율하기도 하고 때로는 싸우기도 하면서 공감의 자장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이 인상깊고 흥미롭게 그려져 있다. 이방인과 이방인이 각자 자신의 민족과 국경의 그 허구적이고 공고한 철책을 들어 깨고 교감하는 과정은 지나치게 극적으로 과장되어 있지도 않고 지나치게 건조하지도 않게 딱 그 만큼 적절한 수준의 감정의 파고를 유지하며 나아가고 있다. 무조건 친해지고 무조건 이해하고 위아더 월드를 외치는 소설적 허구 대신 인간 관계에서 흔히 발생하는 상대의 기대치의 어긋남 뒤에 한시적인 화해, 때로는 끝까지 어긋나 평행선을 긋는 관계 등으로 담담함을 끝까지 간직한 그녀의 관계들은 되레 '너를 알고 있다',가 아닌 '내가 누구인가?'를 묻는 진지함으로 확장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유독 강조되는 여자로서의 정체성이 스웨덴에서 만나는 수많은 프레이야의 딸들의 아름답고 당당하고 오히려 성적 정체성에서 자유로운 모습으로 전환적 계기를 맞는다. 한국인이자 동양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재확립하게 되는 과정에서 그녀는 평등을 자유와 같이 가지고 가기 위해 가진 것들을 기꺼이 양보할 줄 아는 그들의 간소함과 품위에 매료된다. 극빈자도 최상의 부자도 없는 사회 시스템은 그들을 사회민주주의의 정체성으로 자본과 노동의 화해를 주선하게 되는 것이다. 극도의 개인주의적인 문화일 것 같은 그곳이 기실은 가장 타자들을 의식하고 배려한 체제라는 것은 역설 같으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기본적인 안녕이 담보되어야 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무언가를 알기 위해 떠난 곳에서 내가 누구인가, 또 그것을 묻기 위해 네가 있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함을 알고 귀환하는 그녀의 모습이 간소하고 품위있어 보였다.  

가수 이상은이 여행을 하는 이유가 새로운 나를 발견하게 되는 매력 때문이라고 얘기하며 멋쩍은 미소를 짓는 모습이 TV에 흐른다. 여행의 순간에는 자기 자신보다 더 강해진다는 정혜윤의 말은 이런 면에서 겹친다. 항상 '너'와 '그것'에 치이다 갑자기 '나'를 응시하게 되는 그 기점에서 우리는 새로운 시간을 선물받는다. 나에 대한 질문이 난무하는 그 새로운 곳에서 우리는 성장한다. 그러니 모든 곳을 타향으로 느끼는 사람은 완벽한 존재의 꿈을 꿀 수 있다. 땅에서 발을 살짝 들어 도약하는 순간 우리는 가장 아름답고 견고하게 착지하는 법을  체득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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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 버스 아저씨는 물었지, 집이 어디냐고 -
    from 아, 여름, 외계인 살려 - 2010-07-17 18:28 
            【기억 재생기】 다시 보고 싶은 20세기        1996년경, 봄과 여름 사이           마음 잡고 공부 좀 하겠다고, 친구와 공부방에서 공부를 한 후 늦은 밤, 글쎄 11시가 넘었을까.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하
 
 
잉크냄새 2010-07-17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천,,,전 스물 일곱에 들어가 서른 여덟에 그곳을 떠나왔군요.
제가 경험한 여행은 그 여행의 과정에는 제가 없는듯 했어요. 무엇을 찾고 무엇을 버려야한다는 강박관념이 어느 순간 사라지더군요. 그리고 여행을 마치고 그 길을 다시 돌아오는 어느 언저리에서 다시 자신을 발견하게 되더군요.

stella.K 2010-07-17 21:36   좋아요 0 | URL
헉, 잉크냄새님 그럼 지금 나이가...?!
사실은 그럴 줄 알았어요.ㅋ
이천 사신다는 건 서재질 초기에 알았지만 결국 떠나셨군요.
언제 떠나셨나요? 전 세계를 타향이라고 생각하시고
여행을 떠나셨던 그때...?

