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이라는 건 언뜻 절대적일 것 같지만 상황에 따라 대단히 상대적이다. 모두 여성인 집단, 남성이 대다수인 집단에서 내가 여성으로서 느끼는 감각은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홍일점인 집단에서 일 년 정도 근무하며 나는 내가 당하는 어떤 불합리, 부당한 일들을 대부분 내가 여성이라는 성정체성을 통과한 후 해석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됐다. 분명 그것과 상관 없는 상황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점점 더 그렇게 됐다. 그건 내가 평등하게 대우 받거나 평가 받지 못한다는 반복된 경험에서 비롯된 편향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어떤 경험을 반복해서 하게 되면 나는 때로 그 경험의 소유자가 아니라 노예가 된다.
몇 년 전 해외에 있으면서 백인들 속에서 나는 또 비슷한 경험을 했다. 점점 그들이 하는 말, 행동들을 내가 아시아 여성이어서 이렇게 말하는 건가? 내 피부 색깔이 이러해서 그런 건가? 내가 백인이어도 그랬을까? 스스로에게 반문하게 됐다. 분명 전혀 인종과 상관 없는 상황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 프리즘을 통과해서 사람들의 나에 대한 시선을 자꾸 해석하게 됐다. 심지어 내가 흑인이었다면? 이런 가정을 하게 된 적도 있다. 전적으로 인종차별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아직도 남성과 여성인 것이 사소한 일이 아닌 것처럼 링컨이 노예 해방을 선언한 지 백육십 년 가까이 흘렀음에도 피부 색깔은 여전히 중요했다. 의식하거나 미처 의식하지 못했거나 아시아 여성과 백인 여성과 흑인 남성과 백인 남성의 삶은 여러가지 의미에서 다르게 흘러간다.
백인의 외모를 갖춘 흑인 여성이 백인 행세를 하는 것. 그럴 수밖에 없는 그 상황을 상상해 본다. 흑인 여성으로 사는 삶이 백인 여성으로 사는 그것과 전혀 다른 열등한 경로를 가고 마침 자신이 백인과 비슷한 용모를 갖추고 있다면 분명 유혹적인 상황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자신들의 리그를 떠나간 친구가 마침내 다시 돌아왔을 때 느낄 이중적인 감정은 짐작이 간다. 아이린은 친구 클레어의 패싱의 비밀을 지켜주고 싶기도 하고 그것에 공모한 죄책감에 괴로워하기도 하며 한편 그녀가 파멸하기를 바라는 욕망 사이에서 갈등한다. 패싱을 단죄하는 것 같은 결말이 씁쓸하다.
안온한 자리, 절대적인 안정은 삶에서 없다. 고정적인 정체성도 없다. 우리가 여기에서 지금 누리는 것들은 결국 지금 우리의 욕망의 상한선 아래에서 맴돈다. 노화와 죽음을 배제한 욕망은 환상 그 자체다. 그러나 그 환상 없이 일상을 지속하기란 어렵다. 이 모순의 줄타기가 삶이다.
오십 대가 되어 추방당한 고향 베네치아로 돌아가기 전 카사노바는 한때 후의를 베풀었던 올리보의 영지에서 그의 조카딸을 만나 애욕을 품게 된다. 더 이상 젊음도 외적 매력으로도 젊은 여자를 유혹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는 과정은 비참하다. 모두가 카사노바라고 생각했던 그 화려한 성적 매력은 연기처럼 허무하게 사라졌다. 어쩌면 그때부터가 진짜인지도 모른다. 우리를 우리이게 만드는 그 모든 것들을 걷어내고도 우리는 스스로를 여전히 확인할 수 있을까? 그 진지한 물음에 정답은 없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아이즈 와이드 셧>의 원작이 된 <꿈의 노벨레>는 단지 부부의 성적 판타지의 화려한 향연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관한 진지한 성찰이다. 의사 프리돌린이 자신의 욕망에 눈을 뜨게 되는 과정에서 환자의 죽음을 경험하는 건 우연이 아니다. 우연히 참석하게 된 가장 무도회에서 만난 욕망의 대상이 딱딱한 시체로 돌아왔을 때 그가 느낀 허무와 놀라움에 대한 묘사도 그러하다. 우리가 딛고 선 생의 지반은 어쩌면 모두 허위인지도 모른다. 진짜라고 여겼던 것들을 해체하고 정상과 비정상, 현실과 환상의 경계의 철책을 과감하게 허무는 슈니츨러의 글쓰기는 경이롭다. 마침내 프리돌린이 아내 곁에 누웠을 때조차 우리는 그것이 그가 원래의 삶으로 안온하게 귀가한 것이 아님을 알아차린다. 좌절된 욕망의 집적이 생임을 암시하며 작가는 비정하게 떠나버린다. 이것은 <패싱>도 다르지 않다. 다른 세계로 자신의 욕망이 실현되는 곳으로 건너갔다고 생각한 순간 파멸하는 인물들의 모습은 씁쓸하다. 이야기는 대안의 세계가 아니라 그 세계에 대한 환상을 그리는 것으로 그친다.
결국 돌아오는 곳은 여전히 우리가 도망가려고 애썼던 바로 그 현실이다. 여전히 욕망은 실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