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를 쓰지는 않는다. 대신 플래너에 매일매일 일어났던 중요한 일들과 단상을 적는다. 아마 스무 살 때부터였을 것이다. 그때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가느다란 펜으로 이제는 알아보기도 힘들 만큼 깨알 같은 글자들로 대단치도 않은 일에 겁나 호들갑을 떨며 아무도 알고 싶지 않을 디테일들로 채워졌다면 이제는 "오늘 ~가 왔다. 후회한다, 두렵다. 기쁘다. 좋다." 등등 초 단답형의 단문들로 내 일상들이 설명된다. 그마저도 너무 피곤할 때는 공란이다. 그래서 분명 중요한 일들이 있었고 많은 생각들이 지나갔을 한 주가 통으로 공백일 때가 있다. 그 공간은 나의 피로와 권태를 설명한다. 이제 정말로 기억하고 싶은 특별한 일들은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매일매일 일기를 쓸 거리들로 충만했던 과거들을 그리워한다. 하지만 때로 너무 벅차서 이를테면 기쁘면 너무 신이 나 잠이 오지 않았고 조금이라도 긴장되면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이 모든 감정들이 과대하게 부풀어 올랐던 그 시기의 격렬함이 피곤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니 단 한번이면 충분한 걸까? 그런 시간들은.

















아, 정말 최고였다. 너무 좋아서 잠시 저자 문보영의 일기 구독 서비스를 신청할까도 해봤지만 지금은 신청 기간이 아니다. 남의 일기를 읽는 게 이렇게 즐거운 일인줄 몰랐다. 사생활 염탐 차원의 얘기가 아니다. 모든 익숙한 사물들, 풍경들이 저자의 시선을 통과하면 그녀의 언어를 통해 전혀 낯선 신비로운 것들로 돌변한다. 새로울 것 없는 방의 구조도를 삐뚤빼뚤하게 그려서 그 방 안의 동선을 통해 한 편의 글을 써낼 수 있는 작가라니. 재기와 재치가 글마다 뿜어져 나온다. 대학 시절 우연히 듣게 된 시인의 강의를 시작으로 그가 운영하는 종각에서의 시 수업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함께 시를 배우며 등단하게 된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언뜻 김연수의 <세상의 끝 여자 친구>를 떠올리게 한다. 종각으로 가는 지하철에서 시를 퇴고하고, 오는 길에 오십 번씩 읽었다는 이야기는 그렇게 해서 결국 등단하게 된 그녀가 쓴 <일기시대>가 깊고 여러 층위를 가지게 된 연원을 짐작하게 해준다. 무언가를 깊이 사랑하게 되면 그렇게 되면 결국 드러나지 않더라도 내면에서 숙성하는 것이 있고 그것은 마침내 무르익어 바깥으로 드러난다. 그녀의 이야기는 사적인데 시시콜콜하지 않고 무겁지 않은데 진지하다. 보고 듣고 경험하는 모든 것들이 자신만의 시선과 정제된 언어로 재편된다. 


인생의 대부분의 시간 나는 너무 사람이다. 그래서 종종 사람이 아닌 시간이 필요하다. 가끔 사람으로부터 멀어지려는 나 자신을 응원하고 싶다.-문보영 <일기시대>


아, 바로 이거였다. 나도 너무 사람이어서 너무 사람만 되려 해서 문제였던 거다. 그래서 내 플래너의 몇 주는 텅텅 비어버린 것이겠지. 이젠 사람이 아닌 곰탱이도 되고 나무늘보도 되고 돼지도 되면서 버티지 말고 그냥 즐겨야지. 


그래도 일기를 다시 쓰지는 못할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