blanca 2010-07-17 22:05   좋아요 0 | URL
잉크냄새님! 그러면 어쩌면 마주쳤을 수도 있겠네요! 온데를 다 휘젓고 다녔었는데요 ㅋㅋㅋ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나이가 더 드신 것 같기는 하네요^^ 아, 여행하면 잉크냄새님한테 얘기를 들어야지요. 지금도 여행중이신가요. 여행의 과정에서 강박을 버려야 한다는 것! 예...그 경지까지 가봐야 겠습니다. 아직은 저는 강박이 있는 것 같아요. 다 기억하고 다 기록하고 새로운 것을 얻어가겠다는...그것도 욕심이 되겠지요.

L.SHIN 2010-07-17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블랑카님의 이야기가 좋아져 버려서, 성급한 마음에 추천부터 누르고 이 좋은 글을 다 읽지도 않은 상태에서
이렇게 댓글을 쓰고 있습니다.(웃음)
덕분에 흐믓한 기억이 떠올랐거든요. 그래서 [기억 재생기]를 하나 돌리기로 했습니다.^^

blanca 2010-07-17 22:07   좋아요 0 | URL
엘신님, 읽고 왔어요^^ 엘신님이 그렇게 수줍어하시는 부분이^^ 저는 고맙다,를 좀 남발하는 경향이 있답니다. 그것도 과히 바람직하지만은 않은 것 같아요. 정말 고마울 때 나의 고맙다,는 말이 가볍게 치부되니까요.

stella.K 2010-07-17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아무래도 저를 위한 책 같기도 하네요.
저는 어쩌면 그리도 집 떠나 모든 곳을 타향으로 한 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던 것인지...
지금은 앞으로 얼마간은 내 집이란 거 두지 않고 여기 저기 조금씩 살아보다가
60 넘으면 다시 안착하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blanca 2010-07-17 22:08   좋아요 0 | URL
스텔라님. 저는 요새 왜이리 붙박이에 집착하는지 다 늙어버린 것 같이 그래요. 어디서든 언제든 떠나고 적응하고 즐겁게 그렇게 살아야 할텐데...점점 새로운 곳을 더 피하게 되고. 이러면 안되겠죠...

stella.K 2010-07-18 14:31   좋아요 0 | URL
제가 그러고 살았다는 거 아닙니까?
달도 차면 기운다나 뭐라나...
이젠 좀 떠돌이로 살아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인생 한 번 사는 건데 세상은 저렇게 넓구요...^^

다락방 2010-07-17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lanca님의 개인적인 경험담과 맞물려 진 책에 대한 이야기라니. 책에 대한 흥미가 확 일어나는데요. 보관함에 넣어두고 갑니다. 글 좋아요, blanca님.

blanca 2010-07-18 21:51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글 좋아요, blanca님이라는 댓글이 왜이리 기분이 좋으면서 다락방님의 말투가 상상이 갈까요? ㅋㅋㅋ 이런 말투 너무 특이하고 좋아요^^

꿈꾸는섬 2010-07-18 0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lanca님 글은 늘 좋네요.^^

blanca 2010-07-18 21:51   좋아요 0 | URL
꿈꾸는섬님 '늘'이라는 말이 이렇게 소중하게 들리다니. 고맙습니다.^^

하이드 2010-07-18 0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천에는 미란다 호텔 온천이 좋고, 쌀이 맛있으며, 도자기 굽는 곳에 들어가 볼 수 있는..
외가가 거기에 있어서, 발걸음 한지는 오래되었지만, 어린시절의 기억이 새록새록 박혀 있는 곳이에요.

