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마음의 눈 - 빗소리가 어떻게 풍경을 보여주는가
올리버 색스 지음, 이민아 옮김 / 알마 / 2013년 6월
평점 :
근시가 시작된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무렵이었던 것같다. 칠판에 판서한 글씨를 알아보기 힘겨워졌다. 시력 검사를 통해 0.3정도 된다는 얘기에 안경을 쓸 수 있다는 기대감에 아주 기뻐했던 철없는 기억 이후로 근시는 급속도로 진행되어 -3디옵터까지 떨어졌다. 대학 합격 소식에 제일 먼저 렌즈를 시도했고 결막염과 각막염이 번갈아 오는 부작용을 감수하면서까지 좀 더 예뻐 보이고자 두꺼운 안경을 감추어 두었다. 직장에 다니면서부터는 영 렌즈착용이 번거로워지기 시작했다. 회식이라도 있는 날이면 심지어 낀 채로 잠이 들기도 해서 토끼눈으로 기상하기도 하며 눈건강은 더욱더 나빠졌다. 그러다 드디어 라식수술이 해법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작용이 걱정되어 여러 번 망설이다 결국 수술을 받았고 거기에 따른 경미한 부작용도 감수하리라 다짐했다. 지금도 수술을 받고 안경 없이 핸드폰의 문자가 너무 또렷하게 보이던 그 첫 느낌이 강렬하게 남아 있다. 심봉사가 공양미 삼백 석을 바치고 눈을 뜨는 기분 만큼은 아니었지만 거의 그 근사치에 가까울 정도로 근사한 느낌이었다.
'읽기'에 중독된 나로서는 사실 눈이 나빠지는 것이 가장 두렵다. 노안도 그렇고 고도 근시가 있었기에 거기에 따른 각종 합병증도 두렵다. 보르헤스 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니기에 더 이상 읽을 수 없는 시간이 죽기 전에 올 수도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끼친다. 나의 바람은 늙어서도 죽음을 앞두고서도 제발 보고 읽는 능력 만큼은 보존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이과 계통에 있는 사람으로서 이 책의 저자인 올리버 색스의 문장은 나를 거의 항상 압도한다. 수와 언어에 대한 능력은 같이 가기 힘들다는 생각에 그 둘이 한데 모인 지점에서 빚어내는 그의 이야기들의 진지함과 섬세함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최근에 안구 흑색종의 전이로 그가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은 무엇보다 슬프다.
이 책의 헌사가 바쳐진 이는 그의 안구 흑색종을 진단하고 수술한 한때 그의 강의를 들었던 제자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올리버 색스는 '뇌의 가소성'을 이야기한다. 삶을 살다 갑자기 맞닦뜨린 불운, 그것이 하필 우리의 지각 체계를 망가뜨리거나 교란시켜 보고 듣고 말하는 가장 본질적인 기능이 제대로 되지 않을 때에도 과연 우리가 삶을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한 그의 대답들은 하나 하나의 아름다운 영화 같은 사례다. 어느 날 갑자기 악보를 보지 못하게 된 피아니스트, 항상 사람들과 유창하게 대화를 나누는 즐거움을 누렸던 여인이 언어를 상실 했을 때, 읽고 쓰는 게 주업인 작가가 갑자기 읽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들 앞에는 절망만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올리버 색스가 인용한 찰스 디킨스의 표현인 '부활'의 세례가 그들에게도 내려진다. 물론 지금까지 살아왔던 방식을 고수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가족들의 혹은 지인들의 지지와 격려, 삶에 대한 사랑과 애착 등이 뇌의 지형도를 변화시켜 다른 지각 기능의 강화와 보조로 잃어버린 것들을 대체하는 기적 같은 일들이 벌어진다. 말을 할 수 없어도 그러한 이들을 위해 저자가 본인의 장애를 딛고 만들어 낸 어휘집의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언어들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친구들과 대화하고 세상과 교류하고, 이제는 눈으로 언어를 읽어내는 대신 오디오북으로 많은 이야기들을 들으며 새로운 창작 활동을 이어간다. 눈으로 보이지 않는 세상은 상실이 아니라 기존까지 가져왔던 온갖 선입견, 허위 의식을 버리고 새로운 자아, 새로운 가치관으로 세상을 재구성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올리버 색스 자신이 암 선고를 받고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며 두려움에 떨었던 경험에 대한 솔직한 일기도 나온다. 이제 환자의 입장에 서게 된 그는 그렇게나 세상을 입체적으로 생생하게 보며 즐거워하고 읽는 기쁨이 정체성의 일부를 이루었던 나날들을 포기해야 하는 생애 최대의 위기를 맞았던 체험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이제 그는 세상을 3차원이 아닌 2차원으로 봐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온갖 사각지대가 생기고 눈으로 보며 즐거워했던 공간은 그에게 변형되고 왜곡되어 다가온다. 넘어지고 실수하고 착각하는 나날들 앞에서도 그의 위트는 이제 세상을 정물화처럼 인식하게 된 새로운 즐거움을 이야기한다. 그가 서신을 교환했던, 제대로 교정되지 않은 사시 때문에 세상을 평면적으로 인식하다 드디어 내리는 눈 가운데에서 3차원의 세상을 경험하며 전율했던 한 여인과는 정반대의 경로에 선 그의 솔직한 투병기는 서글프기도 하고 장엄하게 느껴진다. 어떤 지점을 넘어서서 그 체험들을 온전히 껴안고 학문적으로 분석하고 언어화하려는 그의 노력 덕택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한 걸음씩 뚜벅 뚜벅 걸어나가고 마침내 슬픈 종지부 앞에 섰음을 가감없이 고백하는 그의 담대함이 존경스럽고 뭉클했다.
그의 트위터 계정에는 자신의 자서전 표지를 장식했던 근육질의 청년이 오토바이 위에 위용도 당당하게 타고 있는 근사한 사진이 떠 있다. 이제 그 용감하고 건장했던 청년은 시력을 잃고 생을 사랑과 신뢰로 채웠음에 감사하며 퇴장하려는 길목에 서 있는 노인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름다운 행성에서 지각 있는 인간으로 태어났던 것은 행운이었다는 고백은 그가 우리들에게 남기고 가는 가장 아름다운 마지막 메시지가 될 것같다. 지뢰밭 같은 삶을 겁쟁이처럼 미리 땡겨 걱정하고 초조해하며 살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은 그러한 이야기들을 읽을 수 있는 행운을 누렸던 것에 대한 최소한의 보답이 될 수 있을까.