주말마다 가는 강기사를 보자면,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blanca 2010-07-18 21:53   좋아요 0 | URL
하이드님 외가가 그쪽이에요? 아하! 그렇군요. 미란다 주민 할인이 20프로인가 되서 거의 공중 목욕탕 가듯이 했던 기억이 나네요. 금요일 퇴근하고 노천탕에서 하늘 보며 좋아라 했던 기억이 납니다. 테르메덴이 생겨서 인기가 덜해지긴 했지요. 하이드님 외가가 이천에, 또 원래는 사당동에 살았던 거. 이래저래 겹치는 부분이 많아서 참 신기해요.

후애(厚愛) 2010-07-19 0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글 잘 쓰세요. 너무 부러워요.^^

blanca 2010-07-19 14:14   좋아요 0 | URL
후애님~ 한국 오신다니 괜히 막 제가 다 설레어요. 감사합니다.^^

마녀고양이 2010-07-20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자기 <카모메 식당>이 떠오르네요... 너무 더워여.
책 표지의 여자를 보니, 어딘가 길바닥에서 여유롭게 헤매는 "나"를 떠올리게 되어 여행이 더욱 그립네요.
아흐흐.........

blanca 2010-07-20 16:28   좋아요 0 | URL
마녀 고양이님, 저는 지금 또 일본의 걷고 싶은 길 읽으며 흐억 하고 있어요. 궁둥이에 날개 달았어요. 돈은 없고 아이는 있고 떠나고만 싶고 ㅋㅋㅋ카모메 식당! 아, 맞아요. 표지랑 그 영화랑 분위기가 참 비슷하네요.

비로그인 2010-07-20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은 타향에 대한 동경이...타향에 대한 향수로...
난 그럴 때가 있더라구요.
그니까~~타향이 고향같은 뭐 그런 역설적인...
말이 안되는 소릴 아침부터 지저귀는 마기는 지금 수면부족으로 정신이 아득한 상태입니다.
이해바람!

blanca 2010-07-20 16:30   좋아요 0 | URL
마기님! 요즘 마기님 시랑 짧은 글귀 보고는 정말 시인 같다, 하며 감탄중입니다. 타인에 대한 향수. 맞아요. 맞아요...그런 것도 있어요^^

2010-07-20 20: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21 09: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10-07-21 0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향에서 이방인으로 산다는 건 참 힘들지요~
어디든 마음을 열면 녹아들어갈 수 있게 되더라는...
나를 만나는 여행을 꿈꾸지만 훌쩍 떠나는 게 쉽지 않지요, 더구나 엄마라면요.ㅜㅜ

blanca 2010-07-21 09:30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혹시 전라도는 고향이세요? 저는 요새 이곳에 관심이 많아요^^

순오기 2010-07-21 19:38   좋아요 0 | URL
94년 대선이든가~ 그때 호남인의 정서라는 걸 눈물겹게 동감한 후로
광주는 이제 내 고향이나 다름 없지요.^^
충남 당진에서 15년, 인천에서 15년, 그리고 광주에서 20년이 넘었지요.

blanca 2010-07-21 21:35   좋아요 0 | URL
아아. 순오기님이 당진, 인천에서도 그렇게 오래 사셨군요. 순오기님..꼭 뵐 수 있었으면 합니다.
 

알함브라 궁전에서 노을을 봤어. 정말 감동적이더라... 

나에게 지나치게 관대했던 그 사람은 스페인을 가보고 싶어했던 나에게 이렇게 알함브라의 인상을 전해주었다. 거진 십 년이 흘렀나 보다. 나는 여전히 가보지 못한 알함브라 궁전의 낙조를 꿈꾼다. 

나에게 스페인은 눈물이다. 대학시절 힘겨운 시간들, 단짝친구와 스페인에 가는 꿈을 얘기하며 버티곤 했다. 왜 하필 스페인이었냐고 묻는다면, 우연히 제2외국어로 택한 그 언어에 대한 마력과 그냥 듣는 것만으로 가슴결에 물방울을 퉁기는 것같은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에 대한 막연한 이끌림이었다고밖엔 설명할 도리가 없다.  

 

생살을 나눈 것 같이,가슴을 꺼내 펼쳐 서로 보여준 것 같이 교감했던 나와 절친은 이제 서로 각자 다른 길을 걷는다. 이제 우리는 더이상 스페인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드문 드문 안부 전화를 타고 알함브라 궁전의 꿈은 각자의 길로 나뉘어 날아가 버렸다. 당연히 그녀와 함께 할 것이라고 꿈꾸었던 알함브라 궁전행은 아마도 홀로, 혹은 가족과 함께 하는 것으로 아니면 그마저도 아득히 먼 곳으로 밀려가고 말았다. 

노을빛으로 물든 조용한 거리를 따라 걷다 보면 나타나는 광장에는 오후 무렵이면 거대한 토파즈로 변하는 금빛 성당이 있다. 고성에 올라 밤의 전주곡이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쓸쓸한 들판을 바라본다. 저 안쪽 언덕 위에는 누군가가 피워 놓은 빨간 모닥불이 희미하게 떨리고, 들판 위로 노란빛을 띤 꽃가루가 하늘거리며 날아다닌다. 도시는 온통 주홍빛으로 물들고 교회에서는 저녁 삼종기도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도시는 꿈결 같은 분위기에 젖어든다...... 밤이 서서히 세상 위로 내려 앉는다. 소나무는 바람에 가볍게 흔들리고 망루에 둥지를 튼 황새들은 종루 위로 날아오른다...... 곧 달이 뜨면 온 세상이 은빛으로 물들어 가리라.
-p.24 

스페인의 여정에는 이 책을 반드시 가지고 갈 것이다. 로르카. 우리는 종교적인 동시에 세속적이어야 한다고, 모든 것을 보고 또 모든 것을 느껴야 한다고 목소리를 돋구었던 이 시인의 기행문은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독자들의 몸에 화인처럼 눌러 넣는다. 죽어 있는 문자들은 시인의 초혼에 응답하여 이윽고 일어나 뚜벅뚜벅 책장을 걸어 나온다. 스페인 남부 카스티야, 안달루시아, 갈리시아 지방을 스승과 함께 여행한 대학생의 여정에 우리들은 무임승차하여 그가 불러주는 노래와 그가 그려주는 그림과 그가 읊어대는 시에 혼곤하게 취하고 만다. 문장 하나 하나를 자꾸 돌아가 되짚게 된다. 너무 예뻐서 너무 아까워서 자꾸만 자꾸만 뒤돌아 보고 어루만지게 된다.  

해가 뜨자 푸르스름한 빛이 감돌던 고요한 새벽하늘에 찬란한 빛이 퍼져 나가 알함브라의 오래된 탑들이 빨간 별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언덕 위의 하얀 집들은 상처 입은 듯 벌걿게 물들어 가고, 그늘진 곳은 초록빛으로 화사하게 반짝거린다.
-p.136 

시인이 붙잡아 펼쳐 준 알함브라의 여명은 그것의 낙조만큼이나 매혹적이다. 그가 돌올하게 서는 지점은 빨간 별처럼 빛나는 알함브라의 뒤에서 상처 입은 듯 벌겋게 물들어 가는 하얀 집들에 대한 응시다. 상처 입은 듯 벌겋게. 유럽의 마지막 이슬람 왕국의 찬연한 번영이 처절하게 이지러져 가는 지점에서의 그라나다에 대한 그의 묘사는 흘러가는 풍경을 우리의 몸에 심고 그 속에서 스러져간 생명들을 추모하는 하나의 경건한 제례같다. 

그의 풍경에는 눈물 흘리는 소리가, 빛깔을 계속해서 갈아 입는 슬픔이 뭉근하게 배어 있다. 시간이 훑고 지나가 그 무자비한 권력으로 모두 황폐하시키고야 말 그 유한한 아름다움을 더듬는 그의 모습은 그래서 하나의 삶의 은유 같다.  우리는 다 어쩔 수 없는, 어쩌지 못하는 것들을 더듬더듬거리며 삶을 살아 나가지 않는가.

그리스도교라 불리는 사람들은 절대로 세상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도리어 세상 속으로 들어가 사람들의 상처를 따뜻하게 어루만지고, 가엾은 이들의 지친 영혼을 달래줄 뿐 아니라 그들에게 선을 알리고 평화를 전해야 한다.
-p.44 

로르카! 그는 자신의 글을 몸소 풍경으로 구현한다. 반파시스트 운동을 하다 고향 그라나다에서 프랑코 정권의 극우 민족주의자에 의하여 사살되어 서른 여덟의 청년의 모습으로 영원히 정지하게 된다. 그의 풍경은. 그리고 나의 인상은. 

이 책을 가지고 알함브라로 가는 그 날 아마도 마침표를 찍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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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7-10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르카.

알함브라. 두 기억을 갖고 읽고, 음악 한 곡 남겨 두고 갑니다 :D


blanca 2010-07-11 09:59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이 제 페이퍼를 완성시켜 주시네요^^ 이 책도 바람결님 덕분에 읽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혹시 이거 기타로 연주하실 수 있으세요? 생각보다 쉽다는 의견이 있어서요^^ 저도 이거 때문에 클래식 기타를 배워보고 싶어요.

비로그인 2010-07-11 10:38   좋아요 0 | URL
아 제가 후회하는 것 중 하나가 대학 고전기타동호회 할적에 왜 기타 많이 배워 두지 않았나 하는건데요.
당시에 선배들이 기타 하나 안치고 맨날 딴짓하는 저를 참 고맙게도 잘 받아 줬다는 생각이 듭니다.

알함브라.. 이게 저 트레몰로를 정확하게 치려면 굉장히 어려운 것으로 압니다.
정확하진 않지만 제 기억으로는 카르카시 교본(?)에 있었던 것 같은데 당시 기타를 제일 잘 치는 사람들도 겨우 연주하곤 했었으니 말이죠..

클래식기타 저도 언젠가는 꼭 배우고 말겁니다. ^^

느린산책 2010-07-10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좋은 책 소개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저에게 알함브라는 첫번째 로망이거든요.
알함브라 라는 단어만 나와도 무조건 구입입니다~ ㅎㅎ
워싱턴 어빙의 <알함브라>도 아주 환상적이었답니당^^

blanca 2010-07-11 10:00   좋아요 0 | URL
가슴뭉클님, 어빙의 <알함브라>를 찾아 보았는데 분량이 만만치가 않네요^^;; 이 작가 덕분에 지금의 알함브라궁이 복원될 수 있었다니 꼭 한 번 용기를 내보아야겠습니다. 가슴뭉클님 덕분에 어빙의 알함브라를 읽게 되었네요. 감사합니다.

프레이야 2010-07-10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이 권해주시는 책은 모두 품격이 느껴져요.
이 책도 당장 보관함에 담아가요^^
스페인!! 저도 정말이지 꼭 가보고 싶은 나라 중 하나에요.

blanca 2010-07-11 10:01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이 책은 바람결님 서재에 갔다가 알게 되었어요. 프레이야님도 너무 좋아하실 것 같아요. 정말 한 줄 한 줄 줄그으며 읽에 되더라구요. 시인이 쓴 산문이 참 매혹적인 것 같아요. 번역의 한계를 넘어서도 충분히 감동적이었어요.

2010-07-11 0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11 1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0-07-11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눈에 화악 그려지는 리뷰예요~. 저는 대학생 때 그리스 섬나라의 일곱 빛깔 바다를 그리 보고파 했습니다. 언젠가는 이루고 싶어요... 그런 꿈을 가진다는 건 참 좋아요~ 살고 싶게 하잖아요.

블랑카님,, 신랑들이 해외 여행을 내내 거부하면 우리 둘이 홀랑 떠날까요? ^^

blanca 2010-07-11 10:04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그리스 산토리니의 그 하얀 마을! 포카리 스웨트! 맞아요. 저, 거기도 꼭 가보고 싶어요. 어딜 가고 싶다고 꿈꾸는 것 참 좋은 것 같아요. 진짜 마녀 고양이님이랑 여행 떠날 날이 올 수도 있을까요?^^

stillyours 2010-07-11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의 페이퍼를 천천히, 정성들여 읽었어요.
늘 그렇듯:)
그러고 나서 바람결님이 올리신 음악을 재생시키고 또 한 번 읽었답니다.
아직은 고요한 일요일 아침.
두 분 덕에 여행지에서 눈뜬 아침 같아요.

blanca 2010-07-12 12:32   좋아요 0 | URL
moon님, 감사합니다. 답글이 늦었습니다. 제 글 읽고 조금이라도 마음의 휴식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정성들여 읽어주신다니 기분이 참 좋네요.

비로그인 2010-07-11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근래 읽은 가장 멋진 리뷰였어요, blanca님. ^^ 책 표지도 근사하군요. 여행서보다 이런 책 한권이, 보는 것보다 느끼는 여행을 만들어 주겠지요. 꿍하니 앉아서 일을 하다가, 저도 문득 스페인 남부의 거칠고도 고풍스러운 풍광을 그려봅니다..

blanca 2010-07-12 12:34   좋아요 0 | URL
Manci님, 어제 안그래도 커피숍에 갔다 옆에 아가씨가 여행 서적들 좌악 펼쳐놓고 행복해하며 읽는 모습 보니 또 부럽더군요. 그녀는 벨기에 관련 책들을 보는 것 같던데..

여행은 삶의 쉼표 같은 것 같아요. 한 번 갔다 오면 정말 마음에 시원한 바람 하나를 품고 돌아오는 것 같은 기분. Manci님 토지도 완독도 아주 멋진 여행을 갔다 오신 것과 같은 것 같아요. 다시 한 번 부러워할게요.^^

穀雨(곡우) 2010-07-12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 때 잠시 스페인어를 배웠어요. 영어보다 훨씬 쉽다는 선배의 꼬임에 빠져 언어는 뒷전이고 스페인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지요. 음...aqui llueve mucho.(여기는 비가 많이 왔어요.^^) como estas? (어떠세요?)
기억이 전혀 안나네요. 그때 배운 허접 스페인어로 제아이디 중 대표는 항상 siempre로 쓴다는...^^
블랑카님, 스페인, 알함브라궁전에 가시길 바랍니다. 리뷰가 바람처럼 마음을 내어 모네요. 쵝오..

blanca 2010-07-12 21:23   좋아요 0 | URL
곡우님, 우아, 여기는 비가 많이 왔어요,라를 기억하신다니 대단하세요. 저는 기억이 안나는데요^^;; 그렇죠. 정말 매력적이고 공부하는 만큼 앞으로 쭉쭉 나가는 맛이 있는, 제대로 구사해 보고 싶다는 욕심으로 방학때 스터디도 해보자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곡우님, 그렇죠. 이렇게 말로 뱉어 놓으면 꼭 이루어지더라구요. 그걸 노리기도 한거같구요^^

잉크냄새 2010-07-13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 궁전이 클래식 기타 선율로 유명한 그 궁전이군요.
세상은 발디디고 싶은 곳이 넘쳐나는군요.

blanca 2010-07-13 16:48   좋아요 0 | URL
잉크냄새님의 여정이 부러울 따름입니다. 어젯밤에 가수 이상은이 여행을 하면서 새로운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는 얘기가 참 와닿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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